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욱] 안티레티코스(Antirrhetikos)
원제: CONTRO I PENSIERI MALVAGI Antirrhetikos Evagrius Ponticus
1. 서론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Evagrius Ponticus, 345-399), 개신교인들에게는 참으로 낯선 존재입니다. 교부문헌에 관심을 갖고 보이는 대로 읽어내는 저에게도 낯선 이름입니다. 수년 전에 새물결플러스에서 책을 받아 서평을 쓴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때는 저자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고 책 내용에만 집중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 에바그리우스의 책은 모두 다섯 권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키아츠에서 나온 <에바그리오스의 기도와 묵상>(키아츠, 2011)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세 권 <안티레티코스>(2014), <그노스티코스>(2016) <프락티코스>(2011)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물결출판사의 <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 실천학>(2015)이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에 관한 자료는 희소하기 때문에 그의 간략한 생애와 사상을 살펴본 다음이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2.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생애
에바그리우스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그의 제자였던 팔라디우스가 저술한 <라우수스의 역사>(Historia Lausiaca)에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에바그리우스의 사후 20년 정도가 흐른 후인 420년경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의 생애와 사상 부분은 허성석 신부의 글과 영어 사이트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라우수스의 역사>에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에바그리우스는 345년 경 폰투스 이보라(Ibora)에서 출생합니다. 폰투스(Pontus)는 현재 터기에 있으며 흑해 동남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은 이보라 지역의 주교였습니다. 이보라 지역은 갑바도기아 3대 교부로 알려진 바실리우스가 머물렀던 안네시(Annesi) 근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에바그리우스는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일찍부터 교류를 했으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바실리우스에게 독서직(讀書職) 을 받고, 379년에 나지안주의의 그레고리우스에게 서품을 받게 됩니다. 독서직은 현대 개신교의 전도사나 강도사에 해당되고 서품은 목사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스승이었던 바실리우스가 죽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자신의 스승으로 삼고 배움에 전념합니다. 그의 책에 ‘우리의 지혜로운 스승’이란 표현을 쓸 때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지칭합니다. 380년, 그는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콘스탄틴노플로 갑니다. 그곳에서 381년에 있었던 콘스탄틴노플 공의회에서 삼분설을 주장하는 아폴리나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삼위일체를 완성하기에 이릅니다. "그리스도는 신성, 인성에 있어서 양성이 완전히 계시된 분"으로 확정 짓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끊임없이 논쟁을 일으켰던 삼위일체의 최종확정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성자 하나님과 성부 예수, 성령이 동일한 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성령의 출처에 관하여 커다란 불씨를 남겨 놓게 됩니다. 즉 성령의 나심(Filioque)은 오직 성부에게만 가능하다는 동방교회와 성부와 성자에게 모두 가능하다는 주장이 갈리게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에바그리우스는 콘스탄틴노플에 유명 인사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명성에 교만해진 에바그리우스는 성의 노예가 되어 고관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꿈에 자신이 당할 어려움을 보게 되고 예루살렘으로 도주하여 감람산에 있던 수도원에 머물게 됩니다. 이곳에서도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젊은 여성들을 만나곤 합니다. 결국 에바그리우스는 질병을 갖게 되었고, 육 개월 동안 온몸의 힘을 쇠진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질병을 보내셨다고 생각한 에바그리우스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방탕한 삶을 청산함과 동시에 수도사가 되리라 결단하며 서원합니다. 그러자 그의 질병은 기적처럼 치유됩니다. 결국 멜리니아 수도원에서 수도복을 받아 383년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알렉산드리아 남동쪽에 위치한 니트리아에서 2년 동안 생활하다 다시 더 깊이 들어갑니다. 당시 수도생활의 중심지였던 켈리아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며 14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매일 노동을 하고 성경을 암송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하루에 한 번 기름으로 양념된 빵을 섭취하며 간소한 삶을 꾸려 나갑니다. 토요일 저녁이면 수도사들은 함께 모여 아가페(성찬과 함께 진행되는 초대교회 저녁식사)를 즐겼고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겔리아 사막에서 그는 필사가로 일했고, 문맹자들을 위해 책을 저술하기도 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형제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오리게네스의 사상에 빠져 그를 알리는 일도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399년 4월 54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땅의 삶을 내려놓습니다.
3.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사상
에바그리우스는 초대교회에서 그다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사막교부들과 중세로 이어지는 수도원 운동의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의 사상은 어느 부분에 있어서 개신교 사상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의 비평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이성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순수 정신(Nous)을 소유합니다. 인간의 정신 창조는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인식하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의 순수 정신은 하나님을 인식하며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하여 순수 정신을 지키려하지 않아 정신적 타락을 통해 육체에 결합되어 있는 영혼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타락 이후 인간은 육체에 결합된 영혼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타락의 정도에 따라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순수 정신에 가장 가까운 천사, 그리고 육체와 결함한 영혼을 가진 인간, 악이 된 타락한 천사 즉 악령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부, 정념부, 욕망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삼중구분은 플라톤 철학의 영항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성부는 타락한 정신의 가장 밀접한 연장(延長)이며, 본래적 능력을 소유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정념부와 욕망부는 육체에 결합된 영혼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욕정부에 속하는 정념부와 욕망부를 정화하면 이성부는 본질적 인식을 회복하여 온전한 단계에 이른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수도생활과 신앙생활은 거룩한 삶과 금욕적 삶을 통해 본질적 인식을 되찾는 것입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영성생활을 크게 두 부분을 구분합니다. ‘프락티케’(수행)와 ‘그노스티케’(관상, 인식)인데, 금욕적 삶(수행)과 이성적인 앎(인식)을 통한 전투적 여정입니다. 초기의 수도는 ‘프락티케’을 통해 몸을 정화하고, 그 다음 단계인 ‘그노스티케’로 나아가게 됩니다. 에바그리우스의 주장에 의하면 욕망부와 이성부는 구분할 수 있으나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습니다. 욕정부는 이성부와 긴밀하게 열결되어 있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만약 욕망부가 덕과 인식을 갈망하는 단계에 이르면, 정념부는 악한 생각들과 싸우게 되고, 결국 이성부는 인식의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인식의 단계는 다시 퓌시케와 테올로기케로 구분합니다. 퓌시케는 낮은 단계의 인식이며, 테올로기케는 좀 더 높은 단계의 인식입니다. 자연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다르며, 자연에 대한 인식 이후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에바그리우스의 주장은 종교 개혁 이후 갖게 되는 영혼에 대한 이해와 상당히 다른 부분이며, 어거스틴과 스스로 스승이라 칭했던 갑바도기아 교부들과도 상당한 차이를 갖습니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헬라철학과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탓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당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사막 교부였던 히에로니무스(342-420)는 에바그리우스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에바그리우스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원죄에 대한 이해가 불분명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중보적 사역이 간과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에바그리우스의 사상은 동방의 ‘넵틱 Neptic 교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중세의 막시무스나 클리마쿠스 등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앞으로 중세의 수도원 운동의 원류와 같은 에바그리우스의 사상의 핵심인<안티레티코스>를 알아봅시다.
4. 책의 구조와 내용
8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에바그리우스가 자신의 설명과 성경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개진해 나갑니다. 8가지의 주제는 탐식,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 헛된 영광, 교만입니다. 여기서 아케디아는 (akedia) 왜 굳이 번역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영적 태만을 뜻하는 헬라어임을 기억하면 될 것 같습니다.
머리말
9개의 문단으로 이루어진 머리말은 악령과 싸우는 영적 전쟁의 방법을 소개합니다. 악령에 대항하기 위해 영적 갑옷이 필요한데, 이것은 ‘올바른 신앙, 완전한 단식으로 이루어지는 가르침, 영웅들의 용맹한 몸짓, 겸손, 거의 혹은 어떤 식으로든 방해받지 않는 고요,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51쪽)라고 소개합니다. 8가지 주제는 8가지 ‘악령’이며, 그 악령을 쳐부술 무기는 바로 ‘성경’입니다.(53쪽) 이 책은 어떤 논리를 따지거나 상세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에바그리우스의 생각과 그에 맞는 성경 구절을 주제별로 뽑아 소개하는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탐식에 대한 첫 장 첫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1. 단식의 노고는 소홀히 하면서 땅만 경작하려 애쓰는 생각에 맞서.
이사카르는 튼튼한 나귀 가축우리 사이에 엎드린다. 쉬기에 좋고 땅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그곳에서 짐을 지려고 어깨를 구부려 노력을 하게 되었다.(창세 49,14-15)
저는 본서에 담긴 성경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개정개역판으로 수정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표기도 (창세 49,14-15)이 아닌 (창 49:14-15)로 수정하겠습니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그럼, 각 주제별로 중요한 문장들과 성경 구절을 추려 옮겨 봅니다. 문장 앞의 숫자들은 번역서에 기록된 것으로 원서에 있는지 번역자가 자의로 부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담화1 탐식
6. 음식과 음료로 배부르기를 갈망하고, 그것이 영혼에 전혀 해롭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맞서: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 32:15)
9. 빵과 물로 배불리면서 성인의 길을 가기를 바라는 영혼에 맞서:
“이스라엘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왕상 22:26-27)
16. 음식과 음료를 걱정하고 그것들을 조달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하는 생각에 맞서 :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23. 음식에 대한 열망의 괴로움에 사로잡혀 큰 사업을 하려고 고독을 포기하려는 생각에 맞서:
고생하는 자는 풍요로워지겠지만, 입술만 놀리며 노력하지 않는 자는 궁핍해질 것이라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잠 14:23).
48. 탐식에 사로잡혀 육체를 만족시키고 쾌락을 쫓으면서 생명의 길을 간다고 믿는 영혼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
탐식(貪食)은 먹기를 갈망하는 것으로 원래의 먹는 양보다 더 많이 먹기를 원하고 맛이 있는 음식을 찾는 미식가적(美食家的) 욕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막는 방법은 단식(斷食)입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성경 속에서 음식과 단식의 구절을 찾아 그리스도인들이 음식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에바그리우스는 탐식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탐식을 육체의 본성에 굴복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는 악령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음식에 집착하여 마치 음식이 없으면 죽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에서 나오는 두려움과 걱정입니다. 하나님은 필요를 채우시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을 돕고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담화2 음욕
1. 한 남자와 결합한 여자를 내 정신에 떠오르게 하는 생각에 맞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5. '간음을 범하거나 불순한 생각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해도 청년기에는 죄가 되거나 비난할 만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맞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출 32:33)
37. '창녀를 보는 것 정도로는 해가 되지 않는다'고 유혹하는 생각에 맞서: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그를 만지는 자마다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6:27-29).
64. 고뇌와 근심으로 넘어져 홀로 심하게 유혹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의 생각에 맞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음욕은 탐식과 정신적 작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범위를 벗어나 육신의 욕망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음욕을 상상하는 것은 괜찮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실제의 간음과 마음의 간음을 둘 다 죄로 정죄했습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음욕까지도 제거하지 않으면 악령에 지고 말 것입니다.
담화3 탐욕
7. 오랜 지병으로 괴로워하고, 게다가 가난 때문에 몹시 고통당하는 사람을 외면하려는 탐욕의 생각에 맞서: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레 25:35)
9. 우리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는 가난한 형제의 청을 거절하려는 생각에 맞서: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23. 돈의 필요성은 절실히 느끼면서도 주님의 은총에서 오는 희망은 고려하지 않는 생각에 맞서: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28. 가난과 나약한 육체를 걱정하게 하고 선행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탐욕의 생각에 맞서: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 3:27-28)
51. 탐욕으로 괴로워하고 탐욕이 낳은 우상 숭배에 눈멀게 하는 생각에 맞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탐욕(貪慾)은 소유의 문제입니다. 타인보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탐욕이며, 불필요함에도 쌓아두려는 마음입니다. 탐욕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에서 나옵니다. 탐욕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신격화 하는 것입니다. 에바그리우스는 탐욕은 이웃을 수단화 시키거나 외면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지 못하게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뿐 아니라 탐욕은 타인과 비교하게 하고, 자신을 염려 가운데 몰아가게 합니다. 탐욕으로 인해 사람들은 열등감을 느끼고, 타인을 착취하고, 결국 악을 행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탐욕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악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담화4 슬픔
1. 영혼에 엄습하는 슬픔 때문에 주님이 자신의 탄식을 듣지 않으신다고 믿는 영혼에게: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출 2:23-24)
9. 우리를 힘껏 도와주는 천사를 보지 못하여 동요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 17:16).
23. 칼을 들고 나타나는 악령에는 전쟁을 치르듯 맞서는 것이 좋다. 우리의 복된 사부 마카리우스도 얀네스(annes)와 얌브레스(ambres)도 버려둔 정원을 보러 가는 중 손에 칼을 들고 다가오는 악령을 보고 그렇게 맞설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 45).
47. 의롭고 복된 안토니우스가 그리 맞섰듯이 은밀히 공중에 나타나는 혐오스러운 모습의 악령들에 맞서: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 118,7).
슬픔은 단순한 우울 증세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울증은 삶의 의미를 잃거나 허약한 정신으로 인해 일어나는 나약함일 수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슬픔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우리를 지키고 있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이기는 것은 좋은 음악도 도움이 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담화5 분노
2. 완전한 이들의 성공을 목격할 때 일어나는 분노의 생각에 맞서: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창 45:24)
6. 증오로 남을 헐뜯거나 미움으로 험담에 귀 기울이는 형제가 생각날 때 – 테바이데의 선견자, 예언자 요한이 말했듯이 재물이나 음식 때문에 증오가 일어나는 경우와 달리 증오가 사람들의 영광에 기인한 것이라면 뿌리 뽑기가 몹시 힘들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레 19:17).
26. 화를 잘 내고 분노로 가득 찬 사람들과 사귀라고 유혹하는 생각에 맞서: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잠 22:24-25).
36. 때린 자에게 분노하고, 처음에 맞았을 때 들었던 생각을 한 번 더 맞으면서 멈추고 싶어 하지 않는 생각에 맞서: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
47. 형제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분노하는 생각에 맞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심리학자들은 분노는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노는 자신 안에 있는 타인에 대한 평가와 가치절하, 무시, 등이 버무려져 일어나는 상한 심령의 발출입니다. 성경은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인내하고 사랑하며 서로의 짐을 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담화6 아케디아(영적 태만)
4. 이케디아의 악령으로 인해 다시 세상으로 눈 돌리고 세상 것들을 갈망하는 정신에 맞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5. 거룩한 원로는 시편 열두 편밖에 몰랐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고 말하면서 독서와 묵상을 단념하게 하고 영적 가르침에서 멀어지게 하는 아케디아의 악령에 맞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8. 성경 말씀을 스스로 읽고 묵상하는 대신 주님께서 당신 성령을 통해 성경을 가르쳐 주시도록 주님을 설득해 보라고 유혹하는 아케디아의 악령에 맞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47. 환난 중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아케디아의 악령에 맞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아케디아, 즉 영적 태만은 육적 게으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헛된 것에 몰입하여 소명에 집중하지 않는 것도 아케디아입니다. 아케디아는 단순함과 거룩, 열심과 성장이라는 변명을 달고 오기도 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서 영적이기를 원하는 것도 아케디아라고 말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열심을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환경에 굴복하여 영적 태만을 부리는 것도 아케디아 악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담화7 헛된 영광
6. '너는 모든 형제들 사이에 평판이 좋다'는 식의 헛된 영광의 생각에 맞서: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한지라"(삼상 18:23)
12. 쓸데없는 것들에 대해 말을 많이 하게 하는 헛된 영광의 생각에 맞서 – 이런 일은 은둔생활을 하는 수도승들에게 일어나기 쉽다. 그들은 헛된 영광 때문에 세상일에 연루되어 자기들 앞에서 논쟁하는 저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 들인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24. 사람들에게서 오는 영광을 그리스도께 대한 인식보다 더 사랑하는 영혼에게: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6.8)
38. 선행을 과시하고 싶은 헛된 영광의 생각에 맞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7-18)
헛된 영광은 하나님께 드려야할 영광을 자신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첫 사람의 타락은 스스로 신이 되어 영광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천함을 알고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랑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 하는 것이 옳습니다.
담화8 교만
2. 마치 나를 나무랄 데 없고 더는 불순한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처럼 찬양하고 추어올리는 교만의 악령에 맞서: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 18:27).
16. 자유의지를 부정하면서, 우리가 우리 의지로 죄를 짓거나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적 생각에 맞서: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52. 자신의 잘못은 정당화하면서, 형제들이 나약함 때문에 범한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으려는 교만한 생각에 맞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교만은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자신으로부터 인한 것이고,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교만은 자신의 약점이나 한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남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만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교만은 결국 친구를 잃게 하고, 하나님의 미움을 받아 자신감도 잃게 합니다.
5. 나가면서
안티레티코스는 어떤 주장이나 사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의 시험을 받을 때 말씀으로 반박하여 이기는 영적 전쟁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시고 사단의 시험이 찾아올 때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악한 영을 이기는 방법은 말씀에 있습니다. 머리말 4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싸움의 순간에 기만하는 악령인 우리 적에게 대응할 적합한 말을 신속히 찾지 못한다. 그 말들은 성경 안에 흩어져 있고 그것들을 개별화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러한 말들을 뽑았는데, 이는 우리 승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전사이자 투사로서 전투에서 그것들로 무장하여 용맹스럽게 필리스티아인들에 맞서 나아가기 위해서다(출 13:17 참조).”
말씀이 입술을 통해 고백될 때 마음은 평정을 되찾고 탐욕과 유혹으로 흔들리는 마음은 다시 굳세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는 것보다 아는 것이 좋고, 아는 것보다 암송할 때 큰 힘을 발휘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말씀을 필사하고, 암송하는데 시간을 쏟았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적절한 암송 구절을 찾아 암기하여 영적 전투에서 긴요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머리말 마지막 9번에서 ‘여덟 가지 악령들 각각이 우리 안에 일으킨 생각들과의 전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들 각각에 맞서 성경으로부터 그것을 쳐부술 수 있는 나의 반론을 썼다’고 말합니다.
비록 우리가 에바그리우스의 사상에 온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릇된 생각과 악한 생각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록된 말씀, 즉 성경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암송하는데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정현욱
책이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책벌레이며, 일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를 글로 표현하기 좋아하는 글쟁이다. <생명의 삶 플러스> 집필자이며, 한국컴퓨터선교회 및 여러 기독교 신문과 출판사 서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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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더미션(https://www.themissi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