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Salvador Dali(1904~1989)
무의식의 위력(威力)과 기상천외의 발상
출생 : 1904년 5월 11일 사망 1989년 1월 23일
출신지 : 스페인 학력 : 마드리드국립미술학교
데뷔 :1917년 '바느질하고 있는 안나 할머니'
경력 : 1980년 미국의 Art News 지에 클레 특집 주관
대표작 달리나는천재다.
에스파냐 대표적 초현실파 화가. 피게라스 출생. 마드리드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강한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적 의식적 태도가 농후하며, 젊어서 받은 프로이트의
영향이 일생을 지배했다. 초현실파 중에서도 직관상형적(直觀象形的)인 시각을 가져
꿈이나 편집광적인 환각을 회화화하여 초현실파의 특이한 지위를 차지했다.
그는 하나의 대상을 2중 3중의 다른 이미지로 보는 병적인 착각을 이용했다.
즉 말이 여인의 나체로 보인다거나 하나의 풍경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거나 하는
중복상을 교묘하게 화면에 표현했다. 그는 <그림이란 많은 비합리적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천연색 사진이다>라고 정의하고, 이상한 환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그는 점차 고전주의에 복귀하였고, 1948년 이후에는 르네상스회화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였다. 1940년 미국에 귀화하여 왕성한 제작활동을 하였다.
작품으로 《피는 꿀보다 달콤하다(1928)》 《기억의 잔재(1931)》 《불타는
기린(1935)》 《레다 아토미카》 등이 있다. L. 브뉴엘과 함께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 《황금시대(1931)》 등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자서전 《살바도르 달리의
숨겨진 생애(1942∼44)》를 낸 바 있다.
아틀리에의 自畵像
달리의 고향 피게라스에서 약 18마일 가량 떨어진 작은 어촌 카다케스에서 그린
이 그림은 자유 분방한 거친 붓자국과 묘법을 보이고 있어,
인상주의적이며 야수주의적인 경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카다케스는 그가 10세 되던 해에 <병든 아이>라는 최초의
유화 작품을 그린 곳이기도 하며 그의 아버지 돈 살바도르 달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가 어릴 적 성장한 바 있는 이 카다케스는 후일 그의 초현실적 영감을 크게
자극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이젤 앞에서 제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세 개의 거울을 통해 포착하는,
방법이 특이하며 바닥면에 투사된 음영을 적자색(赤紫色) 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주관적 내지는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빌라말랴의 聖女 루치에의 축제
종이 위에 괏슈로 그린 이 그림은 표현주의적 경향의 채색과 묘법을 강하게 풍기는
작품이다. 달리는 어릴 적부터 그가 자란 지방의 풍속에 깊은 관심을 갖고 원시
미개적인 장식화 같은 풍속화 등을 그리곤 했다. 이 작품은 성녀 루치에의 축제일을
맞아 놀이진 농촌의 들녘에서 젊은 남녀들이 한데 어울려 축제를 즐기는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작품은 달리의 작품으로서는 드물 게 보이는 전원을 배경으로
하는 환희에 넘치는 목가적 풍경을 담고 있다. 루치에의 축제일은 12월 13일인데
중세의 달력에 의하면 1년 중 낮이 제일 짧은 날이라고 하니 우리의 섣달 동짓달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어 진다.
아버지의 초상
이 그림의 특징은 대개의 초상화들이 정면향인데 반해 측면향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이다. 또한 인물을 보다 강조 표현하기 위하여 배경의 하늘과 지평의 면을 크게
양분하고, 붉게 물든 석양 하늘을 인물과 강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그는 '아버지는 위대하다'는 관념 때문에 어떠한 작품보다도 물감의 층을 두텁게
착색하여 중후감을 강조하려 하였다. '해가 짐과 동시에 멈추는 해바라기의 활동에
넋을 잃은 아버지는 나의 죽은 형 무덤가에 놓으려 단단한 해바라기를 조각해 주도록
나에게 부탁하였다.'라고 이 작품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어릴 적부터
그의 형에 대한 콤플렉스에 젖었던 것과, 그의 아버지에 대한 관념적 인상을 강조하려
했다는 것과는 서로 미묘한 차를 보인다.
등을 돌려 앉은 소녀
20세 초반에 접어든 달리가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에게 끌려 고전주의적
사실을 지향하고 그린 이 작품은 카다케스의 고향집에서 그보다 네 살 아래인 누이동생
마리아를 모델로 그린 그의 초기 작품이다. 그녀는 오빠를 위해 자주 모델이 되어주곤
했는데 뒷모습을 그린 경우도 많다. 달리는 비스듬히 의자에 걸터앉아 머리카락을 묶어
늘어뜨린 여인의 두상 부분에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오른쪽 어깨를 노출시킨 것도
두상 쪽에 시선을 집중 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여지며 배경의 큐비즘적 풍경들과는
유니크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이 해 11월 바르셀로나의 달마우 화랑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 출품
되었으며, 이 전시회를 통해 유망한 신인으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마드리드 건축
1922년 마드리드 미술 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교의 수업에만 만족치 않고, 프라도 미술관
에서 거장들의 작품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당시의 새로운 미술의 동향 파악에 몰두하였다.
이 작품은 인상주의 .점묘주의 .미래주의 . 큐비즘 등에 차례로 관심을 보이며 심취하였던
그의 점묘주의 화풍에 속하는 그림인 것이다. 쇠라, 시냑 등의 신인상주의 회화는 큐비즘
과 연결되는 원류 중의 하나지만, 이 그림은 달리 자신 특유의 독자적 해석법에 의해 추구
한 것이다. 황 .녹 .청 .적 등의 제한된 색들로써 점묘하고 그림속에 마드리드의 도시 일부
분을 기하학적 형태로 부상시키고, 채색의 합리성을 꾀한 이 작품은 달리의 작품에 있어서
초기의 시적 정서가 넘치는 습작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세니시타스
1927년 달리가 파리로 진출하기 직전의 작품으로서 그에게 있어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별안간 나타나게 되는 불가사의한 내용의 그림이다. 달리 예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초현실적 내용의 작품 경향을 보인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이 작품은 내가 군복무중인
9개월간에 그린 단 하나의 작품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푸른색의 공간을
배경으로하여 두 마리의 새가 투영된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진 인체의 모습과 말, 당나귀,
남자의 정면과 측면 두상, 나부의 토르소, 삼각기둥, 뒤틀린 상호 비연관성을 지닌 형체들
이 공간을 떠다니거나 매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미로나 에른스트 등의 그것
을 연상케도 하지만, 여태까지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이 독특한 세계는 그를 초현실주의의
세계로 치닫게한 시점의 작품이다.
새
카다케스에서 제작된 이 작품은 어두운 바탕에 달을 그려 넣어 우주의 섭리를
표출하는 양, 화면 중심부에 장방형이 놓이고 그 양쪽에 모래와 자갈 등을 붙여 놓았다.
그마티에르에는 그가 어릴 적에 경험한 카다케스의 하얀 암벽과 섬바위 사이를 넘나드는
파도 등에 대한 애착이 엿보인다.
막스 에른스트의 영향을 보이는 이 작품은 그것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표현하기 위해 에른스트적인 것을 빈 것으로 보여진다. 이름을 알 길 없는
흰 빛의 새, 그 새의 태(胎) 안에는 잉태된 또 하나의 괴이한 동물이 출산을 기다리는
것처럼 성장되어 있다. 새의 태를 빌어 잉태된 이 고양이는 곧 달리 자신이며, 태를 박차고
나온 그 고양이는 이내 호랑이로 성장하여 결국에는 미술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어릿광대
1927년 파리에 진출한 달리는 새로운 회화적 조립을 위해 고심하게 된다.
그러한 그의 작품은 놀라울 정도의 불균형을 나타나게 된다. 그는 피카소의 영향을
직접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본질적인 특유의 성격을 작품 속에 나타내고 있었다.
이무렵 달리는 초현실적 작품 경향과 더불어 후기 큐비즘적 경향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 해에 그는 <달빛 비친 정물>, <여자의 얼굴> 등을 그렸는데 이 모두가
큐비즘적인 작품에 속한다. 후기 큐비즘은 엄격한 기하학적 조형에서 차츰 벗어나 때로
장식적이라 할 수 있는 유연성과 임의의 색채를 보인다.
달리의 이 작품은 꼴라쥬, 빠삐에 꼴레 등을 직접 그림으로 그렸으며 아무렇게나 어우러진
상태, 그 밖의 마티에르 본위의 표현을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비인간적으로 물질화했다
는 점에서 볼 때 달리의 찾아보기 힘든 초기 작품 중의 하나라고 보겠다.
빵 광주리
<등을 돌려 앉은 소녀>에 이은 또 하나의 고전주의적인 사실 경향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경우 22 세의 젊은 청년 달리가 지닌 극명한 사실 기법 속에 형언키 어려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은 어쩔 수 없는 달리의 신비로움이라 할 것이다.
이미 반정부적인 생활이 심화된 그는 이 해 10월 그로 인해 국왕 알퐁소 13세의
서명에 의해 퇴학 처분을 받고 추방을 당하기에 이른다.그러한 그는 그 전해에 이어
두 번째 개인전을 바르셀로나의 달마우 화랑에서 갖는다.
이 그림은 그 개인전에 출품되었으며, 1928년 미국의 피츠버어그에서 열린 제 27회
카네기 미술 전에 <등을 돌려 앉은 소녀>와 함께 출품되어 미국과 달리가 갖게 되는
인연의 첫 동기가 된 것이다.
욕망의 수수께끼, 어머니, 어머니
이 그림은 바로크적인 불규칙한 격동이 꿈틀 대는 듯한 형태 속에 섬바위의 풍화된
암석 같은 모양과 환상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적 형태의 영향 등을 감지케 한다.
왼쪽 아래쪽에 다소곳이 잠든 듯한 태아에 수염을 붙인 듯한 기묘한 생물, 그 위에
운집된 개미들과 그 왼쪽 저 멀리에는 사자, 메뚜기, 물고기, 칼을 쥔 손, 그리고
아버지를 부둥켜안은 달리 자신의 모습 등이 한데 어울려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수없이 뚫린 구멍 중 36개의 구멍 속에는 '나의 어머니'라는 단어가 써 있는데,
이것은 다다이스트인 트리스탄 차라가 발표한 어떤 싯귀와도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고도 한다. 이 작품을 달리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손꼽고 있다.
빛에 비쳐진 快樂
달리 작품에서 나타나는 여인의 머리에 대한 이미지는 그의 상징주의적 성향에서 비롯된
다. 허공에 떠 있는 사자와 여자의 머리는 서로 마주보고 있어 달리와 갈라를 연상케 하고,
메뚜기와 피묻은 칼을 움켜 쥔손 등은 자기 도취적 세계를 묘사한 그의 환상이다. 오른쪽
TV 스크린처럼 보이는 상자 속에 자전거를 탄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얹은 하얀 덩어리들
은 '욕망의 덩어리를 상징하는 아몬드 사탕'이다. 레이놀즈 모오스가파리에서 열린 달리의
첫 개인전에서 '이 작은 그림은 달리의 초현실적 작품 중 가장 복잡하며 비합리적이고, 프
로이트적 잠재 의식의 최초이자 중요한 시각적 진술이다.' 라고 지적한 것처럼 기념할 만
한 작품에 속한다.
달빛 비친 정물
짙은 어둠이 깔린 실내에 탁자가 놓이고 그 위에 달빛이 투사되어 유연한 선과 면으로
변형, 해체된 정물들이 밝고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이 그림에 대해 달리는 '메마른
질감의 기타와는 상반되게 물고기처럼 부드럽고 끈적거리는 듯한 촉감의 기타를 그렸다.
이 그 림은 피카소에서 직접 영향을 받고는 있지만 이미 나의 녹아 흐르듯 유연한 시계
<기억의 永續> 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탁자의 중심부는 붉은 바탕면
을 깔고 적.황.청.백으로 채색된 사람의 머리, 녹아 흐르듯 유연한 시계와도 같은 기타,
괴이한 모양의 물고기들이 탁자 위에 짜임새 있게 놓여져 있다.
이와 같이 달리는 큐비즘적 경향을 취하면서도 자신 특유의 개성 때문에
여느 큐비스트 들과는 다른 일면을 보인다.
기억의 永續
사물의 부동성을 강조하고 거기에서 야기되는 환상적 측면을 표현하려 한 키리코의
정지된 듯한 풍경, 길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에서 느끼는 외롭고 황량한 분위기
등에 영향을 받은 달리는 키리코보다 훨신 더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의 자극적인
내면 세계를 표출하였다. 이 그림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서,
납작하고 부드럽게 축 늘어진 세 개의 시계와 또 하나의 시계에는 개미 떼가 달라붙어 있다.
모서리에 걸친 시계에도 한 마라의 파리가 달라붙어 있으며, 멀리 섬바위들과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등이 우주의 모든 것이 정지된 것만 같은 적막감을 불러 일으킨다.
비교적 많지 않은 종류의 소재들로서 그의 몽환적 세계를 충분히 반영한 달리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꿈
'어떠한 비합리적인 복잡한 양상의 꿈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그림 속의 꿈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세라피 피탈라의 기념상에서 비롯되었
다.'라고 달리는 이 작품의 영감에 대한 근원을 밝히고 있다. 그림의 전면에 보이는 녹색
으로 된 커다란 흉상과, 마치 불꽃과도 같고 뱀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은
장식적인 모양으로 둘러싸여 있다. 차분히 내려감은 듯한 두 눈은 실제로는 녹여 없애
버렸으며 그 언저리에는 개미 떼 들만 우글거리고 있다. 그 밖의 모든 요소들과 더불어
이것들은 무엇인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듯 하며 통념의 차원을 초월한 비합리적인
꿈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폴 엘뤼아르의 초상
초현실주의의 3대 시인 중 한 사람인 폴 엘뤼아르의 초상이다. 달리는 이 작품을 통해
위대한 시인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표현하고 있다. 파리에서 한 번 만나본 적이 있는
폴 엘뤼아르의 부인 갈라(엘레나)에게 짙은 연민의 정을 느낀 달리는 이들 부부를
카다케스로 초대하였고, 그곳에서 달리와 갈라는 서로 가까워진다. 이들의 관계를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감지한 엘뤼아르는 이에 순응하고 돌아서고 만다. 이 작품에는
그러한 세 사람의 미묘한 관계가 숨겨져 있으며, 파리에서 개최된 달리의 개인전에
출품되기도 하였다. 한 묶음의 머리카락 위로허공에 떠 있는 마치 기념비와 같은
이 초상은 인간의 머리, 숲의 풍경 등 여러 요소들이 특이한 형상으로 엮어진 응시하는
시인의 초상으로 달리 적인 야심작이다.
현기증
높은 빌딩의 옥상과 같은 느낌을 갖도록 바닥면의 원근이 과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 저쪽
에는 사자와 같은 머리가 놓이고 그 오른쪽에는 남녀가 불가사의한 행위를 하고 있다.
얼굴의 윤곽이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예리한 칼로 몸통이 잘리어진 것
같으며, 이들의 모습은 마치 잔인한 에로스의 침묵극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푸른 공,
인체를 연상케 하는 이상하리만큼 길게 늘어진 또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달리가 설정한 빛과 그림자를 포함한 넓은 바닥 공간 등은 키리코에게서 영향을 받고 잇
음을 시사해 준다. 화면의 왼쪽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잔잔한 바다와 맞닿은 곳이 높은
광장과 대조를 이루게 하여, 구도상 고저감과 외롭고 단절된 거리감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營養家具(영양가구)의 離乳(이유)
고전적인 극사실의 묘법으로 리가트 항(港)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는 그의 유년시절 그
의 초현실적 영감을 자극하였던 이 항구를 자주 작품의 소재로 취하고 있다. 그의 고향에
서 멀지 않은 이곳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섬바위 사이로 거센 바닷물이 넘치는, 그에게 있
어서는 보금자리와도 같은 곳이다. 여인의 젖가슴처럼 중첩된 산들이나 배들이 매인 해변,
바람 한 점 없는 듯이 잔잔한 바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주저앉은 여인의 등에는 마치 터널
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그리고 지팡이가 그것을 받치고 있다. '벽을 투시할 수 있는 시선
은 현실의 육체에서도 투명한 공간을 만든다. 만약 이공간이 여자의 등에 뚫렸을 때는 마
법처럼 그곳에는 <營養家具의 離乳>가 형성되어 진다.'고 달리는 말 한다.
回想의 여자 흉상
'처음 실용적 물질이던 것을 비실용적이며 미적 형질로 바꾸어 놓으려 했다. 즉 나는 빵으
로써 초현실적 오브제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메마르고 부
패되어 더 할 나위없이 볼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것이 퍽 아름답게 보였다.' 라
고 달리는 통념의 인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초현실주의 전람
회와 살롱 드쉬르 앙 데팡당전에 출품된 이 작품은 피카소가 그 전시장에 데리고 왔던 개
가 뛰어들어 그 빵을 삼켜 버렸다는 일화를 지닌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로 그 후 이
작품은 1970년 원래의 흉상에다가 밀레의 <만종> 속의 두 인물을 조그맣게 소조하여 올
려 놓고 잉크병을 첨가하여 거의 원형대로 재현하였다.
두개골로 된 하프를 젖짜듯하는 평범한 대머리 官僚
달리는 비합리적인 편집광적 해석, 때로는 비합리성이 조형 세계를 지배하기에 자연의 사
물에서 엉뚱한 이미지를 발견하고 바로 작품에 옮기는 경우가 많다. 불가사의한 형태나 이
미지에서 달리 특유의 형태학을 촉발하곤 하는 것이다. 이상하리만큼 뒤통수가 튀어나온
대머리의 관료가 짜고 있는 것은 아무런 반응조차 없는 뒤틀린 두개골 모양의 하프를 그
린 것이다. 두개골을 받치고 있는 지팡이는 달리가 어릴 적 어둑한 헛간에서 본 적이 있는
것이었고, 그가 그 지팡이를 그리게 된 것은 부드러운 모양의 둥근 물체를 안정되게 받치
는 단단한 물체이기 때문이리라 짐작된다. 또한 그는 이 그림에서 의도적으로 음영을 설정
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음영의 법칙을 무시한 전혀 자신의 의도에 의존하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테이블로 사용되는 베르메르의 망령
이 작품에선 17세기의 화가 베르메르의 이름을 그대로 빌어 명제로서 사용하고 있다. 왼
쪽과 오른쪽에는 벽돌 담장이 되어 있고, 베르메르의 망령의 오른쪽 다리가 길게 뻗어져
있어 그 위에 포도주병과 컵이 놓여있다. 그리고 발목을 잘라 우뚝 세운 것은 마치 테이블
과 같은 인상을 준다. 달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여느 짧은 순간의 영감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리 가트 항의 묘지
로 통하는 길 한가운데서 나는 베르메르를 보았다. 그 후에 나타난 떠도는 무소(코뿔소)의
출현을 예고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발과 발목은 떨어져 있다.
' 이는 그럴 듯한 달리 적인꿈이며, 동시에 달리가 1920년대에 베르메르에 심취하였음을
시사 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피카소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스페인 출신인 달리는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격려해준 중산층 부모를 두었던 행운아였다. 스페인어로 "구원자"라는 뜻의 살바도르라 이름지어진 것은 회화도 데생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 이 시대에 회화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라는 소명이었다. 그는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할 당시 선생들의 자질을 문제삼다가 퇴학을 당한 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 시인들과 교유하였다. 이듬해 최초의 개인전을 열면서 정식으로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하였고,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폴 엘뤼아르의 부인 갈라를 평생의 동반자, 모델, "초현실주의
뮤즈"로 삼으면서 그녀에게서 영원한 영감을 받게된다.
* 초현실주의- 다다 운동의 뒤를 이은 무의식의 세계를 정복하고 심화시키고자 하는 운동. 프로이드의 발견 내용을 탐구하고 행하던 예술 세계
스스로 "편집광적 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달리의 창작기법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1955년 소르본 대학에서의 강연을 통해 그는 자신의 방법론을 설파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로 복귀하려는 욕구가 커졌으며,
초현실주의 화가 그룹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도 원자과학이나 가톨릭의 신비성을 추구하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였다.
젊은 시절의 달리는 아주 소심하고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었다. 이를 보상하기 위해 그는 '천재의 역할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어른이 되어 외향적 성격으로 발전시켰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달리의 개성, 달리의 '유니폼', 달리적인 혐오가 실제로는
그가 가면을 쓰고 행동했던 것이다.
40m 짜리 빵으로 세상을 뒤덮을 상상을 했던 달리는 기행과 충격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신에 집착하는 자기현시자가 되었다. 그는 기묘하게 위로 향한 콧수염을 과시했고, 카메라를 향해 싫은 표정을 지어보이고,
유명 사진작가를 위해 초현실주의적 세팅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는 또한 이상한 옷을 입기도 했다. 1936년 런던 전시회의 개막식을 위한 그의 의상은 마치 무의식의 세계로 내려가기
위하기라도 하듯 심해 다이버의 복장이었다.
그는 당돌하게 37살에 자신의 외설스러운 성적 환상과 자위행위에 대한 열정을
자세히 적은 자서전도 출판했다.
달리는 돈을 벌 욕심으로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아첨은 물론 광고와 디스플레이, 뉴욕 월드
페어의 오락관 디자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망각의 여로>에 드림 시퀀스를
위한 스케치를 제공하면서 몇년을 미국에 머물렀다.
그는 미국의 여배우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여배우의 머리가 초현실주의적 아파트로 그려지고, 붉은 입술은 소파가 되었다. 입술 소파는 후에 가구로도 만들어졌다.
<위대한 수음자>-
물렁물렁한 형태, 우글거리는 유기물, 신랄한 에로티시즘 등은 세상의 온갖 고뇌를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
<끝없는 수수께끼> 달리가 즐겨 사용하는 여러겹으로 겹친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특징적인 그림으로, 누워있는 사람, 사냥개, 사람얼굴, 정물화, 신화 등에 나오는 동물 등 6개의 주제가 겹치고 있다.
<전쟁의 얼굴>
<삶은 완두콩과 흐믈흐믈한 구성>- 부제 : 내란의 전조 스페인 내전을 주제로 한 작품.
끈적끈적하고 부풀어 오른 살덩이들은 달리의 초기 작품들에서 거의 일관성있게
나타나는 주제이다. 이 시기에 그는 과거 거장들의 기법에 숙달해 있었고, 유년기에 인상주의로부터
영향받은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달리는 자신의 그림을 이렇게 정의한다. "내 작품은 구체적 불합리성에 대한 최상의 기상천외한, 한번도 보여진 적이 없는
이미지를 담은 천연색 즉석사진이다"
달리는 스캔들과 자극적 언사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꿈에 영향받은 녹아내리는 시계와 같이 불합리한 이미지 표현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이런 이미지들을 정확하고도 환상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달리의 능란한 스타일과 기묘하고 키치같은 이미지들의 차용으로 별로 세련되지 않은
기호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의 작품은 포스터와 엽서로 널리 복제되었다. 초현실주의라는 그의 브랜드는 많은 광고제작자들에게 영향을 주고있다.
달리는 모순, 역설, 심술궂은 의견으로 대중들을 혼동시키고 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려고 했다. 예를 들어 달리가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을 때,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서도 자신은 "군주제 지지자이며 무정부주의자이다!" 라고 선언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특출한 개인으로 주장하기 위해 달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이려고 했다. 이는 그가 사교 모임과 모든 종류의 집단주의를 배격했고, 상업과 대중매체를 좋아하고,
사실과 허구를 흐려놓으려는 태도를 설명해 준다.
달리의 말년은 예술적 정신의 쇠퇴와 질병으로 얼룩졌으며, 이 시기 동안 그가 백지에다
사인을 함으로써 달리 시장이 모조품으로 오염되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1974년 달리는 자신의 미술관을 고향 피게레스에 세웠다. 훗날 여기에 그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달리 사후에 '갈라 달리 캐슬 뮤지엄 하우스'와 '살바도르 달리 뮤지엄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2000년 한해에 이 세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의 수는 90만명이 넘었다. 오늘날 달리를 기리는 수많은 웹사이트가 있고 그의 판화와 기념품을 판매하고 꼭 필요한
진위 감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상 갤러리가 있다. 70대 노인이 되었을 때 "죄가 될 정도로 부자"라는 표현을 즐겨쓰던 살바도르 달리는
피카소와 함께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화가이다. 편지 겉봉이나 그림엽서에 그의 가느다란 콧수염을 그려넣고 "스페인"이라고만 쓰면
그가 살고있는 곳으로 어김없이 배달됐다 할 정도이다.
달리가 친구 루이스 부뉴엘과 합작한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의 한 장면 입이 없는 가면, 입 대신 외음부의 음모가 자리잡고 있는 가면, 잘려진 손, 면도칼로 도려내어 지는 마치 여자 아이의 눈처럼 보이는 송아지의 눈, 양팔 밑에 성게를 끼고 있는 소녀의 누드 등 충격적 장면으로 이루어진 17분 분량의 영화. 이것은 파리의 미술, 사교계에 비수를 꽂았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초기 회화와 영화의 일부가 현대 미술에 상당한 공헌을 한 건 사실이다. 그가 친구 루이스 부뉴엘과 합작한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와 <황금시대>(1931)는
영화사에 독자적인 의의를 남겼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경력은 윤리적 순수성과 미학적 질 대신 돈과 명성을
지나치게 추구했다는 비판도 있다. 달리를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억압된 동성애자로 나타낸 '명성'과 '치욕'을 연결시킨
TV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도 했다.
스스로를 상품화시킨 아트 스타 살바도르 달리. 스스로를 천재라 공언한 그는 84세에 파킨슨 병으로 숨을 거두기까지 셀 수 없는
논문과 10여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으며 순수 회화와 응용미술, 대중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성과를 이뤄냈다.
달리 사후 10여년 넘게 그의 순회전이 세계 각지에서 열렸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전
달리전이 열렸으나 스스로 피카소를 능가한다고 말하는 이 거장의 질 좋은 작품을
구해오기란 쉽지 않아서인지 전시 내용 면에서 그리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다.
Music: Morir De Amor / Dya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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