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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44
1월18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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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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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0j1LCF9Z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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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전능하신 분께서 연약하게 되시고, 우리에게 순종을 명하시는 분께서 스스로 순종하셨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첫 번째 독서로 히브리서를 계속 봉독하게 됩니다. 히브리서는 말마디 그대로 히브리인들, 즉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이자 가르침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한 논쟁은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어 왔는데,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오늘날 성경학계에서는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더 이상 바오로 사도를 히브리서의 저자로 단언하지 않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어휘나 문체가 놀랄 정도로 세련되고 수준이 높아, 비교적 거칠고 투박한 바오로 사도의 표현과 맥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과는 달리 히브리서에는 바오로 사도가 저자라는 언급은 물론 암시조차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을 인용하는 방법이나 신학적인 내용에서 바오로 사도의 서간과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헬레니즘 문화의 배경을 지닌 유다계 그리스도인으로 추정합니다.
히브리서는 신약 성경들 가운에 가장 완숙한 신학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구약성경의 전통 안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탁월하게 풀어냅니다. 메시지 역시 심오하면서도 다양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후, 친절하고도 자상하게 답변을 이어갑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다른 서간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가르침이 적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특별히 예수님을 대사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던 대사제는 이제 예수님 안에서 절정과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세상 육화강생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을 몸소 체험하신 예수님께서는 직무상 대사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시는 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각자의 연약함을 가련히 여기시며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는 신앙의 위기를 맞이한 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이를 통해 지금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를 잘 극복하도록 돕습니다.
결국 히브리서는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실체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사제이자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희생 제물로서, 완전한 제사를 하느님께 바친 분임을 역설합니다.
더불어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따라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무엇보다도 강한 믿음과 불굴의 인내를 간직할 것을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히브리서 5장 8~10절) 히브리서의 전반적인 흐름 안에서도 포착되는 바이지만, 역설적인 진리가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재차 강조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연약하게 되시고, 우리에게 순종을 명하시는 분께서 스스로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시어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완전하게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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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공동체 결속의 힘은 규율이 아닌 자비>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xqqZdING2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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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는 마르코 복음의 흐름 주제는 ‘공동체의 중요성’입니다. 공동체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죄를 용서받습니다. 세리들의 공동체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이와 상반되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행위’, 즉 ‘율법’을 공동체가 유지되는 힘과 원리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두 공동체는 단식이라는 규율 안에서 누가 더 잘하는가 경쟁이라도 하듯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분명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공동체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당신은 신랑이고 제자들은 그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입니다. 사실 당신의 신부라고 이야기하면 그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기에 그냥 손님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가르침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어쨌건 분명 예수님의 공동체와 바리사이들의 공동체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두 공동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자유’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공동체에서는 율법을 어기면 바로 퇴출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공동체에서는 유다가 끝까지 거부하지 않는 한 그를 품어줍니다.
이 두 공동체를 비교할 때, 군대와 수도회를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군대는 규율에 따라 통제되고 그 규율만 잘 지키면 칭찬을 받습니다. 히틀러가 처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은 곳이 군대입니다.
반면 수도회는 군대와 다릅니다. 분명 규율이 있지만, 그 사람이 평가받을 때는 성령으로 충만한가가 그 평가 기준이 됩니다. 또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수도회를 나갈 수 있고 다른 영성이 있는 수도회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수도회들은 지나치게 규율을 강조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보다 조금은 바리사이 공동체에 가까운 모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학교도 수도회와 다를 바가 별로 없기에 한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독일 신학교로 유학을 하러 갔던 한 신학생이 원장 신부님에게 불려가서 혼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는 왜 매일 미사에 나오니? 정신적으로 좀 문제 있는 거 아니야?”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한국 신학교에서는 미사에 빠지면 신앙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그것이 반복되면 신학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규율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그렇게 규율을 잘 지켜도 방학만 되면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신학교는 매우 자율적입니다. 신학교 열쇠도 있어서 밖에서 잠자고 들어와도 특별히 공동체의 분위기만 해치지 않으면 뭐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듯 규율이 강한 공동체에서는 그 규율 때문에 성령을 받는 것에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규율을 잘 지키는 것으로 성령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 방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라 한다면 딸이 딱 몇 시까지 안 들어온다면 호통을 치는 그런 가정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지켜줘야 할 마땅한 것을 지키든지 말든지 할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언제까지 자녀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가 보장되었을 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시키지 않아도 모든 규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공자가 칠십을 일컫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즉 “아무리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라는 삶일 것입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보좌 때는 주임 신부에게 귀가 시간을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도 그런 규정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온다고 사제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제를 보호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혼자 살아야 할 때가 옵니다.
죄지을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공동체에서는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고 자신을 단련할 기회도 잃을 수 있습니다. 신학생으로서, 혹은 사제로서 훌륭하게 성장하려면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는 그 정체성을 잃지 않게 만드는 한도 내에서는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죄와 싸워보고 그래서 안 되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그리스도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시골에서 함께 자라며 결혼을 약속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둘은 자신들만의 아지트에 있는 나무를 하트 모양으로 파고 자신들 이름의 머리글자를 새겨 넣으며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둘은 성장하여 성당에서 결혼하고 근처 도시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임신하고 육아에 바쁘게 되자 남편은 오히려 비뚜로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아내에게 욕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할 때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바보처럼 참았습니다.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가 더 바보 같았고 직장 동료와 외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 외도하는 여자도 자신의 가정을 지키겠다고 그런 관계를 더는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남편은 사는 게 뭔지 생각하며 예전에 아내와 결혼 약속했던 곳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크게 자란 자신들만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무에 큰 못들이 박혀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져 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들의 나무에 못이 박혀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사실 당신이 외도하는 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나를 아이들 앞에서 무시하고 욕하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할 때, 그리고 외도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이 나무에 못을 박았어요. 이 나무는 우리의 기억이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남편은 몰래 나와 그 나무를 부여잡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아내에게 더는 못을 박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자녀들을 다 결혼시키고 인생의 황혼 녘에 부부는 또 그 나무를 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못이 다 빠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당신이 고마울 때마다 못을 하나씩 뺏더니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네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아직 멀었어. 못은 없어졌지만 못 자국들은 그대로 남아 있잖아.”
돌아올 수 없는 죄는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는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성장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지, 아예 그런 것을 차단해버리면 자신이 의인인 줄 알고 성장도 멈춰버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규칙으로 통제된 공동체가 아닌 자율적인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신랑과 신부와 같은 관계의 공동체입니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는 분명히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의처증, 의부증 걸린 사람처럼 상대를 믿지 못하여 통제하는 공동체는 아닙니다. 꼭 필요한 신의와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자유를 줄 수밖에 없는 성령으로 맺어진 그러한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살다 보면 그런 선을 넘는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엮였기에 서로 용서하며 성장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공동체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공동체의 힘은 잘잘못을 따지는 규율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는 성령에 있습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인 성령을 담는 새 가죽 부대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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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8-22 :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단식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8절)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절)라고 말씀하셨다.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고 하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19절) 이스라엘 성조들에게 구세주가 처음 약속된 때부터 성도들은 눈물과 비탄으로 그분을 기다렸다.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뒤로도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으로 사랑했던 분이 육으로도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단식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절) 헌 옷과 헌 가죽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놀라 화내며 선포된 말씀을 멀리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절)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준다. 둘 다 영성과 관련된 말이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한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내적인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된다.
또 새것(새 천 조각, 새 포도주)과 낡은 것(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혁신적이고도 위력적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에 맞갖은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기쁘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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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무엇인가 쇄신하려 할 때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꼭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새로워지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옛것을 버리기만 하는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옛것을 알아 새롭게 하려는 용기와 희망이 필요합니다. 또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두려움이 있다면 어쩌면 새롭게 살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낡고 초라하며, 고집스러운 생각과 편견 등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9년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강론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바르게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일을 망쳐 버리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모습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자기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삶, 곧 당신의 삶에 초대해 주셨고, 우리의 그 어떤 모습도 한결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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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옳은 것은 지키고, 옳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한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 말씀을 해석할 때, 겉으로 보이는 ‘새’ 라는 말과 ‘헌’이라는 말에만 매여서, 또는 이 두 말에 대해서만 집착하면서 예수님 말씀의 진짜 뜻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씀은, ‘헌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라는 뜻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지켜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1테살 5,21-22)
우리는 ‘새것’이든지 ‘헌것’이든지 간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해서 선한 것은 보존하고 악한 것은 버려야 합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새것인가?, 헌것인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가? 아닌가?”입니다.)
오래된 것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영원히’ 보존해야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마태 24,35)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낡은 율법주의는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계명들과 계명들에 들어 있는 근본정신은 지켜야 합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수천 년 전에 내려주신 것입니다. ‘낡은 것’이라고 함부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도 이천여 년 전의 것이지만, 신앙인들은 항상 “오늘 나에게 주시는 새로운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반대로, 새로운 것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면,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곧바로 버려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실 아테네인들과 그곳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은 모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사도 17,21) 그 당시의 아테네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고, 또 새로운 학문과 새로운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격분했습니다.(사도 17,16) 그 도시는 새로운 것을 즐겨 찾다가 온갖 이단 사상과 우상 숭배와 미신으로 가득 찬 도시가 된 것입니다. 요즘에도 사이비 종교들은 ‘새로운 이론’, ‘새로운 사상’이라는 탈을 쓰고 사람들에게 접근하는데, 그 ‘새롭다.’는 것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와 아담의 모습과 같습니다.
뒤의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관해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이 질문은, “안식일은 ‘좋은 일’(선한 일)을 하는 날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합당하냐?’라는 질문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라는 질문입니다. 이 말씀에는,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안식일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을 옳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정하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공동체와 함께 드리는 미사가 중단되고, 그래서 주일에도 주일미사 참례를 할 수 없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평화방송에서 중계하는 미사를, 또는 인터넷으로 중계하는 미사를 ‘구경’하기만 하고서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일까? 바이러스를 핑계대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안 했던, 즉 선행과 사랑 실천도 안 했던 유대인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새 부대를 구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헌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았다.”라고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체와 함께 하는 미사가 중단되어서 미사 참례를 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지만, 그런 경우라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은 많습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도생활과 선행 실천과 사랑 실천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신심과 의지의 문제입니다.>
새로운 본당에 부임해서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들을 바꾸려고 하면, ‘전통’이나 ‘관습’을 내세우면서 반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순히 오래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바꾸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해서 고치는 것은, 해야 할 일이고 옳은 일입니다. 옳은 일을 반대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잘못된 틀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그것을 고치고 바꿀 필요를 못 느낄 수도 있고, 변화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경우에 대해서,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인의 신앙생활 경우에, 살던 대로 살고, 하던 대로 하는 것이 편안할 텐데, 그 편안함에 안주하면 제자리에 정체된 신앙생활이 되어버리고, 그러다가 결국 후퇴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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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웠습니다. 눈을 치우지 못한 곳은 걷기가 불편했습니다. 신발장에서 등산화를 꺼내서 신었습니다. 미끄러운 길도 걷기가 수월했습니다. 눈이 쌓인 곳도 쉽게 걸었습니다. 등산화는 방수가 되었고, 미끄럽지 않았습니다. 신발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미사를 봉헌하거나, 강의를 할 때는 검은색 구두를 신습니다. 동네 산책을 할 때는 편한 운동화를 신습니다. 눈이 온 다음이나, 캠핑을 갈 때는 등산화를 신습니다. 물가에서는 물에 젖어도 상관없는 슬리퍼를 신습니다.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가지만 밭을 가는 데는 소보다 못합니다.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나무는 성문을 부수는 데는 용이하지만 구멍을 메우는 데는 작은 나무만 못합니다. 쓰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엉이는 캄캄한 밤에도 벌레를 볼 수 있지만 낮에는 산도 보지 못합니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두발로 걷는 사람은 3가지 능력이 생겼습니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도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도구는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었고, 사냥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도구를 이용하면서 문화와 예술이 생겼습니다. 뇌의 용량이 커졌습니다. 이성과 오성이 발전하면서 철학, 종교가 생겼습니다. 성대가 열리면서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는 지식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국가와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두발로 걸으면서 감수해야 할 어려움도 생겼습니다. 척추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허리의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성들은 자녀의 출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골반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소화 기능이 약해졌고, 치질이 생기기도 합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전은 신체적인 결함을 보완하고 극복하였습니다. 평균수명이 길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직, 제도, 율법, 계명도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희생, 헌신, 열정, 사랑, 나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갑을 억지로 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은 스스로 지갑을 열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제도와 조직에 안주하는 교회는 사람들이 떠날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와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낡은 제도와 조직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때로는 십자가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조롱과 멸시를 받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밀알이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씨앗은 쪼개져야 새 싹이 나듯이 우리는 늘 낡은 허물을 벗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신앙인들은 3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생활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즐거움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먼 훗날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아래 왔다가, 금세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 세상의 것들에 빠져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가난과 겸손이 주는 기쁨을 알고, 세상의 가치보다 훨씬 소중한 주님을 따르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주님의 깃발아래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기에 오늘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신 것은 고난을 겪으신 다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2021년 새해에는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겸손, 가난, 나눔, 봉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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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금’ 묻지 말아야 할 물음>
마르코 2,18-22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지금’ 묻지 말아야 할 물음>
난 ‘지금’
그런데
넌 왜 ‘지금’
난 ‘지금’ 기쁜데
넌 왜 ‘지금’ 슬프니
난 ‘지금’ 슬픈데
넌 왜 ‘지금’ 기쁘니
난 ‘지금’ 기도하는데
넌 왜 ‘지금’ 행동하니
난 ‘지금’ 행동하는데
넌 왜 ‘지금’ 기도하니
난 ‘지금’ 단식하는데
넌 왜 ‘지금’ 먹고 즐기니
난 ‘지금’ 먹고 즐기는데
넌 왜 ‘지금’ 단식하니
난 ‘지금’ 홀로 머무는데
넌 왜 ‘지금’ 함께 어울리니
난 ‘지금’ 함께 어울리는데
넌 왜 ‘지금’ 홀로 머무니
난 ‘지금’ 침묵하는데
넌 왜 ‘지금’ 외치니
난 ‘지금’ 외치는데
넌 왜 ‘지금’ 침묵하니
난 ‘지금’ 이런데
넌 왜 ‘지금’ 이렇지 않니
난 ‘지금’ 이렇게 하는데
넌 왜 ‘지금’ 이렇게 하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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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성경을 보면 단식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실행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일치와 만남을 위해 단식하였습니다.(탈출 24,18 참조)
바빌론 왕국의 재상 하만이 유다인들을 몰살하려고 시도하자 에스테르 왕비는 사흘 동안 단식하였습니다.(에스 4,16 참조)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로 가서 그 도시의 멸망을 선포하자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습니다.(요나 3,5 참조)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참된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마태 6,16-18 참조)
우리는 단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말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며 하느님 아버지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사랑을 실천하려고 단식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단식이라는 육체적 수련으로 탐욕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형제적 사랑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제의 훈련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영혼 안에 채우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하며 속죄와 나눔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단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와 함께 구원의 혼인 잔치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셨을 때 비로소 제자들은 비통해하며 단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단식은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며 회개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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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문화순 수녀님]
<어머니의 지혜>
알래스카의 여름 하늘은 흰구름 운동장이다. 높은 산이 많고, 산 넘어 구름 공장이 있는지 매일매일 뭉게구름이 끝없이 피어오른다. 구름이 하늘을 도화지 삼아 온갖 그림을 그리는데 멀리서 바라다보면 목화꽃이 무더기로 핀 것 같기도 하고, 배고픈 날은 솜사탕 같기도 하다.
구름을 보면서 나는 늘 아버지의 꽃상여를 생각한다. 이른 봄 아버지를 선산으로 모시던 날, 하얀 꽃상여를 따르던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도 상두꾼의 상엿소리며 방울소리가 듣기 좋아 귀를 기울였다. 이로써 아버지의 시대가 끝나고 오빠들과 새언니들이 집안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었다.
조금 있으면 우리 수녀원도 소임이동이 시작된다. 한동안 온 수녀원이 술렁거리고 식탁에 앉으면 어느 수녀님이 어디로 갈까, 서로 알아맞히기 내기도 하면서 기다린다.
소임이동이 되면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도 어렵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는다. 지금껏 서로 잘 맞추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새사람과 다시 맞추기 위해 신경 써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책임자가 바뀌면 더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남은 자의 아픔’이라고 말한다.
본당에서도 신부님·수녀님들이 바뀌면서 신자들이 겪는 혼란을 적잖이 보아왔다. 그래서 어느 땐 한꺼번에 다 바뀌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도 한다. 새로운 사람끼리 맞추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여름에 낡은 인조 옷을 꿰맬 때마다 헌 인조 조각을 찾지 못해 새 천 조각으로 기웠다가 번번이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이렇듯 새것은 새것끼리, 헌것은 헌것끼리 해야 무리없이 넘어간다.
그런데 사람이 바뀌고 새로운 시대가 왔는데도 자기 생각을 양보하지 않거나 고집하다 보면 어느새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라지게 된다.
수녀원에서 소임이동 철칙은 ‘새 소임지에서 6개월 동안은 전임자가 했던 것을 바꾸지 않기’이다. 최소한 6개월은 지켜보면서 새것과 헌것이 서로 맞춰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다림이 힘들고 어렵고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기다림이야말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고 신뢰하게 하고 가까워지게 하며 오래갈 수 있게 해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오빠들이 하자는 대로 조용히 따르셨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새언니의 뜻에 맞추도록 당부하셨다. 어머니는 때로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펴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생각도 못했을 일들이 일어나도 가만두셨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처럼 집안 대소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머니가 고집을 부리며 자식들의 말에 반대했다면 지금처럼 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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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오랜만에 후배 신부를 어느 모임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후배 신부의 모습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신부! 살이 많이 쪘네?”
워낙 왜소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신부인데, 살진 모습이 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여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 말에 기분이 안 좋았나 봅니다.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살 뺄 거예요.”
실수한 것 같아서, 얼른 “아니야! 건강해 보이고 보기 좋아서 이렇게 말한 거야.”라고 말했지만, 그 신부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살쪘다는 것을 하나의 욕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게으르고 자기 조절을 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의 생각이 이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떻게든 상대의 힘을 빼는 말이 아닌, 상대에게 힘이 되어 주는 말을 하는데 더 큰 노력을 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사람의 말도 이런데, 주님의 말씀은 어떨까요? 주님의 말씀 역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와 달리 단식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모습만 보여 주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이런 모습만 기억하면서 먹고 마시는 데에만 중점을 둬야 할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된 단식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함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먹는 것을 삼가는 것이 단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상의 뜻을 담고 있는 단식을 우리가 받아들였으면 하셨습니다. 즉, 음식을 삼가는 것처럼 악습을 멀리하는 것이 참된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악습을 멀리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기존의 단식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먹고 마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참된 단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은 새 천 조각,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옛 옷과 옛 부대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이 새 옷, 새 부대가 되어서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단식의 의미였습니다.
먹는 것을 삼가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악습을 멀리하고 주님의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것이 진짜 단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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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바라보십시오>
얼마 전에 사회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세상의 변화를 실감하게 됩니다.
가장 큰 변화는 이 친구들이 대학 다닐 때, 열심히 데모하면서 소위 운동권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영원히 진보적인 태도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지요.
이런 모습은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위치가 높아지거나 소유하는 것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학창 시절에 그렇게 개방적으로 살았으면서도, 자신의 자녀를 향해서 보수적인 모습을 멈추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편에 서고 있느냐입니다. 진리가 없는 방향성은 나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름을 틀렸다고 나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살펴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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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새 포도주의 신선함>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태의연한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갇혀 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만큼 새로워집니다.
단식을 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 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 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굶는 것을 단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에로, 그리고 이웃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구체적 이웃사랑 실천이 없는 단식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단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단식, 알맹이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몇 해 전 로마를 비롯한 남유럽에 혹한이 닥쳤을 때 로마의 성 갈리스도 성당을 노숙자 숙소를 사용하였습니다. 약 30여명의 노숙자들이 성당에서 따뜻하게 잠을 청할 수 있게 조치하고 자선단체가 제공하는 음식도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청 소유의 승용차와 승합차를 이용하여 노숙자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게 배려하라고 지시하셨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성당은 단순히 기도하는 장소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이 살아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율법의 엄정함과 철두철미한 준수가 오래된 포도주라면 그것을 넘어 사랑이 숨 쉬게 하는 것이 새 포도주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새 포도주의 신선함을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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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지금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삽시다>
-기쁨, 기도, 감사-
이런저런 풍성한 예화로 오늘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루하루 아껴 쓰며 지낸 하루들인데 벌써 1월18일!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흡사 하루하루 흘러가는 세월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통찰은 시공을 초월하여 동서고금 예나 이제나 변함없어 보입니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나오는 옛 중국 현인들의 짧막한 두 대조적인 시詩가 현재의 중요성을 실감케 합니다.
“오늘 즐기지 못하면/다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백년도 못사는 인생이/천년 근심 늘 안고 있어라.”
“젊은 시절은 거듭 오지 않으며/하루에 새벽이 두 번 있진 않네
때를 놓치지 말고 힘쓸진저/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네.”
대조적인 관점에 공감이 갑니다. 모두 오늘 지금 여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입니다. 엊그제 89세 노형제님의 면담고백성사차 방문에 감동했습니다.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성사 오셨는데 어제 추운 새벽에는 기도하며 산책하는 모습도 목격했습니다. 하루를 절실하게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노형제께서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큰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엉겁결에 큰 절로 맞절을 드렸습니다. 비움과 겸손과 감사가 가득 담긴 절이었고 고백성사후 처방전 말씀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써드렸습니다. 우울하고 어둡고 힘든 세월일수록 처방전 말씀은 이 한 말씀뿐입니다. 윗 한시에 대한 그리스도교신자들의 답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전5,16-18)
이 말씀에 덧붙여 반드시 찍어 드리는 스탬프 두 말마디중-“웃어요”, “괜찮아 힘내”-둘 중 하나입니다. 우울해 하던 분들이 성구를 읽고 이 말마디를 읽으면서 정말 통쾌, 유쾌, 상쾌하게 활짝 웃는 모습을 자주 볼 때마다 저절로 웃게 됩니다. 윗 중국 한시와 비교하여 얼마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지요.
이번 주 1월17일자 가톨릭 신문 21면 ‘사람과 사람’ 기사도 저에겐 신선한 충격에 교훈이었습니다 제 대구가대 1회 동기 졸업생 한분(김상진 신부)과 더불어 5명, 합하여 6분의 백발의 은퇴 사제들 사진과 더불어 반대편에는 흑발의 여섯분 새사제들 사진이 참 대조적이었습니다. 한쪽은 일몰의 퇴장 모습을, 반대쪽은 일출의 입장 모습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하단에는 제 동기중 최초로 지병으로 선종한 사제(이승용 신부)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한 순간에 흐른 30-40년 세월같습니다.
새삼 오늘 지금 여기 현재 삶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참으로 겸허하게 하는 사진들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죽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살아야 겠다는 자각을 새로이 하게 하는 사진들이었습니다.
새벽 강론 쓰기전 우선 확인하는 것은 인터넷 뉴스요 제1번이 교황님 근황입니다. 2000년 역사상 이런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지닌 참목자 교황님은 처음일 것이니 가톨릭교회의 홍복洪福이자 천복天福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사랑의 전사, 가톨릭교회의 자랑! 날마다 주옥같은 생명의 말씀을 선사하시는 교황님이십니다.
어제 삼종시 복음 강론도 핵심을 잡은 감동적 내용이었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일치주간’메시지도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은 사랑을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사랑이며, 사랑만으로 응답되어야 한다.”는 강론의 요지였고, 일치주간을 맞이하여서는 “예수님의 소망인 모두가 하나되는 것 즉 일치가 실현되도록 기도하자. 일치는 언제나 갈등보다 고귀하다(Unity is always higher than conflict).
어제 오후 뜻밖의 메시지도 충격이었습니다. 30년 동안 한결같은 수도원 예수님께 사랑을 쏟았던 50대 초반 자매의 남편이 50후반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신부님, 하늘나라 갔어요! 기도해 주세요.” 하늘나라 갔다는 신심의 표현이 그대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거의 1년이상 온통 나라를 혼란케한 유명인사에 대한 기사도 깊은 울림을 주는 교훈이었습니다. “시대흐름을 거스른 정치인들의 운명, 유통기간은 끝나다”라는 요지의 기사중, ‘유통기간’이란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인생 누구나 유통기간이, 심지어는 사랑도 유통기간이 있다 합니다. 유명 바둑기사들만 봐도 전성기의 유통기간이 끝나면 서서히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향주삼덕 믿음 희망 사랑에는, 또 주님의 말씀에는 유통기간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도 유통기간이 없습니다. 고전古典이나 고전같은 성인이나 위인들 역시 유통기간도 없고 유행을 타지 않습니다. 반면 신문은 유통기간 하루입니다. 인스탄트 시대 날로 유통기간도 짧아집니다. 그러나 위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통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 말씀과 제1독서의 말씀도 유통기간이 없고 영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왜 예수님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는 참 까칠한 꼰대같은 질문에 예수님은 현재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며 이들의 사고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삶의 핵심은 단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단식의 거부가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하면 될 것이지, 왜 주님이신 당신과 함께 혼인잔치의 기쁨을 누려야 할 축제인생에 굳이 고해인생을 살려 하느냐는 이들의 무지와 완고함을 꾸짖는 말입니다.
그대로 예수님 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정말 분별과 식별의 잣대는 단식이나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화신이신 예수님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하실까?”에 답은 자명하게 나옵니다. 이런 예수님의 다음 복음 요지 말씀입니다.
“아무도 새 천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깊지 않는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러니 새 헝겊은 새 헝겊에 대고 기워야 하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삶의 지혜와 통찰이 가득 담긴, 그러나 너무 평범한 요지의 말씀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변하는 새포도주의 현실에 맞게 새 부대의 사고와 시야를 지니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꼰대 소리 듣지 않고 유통기간없는 늘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일 것입니다. 하여 평생 배움의 공부가 필수입니다.
예수님은 산전수전 다 겪은 분이기에 누구보다 우리의 처지를 잘 아십니다. 히브리서가 감동깊게 묘사하는 그대로입니다. 참 역설적으로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너무나 신적인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하셨습니다.”
바로 대사제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심오한 묘사입니다. 바로 이런 대사제 예수님께서 당신 사제를 통해 친히 이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 부대의 우리 마음 안에 새 포도주의 성령을, 사랑을 넘치도록 담아 주시어 우리 모두 당신의 더없이 깊은 사고와 당신의 드넓은 시야를 지니고 오늘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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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가짐에 대해 일러 주십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18)
단식은 육신을 비워 맑은 정신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수행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앞에서 뉘우침과 통회, 간청의 표현으로 옷을 찢거나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쓰거나 단식을 했습니다. 단식은 단순히 건강을 위해 음식 섭취를 중단하는 식이요법을 넘어서, 자신의 기본 욕망을 제어하고 인내하면서 하느님께 바치는 일종의 보속 행위가 되기도 했지요.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예수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결합하는 혼인 잔치에서 신랑을 곁에 두고 단식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혼인 잔치는 기쁨과 축복의 장이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대사제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든 대사제는 ...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히브 5,1)
아론의 후예인 대사제는 자신이 지은 죄와 백성이 지은 죄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 축복을 얻기 위해 예식을 거행합니다. 율법이 정한 대로 예물과 제물을 바쳐 정결하고 거룩한 백성의 모습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인간 대사제의 행위는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해 하느님께서 느끼실 분노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
그와는 달리, 지파의 혈통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은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기도는 "경외심"에서 출발합니다.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뜻을 기꺼이 당신 것으로 하는 "순종"입니다.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 대사제들이 드리는 예물과 제물은, 많은 경우 백성들로 인해 하느님이 몹시 화가 나셨을 테고 우리가 그걸 풀어드려야 한다는, 징벌과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이 경우 삶에서 감사꺼리를 떠올리며 찬미와 기쁨의 제사를 바치기보다 죄와 어둠에 집착해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하는 부작용이 크지요. 또 자칫 진정으로 통회하는 마음 없이 물질과 예식으로 때우는 요식행위로 전락할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이럴 때 마음을 보시는 주님은 예언자를 통해 '이런 제물은 역겹다.'고까지 하셨지요.(이사 1,13 참조)
예수님의 제물은 당신 자신이셨고 제사는 사랑과 순종의 의탁이었지요. 벌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신뢰와 사랑에서 우러나는 제사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단식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오랜 역사 동안 이스라엘이 충실히 지켜온 단식의 가치를 폄훼하시지 않으시지만, 단식이 어떤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는지 새롭게 보자고 초대하시는 겁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 중 하나인 단식이 영혼이 빠진 형식적 율법 준수나, 엄벌에 처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부정적 두려움에서 나왔다면, 이제는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 그분 현존의 기쁨을 영육으로 실컷 누리다가, 그분을 빼앗기는 날, 사랑을 잃은 애끓는 비통과 슬픔의 표현으로 바치면 된다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혼인잔치 안의 기쁨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의 뿌리에서 생성해 성장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새로움은 이전의 것을 부정하는 무엇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의 회복이고 우리 의식의 전환일 겁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죄의식이나 두려움보다 감사와 찬미에서 흘러나오길 그분은 원하십니다.
이미 용서 받은 죄에 집착하다보면 오히려 주님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내가 괜찮다는데!" 하고 등을 두드리시니, 어깨를 펴고 주님께 나아갑시다. 우리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사랑에서 솟아나는 예물과 제물이 되길 축원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신랑과 함께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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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너 자신에게 돌아가라!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 팬데믹 사태에서 일상생활의 단조로움에 우울증과 신경증을 앓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미사나 예배나 전례나 기도회 등에 참여하지 못하여 신앙생활이 위기 상황이지만 일상의 삶이 오히려 내면의 심연에 내려가 영성적인 삶이 되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성숙한 신앙이 될 수 있는 역전의 현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너 자신에게 돌아가라! 인간의 내면 안에 진리가 살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참된 종교」, ⅩⅩⅩⅨ.72)라고 적는다. 또 “당신을 찬미하는 것이 기쁨이 되도록 당신 친히 우리를 깨우치셨습니다. 우리가 당신께 향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 우리 마음은 고요함을 알지 못합니다.”(「고백록」, 1.1.3)라고 합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은 대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외적인 것에, 즉 친구나, 유흥이나, 자기 성취를 위해 밖의 것들로 채우려 하면 끝내는 지치고 좌절과 배신을 느끼고 더 외로워져서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러나 “너 자신에게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내면의 고독의 장으로 들어가 참 자아를 만나야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버드 철학자들의 인생수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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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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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이는 단식이 무엇을 위한 단식이고, 누구를 위한 단식인가를 밝혀줍니다.
곧 새로운 시대의 단식은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구약과 신약의 단식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는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단식입니다.
그 말은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이제부터 단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삶 안에 우리의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채우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단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낡은 옷에다가 새 천 조각으로 깁을 수 없듯이,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새 포도주인 당신을 담을 새 부대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제 마음이 당신의 새 부대이오니, 제 마음에 당신 사랑의 술을 부으십시오!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 하리이다. 제 마음 온통 당신 사랑에 젖어 당신 향기 품으오리이다.
이제는 제 삶이 당신의 사랑을 건네주는 포도주 잔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제 삶이 당신의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이제 제 삶이 당신의 사랑이 되어 제 형제들에게 퍼내 주리이다.
제 삶이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담아 건네 주리이다. 하여, 이 세상이 새 포도주가 담긴 새 부대가 되게 하소서!
이 나라에 사랑과 진리와 생명이 피어오르고,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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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게 하소서!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곡곡,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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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
지금 마산교구는 신부님들의 인사이동으로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많은 신부님들께서 기존 소임지를 떠나 새로운 소임지로의 이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번 인사 발표에 따라, 영산공소를 떠나 새로운 소임지인 고성 당항포 쪽에 있는 배둔공소로 이동하게 됩니다. 어제 영산에서의 마지막 주일미사를 드리고, 2년 사이에 부쩍 늘어난 이삿짐을 미리 옮겼습니다.
예수님 공생활 때, 하느님의 큰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머물러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온 것이다."(마르1,38)
그래서 사제들은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지 않고, 때가 되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 같습니다.
1.19(화) 저녁에 주교님께서 오셔서 영산본당 설립미사를 집전해 주십니다. 이 미사로 영산공소가 영산본당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납니다. 본당 설립미사를 마치고, 저는 목요일(1.21)에 새로운 소임지로 이동합니다.
오늘 복음은 신랑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의 삶'과 오늘 내게 오시는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 포도주인 예수님, 새 포도주인 배둔공소를 마음에 품기 위해서, 그동안의 것들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고 묵상했고, 그래야 배둔공소에 계신 예수님, 새로운 땅 배둔공소에 있는 형제자매님들과 새로운 친교를 맺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될 수 있다고 묵상했습니다.
본당으로 승격되어 새로운 출발을 하는 영산본당 공동체를 위해 주일미사 때 제가 '특송'을 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소수의 인원만 참석한 주일미사여서 좀 아쉽기는 했지만, 가톨릭성가 179번 '주의 사랑 전하리'를 불렀습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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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5558eXj06f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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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 22)
새 포도주의
시작이다.
새 포도주는
새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것은 우리
마음이다.
마음을
만나는 일이다.
마음이
시작점이며
마음이
모든 것의
기본이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마음의
일이 가장
으뜸되는 일이다.
우리
자신이야말로
새 부대가 필요한
마음의
사람들이다.
단식은
생명을
일깨워주고
마음을
일깨워준다.
단식은
주님과의
진심어린
마음의
소통이다.
마음의 소통은
맞아들임의
시작이다.
단식의 길은
주님을
맞아들이는
마음의 길이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이어져있다.
우리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있고
새 포도주이신
그리스도를
원한다.
주님을 통해
우리 마음이
비로소
제자리를
잡는다.
자아를 벗어나
새롭게 변화되고
성장하는 삶이
새 부대의 삶이다.
낡은 악습을
끊어버리듯
새롭게
변화되는 삶속에
새로운 기쁨이
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삶의 새로운
기쁨으로
초대하신다.
기쁨이 없는
삶은 변화를
꺼리는 삶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를
만든다.
그래서
오늘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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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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