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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58,9ㄷ-1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12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5,27ㄴ-3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로마 3,9.23 참조)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되었습니다.”(로마 3,24)
그러니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의인인 체하는 죄인>
불이 났을 때 소방대원은 목숨을 걸고 불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것이 그들의 소명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위험을 감당하더라도 인명을 구하고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합니다.
보통 사람은 위험을 피해 달아나지만, 그들은 위험 속으로 달려갑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신앙이라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 하시며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셨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도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계산을 하느라 온전히 따르지 못합니다.
불을 향해 달려가는 소방대원처럼 예수님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십니다.”
(교부 사르마타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해야 하겠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고해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죄의 용서로 초대받았으니 기뻐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복음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명 한명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 표현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저는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 대해서 묵상을 좀 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시선 과연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당시 유다인들의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 마디로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저런 매국노, 로마 앞잡이, 인간 말종, 처죽일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급 간부 세리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지만,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도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맨날 하는 일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족들을 후려쳐서 세금을 뜯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맨날 동족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다보니, 삶의 피폐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꿰뚫어보시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바라보시고 그의 갈등하는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다른 사람과는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그 시선은, 측은지심의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 부드러운 시선, 안타까운 시선, 짠한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선을 레위에게 보내면서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때로 대화는 말로만이 아니라 시선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시선으로 레위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애야, 그동안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느냐?
내가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모와 비참을 다 보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란다.
지난 세월은 이제 뒤로 하고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자.”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는 평생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그런 따뜻한 시선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레위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는 회심과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내렸을 것입니다.
이어서 건네시는 예수님의 말씀, “나를 따라라!”
레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섭니다.
목숨과도 같은 장부도, 수금한 돈도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그 따뜻한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이 철옹성 같았던 레위의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하고 녹아내리게 한 것입니다.
그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날 저녁 레위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잔치였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가 동료 세리들과 작별하는 송별식도 겸했습니다.
수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는 요즘으로 치면 조폭 두목 결혼식 피로연, 아니면 조폭 두목 어머니 칠순잔치 자리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덩치가 산만한 조직원들,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총집합한 것입니다.
호시탐탐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꼬투리를 잡아 고발하려고 혈안이 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한건 올렸다며,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한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여러분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틈만 나면 욕을 바가지로 먹던 세리와 죄인들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시선으로 오늘 우리들 한명 한명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께서는 우리는 예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제 내 나이가 70이고, 80인데, 예뻐할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왔는데, 이런 나를 예수님께서 예뻐하실 리가 없어! 라고 절대 말하시면 안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늙었다, 추하다, 하며 외면하지만, 하느님 눈에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신다,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애지중지 하신다는 마음으로 올해 고백소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그들’이 아니라 ‘나’>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마태 9,9).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사도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라는 말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 당신들도 죄인들이다.” 라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죄인’이라고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그 죄인들의 죄에 오염되는 일이고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의사가 치료하기 위해서 ‘병든 이들’을 만나는 것처럼, 당신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들’을 만나고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왔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만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죄인들과 의인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죄인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고, “너희도 죄인들이다. 너희도 ‘병든 이’들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세주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만일에 누구든지 “나는 의인이다. 그러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라고 자처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 없다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로마 3,9ㄹ-11)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로마 3,23-24)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로마 5,8-9)
따라서 ‘죄인들’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 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도 아니고, ‘나’입니다.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나’를 ‘그들’과 구분해서 분리하는 것이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리사이들과 같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의인인 나’와 ‘죄인인 그들’을 구분하고 떼어놓는 것, 바로 그것이 바리사이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분입니다.
‘그들’이 아니라 ‘내가’ 죄인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건강한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병든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렇지만 회개하려고 노력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셈이 되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건강한 이들과 병든 이들로 바꿔서 표현하면, ‘그들’이 아니라 ‘내가’ 바로 ‘병든 이’입니다.
내가 이웃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나는 건강하고 그 이웃은 병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병자이기 때문이고, 함께 치유되고 함께 건강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지, 사제 자신은 건강하고 고해성사를 보는 이는 병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제 자신도 ‘병든 이’이고, ‘죄인’입니다.
물론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용서한단 말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고해성사의 용서는 사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사제는 그 은총을 전달해 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주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사랑의 성사’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들이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남들보다 조금 먼저 회개한 죄인들이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그것이 복음 선포이고 선교활동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따라라” - 더불어(together) 주님을 따름의 여정 - “늘 새로운 시작”>
“주님,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에는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시편 92,3)
어제 수도형제들을 위한 금요강론중 마지막 한 구절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정주생활의 은총을 요약한 말마디입니다.
“자신과 함께 편안히 머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했다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
(To be at home with oneself is indispensable for finding one’s identity)
제자리에서 제대로 참나의 삶을 살 때 평화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이 또한 회개의 열매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자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도 읽어보는 2월17일자 다산 어록과 논어의 공자 말씀이 새로운 감동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참 구도자의 향기를 느낍니다.
“학문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늘 일상에서 자신을 정비한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며 나를 찾았다.’”
외롭고 고독한 중에도 한결같이 정진하는,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다산의 준열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전해져 옵니다.
“군자의 도에서 어느 것을 먼저 전하거나 미뤄두겠는가?
처음이 있고 마침이 있는 것은 오직 성인뿐이다.”
늘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하루 영원을 살았던 참된 구도자 공자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어제 받은 카톡 메시지 두 편도 소개합니다.
곳곳에서 주님을 찾는 ‘주님의 향기’같은 분들을 만나는 느낌입니다.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드립니다.
아침엔 강론 말씀으로 배부르고 잠자리에서선 ‘둥근마음 둥근삶’으로 배불러 너무 행복해서 가슴뛰는 이런 단식은 안해도 되겠죠.
아부지 감사드립니다.
모자라기 짝이 없는 이 죄인을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찬미와 영광을 영원히 홀로 받으소서.
아멘.”
아버지란 표현보다 아부지란 표현이 더 정답게 느껴집니다.
온갖 어려움중에도 한결같이 책임을 다하며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어느 자매의 메시지도 잔잔한 감동입니다.
“수도자의 삶은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인 것 같아요.
잠깐의 나태함도 허용안되는 부단한 노력과 공부! 저희들을 한결같이 이끌어 주시고 일깨워주시는 신부님, 사랑합니다!”
저에겐 제 강론을 나누는 모든 분들이 더불어 주님을 찾는 구도자이자 도반들입니다.
이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또 저에게 날마다 감동을 선사하는 살아 있는 성인이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늘 봐도 미소띤 한결같은 표정에 날마다 끊임없이 많은 분들을 만나며 주시는 메시지도 살아 있는 말씀들입니다.
우리 나이 89세의 고령에도 어쩌면 한결같은 열정의 삶인지 참 경이(驚異)롭고 저에게는 살아있는 멘토가 됩니다.
어제는 교황청을 찾은 신학교 사제들을 향한 말씀중 일부가 저에겐 참신했습니다.
“교회는 진보중에 있는 하나의 활동이다.
성령의 새로움에 늘 열려있는, 자신과 자기 자신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극복해내며, 끊임없는 움직임중에 머무르는 교회는 무엇보다 열려있는 구성체이다.”
이런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닮은 우리 깨어 있는 신자들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사야서 제1독서 말씀도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살아 있는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복음의 세리 레위는 참으로 주님을 찾는 갈망의 구도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이런 레위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뿐 아니라 오늘 우리 하나하나를 위한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가 아닌 “나를 따라라!” 명하십니다.
날마다 새롭게 레위와 함께, 도반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에 오르는 우리들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항구하고 한결같이 더불어 따름의 여정을 살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혼자 외롭게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레위를 제자공동체, 식사공동체에 합류시키셨듯이 우리를 교회공동체에 합류시키셨습니다.
외로운 혼자가 아니라 도반들과의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레위가, 우리가 제자공동체에, 교회공동체에 불림받지 않았다면 레위의 삶은, 우리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역시 부질없는 상상입니다.
우연이 아닌 주님의 섭리로 주님의 부르심을 통해 여기까지 주님 친히 인도해준 우리 하나하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통해 ‘치유받은 병자’, ‘회개한 죄인’으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치료받아야 하는 환자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십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죄라기보다는 병임을 깨닫게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모두가 죄인이요 병자들 같습니다.
이런 자각이 참된 겸손에로 이끌고 구원의 주님을 더욱 갈망하게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이자 치유요 이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따름의 여정과 회개의 여정, 치유의 여정은 동시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무지의 죄, 무지의 악도 깊이 들여다보면 무지의 병임을 깨닫습니다.
아, 무지의 병을 치유해 주실 유일한 분은 천하의 명의(名醫)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평생교육, 평생힐링에, 불치병 같은 무지의 병의 치유에 주님의 매일미사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은 얼마나 신바람 나는지요!
사랑의 실천으로 입증되는 회개의 진정성입니다.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회개한 영혼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놀랍습니다.
어느 하나 생략하기가 아까워 전반부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어제의 참된 단식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새삼 참된 회개가 없어 병들도 많은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치유와 겸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주님의 빛입니다.
따름의 여정과 함께 무지의 어둠도 서서히 걷혀갑니다.
날마다 주님의 샘터이자 쉼터이자 배움터인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따름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
(시편 92,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죄인이신가요? 축하드립니다.>
어제는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시비를 걸더니,
오늘은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30) 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시비를 거네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 일행의 행실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죄인을 죄인으로 대하지 않고 친구처럼 지낸다는 거죠.
나름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하는 그들은 사실 '구분'의 명수입니다.
안식일과 일하는 날을 구분하고,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고, 율법을 지키는 이와 그렇지 않는 이를 구분합니다.
장소를 구분하고, 정(淨)한 것과 부정(不淨)한 것을 가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아는 율법 지식과 권한으로 이런 '구분'에 타인도 따르길 바랍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자신들이 옳고, 그들 눈에 모든 세상사는 흑과 백이 명료하기 때문입니다.
구분은 분별의 지혜로 발전할 수 있어 그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문제는 '구분'에 그치지 않고, 한 쪽을 취하면 다른 한 쪽은 버리거나 폄하하거나 소외시킨다는 점입니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특권의식과 패배주의, 대립, 단절, 괴리, 불일치를 야기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구분하지 않고 모두 포용하는 분이십니다.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셨다면 애초에 죄인인 인간들 틈으로 들어오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레위 같은 세리를 제자로 부르실 리 없으셨겠죠.
예수님께서는 흑과 백 사이에 셀 수 없이 무수한 층위가 존재함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모두를 다 아우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루카 5,29)
꽤나 성대한 잔치였나 봅니다.
세리의 집이니 동료 세리들은 당연히 왔을 테고, 평소 같으면 그들과 한 자리에 있는 것도 꺼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까지 모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잔치 손님들을 소개할 때 "죄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들"이라고만 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루카 5,31)
건강하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제시된 어느 기준 이상일 때 쓰는 말일 뿐, 결코 신체 모든 부분의 완전함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건강 상태와 병든 상태 사이에 무수한 층위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또 의인과 죄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의인으로 괜찮게 보아주는 타인의 평가는 잠시 제쳐두고 스스로를 깊이 성찰할 때, 한 치의 죄악이나 부정 없이 완전히 의롭다고 자부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반대로 어느 한 곳도 선한 구석 없이 완전히 극악무도한 죄인이 있을까요?
의인과 죄인 사이에도 무수한 층위가 존재합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어디는 건강하고 어디는 약할 수 있습니다.
또 얼마간 의인이고 얼마간 죄인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병든 이, 죄인"을 정면으로 거론하셨지만, 단지 세리와 죄인들만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 우리 모두가 병든 이고 죄인이라 당신이 필요한 존재들이라고 선언하신 것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스스로 병들었음을 의식할 때라야 의사를 찾고, 스스로 죄인임을 의식할 이라야 구원자를 찾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율법에 의해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던 이들은 공동체의 가르침과 불화하는 자신의 실존과 한계를 절감하면서 그 괴리 사이에 드리워진 외줄을 아슬아슬 타고 살아온 이들입니다.
스스로 누구보다 죄인임을 자처하며 살아온 이들이고요.
그러니 누가 건강을 되찾겠습니까?
겉 보기에 멀쩡해서 속으로 병이 난 줄도 모르고 건강에 자신있어하며 의사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약하고 모자라서 병든 몸을 추스르며 의사를 찾는 사람일까요.
또 누가 구원되겠습니까?
양심과 영혼의 의로움보다 율법에 기인한 의로움으로 스스로를 의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일까요, 아니면 부서지고 낮추인 영, 겸손한 마음으로 또 다시 넘어질 게 뻔한 길을 돌이키고 또 돌이켜 염치불구하고 하느님 발치로 모여드는 이들일까요.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율법의 정신을 사는 진정한 태도를 알려 주십니다.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이사 58,10).
율법에 의해 소위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메고 있는 멍에를 더 부끄럽게 만들지 말고, 죄인이라 함부로 손가락질 하지 말고, 험담도 비난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지하고 살기 바빠서 율법의 어느 조항을 어겼는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자상히 하느님의 가르침을 나눠 주고, 율법의 온전한 준수가 불가능한 삶 속에서도 그들이 죄책감에 짓눌려 찌부러지지 않도록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그들의 병이 나의 병이고 그들의 약함이 나의 약함임을 깨달을 때 진정 율법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과 가르침은 아무리 다른 말들로 표현되어도 '더 사랑하라'는 촉구입니다.
좀 더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한 이에게 더 큰 사랑의 보상이 약속됩니다.
굶주리고 고생하는 이들의 병과 약함을 돌봄으로 "내 어둠이 빛이 되고"(이사 58,10), "내 넋이 흡족해지고 내 뼈마디가 튼튼하게 될 것입니다"(이사 58,11).
그러니 진정 구원받을 이는 내가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레위뿐만 아니라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에게도 이 초대를 하신 겁니다.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는 안타깝지만 각자의 몫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죄인이신가요?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이 벗님을 부르러 오셨다네요.
벗님은 영육간 건강에 문제가 있나요?
축하드립니다.
최고의 명의이신 예수님께서 고쳐주신다네요.
오늘은 의인이라 자만하지 말고, 건강하다 자만하지 맙시다.
세리처럼 죄많은 인간임을 고백하고, 영육이 허한 사람임을 고백합시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를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황당과 당황’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황당은 그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007년 여름에 저는 이탈리아 로마의 레오나르드다빈치 공항에서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 수속을 하였습니다.
창구의 직원은 저의 여권을 한참 보더니 벨을 눌렀습니다.
곧 보안요원이 왔고, 저는 5시간 넘게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인종차별에 가까운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비행기 시간을 변경해야 했고, 토론토에서 동창신부님과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그것도 취소되었습니다.
토론토 도착 시간이 밤 12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당시 수배중인 사람과 저의 인상착의가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무사히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더 오래 전의 일도 있습니다.
1993년의 기억입니다.
동창 모임이 진부령 알프스 스키장에서 있었습니다.
다들 모였는데 한 친구가 밤이 늦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을 때입니다.
친구는 진부령과 진부를 혼돈했다고 합니다.
버스를 타고 오대산에 있는 진부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결국 다음 날, 친구를 만나야 했습니다.
그래도 하루 늦었지만 별 탈 없이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황당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당황은 그 원인이 본인에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019년 7월입니다.
저는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렸는데 그만 지갑을 놓고 내렸습니다.
지갑에는 운전면허증, 주민등록증, 신용카드, 현금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권은 따로 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당황했습니다.
한국에 전화해서 신용카드를 정지시켰고, 운전면허증과 주민등록증은 새로 만들었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는 남은 일정 얻어먹으면서 다녔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있었기에 다행이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웃을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고, 드디어 성지순례를 시작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2003년의 기억입니다.
자매님은 미국비자가 있는 구여권을 가져왔습니다.
구여권은 유효기간이 만료된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새로 발급받는 여권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집이 수원이었던 자매님은 부득이하게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와야 했습니다.
하루 늦었지만 그래도 순례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나의 부주의와 나의 착각으로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곤 합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작이 ‘황당’했을 것 같습니다.
나름 부푼 꿈을 가지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화려한 궁궐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축복하는 집에서 태어나기를 기대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동물이 머무는 구유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그 시작부터 ‘난민’이 되었습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난민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신고식치고는 무척이나 황당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모님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입니다.”
확실히 세상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미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황하셨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는 표징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표징은 그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외면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십자가 없는 부활을 얻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들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일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미국 댈러스 한인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재작년에 코 수술을 받았습니다.
콧속에 혹이 나서 냄새를 맡지 못했고 또 숨을 쉬기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수술 후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코안을 꽉 막고 있는 솜으로 인해 답답해서 어떻게 할지 모를 정도가 되었고, 순간순간 찾아오는 통증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선택은 계속 누워만 있었습니다.
자다 깨다 만 반복하며 하루 종일 누워 있었습니다.
저를 아는 분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저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꾸물거리는 것을 제일 싫어하고,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행동하는 것이 저였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해서 있는 이틀 동안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인 ‘나이팅게일’은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를 ‘걷는 것’이라고 구분합니다.
환자는 걷지 못하고, 건강한 사람은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두 다리를 걷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중단한 사람도 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또 돈이 없다면서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고 있다면 지금 아픈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도 경험해 보니 아프면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픔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평소에 운동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지요.
그렇다면 정신의 건강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정적 감정을 몰아내고 긍정과 희망의 감정이 가득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의사가 필요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정신의 건강을 위해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이 세상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이 만연하면서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걷지 못하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 포기와 좌절을 반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의 메시지가 더 큰 힘이 됩니다.
걷지 못하고 자리에 멈춘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분명히 밝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주님의 메시지는 모두 희망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올바로 따르는 이는 이 희망 안에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절망 안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걷지 못할 때, 얼른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제대로 걸을 수 있도록 하는 한 줄기 ‘빛’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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