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3. 8. 20(주일) - 성령강림절후 열두 번째 주일 - (2023년 34주)
제목; “아브라함의 끈질긴 부르짖음”
성경; 창 18:20-33 (p. 47) (시 138:1,3, 515<256>, 279<337>, 621)
<예배의 부름> (시 138:1,3)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훈련의 달 8월 세 번째 주일에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날씨가 정말 덥지요? 가을로 들어간다는 입추(立秋, 8일)도 지나고, 삼복 중 가장 덥다는 말복(末伏, 10일)도 지났건만 폭염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물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천리(天理)는 속일 수 없어서 가을로 향하여 달려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마지막 남은 무더위 잘 견디고, 건강 잘 유지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은 날씨도 덥고, 힘든 현실을 생각하며,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웃으면서 넌센스 퀴즈 몇 개 풀면서 말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1. 우리나라가 쇼트트랙에 강한 이유는? / 새치기를 잘 하기 때문
2. 보신탕 집으로 끌려가는 개의 가장 큰 소원은? /
다음 세상에서는 식인종으로 태어나는 것
3. 가짜 휘발유를 만들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재료는? / 진짜 휘발유
4. 못생긴 여자만 좋아하는 사람은? / 성형외과 의사
5. ‘술과 커피는 안 팝니다’를 네 글자로 줄이면? / 주차금지
6. 소가 가장 무서워하는 말은? / 소피 보러 간다.
7. ‘특별히 공부도 못하면서 대가리만 큰 아이’를 세 글자로 줄이면? / 특공대
8. ‘양초 곽에 양초가 가득 차 있다’를 세 글자로 표현하면? / 초만원
9. 이상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 치과
10. 날마다 가슴에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은? / 연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재미 있지요? 조금만 발상을 바꿔보면 답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게 잘 안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이 그런 말씀입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창 18:20-33)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죄악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올리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의 통로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가장 먼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을 찾으시는 오늘 본문(창 18:20-32)의 서론인 17-19절은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를 이루고 천하 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선택하신 이유는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0-21절에는 소돔과 고모라에 가득한 부르짖음과 무거운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땅에 직접 내려가 사태를 파악하기로 하셨다는 독특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이어서 22-32절에는 소돔의 심판을 둘러싼 아브라함의 반복되는 질문과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소돔과 고모라라는 고대 도시를 배경으로 엮어지고 있는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 땅의 역사를 인도해 가시는지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이 감당한 역할 중의 하나가 믿음의 조상으로서, 복의 근원으로서 이웃을 향한 중보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20절 바로 앞 절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멸망을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 속 마음을 털어놓으시는 하나님(16-17)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냥 가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해주고 떠나가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떠나가시는 하나님을 전송하려고 나갑니다(16).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참 가시다가 마음이 바뀌셨습니다. ‘아니지. 아브라함한테는 이야기해야지’ 하시며 돌아오셔서 하나님의 속마음을 아브라함에게 털어놓으셨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우린 인간이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마음을 아브라함에게 털어놓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친하기 때문입니다. 친한 사람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더 친한 사람이 있고 덜 친한 사람이 있습니다. 더 친한 사람에게는 마음에 있는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덜 친한 사람에게는 말을 골라서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만 이야기하고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지난 24년 동안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갈등과 고민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것을 의로 여겼습니다(15:6). 그리고 이스마엘을 얻고 나서도 13년이나 믿음의 휴면기를 보냈습니다(16장). 그 후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이름을 바꾸고, 할례를 행하라고 할 때 그대로 순종하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17장). 그리고 오늘 본문 앞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을 때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18:1-8). 이전에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 없었던 이런 모습을 보며 하나님은 속마음을 털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과 친해져야 합니다.개인적으로 친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고 열심히 나오는데,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같이 전혀 하나님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녀도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친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음성도 들으며, 그분의 비밀도 알게 되고 자신의 비밀도 하나님께 알려 드립니다. 이런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계획(18-21)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는 계획은 두 가지였습니다.
1)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18-19) :
“아브라함은 ①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②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8-19)
아브라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하나님은 두 가지 계획을 말씀하시는데, 먼저 아브라함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첫째,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18)으로, 이미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약속해 주셨던 것을 재확인해 주시고, 둘째, 자녀에 대한 말씀으로(19),이런 복을 주시려고 네 자녀를 선택했고, 그 약속은 이 자녀들에게도 이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 임박한 심판(20-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20-21) 아브라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하나님의 두 번째 계획은 소돔과 고모라의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것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 심각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친히 알아보려고 가시던 중이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죄는 부르짖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20).
죄는 그냥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는 소리를 지릅니다. 여기서 “부르짖음”(제아카, זעקה)는 ‘소리지르다’ (왕상 22:32), ‘외치다’(삼상 28:12)를 뜻하는 ‘자아크’(זעקה)에서 유래하여 ‘외침’(겔 27:28)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 곧 원성(怨聲)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늘을 향한 억울한 사람들의 애절한 호소인 듯합니다. 지도층에게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남을 억울하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학대하고, 고통을 주면 그 고통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하는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들립니다(출 2:23-25).
둘째,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전에 오셔서 알아보고 확인하신다는 사실입니다(21).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그냥 심판하지 않으시고 일단 오셔서 확인하십니다. “알려 하노라”(야다, ידע)는 ‘철저히 조사하여 정확한 실상을 파악한다’는 뜻으로, ‘기회를 준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때 회개를 하고 마음을 바꿨으면 무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들이 확인 조사를 하려고 소돔과 고모라에 갔을 때 그들은 무례하게 행했을 뿐 아니라,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결국 그들을 심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확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겠다는 속마음을 말해주고 나서 소돔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22).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예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당황해서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하는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거민들의 구원을 위한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돔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아무리 죄악이 심해도 거기에도 의인들이 있을 텐데 설마 하나님께서 그들도 함께 멸하시겠느냐는 생각으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구합니다.“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5) 아브라함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 악인과 의인을 같이 심판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항의하고 있는 것은 보편적인 심판입니다. 여기서 ‘부당하다’(할릴라, הללה)의 기본 뜻은 ‘멀리 떨어져 있다’이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뜻에서 발전하여 ‘결단코 그렇지 않다’(삼상 14:45), ‘결코 아니다’(삼상 2:30)란 뜻으로 쓰였습니다. 특히 ‘할릴라’란 단어가 본문에서 연속해서 두 번 쓰인 것은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간절하고도 간곡한 호소를 잘 보여줍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과 악인을 똑같이 취급하거나 함께 멸망시키시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부정과 반대 의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소돔 성과 그의 사랑하는 조카 롯을 위하여 아주 적극적인 중재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리 죄로 물든 소돔과 고모라라도 어느 정도 의인은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소돔은 비옥한 평지에 위치한 큰 성이었기에 정확한 인구는 전해지지 않지만(학자들은 약 5만명의 사람이 살았다고 추산함)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생각하는 매우 적은 수인 50명(1/1000)을 언급합니다. 아무리 못해도 그 정도쯤은 의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의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소돔에는 의인 50명이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45명도, 40명도, 30명도, 20명도, 10명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타락한 도시일지라도 의인 10명이 없다는 것은 그곳이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결국 소돔은 그 죄악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결과를 놓고 본다면 아브라함의 기도는 실패한 기도, 응답받지 못한 기도처럼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기도는 오늘 우리의 기도 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귀한 원칙과 방향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으며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점입니다.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할 부분은 아브라함의 기도가 응답받았느냐의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왜 기도했는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태도로 중보 기도를 드렸습니까?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가까이 대면하여 기도하였습니다(23).
“가까이 나아가 이로되”
아브라함의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대면하여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과 대면하여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더욱 하나님 앞으로 다가갔다는 사실은 그가 소돔 성을 향해 얼마나 간절한 심정을 가졌는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처럼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대면하여 서 있음에도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친밀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하지만 어떤 성도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듯한 기도를 드립니다. 즉 대상을 바로 하지 않고 그저 기도하는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대면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분의 느낌과 표정을 주의하면서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한 마디 해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에만 집중하여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을 주의 하지 않은 채 마구 말들을 쏟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고 중보 기도를 올렸습니다.
창세기 32:13-32에 보면 야곱이 밤새도록 씨름을 하고 축복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은 밤새 씨름을 해서 이기고 난 후 상대방이 날이 새려하니 가게 해달라고 할 때, 야곱이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이에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8) 이에 다시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고 말하니 천사가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물은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합니다(29). 이에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부르는데, 직역하면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이며, 그 의미는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30)라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직접 대면하여 인격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2. 참된 기도는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27).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이나 재”로 비유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나 재”(아파르 와에페르, עפר ואפר) 같은 존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원문을 보면 “티끌”(아파르, עפר)이라는 단어는 ‘먼지’(dust)를 말하는 것으로, ‘티끌과 재’는 ‘먼지와 재’(dust and ashes)로, ‘이 땅에서 가장 가치 없고 무익한 존재’를 뜻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이 먼지와 재 같이 보잘 것 없고 미약한 존재임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인식이 바로 아브라함의 기도가 출발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는 50명에서 계속 숫자를 줄여 갈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30), “내가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31),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32). 이 거듭되는 그의 호소는 겸손하지만 담대하고 끈질긴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겸손하되 공의를 가지고 끈질기게 최선을 다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하나님은 마음이 높은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면서 감히 눈을 들지도 못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눅 18:9-14). 또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약 4:6).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3. 아브라함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25).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뜻을 표명한 기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기도의 출발점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의지하여 의인을 살려 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요청은 결코 자신이 잘못을 해 놓고 하나님의 긍휼에만 의지하려는 나약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맹목적이고 기복적인 신앙도 아닙니다. 그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을 정확히 알고 있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구하는 기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 자신의 필요와 기대가 아닌 하나님 자신의 필요와 기대와 요구를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확인한 것은 놀랍게도 소돔 성에는 의인이 열 명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롯 외에 의인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소돔을 심판하심이 의로운 것임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나님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그의 기도를 통하여 의인을 구원하고 악인을 심판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해서 이런 중보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와 중보 기도의 내용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는 소돔에 있는 의인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기도가 조카 롯을 위한 중보 기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소돔에 있을지도 모르는 더 많은 의인들을 위한 기도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것은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25)라는 기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소돔같이 많은 사람이 사는 큰 성에 최소한 의인 50명은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의인의 수가 50인이 안될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45인으로, 40인으로, 30인으로, 20인으로, 마지막으로 10인으로 줄여가면서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의인이 10명도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서 중재하는 기도를 마쳤습니다.
2)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는 소돔에 있는 의인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소돔 거민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 그는 의인이 50명만 있다면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겠느냐고 중재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기도는 실상 소돔 거민 모두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기도는 소돔의 모든 죄인을 위한 기도였고, 그의 기도는 어떤 죄인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기도였습니다.
3) 아브라함이 이런 귀한 기도를 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것은 그가 소돔과 분별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가 만일 소돔 가운데 있었다면 그의 눈도 맑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눈이 맑은 것은 그가 분별된 의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분별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 속해 있으면 세상을 더 잘 알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고후 6:16-18).
4.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최선을 다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 등 무려 여섯 번을 변경시켜가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도 이렇게 거듭 호소하기가 민망했을는지 모릅니다. 또 자존심이 상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냥 해 보는 기도가 아닙니다. 정말 진정 어린 간절함이 있습니다. 50명에서 시작해 10명이 될 때까지 이어진 그의 기도는 어떻게 해서든 소돔 땅에 내릴 심판을 피해 보려고 발버둥친 그의 노력입니다. 그는 최선을 다합니다. 자존심이고 뭐고 그런 것들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는 거룩한 용기가 있습니다. 그 믿음의 담대함이 하나님 앞에 이토록 담대한 외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50명에서 시작해서 민망할 정도로 점점 줄어든 숫자인 10명이 될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기도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어떤 제목을 갖고 기도를 하는데 도저히 이것은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아예 기도를 중단해 버리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판단에 기초한 연약한 행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십니다. 앞서 생리가 끊어진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4)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 사람들을 위해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그에게는 그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가 끈질기게 기도한 원동력은 바로 한 생명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 아브라함은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한 후에는 참고 기다렸습니다(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대화한 후에 가시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 그 결과를 참고 기다렸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을에 결실이 있을 것을 믿기 때문에 뙤약볕에서도 참고 일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것을 믿는 농부의 마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참고 기다림을 통해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먼저 나를 변화시키고 다음으로 내 주변을 변화시킵니다.내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든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생각을 잃어버린 사람은 작은 것에도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하는 사람은 능력을 받습니다.기도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선물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학교에서 시험 문제를 풀 때 실력이 없는 학생들은 쩔쩔 매지만 실력이 있는 학생들은 쉽게 풀어 갑니다. 인생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를 푸는 실력이 기도의 실력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III.
저는 8월 첫 주간에 故 이용태 집사님 장례를 치르고 지난 주간에도 어떤 한 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벽제 승화원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수요일 밤 10시가 넘어서 포항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메디인병원 장례식장에 있는 분 장례를 치러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교회 권사님 아들이 자살을 했는데, 이전에 가족들이 다니던 교회에 연락하니 교회 출석한지 오래 되어 교적이 없으므로 장례를 치러줄 수 없다고 하고, 다른 교회 목사님께 연락하니 자살한 사람은 장례 치러주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원해서 무당도 장례 치러준 목사가 무엇을 못하겠느냐’고 하면서 제가 가서 장례 치러주겠다고 하고, 다음 날 17일(목) 아침에 가서 장례 절차 논의하고, 오후 1시에 입관 예배드리고, 18일(금) 오전 7시 발인해서, 벽제 승화원 가서 하관 예배드리면서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세 번의 설교를 통해 유가족들이 신앙을 회복하고 천국에서 다 만나기를 소망한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위로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면서, ‘비단 목사가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조카 롯과 소돔, 고모라 성의 심판과 멸망을 막기 위해 끈질지게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같이, 어려움 당한 우리의 이웃을 향한 중보 기도와 섬김과 나눔의 삶이 계속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새벽기도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과 부흥에 대해 그 원인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새벽마다 주의 제단에서 눈물로 기도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싶습니다(1907년 평양 대부흥 시 길선주 목사님께서 시작하심).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 기도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이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소원과 아쉬움만을 나열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기도에 머물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과연 나의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질문을 별로 던져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기도는 기도에 관한 많은 교훈과 통찰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기도하고, 겸손하게 내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초하여 기도해야 하며, 끈질기게 최선을 다해서 기도한 후에는 참고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전 광고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지요?’하는 질문에 대부분 ‘물이요’라고 답했는데, 한 아이가 ‘봄이 오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응답받는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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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0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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