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live/V-4uxrgKm8s?si=CyFSWRh2YUAcmO09
수난 예고와 무지한 제자들9:30~32
30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겸손과 섬김에 대한 교훈9:33~37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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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다시 인자가 당할 고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길에서 쟁론한 것을 아시고,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 중에서 끝이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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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 예고와 무지한 제자들9:30~32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무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두 번째 예고하십니다(8:31 참조). 그리고 갈릴리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을 계획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여정을 비밀로 하심은 무리로 인해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방해받지 않게 하시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제자들은 얼마 전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신적 형상을 보았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체험했음에도 여전히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수난 예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기도 꺼립니다. 위기 순간에 영적 실패에 빠지지 않도록 속히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주님은 지금 내가 어떤 말씀을 깨닫기 원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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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섬김에 대한 교훈9:33~37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두 번째 들었음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 나라의 권력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가장 큰 자인가’를 두고 다툼을 벌인 이들에게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적 교훈으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또 어린아이 한 명을 사랑으로 맞아들이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시며 ‘섬김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섬김은 겸손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의 목록 중 으뜸은 교만입니다(잠 6:17).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시고 겸손히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마 20:28; 빌 2:7). 이는 낮아짐의 실천이요, 최고 모범입니다. “누가 크냐?”라는 다툼은 예수님의 섬김과 겸손을 배척하는 행위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서로 누가 큰지 논쟁했을까요?
높아진 마음을 버리고 다시 겸손과 섬김의 종으로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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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도 예수님의 길로
히말라야 고원 지대에는 양을 매매할 때 특이한 기준을 적용하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양의 크기가 아니라 양의 성향에 따라 값을 매기는 것입니다. 이를 테스트하는 방법이 재미있습니다. 산비탈에 양을 세워 두고, 팔 사람과 살 사람이 지켜봅니다. 양이 풀을 뜯으러 산비탈 위로 올라가면 좀 말랐어도 값을 높이 쳐 줍니다. 그런데 산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살이 통통해도 값을 덜 쳐 줍니다. 왜냐하면 산비탈 위를 오르는 양은 당장은 힘들지만, 잠시 후면 넓고 풀이 많은 산허리를 만나 점점 살이 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비탈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당시에는 편하지만 나중에는 풀이 없는 협곡에 이르러 결국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의미요,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기 전이나 후나 삶의 목표가 같다면 이상합니다. 여전히 내가 높이 올라가고 싶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기를 원하고 있다면, ‘내가 정말 예수님을 만났나?’ 하고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풍성한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죄를 용서받고 회복을 경험하고 새사람이 된 우리는 예전과 똑같이 살 수 없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날마다 천국을 향해 / 진희근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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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마가복음 9장 35절
세상 사람은 더 높은 자리를 원하지만, 성도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기를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10:45).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을 기억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결핍을 메우기 위해 높아지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만족하는 성도는 낮아짐을 선택합니다. 성도는 십자가로 겸손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 순종과 사랑으로 어둠의 세력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 존 스토트
오늘의 기도
주님, 제 지성과 마음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깨닫게 하소서. 은근히 남들보다 높아지려는 제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겸손과 섬김으로 제자의 본분을 지키게 하소서. 어린아이에게도 친절함을 나누시는 주님의 마음을 갖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63 신자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셔서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여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억지를 부르면서 진리를 외면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 안에 거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에게 당신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믿게 하여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분을 온 맘으로 예배하자
항상 겸손히 그분께 나아가고, 그분께서 깨닫게 하여 주시고, 밝히 볼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그분의 제자로 성실히 살아가자
오늘 본문은 자리싸움을 하는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고자 하면 끝이 되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한 어린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섬김의 도리를 알려주십니다. 본문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예고, 길가에서 변론하는 제자들, 섬김에 대한 가르침 등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 스승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무슨 뜻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두려워서 묻지도 못했다는 말입니다. 깨닫지 못한 이유는 죽은 사람을 살리신 능력자가 사람들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는 점을 이해할 수 없고, 더구나 사흘 후에 부활한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묻지도 못한 까닭은 혹시라도 그들도 주님처럼 그렇게 될 것을 염려하거나 혹은 괜한 질문을 해서 스승께 책망을 받을까 두려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가장 낮은 자를 소개할 때 하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가장 미숙한 신분으로 취급되고, 또한 이스라엘 문화권에서도 분별력이 없어 엄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연령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전쟁을 할 수도 없고, 일도 할 수 없는 곧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 존재라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어린 아이의 낮은 위치를 강조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 그런 어린 아이를 받아들이면 곧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즉, 가장 낮고 천한 자를 주님과 동일시하여 그런 어린아이를 대하는 일이 곧 주님을 대하는 일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말은 ‘인정한다., ‘사랑으로 대우한다.’의 뜻으로, 그렇게 사람들을 겸손하게 섬기라는 당부입니다. 자신과 가장 낮은 자를 동일시한 예수님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에서도 나옵니다. 거기에는 어린아이 대신에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가 나옵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 가련한 그들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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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 길에서 토론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이 함구했다는 말입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과 제자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바라는 길은 출세의 길이자, 부귀영화의 길입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보다 뒤처져서 한 일이 있으니, 곧 서열 매기기입니다. 줄 세우기입니다. 이제 스승이 곧 왕이 되므로 미리미리 내각을 구성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외부에서 밀고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인자는 예수님이니, 2인자는 누가 되어야 하느냐? 문제는 누구나 제 2인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장관 자리는 따놓은 것이고 기왕이면 총리대신을 해야 실세가 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이제 죽으러 가고 있는데 제자들은 더 높아지고, 더 잘 살기 위해 변론을 벌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어린아이를 시청각 교재로 세울 만 합니다. 땅의 시각으로는 하늘의 시각을 볼 수 없고, 세상을 사는 요령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이치라 그렇습니다.
‘높아져야 한다’, ‘군림해야 한다’ - 땅의 가치관입니다.
‘받아라’, ‘보복하라’, ‘이름을 내라’ – 세상을 사는 요령입니다.
‘낮아져야 한다’, ‘섬겨야 한다’ - 하늘의 가치관입니다.
‘주어라’, ‘원수까지 사랑하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 하나님 나라를 사는 요령입니다.
‘첫째가 되려면 처음이 되어야 한다.’ - 제자들의 시각입니다.
‘첫째가 되려면 끝이 되어야 한다.’ - 예수님의 시각입니다.
성경은 패러독스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은 역전모티브의 대가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원리라 그렇습니다.
땅의 가치관과 세상을 사는 요령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를 선택하라는 주문입니다.
천당과 지옥은 동시에 갈 수 없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취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선택이 그것을 결정해 줍니다. 또한 그 결정이 쌓여 그 사람의 미래가 된다는 점입니다. 양자 사이에서 주저할 수 없습니다.
부르실 시간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자가 능력자입니다.
대접을 받고 싶거든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아무리 높아도 산이 하늘 아래 있듯이, 땅의 이치가 아무리 그럴듯하여도 하늘 이치 아래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공공연하게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삼 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통은 이해가 안 될 때는 질문을 했었는데,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는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습니다 묻지 않는다고 질문이나 해답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제자들은 왜 묻지도 않았을까요? 십자가의 도는 거리끼는 것이라 외면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
반면에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잘났냐는 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묻고 대답하며 논쟁했습니다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막9:33~34)
그래서 지금도 둘만 모여도 나이와 학벌과 직업을 물으며 누가 더 큰지 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게 묻기도 두려워하던,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그 십자가의 도야말로 정말로 으뜸이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9:35)
그렇게 죽기가 무서워 꺼리던, 주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그 십자가의 도야말로 사망을 이기고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55)
그렇게 가난이 싫어서 등지던, 자기 집과 가족마저 내려놓는 그 십자가의 도야말로 현세와 내세에서 갑절이나 잘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18:29~30)
그렇게 고난이 두려워 회피하던, 주의 멍에를 메는 그 십자가의 도야말로 참 평안과 참 쉼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우리의 복이 되는 십자가의 도만 담대히 따르기 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전체 수난의 시간을 앞두시고, 제자도에 대해 교훈하십니다. 겸손과 섬김(35-37절), 종교적 관용(38-40절), 약자에 대한 배려(37,42절), 죄를 멀리하기 위한 투쟁과 배교에 대한 경고(43-50절)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읽고 경청하는 말씀은 주로 어떤 내용입니까? 복과 은혜를 약속하는 달콤한 말씀만이 아니라, 힘써 지켜야 할 쓰고 아픈 말씀도 귀담아들어야겠습니다.
34-37절 서로 높아지려는 자들에게 첫째가 되려면 맨 아래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질서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은 결코 그 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도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비천한 죽음으로 사랑의 본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내 삶의 방식은 하나님 나라에 가깝습니까, 이 땅에 가깝습니까?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31,32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깨닫지 못할뿐더러 묻기도 두려워합니다. 메시아가 고난받고 죽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모르니, 부활의 영광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저 두려웠기 때문에 그들이 택한 방법은 회피입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태도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현실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마주할 때 고난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고, 십자가를 경험하는 자가 십자가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33,34절 벌써 예수님이 두 번이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가장 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한 선택을 받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 안에 더 큰 권력에 대한 욕망이 생겨난 것입니다. 한 번 그들 마음에 자리 잡은 욕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무리한 청탁이나 다툼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성도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 중 하나는 공동체에서 높아지려는 마음입니다. 이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제자의 삶에 걸림돌이 되고, 서로 섬김으로 세워가야 할 공동체를 도리어 무너뜨리는 불씨가 될 뿐입니다.
기도
제자의 길을 방해하는 옛 소욕을 버리게 하시고, 합당한 성품으로 빚어가소서.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방식의 삶❞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제자입니다.
✔ 진정한 제자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 고난을 통하여 영광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30~34절).
갈릴리 지역을 가로질러 가고 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중이었기에 자신들의 행방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가르치신 내용은 고난에 관한 것인데,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31절)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죽는다는 사실에 매몰되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런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이 세우실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 논쟁(33~34절)만 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세상의 가치에 따라 스스로를 높이데만 몰두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나의 삶의 목적과 방향과 삶의 자세와 고난과 환난을 이겨내는 방법 등 나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바램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라고 하는 고난의 길을 택하셨고,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세속 주의적 성공관이 지금의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뒤 흔들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요즘 SNS상에서 회자되고 있는 글이 있어 옮겨봅니다.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 남들의 목숨을 위태하게 한다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현실 앞에서 나는 무엇이 우리에게 ‘옳은 선택’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원하지 않는 십자가의 길을 모두를 위해서 걸어가셨습니다. 온라인 예배 4주차, 출석 “0”, 헌금 “0” 그럼에도 월세를 내야 하는 날짜는 다가옵니다. 모이는 숫자가 적으니 평상시처럼 예배를 드려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까 고민하다가 온라인 예배를 택했습니다. 고난의 삶을 통해 영광된 삶을 사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제자의 삶입니다.
➲ 타인을 높이는 섬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35~37절).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불러놓고,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35절,새번역)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분명 세상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다른 말씀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 하나는 데려다가 세우시고, 안으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삶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첫째가 되는 길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온전히 섬기신 것처럼 나 역시도 다른 사람을 영접하고 섬기는 종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섬기는 자’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이는 자발적인 섬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입니다. 내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의 시간과 열정 그리고 재능과 물질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타인을 높이는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제자의 삶입니다.
어린아이일수록 자기중심적이고 불순종하려는 경향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단계에서는 민족과 종교, 경제적 지휘, 신체와 상관없이 친구로서 그냥 어울릴 수 있는 세상에서 흔히 보는 차별이나 마음의 장벽이 없습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 다른 이를 조정하려거나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 마음, 그런 의도 자체가 없는 낮은 마음이 예수님 앞에서는 활발하게 돌아다니지만 부르면 수줍게 다가 오는 아이를 통해 서로를 용납하는데 거리낌이나 거침이 없는 마음이며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는 하나님을 제한 없이 영접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가며 여전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신 예수님이 들릴 정도로 누가 서로 높은지에 대해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누가 더 높으므로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때 다른 이를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려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베대의 아내가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좌우에 두게 해달라고 했던 것처럼 그들이 끝까지 원했던 것은 세상적 권세와 다른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어른의 마음이었지만 주님께서는 스스로 죽음에까지 내려 가심으로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이루어 가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그 주님을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영접하며 그분이 주시는 사명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복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심(31-32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떠한 죽음을 맞을 것이며 또한 그 죽음을 어떻게 이겨 내실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때에는 그 말씀이 가진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무런 질문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였지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한계 안에 갇혀서 온 인류를 구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알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 제자들과 같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의 한계에 갇혀서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늘 인정하며 그분의 뜻 안에서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2.높아지고 싶은 제자들(33-37절)
제자들이 가진 관심을 몇 명 안되는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높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한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높은 자가 어떤 자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나중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가르침을 하십니다.
또한 어린아이를 중간에 세우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약자되고 연약한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겸손함을 가진 사람은 곧 예수님을 받아 들인 것이며 나아가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받아 들인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30~37 섬길수록 첫째 되는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이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시러 올라가는 여정가운데 계신다.
변화산상에 3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셨다 내려왔는데
산 아래 있는 제자들이 귀신들린 소년을 치유하지 못했다.
그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도와 달라고 간청을 하였고
예수님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책망하시며 치유해 주셨다.
오직 기도 만이 이런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특강을 해 주셨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행해 발걸음을 옮기신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자신의 정체에 대하여 알리고자 아니하신다.(30)
왜냐하면 12제자들에게만 집중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이제는 많은 사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제자들에게만 집중하시는 것 같다.
계속해서 가까이 있는 제자들을 가르치신다.(31)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핵심은
1. 인자가 사람의 손에 넘기워 진다.(31)
2. 죽임을 당한다.(31)
3. 죽은지 3일 만에 살아나리라 는 것(31)을 가르치신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개인 과외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32)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가 소개되고 있다.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33)는 주님의 말씀에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하고 쟁론하였으므로 아무 대답을 못했다.(34)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실 사명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 사명을 제자들에게만 특별히 가르치고 있는데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시기만 하면
누가 더 권력의 요직 핵심의 자리를 차지 할까 서로 다투고 있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생각과 핵심 제자들의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 반대의 마음을 서로 품고 꿈꾸고 있는 것 같다.
십자가에 대한 무지의 태도가 핵심 제자들만이겠는가?
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가?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지금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하느냐? 라는 주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훌륭한 신앙 고백을 들으신 직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심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부활한다고 가르치셨었다.
지금 가르치심이 두번째 가르침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주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또 가르치신다.(35)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35)
누가 더 큰가라는 논쟁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다.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이다라고 교훈하시는 것이다.
시청각적으로도 교육하신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면서 말씀하신다.(36)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다.(37)라고
천국에서 높은 자가 되는 비결은
교만한 욕심과 욕망을 다 버리고 어린아이 하나라도 겸손히 섬기는 것이며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섬기라는 말씀이다.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에는 차이가 있구나.
세상에서는 누가 높이 쌓았고 높이 올라갔고 많이 가졌는가의 경쟁이라면
하나님은 누가 낮게 내려갔고 더 많이 나누었고 더 많이 낮아져 섬겼느냐는 기준이다.
예수님 스스로도 하늘영광 보좌 다 버리시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시며 실천하셨으니
예수님이야 말로 천국에서 가장 큰 자이시겠구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하셨으니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을 본받아
종의 도를 실행하며 살도록 성령님 도와 주옵소서.
오늘의 말씀요약
갈릴리를 지나시며 예수님은 사람들 손에 넘겨져 죽임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날 것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누가 큰가 쟁론합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려면 모두를 섬겨야 하고, 어린아이라도 그분 이름으로 영접하라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두 번째 수난 예고(9:30~32)
영적 눈이 어두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가르치는 데는 반복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기에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영적 맹인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처음과 달리 아무 저항이 없고 그 의미를 묻는
사람도 없지만, 이는 그들의 이해가 깊어져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전에 베드로가
꾸지람 듣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묻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미 잘못을 지적받았는데도 제자들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가치관과 고정 관념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듣고 싶은 것, 믿고 싶은 것만 취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죽음에 관해 들은 제자들은 왜 침묵했을까요?
- 적용 질문: 뜻 모르는 고난 속에서 두려움을 느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제자의 바른 자세일까요?
큰 자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9:33~37)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이해했든 못 했든, 예수님이 그분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셨는데 서로 누가 큰 자인지
따지고 있다는 것은 그분의 제자들로서 합당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 생각과
전혀 다른 답을 주십니다. 첫째가 되려면 오히려 끝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시 어린아이는 쓸모없는 사람, 애써 영접할 필요 없는 비천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영접할 만큼 낮아져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 묵상 질문: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큰지 논쟁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섬겨야 할 주변의 ‘어린아이’는 누구인가요?
그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하면 좋을까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나라에서 가치 있는 것은 섬기고, 낮아지고, 끝이 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비록 이 세상 속에 있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본받아 이웃과 교회를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걷게 하소서.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죄많고 허물로 가득한 우리를 거리낌 없이 안아주시고 만져주시고
그 놀라운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의 능력을 허락하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세상의 수많은 편견과 욕망을 우리의 심령에서 걷어내고
온전한 복음을 순종과 겸손으로 받아내는
정결한 질그릇으로 쓰임 받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하늘의 창고를 열어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사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길 잃은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시고
예배와 말씀의 회복이 속히 오게 하시며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더 낮은 곳에서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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