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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11,29-32; 12,19
29 그때에 예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다가 실로 사람 아히야 예언자를 길에서 만났다.
그 예언자는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들에는 그들 둘뿐이었는데,
30 아히야는 자기가 입고 있던 새 옷을 움켜쥐고 열두 조각으로 찢으면서,
31 예로보암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열 조각을 그대가 가지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제 내가 솔로몬의 손에서 이 나라를 찢어 내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
32 그러나 한 지파만은 나의 종 다윗을 생각하여,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내가 뽑은 예루살렘 도성을 생각하여 그에게 남겨 두겠다.’”
12,19 이렇게 이스라엘은 다윗 집안에 반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에파타!(열려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지역을 지나 다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 7,31)
사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귀먹은 이’란 단지는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곧 귀가 있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입니다.
또한 ‘말 더듬는 이’란 입이 있어도 혀가 굳어져 말씀을 삼키지 않는 이입니다.
그러니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은 소통과 통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단절과 분리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친교를 나누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닫혀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귀와 입이 닫혀있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막혀 있어서 흘러들고 흘러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완고하여 고집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우리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열려라)”
(마르 7,34)
바로 그 순간, 저희는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집니다.
곧바로 묶였던 ‘혀’가 풀리고 닫혔던 ‘귀’의 문이 열립니다.
마치 아담이 말을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창세 1,27-28;2,20), 힘들게 배워야 하는 말을 배우지도 않고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당신 말씀을 듣도록 ‘듣는 귀’를 열어 당신 말씀을 심으십니다.
당신 손가락으로 혀를 도유하여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이로써 “귀머거리는 귀가 얼리리라. ~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의 예언을 저희에게서 이루시고,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도유하십니다.
저희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에파타!(열려라)”
(마르 7,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당신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주님,
저의 영혼을 도유하소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저의 귀와 입을 열어주소서.
저희 귀에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저의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소서.
오늘 제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시고,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특별한 사랑이 필요합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에파타 기적을 행하십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에파타’를 우리가 세례 때도 재현합니다.
세례로 이제부터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귀가 열리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입이 열리라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의 행위가 다른 때와 같지 않습니다.
다른 때는 주님의 행위가 이렇게 은밀하지 않은데, 오늘은 주님께서 귀와 입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다른 때는 그저 말씀 한마디로 치유해주시는데, 오늘은 여러 행위와 직접 손을 대시며 치유해주십니다.
어떻게 보면 과장된 제스츄어의 연출 같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하신 걸까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신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더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랑을 하신 것이고, 그에게 필요한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쉽게 열리는 사람이 아니었나 봅니다.
꼭 이렇게 해야만 열리는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사람, 귀와 입만 닫힌 사람이 아니라 그로 인해 마음의 문까지 굳게 닫힌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귀와 입의 장애는 능력의 주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고치실 수 있고 그런 예는 성경에 수도 없이 많지 않습니까?
창세기에서는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백인대장은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거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의 종을 찾아가지 않으시고 한 말씀으로 치유하셨잖습니까?
그러나 오랜 장애로 그의 마음은 정말 굳게 닫혀있었고, 그래서 이 마음의 장애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치유하셔야 했을 겁니다.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너만 미워한 것이 아니다.
너만 미워해서 너의 귀와 입을 닫히게 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너만 고통을 많이 당했다고 생각하니 지금 이렇게 너만 특별히 사랑할게.
이런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말을 행위에 담아 그에게 말씀하셨을 것이고,
이런 특별한 사랑이 그의 마음에 닿아 귀와 눈과 함께 마음도 열렸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사랑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까?
이런 특별한 사랑이 아직도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아직도 필요하다면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완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그렇다면 곧 사순 시기가 다가오는데 마음이 아직 사순 시기인 우리는 이런 말씀을 자주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야 한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말 못 하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나를 사랑하시고 먼저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으로 귀를 열어 주시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들을 귀가 없는 그는 귀먹은 사람이요,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말 못 하는 이입니다.
그런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수필을 쓰며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시고 말씀도 얼마나 이쁘게 잘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육체적인 귀는 닫혔지만,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으십니다.
내면의 귀가 열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우리도 한적한 곳에서 주님과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말보다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콜로 3,2)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 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귀를 열어 주시고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위로와 구원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 한껏 네 입을 벌려 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 주리라.”
(시편 80,11)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하고 놀라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은 누구에게 귀를 열어주시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사람들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고쳐 주시라고 청했지만, 예수님은 다른 방식을 쓰십니다.
곧, 그 사람을 군중 밖으로 데려 내오신 다음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일은 ‘성령’을 주시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들을 귀’가 있는 이들은 알아들으라고 하십니다.
들을 귀란 성령으로 말씀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은총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지 않으실까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어릴 때부터 성체에 대한 신심이 남달리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빠르게 9세에 첫영성체를 합니다.
첫영성체한 후 마르가리타는 열병에 걸려 4년 동안 침상에 누워 지냈습니다.
그러다 성모 마리아에게 만약 완쾌되면 꼭 수도자로 하느님에게 자신을 봉헌하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에 병이 치유되어 완쾌되었습니다.
성녀는 자라면서 자신이 한 서원을 잊었습니다.
세속의 삶에 빠져들 때쯤 예수 그리스도의 환시를 목격합니다.
그녀는 단순한 환각으로 치부해버렸습니다.
그만큼 세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그녀 앞에 나타나 과거 그녀가 자신을 하느님에게 봉헌하겠다는 서원을 한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녀에게 자신에게 한 서원을 잊어버린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이 같은 체험을 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는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 소속 수녀원에 입회하여 수도 서원을 한 후 수녀가 됩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수녀가 된 지 3년째 되던 해인 1673년 12월 27일, 그녀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습니다.
어느 날 기도에 몰두하고 있던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위에는 십자가가 있고 주위에는 가시관이 둘러있는, 사랑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자신의 성심을 보여주면서 “보라! 사람들을 이렇듯 사랑하였고, 그들에게 이렇듯 많은 은혜를 베풀었건만 이 무한한 사랑에 대해 오직 배은망덕만 당하는 이 성심을! 내 성심은 망각과 무관심 그리고 무례를 견디고 때로는 특별한 사랑의 유대로써 내 성심과 밀접히 결합된 이들로부터 이 모든 능욕을 당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체 성혈 대축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금요일을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예수 성심 대축일)로 정하고, 그날 영성체하는 것은 물론 제대 위에 성체를 현시함으로써 예수 성심이 받은 불경을 배상하기 위하여 엄숙히 보상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성심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경하도록 권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을 부어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그녀는 매주 목요일 밤마다 한 시간 동안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겪었던 고통의 시간을 묵상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모든 가톨릭 신자는 첫 번째 목요일 밤마다 한 시간 동안 본당에서 성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계시가 바로 다 믿어지고 받아들여졌을까요?
처음엔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특별히 함께 사는 수녀들이 더 안 믿었습니다.
그러한 고통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훈련하셨습니다.
은총을 받으면 약속을 꼭 지키도록.
그래서 끝까지 참고 견뎠고 죽음 직전까지 가며 원장 수녀를 믿게 합니다.
나중에 고해 사제였던 클라우디오 드 라 콜롬비에르 신부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는 마르가리타 마리아 수녀가 정말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보았습니다.
이 둘은 다 성인, 성녀가 됩니다.
우리도 주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을 뵈옵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입으로 발설하게 되면 세상 모든 이들을 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을 견뎌낼 수 없다면 그분은 우리 귀를 열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르가리타 성녀에게 예수님은 “너의 모든 것을 바쳐라.”, 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너도 좋아하고 그 외에는 아무 판단도 희망도 의지도 가지지 말아라.” 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귀를 열어주실까요?
곧 들을 귀를 주실까요?
바로 혀까지 봉헌할 사람에게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는 나와 단둘이, 일대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의 서북쪽 해안 지역, 즉 티로와 시돈을 훑으신 다음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베이스캠프 격인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사목터로 돌아오자 마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치유를 청하십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저도 청력이 조금씩 약화되어 가니, 청각장애인이 겪는 고통과 그들의 심정을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심하지는 않으니 그냥 마음 편히 가시고 살라는 의사 선생님의 당부를 순순히 받아들이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청각 장애와 함께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언어장애입니다.
잘 안 들리다보니 말수도 줄어들고, 결국 말도 어눌하게 되고 더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잘 안 들리고 말을 잘 못하는 것, 어쩔 수 없지, 다른 불치병보다는 괜찮지,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 겪는 고통은 만만치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소통이 안되니 거기서 느끼는 소외감과 막막함, 사회로부터의 단절감과 고립감은 그를 엄청난 외로움으로 몰고 갑니다.
이런 중복 장애인을 치유하시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선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르르 단체로가 아니라 주님과 나 단둘이 일대일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께서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시고 나를 특별히 대우하시고 배려하신다는 것,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지요.
그 옛날 그 중복 장애인은 예수님과의 일대일 만남, 그것 하나만으로도 벌써 몸과 마음의 치유가 시작되었습니다.
더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 굳이 접촉하지 않으셔도 말씀 한 마디로, 눈빛 한번으로 치유가 가능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그토록 크신 하느님, 지고지순하신 하느님께서 하찮은 우리 인간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당신의 존귀하신 손가락을 환자의 두 귀에 집어넣으십니다.
손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환자 입장에서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눈에서는 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입에서는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터져나왔을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권능으로 가득찬 한 마디 말씀으로 그를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에파타!”
오늘도 주님께서는 여기저기 막히고 단절되어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에게 힘주어 능력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열려라!”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에파타!>
예수님께서 장애자를 군중과 분리시켜서 따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군중이 예수님의 치유 기적만 보고 열광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 손가락을 장애자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것은 그 사람의 장애를 고쳐 주기 위한 동작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동작입니다.
그는 들을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의사들이 하는 것과 같은 ‘시각적인 동작’으로 우선 먼저 그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의 치유는 ‘에파타!’ 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이고,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 라는 사상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을 원상복구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라는 말은 이사야서 35장 5절에 연결되고, 이 말은, “예수님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 라는 믿음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장애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 즉 단순한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야기 전체를 상징으로 생각하면, 신앙인들이 말씀을 듣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특별한 가르침입니다.
장애 때문에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을 수 있는데도 안 듣고, 말씀을 전할 수 있는데도 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와 혀를 열어 주시는 것까지만 해 주십니다.
듣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복음 말씀에는 관심도 없고, 그래서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세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 귀를 막는 것과 같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말씀을 전하는 일은 하지 않고 정말로 쓸데없는 말만 하는 것은 신앙인의 본분을 실행하지 않는 죄를 짓는 일이고, 십계명 제8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항상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사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박해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뒤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사도 9,8-9)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보내셨습니다."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도 9,17-19)
박해자 사울이 앞을 못 보게 된 일도, 그리고 다시 볼 수 있게 된 일도, 모두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가 앞을 못 보게 된 일을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일로 생각할 수 있고, 바오로 사도 쪽에서 생각하면, 자신이 그동안 ‘눈 뜬 장님’으로 살아왔음을 깨달은 것을 상징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볼 수 있게 된 일은 그가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는 시력을 얻은 일인데,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그 시력을 주신 것이고, 바오로 사도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비로소 ‘눈 뜬 장님’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상징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는 일이고, 들어야 할 말씀을 제대로 듣는 일이고, 전해야 할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일입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을 사용해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있고, 듣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천사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사탄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보아야 할 것은 안 보고 다른 것만 보다가는, 또 들어야 할 말씀은 안 듣고 사탄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다가는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서 멸망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들어라! - “에파타(열려라)!”>
"주님,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 주소서."
(시편 51,14)
아침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시편입니다.
또 본기도 앞부분, "말씀의 빛으로 무지의 어둠을 없애시는 하느님"이란 말마디가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어제 저녁미사 때 강론 원고에 없던 내용의 인용이 새로웠고 잊지 못합니다.
아주 예전 30년 전쯤 어느 자매로부터 무심코 들었던 말인데 지금도 생생한 다음 탄식성 말마디입니다.
아마도 자녀로부터 많은 상처와 실망을 받은 분이었을 것입니다.
“음식이 맛이 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자식은 맛이가면 버릴 수도 없고...”
하느님의 솔로몬에 대한 탄식도 이와 흡사하리란 생각이 듭니다.
‘맛이갔다!’ 음식뿐 아니라 사람도 변질되면 맛이 갈 수 있습니다.
정말 맛있는 음식도 맛이가면 버리는데 사람은 버릴 수 없으니 참 문제입니다.
밭 농사는 일년인데 사람 농사는 평생이요,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니 어렸을때부터의 사람 교육이, 훈육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어렸을 때만이 아니라 평생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는 평생 공부가 또 얼마나 중요한지, 참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의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또 교육을 보면 미래가 보인다는데 오늘날의 학교 교육을 보면 미래가 심히 우려됩니다.
정말 말그대로 죽음에 임박했던 노년의 솔로몬은 완전히 맛이 갔으니 죄의 결과는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새삼 회개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매일미사은총이 사람의 맛이 가지 않게 하는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말 그대로 회개 은총의 효소가 부패인생을 발효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다윗의 발효인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그의 아들 솔로몬의 부패인생입니다.
어제 저녁식사 때 식당독서 중 2월8일자 성규의 말씀이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요즘 식당독서 중 규칙서는 가장 긴장에 속하는 “제7장 겸손에 대하여” 중 어제는 열한째 단계에 속하는 말씀입니다.
“겸손의 열한째 단계는, 수도승이 말할 때 온화하고 웃음이 없으며 겸손하고 정중하며 간결한 말과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목소리에 있어서는 큰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다.
책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적은 말로써 드러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500여년 전 규칙서인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도 그대로 공감되니 참 놀랍고, 역시 고전중의 고전인 베네딕도 규칙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겸손의 덕을 지닌 사람은 참으로 잘 듣는 사람일 것입니다.
문득 ‘온화(溫和)하고’, 즉 ‘따뜻하고 부드럽고’라는 한자 뜻을 대하니 얼마전 성지순례 내용을 담은 수필집을 낸 분의 이름, ‘온화(溫花)’가 생각납니다.
‘따뜻한 꽃’이란 꽃 '화(花)'자로 원래 한문에는 없는 단어일 것입니다.
참으로 잘 듣는 경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맨 첫마디도 “들어라!”로 시작됩니다.
“들어라! 오 아들아, 네 마음의 귀를 기울여 스승의 계명을 경청하고 어진 아버지의 권고를 기꺼이 받아들여 그것을 실행하여라.”
(머리 1절)
지난 2월3일자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서 지혜를 청하던 솔로몬의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열왕상 3,9) 말도 생각납니다.
듣는 마음, 듣는 귀를 지녔던 솔로몬이 완전히 변질되어 맛이 가, 마음의 귀가 닫힌 완고한 사람이 되었으니 바로 마음이 하느님을 떠난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결과 다윗 때는 하나였던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 산산히 분열된 나라가 되었으니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 화답송 시편 81장의 선정이 참 적절하고 후렴도 잘 어울립니다.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여기서도 강조되는 말마디가 ‘들어라’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잘 들으며 공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공부를 강조한 다산 정약용의 어록중 오늘 2월9일자 말씀이 이채로웠습니다.
“그 어떤 공부도 예술이 함께 하면 즐겁다.
지식이 놓친 마음을 예술은 따뜻하게 데워준다.
가르침의 목적과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학문을 즐기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 학문을 즐기지 못한 이들에게는 노래와 춤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리하여 옛 선비들은 모이면 시(詩)를 짓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와 춤을 가무(歌舞)를 즐겼던가 봅니다.
이런 경지의 전인적 공부라면 정말 멋질 것이며, 새삼 끊임없이 시편을 노래하는 우리의 성무일도가 전인적 공부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이렇게 매일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또 성가를 노래하는 미사와 같은 전례가 어느 종교에 있겠는지요.
오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는 복음도 참 은혜롭습니다.
육신의 귀가 아무리 밝고 좋아도 죄로 인해 마음이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굳어져 있으면 즉 마음의 귀가 닫혀 있으면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합니다.
마음의 귀가 열려 있어야 제대로 듣습니다.
입이 열려 있다고 말 잘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중 마음의 귀로 잘 듣는 이가 진짜 생명을 주는 유우머나 청담, 덕담의 참말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귀먹고 말더듬는 이가 상징하는 바 바로 우리들입니다.
죄로 인해 마음의 귀가 먹고 제대로 참말을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정성을 다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치유하는 과정이 그대로 우리를 향한 미사은총처럼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신 후 하늘을 우러러 한 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말을 제대로 하게 되니 얼마나 통쾌한지,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죄로 인해 마음의 귀가 먹은 이들은 회개와 더불어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제대로 말하게 하시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마침내 복음 선포자가 된 군중들의 고백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제가 참 좋아하는 예수님의 아람어 둘입니다.
하나는 “탈리타 꿈(소녀야 일어나라!)”이고 하나는 오늘의 “에파타!(열려라!)”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탈리타 꿈!” 일어나, 주님과 함께 “에파타!” 활짝 열린,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
(시편 100,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Eureka)’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유레카는 뜻밖의 발견을 했을 때 외치는 감탄사입니다.
꽉 막힌 문제가 어느 순간에 풀렸을 때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순금과 같은 무게인 물체를 물에 넣어 순금이 밀어내는 물의 양과 다른 물체가 밀어내는 물의 양을 비교하여 순금인지 합금인지 알아내었다고 합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목욕탕에서도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염화시중(拈華示衆)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부처님이 영산회에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보이자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 지으므로 그에게 불교의 진리를 주었다고 하는 데서 유래합니다.
유레카는 아니지만 살면서 기분 좋은 일이 더러 있습니다.
약속시간에 조금 늦을 것 같았는데 상대방이 늦을 것 같다고 문자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급하게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여유 있게 약속시간에 나갈 수 있습니다.
염화시중은 아니지만 ‘찌찌뽕’이 있습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삶에 유레카와 염화시중이 있다면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복음서는 ‘희랍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람어’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복음서가 희랍어로 기록된 것은 복음을 듣는 대상들이 희랍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넘어 아시아로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희랍어는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부분 희랍어로 표현했지만 3가지 말은 아람어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유는 그 말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케파’입니다.
케파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희랍어로 베드로라는 뜻이고, 베드로는 우리말로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베드로에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시는 그 특별한 순간에 ‘케파’라는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탈리타 쿰’입니다.
탈리타 쿰은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소녀를 찾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소녀가 이미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죽어있는 소녀에게 ‘탈리타쿰’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에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신에서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분노에서 용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만에서 겸손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25세에 죽고 75세까지 묻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잠재력을 완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의 열정과 꿈을 추구하지 못한 채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절망 중에 있다면, 불신 중에 있다면, 분노 중에 있다면, 교만 중에 있다면,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고 산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복음서 저자는 죽은 이를 살리는 특별한 순간에 ‘탈리타쿰’이라는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에파타’입니다.
에파타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하였던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도 교회의 창문을 열자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낯선 곳의 긴장도 쉽게 풀어주고, 새로운 만남을 곧 친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만 잘 지키면 우리는 닫힌 문을 열 수 있을 겁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특별한 순간에 ‘에파타’라는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표징으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네.”
- 미국 댈러스 한인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이제까지 했던 선택 중에 가장 잘한 것을 제게 꼽으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사제가 된 것을 말합니다.
사제 서품을 받기 전, 신학생 때 다른 길을 가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꽤 시간이 지나 중년의 나이에 들어서는 이 사제의 길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 명예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학창 시절 때의 친구들을 만나면, 세상일이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힘들다면서도 이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니 계속해서 힘들다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자신의 책 ‘맹자’에서 군자삼락, 즉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합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의 왕 노릇은 포함되지 않는다.
부모 형제가 모두 살아 계시고 무탈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그리고 천하의 영재를 얻어 이들을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천하의 왕 노릇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저는 이 군자삼락을 거의 가진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지만, 우리 신앙 안에서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신 것이니 주님 안에서 무탈하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지 않아 그래도 100%는 아니지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미사 강론과 강의를 통해 교육하고 있으니 이 역시 큰 즐거움입니다.
계속해서 이 군자삼락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권세를 쥐는 것이 즐거움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충실한 삶 안에서만 진짜 행복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행복도 세상의 성공과 권세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어떤 사람이 함께 했었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당시에 힘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소외되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던 병자나 마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시는 주님을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실 때,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을 이용해서 말씀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지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보이는 사랑처럼 하십니다.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치유를 위한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마음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나요?
진정한 행복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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