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재는 흔히 천등산 박달재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박달재는 정확히 말해서 구학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시랑산 자락에 위치한다. 천등산 박달재라고 하는 가사는 충주의 산척면에 있는 천등산 자락을 넘어가는 다릿재와 혼동하여 생긴 것으로, 제천에서 충주 쪽으로 가려면 박달재와 다릿재를 차례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이 같은 혼란이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던 박달재 아래에는 박달원(朴達院)이 설치되어 수많은 나그네가 쉬어 가는 시설로도 활용되었다.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사연은 그러한 과정에서 남겨진 이야기로 보인다. 박달재 정상에는 서낭당이 있어 나그네들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 주었고, 박달재 아래에는 국가의 곡식을 보관하는 원서창(遠西倉)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한편, 박달재에는 산적이 자주 출몰해서, 상인들이 고개를 넘을 때는 며칠씩 평동마을에서 머물다가 떼를 지어 넘어갔다고 한다.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덕암은 도적들이 머물던 근거지로서, 본래 이름은 도적암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가요 중 하나인 「울고 넘는 박달재」는 박달재에 남겨진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던 남편과 이별하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는데, 노래 속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영남의 선비인 박달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이등령이라 일컬어지던 이 고개를 넘게 되었다. 그때 마을의 처녀를 보고 연모하게 되었으니,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기약하게 되었다. 금봉은 고갯마루 서낭당에서 서울 쪽을 바라보며 도령의 과거 급제와 상봉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서울로 간 박달은 과거에 낙방하여 금봉을 찾지 못하였다. 얼마 후 박달이 금봉을 찾아왔을 때 금봉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박달은 금봉의 환영을 좇아 결국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이후 사람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기억하며 ‘박달재’라고 고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한편, 1944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의 마을 장정 13명이 징용으로 끌려가던 날, 동네 부인들이 정성껏 만든 도토리묵을 남편의 허리춤에 달아 주며 고갯마루 서낭당에서 이별했다는 사연이 노랫말로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다.
1948년에 발표된 「울고 넘는 박달재」는 반야월[진방남]이 노랫말을 짓고 김교성이 곡을 붙인 것인데, 박재홍이 불러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2005년 한국방송공사의 가요 프로그램인 ‘가요무대’가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불린 노래를 선정했을 때도 1위로 선정되었다. 그러저러한 인연과 사연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는 제천 지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임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임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 주며/ 한사코 우는 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 넘는 눈물고개/ 돌부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 길아/ 도라지 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 보면 산울림만 외롭구나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가요 중 하나인 「울고 넘는 박달재」는 박달재에 남겨진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던 남편과 이별하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는데, 노래 속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영남의 선비인 박달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이등령이라 일컬어지던 이 고개를 넘게 되었다. 그때 마을의 처녀를 보고 연모하게 되었으니,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기약하게 되었다. 금봉은 고갯마루 서낭당에서 서울 쪽을 바라보며 도령의 과거 급제와 상봉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서울로 간 박달은 과거에 낙방하여 금봉을 찾지 못하였다. 얼마 후 박달이 금봉을 찾아왔을 때 금봉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박달은 금봉의 환영을 좇아 결국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이후 사람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기억하며 ‘박달재’라고 고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한편, 1944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의 마을 장정 13명이 징용으로 끌려가던 날, 동네 부인들이 정성껏 만든 도토리묵을 남편의 허리춤에 달아 주며 고갯마루 서낭당에서 이별했다는 사연이 노랫말로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다.
1948년에 발표된 「울고 넘는 박달재」는 반야월[진방남]이 노랫말을 짓고 김교성이 곡을 붙인 것인데, 박재홍이 불러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2005년 한국방송공사의 가요 프로그램인 ‘가요무대’가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불린 노래를 선정했을 때도 1위로 선정되었다. 그러저러한 인연과 사연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는 제천 지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임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임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 주며/ 한사코 우는 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 넘는 눈물고개/ 돌부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 길아/ 도라지 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 보면 산울림만 외롭구나
국사봉님의 많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 이군요 ...노래에 얽힌 사연을 알면 노래에 감정이 이입되어 더욱 표현이 잘될것 같아 이참에 함 들려 봤습니다..제고향도 안성시 일죽이라 그리 멀지도 않코요..ㅎㅎㅎ 옛날에 그 고개를 넘자면 힘들겠다 생각이 드네요..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날 되십시요
노래에 담긴 사연까지...잘 보고 듣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잘 쉬고 갑니다
넵 ㅎㅎ 좋은날 되십시요
잘 들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연주 잘 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세상만사순처님 저도 제 고향이지만 그사연을 소상하게 잘올려주심 감사드립니다
저역시 서울에서 결혼해 살다가 집사람과 큰딸을 제천 고향에두고 군대가려고 버스를 타고박달재를 넘어가던 기역이나네요
그당시 집결지는 충주공설 운동장 이 였거든요 ㅎㅎㅎㅎ
어린시절에는박달재고개 아래에까지가서 나무를 해오던곳이지요
님의연주 잘감상하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국사봉님의 많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 이군요 ...노래에 얽힌 사연을 알면 노래에 감정이 이입되어 더욱 표현이 잘될것 같아 이참에 함 들려 봤습니다..제고향도 안성시 일죽이라 그리 멀지도 않코요..ㅎㅎㅎ 옛날에 그 고개를 넘자면 힘들겠다 생각이 드네요..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잘 듣고 나갑니다
감사합니다^^
애잔한 노래 연주 잘 들었습니다.
연주 잘 들었습니다.
멋진 연주 잘 들었습니다~~
노래에 담긴 사연까지 정리해 올려주시니 한결 돋보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