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능선에서면 저자 남난희님 화개골 자택 마루에서 찻상을 보세요 낭만이~~ㅎㅎ*
아! 진부령!
76일 동안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진부령. 산은 아직도 겨울이건만 이곳 진부령은 질척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와 허무가 몰려왔다.
아! 이 허허로운 바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힘없는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았다.
태백의 형제 능선들이 나를 손짓하는 듯 했다. 그렇게 지겹기만 하던 등반이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아직 나의 등반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분명히 나의 등반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잠시 쉬는 거다. 그리고 통일되는 그날부터 나의 고행은 다시 시작되리라.
진부령만 도착하면 나는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고, 홀가분하게 산을 등질 것이라던 내 생각은 오산이었다.
오히려 산은 숙제처럼 마음에 남았다.
북쪽의 그 산릉을, 언젠가는 여기서 다시 이어지는 우리의 맥을 따라 개마고원을 지나고 함경산맥을 지나
소련, 만주국경까지 달려가 반토막 국토종주의 한을 풀리라.
나는 내 발로 직접 걸으며 내 눈으로 직접 보며 내 가슴으로 직접 느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국토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나머지 맥을 잇고 싶어하고 그리고 곡 그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항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한 심정은 이젠 정말 푹 쉬고 싶었다.
아무도 만나지 말고 그냥 만족하게 쉬었으면 했다. 희비가 엇갈리고, 시원하고, 섭섭하고, 주체할 수 없이
허전해왔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욕을 삼켰고, 모든 생각들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답답했다. 아니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흡사 전쟁 고아처럼 비틀비틀 알프스 산장으로 향했다.
나의 도착을 미리 알고 있는 듯 알프스 산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시간이 5시20분.
쓰러질 듯 주저앉았다. 서울에서 온 회원들과 기자들이 계속 기다리다가 5시에 모두 철수했다고 알프스 산장의
사모님이 전해주었다.
사모님이 다시 연락하겠다는 것을 나는 말렸다. 이 시간만은, 오늘만은 그냥 혼자이고 싶었다.
그냥 조용히 나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난 정말 큰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힘겨운 일을 성취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난 몹시 피곤했고 단지 쉬고 싶을 뿐이었다.
알프스 스키산장의 사모님은 귀한 손님이니까 정중히 대접하라는 부탁을 여러 사람에게 했다.
융숭한 저녁을 대접 받고 따뜻한 방에 누우니 비로소 뜨거운 눈물이 나왔다.
나는 드디어 했구나. 드디어 해내고야 말았구나. 장한 내 다리를 만져 보았다. 그동안 혹사시켜서 미안한
내 다리, 만신창이가 된 내 육신.
이제는 좀 더 나를 사랑해야겠다. 내 주변 사람들을 좀더 사랑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 땅은 나쁜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차가운 가슴의 소유자보다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나의 이 등반은 비록 행위는 나 혼자 했지만 결코 나 혼자 이루어낸 등반이 아니다.
나의 헌신적인 지원대, 그리고 내게 성원을 아끼지 않은 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제 열심히 살아갈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통일이 되는 그날,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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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금정산에서 진부령까지 태백산맥 2천리 길을 76일에 걸쳐 겨울철에 단독으로 종주한
남난희씨의 산행기『 하얀능선에 서면 』중에서
남난희(1957생)
태백산맥종주 ('84)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강가푸르나봉 등정 ('86)
설악산 토왕성 빙폭 등반 ('89)
백두대간 종주 ('90~'91)
태백산맥 종주등반 종착역인 진부령으로 들어오면서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는 남난희씨
*하얀능선에서면 저자 남난희님 화개골 자택에 옛청학동 사진*
*하얀능선에서면 저자 남난희님 지인들에거만 파는 된장독*
*하얀능선에서면 저자 남난희님 5년숙성된 된장을 제가요청 구입장면*
*하얀능선에서면 저자 남난희님 화개골 자택에서 쌍계사 지리산을 바라보며 세계에서 제일 편안안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봤음*
전설의 여성 산악인 남난희"좀 모자란 듯 살아도 전 지금 무척 행복한걸요"
하나, 남난희는 이 말은 잊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된장을 구입하겠다고 연락이 이따금씩 오지만 보내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더 많이 된장을 만들면 더 많은 벌이가 되겠지만 콩 10가마가 넘어가면 손맛을 잃는단다. 무엇보다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노동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그게 그의 지론이다. 대신 그는 지난해부터 차를 재배, 직접 덖은 후 판매도 한다. 아들 기범(남원 실상사 대안학교 3학년)이의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남난희는 쌀 이외의 모든 것을 자족한다. 대문 앞 텃밭에서 거의 모든 것을 직접 키운다. 심지어 우물 옆 음지에선 버섯 재배도 직접 한다.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남난희. "저는 약간 모자란 듯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요. 덜 쓰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하지 않는 절제에 이젠 익숙해져 있나봐요." 오랜 기간 화두를 붙잡고 용맹정진하다 깨달음을 얻은 노승이 연상될 정도로 차분하면서 느긋하고 한편으론 사물을 달관한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아들을 대안학교에 보냈던데."요즘은 사춘기여서 저에게 약간의 반항도 해 섭섭하지만 저에겐 고마운 스승 같은 존재예요. 제도권 교육은 못 미더워 보냈어요. 본인이나 저도 만족하고 있어요. 저는 아들에게 무엇이 되라고는 요구하지 않아요. 작은 바람이 있다면 자연과의 교감을 갖는 삶을 영위했으면 좋겠어요."-산은 이제 완전히 끊은 겁니까.(잠시 뜸을 들이다)"통일이 되면 백두대간을 밟고 백두산에 꼭 가고 싶어요. 또 역전의 용사들이 좋은 기회를 만들면 따라붙을 겁니다. 괜히 절 은퇴시키려고 하네요. 송충이가 솔잎을 못 먹으면 죽어요."실제 그의 저서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리고 언젠가 통일이 되는 그날,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북으로) 나설 것이다'.■ '태백산맥 종주등반'을 회상하며- "육체적 고통보다 외로움이 더 힘들었어요"장삼이사들은 남난희 하면 '태백산맥 종주등반'을 우선 떠올린다. 25년이 지난 지금 남난희는 "내 인생에서 그런 경험을 한 것이 행운이며, 그로 인해 지금의 내가 완성됐다"고 힘주어 말했다.-그토록 힘든 등반을 왜 했나요."당시엔 산에 미쳤어요. 암벽에 빙벽에, 시간만 나면 산엘 갔어요. 월급을 주는 직장도 산을 타기 위해 다녔어요. 모든 게 산과 타협이 되지 않으면 포기했을 정도였으니까. 답변이 되나요."잠깐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다. 백두대간이란 용어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친숙한 백두대간이란 개념은 남난희가 태백산맥 종주를 시도할 때인 1984년에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고 이우형 씨가 1986년 이 개념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 소속 대원들이 종주 후 대간종주기를 연맹회보인 '엑셀시오'에 소개했다. 이는 산꾼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 1990년 월간 '사람과 산'이 연중기획으로 종주기사를 연재함으로써 전국의 산꾼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백두대간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재밌는 점은 당시 인기리에 연재된 백두대간 종주기를 남난희가 썼고, 부산에서 활동하는 권경업 시인이 동행하며 산시를 곁들였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남난희가 76일간 악전고투하며 걸었던 코스는 어디일까. 그는 금정산 고당봉에서 출발, 진부령에서 끝을 맺었다. 도상거리 약 590㎞, 실제 걸은 거리 약 800㎞, 1000m 넘는 봉이 50여 개 그리고 가없는 고개, 령, 봉, 재, 5만도폭 지형도만 27개나 되는 대장정이다. 요즘 산줄기로 보자면 낙동정맥을 타고 오르다 태백산에서 백두대간과 합류해 진부령까지 걸었던 셈이다. 백두대간을 몰랐던 당시로선 이 코스가 국토의 등뼈, 다시 말해 지금으로 치자면 백두대간의 개념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 자체가 당시 인식의 한계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남난희는 "물론 종주는 혼자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 10차례 후배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그들이 없었다면 종주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무작정 내달린 게 아니라 철저한 준비 또한 필수였다고 덧붙였다. 떠나기 전 지도상으로 등반하는 인도어 클라이밍으로 전 지점을 머릿속에 넣었고, 지원조와는 1차 만날 지점을 놓치면 2, 3차까지 면밀히 준비했다고 한다."배낭이 너무 무거워 1g이라도 줄이려고 칫솔을 반 토막냈고, 길을 잃고 잡목에 갇히고, 가슴까지 쌓인 눈속에 파묻혀 울었어요. 그러면서 차츰 출발 전 자신감은 모두 사라졌어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어요."당시를 떠올리던 남난희는 "그 정도로 힘들었으면 약간 망설였을텐데 그땐 동계 종주가 얼마나 무모한지도 몰랐다"며 약간 상기된 채 웃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0년 남난희는 이 종주를 바탕으로 책을 엮었다. 제목은 '하얀 능선에 서면'. 국내 산서로는 드물게 중판에 중판을 거듭, 당시로선 베스트셀러로 올랐다. 2004년 남난희는 산을 내려온 산악인의 삶을 실감있게 그린 '낮은 산이 낫다'(학고재)를 출간했다.
남난희 / 하얀 능선에 서면(태백산맥 2천리 단독 종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