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10대 여래 칭호가 있습니다. 부처님을 10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칭호를 합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응공(應供). 아라한을 번역한 단어라고도 합니다만. 어쨋든 ‘응공’이라고 하는 단어도 스님들과 25년 넘게 살다보니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 대중으로부터 공양을 마땅히 받을만한 존재다. 여래이시다. 스님들께는 어떤 면에서 보면 가장 지엄한 부처님의 칭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나 우리들처럼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급여를 받기에 마땅한 일을 하고 있는가? 여래는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선원장 스님으로 모시고 있는 큰 스님. 또 주지스님 혜담스님 두분이 계신데, 워낙 오랜 인연이시고 두분 다 여여하시고, 응공의 자격을 갖고 계신 분인데 제가 어울리는 자리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스님들이 부르셨으니 왔고 법회 맞는 말씀은 드리지 못하지만 말씀드릴까 합니다. 먼저 죄송하다는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역사학을 전공했고, 그 중에서 불교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전생의 복덕인지 모르나 비교적 일찍 스님들 학교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너무 이른 30대 초반에 자리를 잡아, 인문학이란 것이 3,40대를 치열하게 공부하고 쌓아 가야 하는데, 학자로서 충족하지는 못하지만 스님들과 일찍 만난 25년 세월이 있어 제 삶으로 보면 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또 제가 전공하고 있는 분야가 불교사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스님들과 함께 살아오고 있다는 것이 저에게 여러 측면에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덕에 학교에서는 스님들한테 불교사 관련하여 강의합니다. 지금도 그때 1991년 2학기에 이 무렵인거 같은데 스님들께 첫 강의를 하러 갔는데 많이 긴장되고 당시 나이는 어렸고, 날이 흐렸는데 강의실 형광등에 반짝이던 스님들 머리가 기억이 납니다. 3학점짜리 시간이었는데 무슨 얘기를 하다 내려왔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그래서 92년도에 2학년이시던 스님들이 지금도 저를 만나면 그때 긴장하던 제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미황사 금강스님도 그 분들 중 한분이셨습니다. 그 시간을 거쳐 오면서 학문으로 하는 불교사와 또 스님들이나 저 같은 개인불자나 학문 대상이 아닌 신행.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불교사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불교사 공부를 하면 할수록 여러 가지 오랜 역사의 부침이 있지요. 그런 공부가 되면 될수록 역사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늘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한국 불교가 있기까지. 늘 그런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이 복된 한국불교의 현재가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학문 대상으로는 늘 자료를 보고 따지고 해야 하는 참 피곤한 과정이지만 학문대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면 그런 환희심이 들 때가 많습니다. 특히 옛날 어른들. 스님들이 남기신 법어집. 법문집. 시문집 이런 글들을 보다보면 부처님 경전 못지않게 그런 환희심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주로 제가 학문을 해가면서 불교신행을 해가면서 느꼈던 역사의 여러 장면 가운데 죄송하고 감사한 그런 마음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조선시대 스님 한분의 얘기를 여러분들께 해드릴까 합니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많이 알고 있는 스님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의외로 잘 알고 있지 못한 부분들도 많고 그렇습니다.
통합종단 이제 반세기 역사입니다...'한국불교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자.'
보우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이 법회 자리에 준비해 온 이유는 늘 역사는 현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현재의 우리 모습들 . 불교가 아니더라도 우리 현재 모습은 역시 끊임없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모든 결과의 총체적 모습인거지요. 그런데 한국불교의 현재만 놓고 우리들이 이야기 하면 아쉬움과 불만 섞인 이야기를 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조선시대 불교를 생각할 때 한국 불교의 현재 모습에 대해 많은 감사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선시대 얼마나 스님들이 얼마나 한국 불교가 어렵게 살았느냐? 가장 대표적인 제도로 승복을 입은 분들은 조선시대 내내 사대문 안에 출입할 수 가 없었습니다. ‘도성 출입금지령’라는 제도입니다. 이유불문입니다. 승복 입은 자들은 한양 땅 사대문 안에 출입자체를 금지시켰던 그 제도는 400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악법도 이런 악법이 없지요. 그만큼 조선시대 스님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가야 했다. 조선의 불교는 그만큼 차별화된 시대에 살아야 했다. 거의 500여년을 그렇게 살아야 했다.
그 도성 출입금지제가 해제된 것이 1895년입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근대기부터 불교가 비로소 다시 대중 사회 속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그런 시대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과 110여년 동안에 이만큼 한국 불교가 다시 과거의 영화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 이는 기적과도 같다고 저는 표현합니다. 한국불교의 현재를 불만족으로 또 부정적으로 미래를 진단하는 스님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스님들에게 불만입니다. 그 110여년 까지 있었던 특히 조선시대 500여 년간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면 결코 그 후 근대 100여 년간 이룩해 놓은 불교의 성과는 결코 부정적으로 평가할 이유가 없다. 엄청난 발전을 했다. 저도 불교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제 이야기를 신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그 110여년의 조선 불교 역사속에서 또 만35년은 일본불교가 침탈해 와서 한국불교를 완전히 왜색불교로 바꿔버립니다. 그 35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한국불교는 거의 일본 불교화 되어 버립니다. 스님들이 장가가는 거는 일제강점기 때 사셨던 스님들의 95%가 대처스님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일제 각종 공공성격의 자료를 찾아보면 많이 남아있습니다. 스님들의 처자 명단이 자연스럽게 첨부됩니다. 왜색불교입니다.
그런 세월을 만35년을 지내고, 그 뒤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이른바 ‘정화운동’이라는 것을 합니다. 우리 상도선원 도량도 그런 정화운동의 역사와 대단히 밀접한 도량입니다. 그 시대 ‘만암’이라고 하는 큰 어른이 백양사에 계셨지요. 그 만암 스님의 선풍. 수행풍토를 지금 선원장스님이 잇고 계신데 그 만암스님이 몰두하셨던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가지고 정화운동을 이끌어 가셨던 그 시대 큰 어른입니다. 조계종 역사 속에서는 크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따를 당하고 계신 셈입니다. 일종의 화해. 중도. 이런 방법으로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그 시대에는 정화운동을 주도했던 스님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종정자리에서 쫒겨나시고, 백양사에서 나름대로 갖고 계셨던 그 새로운 불교를 몸소 실천하셨던 어른이셨습니다. 어쨌든 그 35년간 일제불교가 들어와 왜색화된 불교. 이른바 대처불교를 극복하기 위해서 1962년까지 거기에 한국불교는 몰두해 있었습니다. 만으로치면 8여년 동안 한국불교는 엄청난 투쟁기를 겪습니다. 그 기간까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지요. 그러니까 통합종단 이른바 지루한 대처. 비구의 싸움을 끝내고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현재 종단의 이름으로 통합종단이 수립된 것이 1962년입니다. 그 때 일간지 1면에 크게 기사를 내고 그랬습니다. ‘이제 한국의 승려들은 싸우지 않는다. ’통합종단이 출범하고 조계사 대웅전에서 기념법회 할 때 온 나라가 축하하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1962년입니다.
그 통합종단부터 치면 이제 반세기 역사입니다. 반세기 동안 이렇게 한국불교가 현대화 대중화 되고 사회 각 분야에서 많은 역할을 한 것을 절대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선 오백년의 역사. 일제 강점기의 역사. 그 일제강점기의 왜곡된 역사를 올바르게 잡아보려고 했던 스님들의 치열한 투쟁기. 전쟁기 그렇습니다. 그 결과 50년 이제 지났기 때문에 ‘한국불교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자.’ 내가 좀 낙관적 천성을 지니고 있기는 합니다. 다소 제 역사관이 낙천적이나 그러나 개인의 성향과 관계없이 조선시대 불교는 그만큼 어려웠다. 오늘 이제 일제 강점기. 정화운동을 말씀드릴 시간은 없겠기에 그렇습니다. 조선시대 불교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겁니다.
허응당 보우스님이 흘렸다는 이 ‘피눈물’ 그 ‘피눈물’에 대해 적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불자라면 적어도 한번쯤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허응당 보우라는 스님이 1530년대 쯤인데요. 조선 중종 무렵 큰 법란이 일어납니다. 보통 역사속의 법란이라고 하면 기억되는 것이 있지요. 중국 불교로 치면 '삼무일종의 법란‘ 같은 것이지요. 최근으로 치면 1980년대 있었던 12.7법란 같은 것도 있지요. 중종때 법란은 의외의 현장에서 발단이 됩니다. 여주 신륵사 강변이 경치가 좋아 유생들의 놀이터였습니다. 지금도 대표적 유흥지지요. 강변치고는 백사장도 있고 그랬답니다. 신륵사 앞에 유생들이 배 띄워놓고, 바위에 앉아 놀고 시회하고 술하고 그랬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유생들이 술에 취해 신륵사 절 안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 겁니다. 소리지르고. 스님한테 욕설을 하고 그랬을겁니다. 사실 참았어야 하지만 신륵사 스님들이 보다 못해 유생을 몇 대 팬겁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벌인겁니다. 그 때의 사회분위기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감히 유생을 중이 팻다.”는 이유로 난리가 나서 그 유생들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일종의 통문들이 돌기 시작한 겁니다. 그게 중중 36년 무렵 법란입니다. 실록자료와 몇 문집자료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유생들이 전국의 사찰들에 행패를 부리고 승복만 입어도 잡아 패고 몽둥이 찜질을 가하고 그런 겁니다. 허응당 보우스님이 남긴 문집에 그 때 당시 처참한 법란을 묘사해 놓았습니다. ‘아!슬프도다. 본조 연산군 때 이르러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더니 (조선시대 불교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바닥으로 떨어진 때가 연산.중종때입니다.) 그때 불교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다른 실록자료를 봐도 절 두 개를 지목해서 봉은사. 광릉 봉선사 하고 두 사찰을 철거할 것을 집요하게 상소를 합니다. 뿌리가 남아 있다는 겁니다. 다 죽여 놨는데 저 두 개는 뿌리니 남겨두면 또 승려가 활동하고 불교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저 두 개마저도 빨리 철거해야 한다는 내용인 겁니다. 연산군. 중종때 거의 극에 달합니다. 그러니까 이때 불교는 거의 끝나버린 상황입니다.
스님이 될 수 있는 길이 몇 가지 길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승과고시라고 경국대전에도 명시되어 있는 사항인데 합격한 승려들께 첩을 발부하고 그 분들은 국가의 역을 면해주었지요. 예를 들면, 전쟁이나 성을 쌓거나 도로를 닦을 때 집을 지을 때 군역이나 노동 봉사와 같은 노역을 면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승과고시를 보지 않고 3년에 한번 보는 것이었음에도 6년 9년을 실시하지 않는 것이지요. 승려를 뽑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연산군 중종 때에는 슬그머니 승과고시를 보지를 않게 되지요. ‘도첩제’ 그런 제도가 있지요. 신분증을 발부하는 제도인데 그 신분증을 발부하지를 않으니 그냥 스님들을 온갖 역에 끌고 갑니다. 종파 선종.교종 두 개 종파를 남겨두었는데 이미 세종 때 그런 불교 탄압조치가 취해집니다. 열몇 개의 종파를 태종 때 7개로 줄이고 세종 때 2개가 남았지만 그 종파마저 인정하지 않고 연산군.중종에 이르러 그런 종파를 없애버리고 승과를 없애고 스님들께 자격을 발부하지 않게 됩니다. 불교가 끝나 있었던 겁니다.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보우 스님이 문집에서 그때 이야기를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한번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쳤다.’그런데 여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중종 때 일어났던 법란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당시 현장에서 그런 시련을 보우스님이 당한 겁니다. 중종의 버림을 받게 되어
‘이로부터 선가의 바람은 부채를 접었고 부처의 해는 그 빛을 숨겼다. 나라안의 모든 사찰은 나날이 없어지고 다달이 헐려 산에는 절이 없고 절에는 스님이 없네. 요행히 산림 속에서 머리 깍고 먹물옷 입은 사람도 관리가 침범하고 속인들이 괴롭히니 눈에는 눈물이 쏟고 그 눈물에는 피가 있었다.’
법회 시간인데 이런 가슴 아픈 행복하지 않은 표현들을 읽어 죄송하지만 그러나 일부러 거기에 한자를 썼습니다. 안유루眼有漏 이루유혈야而淚有血也. 눈에는 그냥 늘상 당시 스님들이 그러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핍박 때문에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고, 피눈물을 머금고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피눈물이라는 말은 그 다음 시에도 등장합니다. 중중 때 법란을 겪고 허응당 보우스님이 쓰신 7언4구의 시입니다.
‘불교가 쇠퇴하는 것이 이 해보다 더 하겠는가? 피눈물을 뿌리며 두건을 적시네. 구름 속에 산이 있어도 발붙일 곳 없으니 티끌세상 어느 곳에 이 몸을 맡기리!’
이런 시입니다 이시를 읽은 때가 1993년 처음입니다. 문집 속에서 ‘혈루’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뒤로 스님들에게도 강의시간에 이 말을 자주 드리고 가끔 일반대중들께도 이 ‘혈루’이야기를 합니다. 당시 허응당 보우스님이 흘렸다는 이 ‘피눈물’ 그 ‘피눈물’에 대해 적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불자라면 적어도 한번쯤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강남 봉은사에 더러는 가보시죠? 봉은사를 가실 때는 이 ‘피눈물’ 단어를 떠올리십시오. 그 보우 스님이 봉은사 도량에서 이 ‘피눈물’을 이겨내는 불사를 하신 어른입니다. 지금도 봉은사에 가면 보우스님을 기리는 몇 가지 기념물도 만들어져 있고, 일주문 들어가면 왼쪽에 가장 큰 전각이 ‘보우당’이고 그것도 이제 얼마 안 됩니다. 90년대 이후에 보우 스님의 피눈물이 의미있게 새겨지게 된겁니다. 왜 ‘피눈물’을 얘기했느냐? 이런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다. 이것이 16세기 전반의 모습입니다. 그 시기 불교는 끝나 있었고 눈물을 머금고 살아가던 시기였다 여러분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접했던 부분이지요?
문정대비를 기억하시죠? ‘윤씨’죠.명종의 어머니로 대단한 여걸인데 이 윤대비는 한국의 여걸로 들면 손가락 안에 듭니다. 기가 보통 센 여성이 아니었고 당시 조선 중기 이른바 ‘대윤. 소윤’이라는 같은 문중 안에서도 서로 싸우게 되는데 빈들 속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세자책봉을 못하게 다 막아내지요. 그리고 그 ‘대윤, 소윤’ 싸움 속에서도 이겨내고 어린 세자 명종을 즉위시키고 문정대비가 수렴청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조선왕조 실록을 비롯해서 유교사관에 입각한 책 들속에는 문정대비에 대한 좋은 얘기가 별로 없습니다. 아주 비판적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사의 측면에서 보면 문정대비는 대단히 고마운 보살이십니다. 이유 없이 여성불자들을 어느때부터인가 보살님으로 부르고 거사님 입장에서는 좀 불쾌합니다. 왜? 여성분들만 그 되기 어려운 보살칭호를 가질 수 있는지요. 억울하지요? 그러나 한국역사 공부를 하다보면 특히 한국불교사 공부를 하다보면 늘 한국의 여성불자들에게 보살의 칭호를 해드리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조선시대 불교는 여성들이 지켜왔습니다. 대놓고 지켜왔습니다. 첫째로 꼽으라면 문정대비 같은 분이지요. 이 문정대비는 일종의 수렴청정을 시작하자마자 첫 번째로 ‘비망기’라는 -대비가 왕의 이름을 빌어 명령을 내리는 것인데-그 비망기에서 ‘선교 양종을 봉립하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없어진 것을 다시 세우라는 얘기죠. 그때는 선종.교종은 없어진 것이었어요. 축소시킬대로 축소시켜 불교를 바닥에 떨뜨린 최악의 조치가 취해졌고, 그 최악의 조치마저도 없애버려 종파가 없으니 스님들이 살수가 없던 때였지요. 두 개 달랑 남은 이제 봉은사 봉선사라는 두 절만 없애면 조선사회에서 승려들과 불교라는 뿌리를 다 뽑아낼 수 있다는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인데 문정왕후는 느닷없이 없애놓은 불교종파를 세우라고 하니 난리가 났지요. 그 때부터 일종의 투쟁이 시작됩니다. 문정대비와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던 허응당 보우스님하고 대비를 둘러싸고 있던 친족세력 윤춘년. 영의정 상진이라든지 비호세력들이 문정대비를 옹호해서 이 싸움이 7, 8년 지루하게 계속됩니다.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워버리고 자신들의 집으로 가버리는 사태도 생기게 됩니다. 이른바 국립대학 학생들이 학교 동맹휴업하고 집으로 가버린거지요. 조선시대 상징적 최후의 저항수단인 성균관 유생들이 결의한 거지요. 이렇게 되면 조정이 난리가 나는 일입니다. 왕이 져야 되는 일이에요. 조선의 왕들은 마음대로 하지 못해요. 조직간의 ‘율’들이 있어서 이런 경우는 져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문정대비는 끝까지 버팁니다. 계속 설득하고 “불교를 좋아해서가 아니고 불교가 사법이고 비법이냐 승려들을 봐라. 소속이 되어 있지 않으니 온갖 나쁜 짓을 일삼지 않느냐. 이것을 관리해야 한다. 옛날처럼 종단을 놔둬서 승도들을 관리할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다.” 고 설득하고 문정대비와 보우대사의 관계에 대해서도 안 좋은 소문이 돌아다닙니다.
야사, 야담에는 그 이야기를 비하하는 것이 나오고 심지어 실록에도 언문으로 ‘보우대사가 몰래 궁녀를 시켜 대비와 밀통하고 있다’고 모함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90년도에 제가 보우스님 논문을 준비하면서 그때는 인터넷으로 검색될 때가 아니어서 명종실록에서 ‘보우’라는 글자만 등장하면 다 뽑아 복사하니까 이만큼입니다. 실록에 그만큼 많아요. 건수로 치면 오육백 건수입니다. 그 많은 실록 기사 중에서 보우스님이라는 단어를 단 하나도 스님을 스님답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온갖 비방의 언어들이 다 등장합니다. 요승.술승.괴승.잡승이다. 그 시대 나올 수 있는 온갖 나쁜 악플이 다 등장합니다. 그런 칭호를 들은겁니다. 하다하다 문정대비가 내치지 않으니까 최후의 수단으로 ‘저 중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모함을 받습니다.
끝내 견뎌내고 명종 재위기간 17.8년 동안에 불교가 살아납니다. ‘후’ 불면 불이 살아나듯이 선종, 교종 두 개의 종파를 독립시키고 또 겨루어 보니 이길만해서 ‘승과고시’를 부활시킵니다. 부활된 승과고시 첫 번째 치른 장소가 봉은사 뜰입니다. 요사이 한전부지로 씨름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 땅은 모두 봉은사 땅이었습니다. 지금도 봉은사 가보면 표지석이 있습니다. 서울시에서 세워놓은 ‘승과평’입니다. 그게 1970년 뚝섬으로 배타고 다닐 때까지만 해도 ‘승과고시를 보던 뜰’이라고 했습니다. 그 부활된 승과고시에서 첫 번째 합격하신 분이 서산대사입니다. 세 번째 시험에 합격하신 분이 사명대사입니다. 그 때 불교는 불씨조차 없었습니다. 다시 문정왕후가 보우스님 도움을 받아 불씨를 되살려놓고 그리고 조선불교는 불씨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역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같은 전란의 역사에 접어듭니다. 그 전란기에 누가 활동합니까? 의승군들이 활동하지요. 최근 우리 종단에서 6.7년간 거기에 몰두해 있습니다. 저도 앞장서고 일하고 있습니다. ‘의승의 날!’ 의병의 날은 있습니다. 의승을 기리기 위한 답이 국가에 없어요. 조선시대 그 전란의 역사에서 순간순간마다 얼마나 많은 스님들이 나라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셨는데, 그분들을 선양하는 일들을 국가에서 하질 않습니다. 저 <밀양의 표충사.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 안변 서광사의 표충사> 이런 사당을 세워 놓은 게 스님들 돌아가시고 150년이 지난 다음에서야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대흥사의 표충사 같은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나라에서 해준 것이 아니고 스님들이 왕이 지나가는 어가를 막고 항의하고 그렇게 해서 만든 사당입니다. 조선왕실에서 나라와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희생한 스님들을 위해서 어디에서도 뭘 해주지 않은 겁니다. 잘 알고 있는 조헌 중봉선생이지요. 조헌 칠백의총에서 적어도 8,9백여명의 스님들이 전사하셨거든요. 그 칠백의총에서 따돌림 당합니다. 철저하게 외면 당한 겁니다.
전쟁을 치르고 나니까 승려들이 필요했던 거에요. 연산군. 중종 때 까지는 없애야 될 대상이었는데 전쟁을 치르고 나니까 ‘저 승려들은 도망가지 않고 목숨바쳐 나라를 위해 싸운다’ 우리 행주산성에서도 뇌묵당 처영스님이 얼마나 결정적 기여를 하셨는데요. 용감하게 싸운겁니다. 많은 스님들이 돌아가셨지요. 그 사실을 놓고 조선의 위정자들이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그게 17세기 초중반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남한산성을 쌓고 그곳에 승려들을 주둔시킵니다. 18세기 북한산성을 쌓고 그곳에 스님들을 주둔시킵니다. 남한산성. 북한산성을 가면 절이 많지요? 절터도 많습니다. 그 절들 보고 좋아할 거 없습니다. 그 절들을 좋아할 건 없습니다. 그 절은 거의 군사기지입니다. 대부분이요. 거기 계셨던 스님들이 수행을 한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거기서 군사훈련하고 산성, 한양 땅 지킨겁니다. 수도경비사령부인 셈입니다.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거기에 가서 부처님들이 여여하게 앉아 계시지만 산성에 계신 절에 참배하실 때는 꼭 그 시대 스님들의 아픔을 같이 기억해주셔야 합니다. 그 분들이 지켜내신 겁니다. 어쨌든 군인의 모습으로 지켜내신 겁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변화의 과정 속에서 전환점이 된 것이 전란이고, 그 전란이 생기면서 조선불교는 17세기 초.중반을 지나면서 질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물론 스님들의 사회적신분이 상승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사라져야 할 대상에서 스님들은 살아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 역할. 그런 사회의 변화가 오도록, 불교의 변화가 오도록 결정적인 기여를 하신분이 바로 허응당 보우대사라는 분입니다. 17,8년 동안 꺼져가던 불교의 불씨를 살려놓고 그리고 스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십니다.
문정대비가 노쇠하여 병에 걸려 양주 회암사(터가 아주 크고 태조 이성계 때부터 왕실에서 중시하던 도량이고, 명종도 아주 중시했습니다.)에 모시고 가서 아주 큰 무차대회를 합니다. 근데 노쇠해서 온 병이고 그래서 낫질 않았던 모양이고 그 직후에 돌아가십니다. 그러니까 다시 보우스님을 죽이려고 하는 상소를 계속 올립니다. ‘보우라는 저 승려가 대비를 죽게 했다.’ 다른 죄는 뒤집어 씌우지 않고 대비의 죽음에 대한 원흉으로 몰아붙이는 겁니다. 계속 죽이라고 하는데 명종은 성장하여 직접정치를 할 때인데 워낙 대신들이 반대를 하니 보우를 죽이지는 못하고, 강원도로 유배를 보내는데 그것도 유생들이 못마땅하게 여기니까 어쩔 수 없이 강원도에서 제주도로 유배를 내리는데 거기까지가 조정의 공식결정입니다. ‘제주도로 승려 보우를 유배 보내라!’ 제주도에 유배를 보내는데 제주도 목사를 지내던 변씨 성을 가진 ‘변협’이라는 제주목사가 조정의 허락도 없이 보우스님을 장살을 시킨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장살이란 곤장입니다. 이건 육체적인 고통으로 치면 최고의 고통을 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연려실기술’과 같은 민간자료를 보면 일부러 보우스님을 관리하는 감옥의 옥리들을 일부러 성격이 포악하고 외모가 우람한 옥리들을 집중배치해서 못살게 굴었다고 합니다. 온갖 수모를 제주에서 당하시다가 결국은 옥사를 합니다. 곤장을 맞고 돌아가십니다.
보우스님이 무슨 죄가 있어요? 조선왕조실록 5.600권에 글을 볼 줄 아는 분들이 공히 평가하고 있습니다. ‘허응당집’이라는 문집이 남아 있습니다. ‘그 문집을 보면 허응당 보우스님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분은 대단한 공부를 하신 스님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고 해서 글은 꾸민다고 해서, 그 분이 남긴 문집 전체가 꾸며서 된 글이 아닙니다. 엄청난 내공이 있는 글입니다. 수행도 단단하신 어른이었습니다. 그런 시련과 협박을 견뎌내고 17.8년간 불교의 불씨를 살려내신 겁니다. 불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죄밖에 없는데 제주에서 돌아가시고 맙니다.
이제 보우스님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처음 불교역사를 공부하면서 감사함. 한편으로는 좀 부끄러움 같은 마음을 간직하게 되는 스님들이 몇 분 계십니다. 이 보우라는 스님의 일대기. 업적을 되새기면 그 두 가지 마음을 늘 함께 갖게 됩니다. 그분의 17,8년간의 정진. 희생. 그런 삶이 없었다면 역사는 가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더러는 가정도 필요합니다. 이 스님이 없었다면 한국의 불교는 거기에서 끝나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지구상에 그런 역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정종교가 특정지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북한만 해도 불교가 있다고 하지 못하고, 불교. 중국도 절도 복원하고 스님들도 많이 배출하고 있지만 중국불교가 살아있다고 말하지 못하지요. 조선 불교는 그때 끝났을 겁니다. 그분의 희생이 있어 양대 전란을 거치고 조선후기의 불교가 다시 정비되는 그런 기간 그런 역사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 감사, 고마움을 보우라는 스님의 피눈물의 의미를 간직하면서 살아가야 이 시대 불자들의 도리고 의무라고 늘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기회가 닿으면 여러분들께 그런 당부의 말씀도 드리고, 봉은사 참배하실 때 그런 마음 가져주시고, 제주도 구관사에 가면 아무도 보우스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을 때 아주 이른 시기에 그 절에 보우스님을 기리는 순교비를 세우셨습니다. 그 스님께서요. ‘보우사상연구회’라는 건물도 지어놓고 그랬습니다. 그런 노력을 해 주신 스님이 계십니다. 구관사에 순교비는 지금도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정확히 그곳이 순교지는 아니구요. 처음 말씀드렸듯이 법회는 법을 말씀드리는 자리여야 하는데 제 전공인 불교사를 스님 한 분 말씀드리는 것으로 마치도록 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보살같은 문정왕후, 그리고 불교를 지켜냈기에 옥에서 곤장을 맞고 돌아가신 보우스님...
그분들의 도움과 희생으로 유자(儒子)들의 나라 조선왕조에서도 불교는 명맥을 이어왔으니...
지금 이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지만 그런 역사를 인식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