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박사의 전두환 탐험[1]
전두환 탐험[1]
전두환은 1931.1.18.~2021.11.27. 90년 동안 이 땅을 밟고 갔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우리 사회에 비친 그는 쿠데타를 해서 정권을 잡은 사람, 철권통치자,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악마였다. 과연 그러한가? 이제부터 필자는 전두환의 실체를 탐험하여 탐험기를 쓰고자 한다.
일본에 100억 달러 받아내야지
그는 제11대 및 12대 대통령을 했다. 제11대 대통령 재임 기간은 1980.8.27~1981.2.24., 제12대 대통령 재임 기간은 1981.2.25 ~ 1988.2.24.이다. 1981.1.20. 레이건이 취임했다. 레이건 제1의 정책은 동맹 강화였고, 대소련 봉쇄였다. 동맹의 상징은 단연 한국이었다.
그래서 레이건은 취임하자마자 동맹의 아이콘 한국을 불렀다. 항간에는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않는 대가로 첫 번째 정상회담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그냥 소설이다.
일본 달러로 미국 장비 사겠다
1981.1.28. 그는 공식수행원 11명. 비공식 수행원 15명을 태우고 미국으로 떠났다. 2월 2일 오전 60분 동안 정상 회담을 했다. 그는 레이건에게 미국에 온 목적이 두 가지라고 말했다. “첫째 목적은 미합중국 대통령 당선을 축하드리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 목적은 레이건 대통령 각하를 도와드리려는 것입니다.”
건국 이래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 도와달라고만 했지 도와준다고 한 적은 없었다. 한국 대통령이 미국을 도와주다니?
모두가 놀라 귀를 세웠다. “죄송하지만 LA의 GNP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LA의 연간 GNP는 800억 달러입니다. 한국의 GNP는 겨우 600억 달러입니다. 매우 초라한 성적표입니다. 그 중 6%를 국방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GNP는 1조1,600억 달러입니다. 한국의 20배입니다.
일본의 안보 무임승차
그런데 일본은 국방비를 0.09%만 사용합니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최일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 덕을 일본이 톡톡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불공정합니다. 한국은 지금 경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한국이 쓰러지면 한국은 공산화됩니다. 도와주십시오. 저는 미국에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닙니다. 각하께서 일본의 무임승차 행위를 일깨워 한국에 차관을 넉넉히 주라 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돈으로 미국으로부터 전투기와 탱크를 살 것입니다” 이는 레이건의 대 소련 봉쇄정책에 100% 기여하는 것이었다.
일본도 각료도 수군수군
수행원들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며 수군댔다.
전두환은 1981.4.22. 일본 정부에 뜬금없이 100억 달러를 내라고 통보했다. 일본에게는 실로 무례하고 엉뚱한 요구였다. 스즈키 내각은 미친소리라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전두환 주변에서도 수군대기만 했다.
1965년엔 8억, 1983년엔 40억 달러
1982.11.27. 나까소네가 수상에 취임했다. 나까소네는 레이건의 백(back)이 필요했다. 1983.1.11. 결국 나까소네가 한국을 방문해 2차례에 걸쳐 정상 회담을 했다.
그리고 100억 달러 대신 40억 달러를 조건 없이 내놓겠다 했다. 1965년 박정희가 일본으로부터 얻어낸 배상액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 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이로부터 15년 후, 전두환은 아주 쉽게 그 5배나 되는 40억 달러의 차관을 얻어냈다. 전두환은 이것이 ‘안보 차관’임을 늘 강조했다.
사실 1980년을 전후하여 미국의 전문 국방 저널에는 ‘일본의 ’무임승차‘(Free Ride) 문제가 뜨겁게 제기되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 석유 도입 등 무역항로에 대한 해상교통에 대한 안전까지도 미국에 의존했다.
지금까지도 미국이 해적을 제압하는 비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은 일본이 일본 땅으로부터 1,000해리까지의 해상 교통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전두환의 100억 달라 차관 요구는 생뚱맞은 요구가 아니라 이러한 국제 정세의 흐름에 잽싸게 올라탄 재치 있는 발상이었다. 이 엄청난 차관을 졸지에 뜯어내고도 전두환은 일본 천황으로부터 엄청난 예우를 받았다.
일본 천황이 고개를 숙여 일본의 사과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가장 수위가 높은 사과를 나타내는 [유감]이라는 표현을 받아냈다. 나까소네는 전두환보다 13살 연상이다. 그런데 전두환과 나까소네는 친 형제와 같기도 하고, 친구같기도 한 감정을 주고 받으며 우정을 쌓았다. 역대의 대통령 중 일본 수상과 이렇게 친분을 쌓고 의기통합했던 사람은 없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경제성장만으로는 안 된다.
국민의식이 선진화돼야 한다. 일본과의 과거를 극복하고 승화시킬 수 있어야 의식이 선진화되는 것이다.
https://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510 2022.8.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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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제대로 알았던 한국 정치인과 기업인들
한국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정치인이 있었다. 박정희, 김대중, 김종필, 박태준, 전두환, 권익현 한일의원연맹 회장, 이병철 삼성 회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일본을 제대로 알고, 협력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용했던 이들이었다. 1965년 한일국교 수립 당시 일본의 원로 정치인들은 한국의 젊은 장교 출신 혁명세력들에 대해 ‘유신지사’의 풍모를 느꼈다는 말이 있다.
그들의 당돌함(?)함이 일본 정치인들에게는 ‘어필’된 듯싶다. 박정희 정권은 어찌 보면 일본을 제대로 ‘이용’ 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시기 김대중 역시 일본을 이용(?)했다. 1972년 가을 김대중은 고관절 치료를 위해 일본에 가 있는 동안 한국에서 유신헌법이 통과 되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선포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계엄령 선포는 반민주적인 조치이다. 나는 민주적 자유를 원하는 조국의 동포들과 더불어 기필코 박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저지할 것이다.” 김대중은 귀국을 미룬 채 일본에 머물면서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반독재 민주화투쟁 전면에 나섰다. 일본어가 유창했던 김대중은 일본말로 한국의 ‘유신체제’를 강력하게 성토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때나 김대중 사형판결 때 오히려 김대중을 적극 옹호하고 구명활동을 했던 이들은 바로 일본의 정치인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친일파’라는 단어가 ‘반일매도’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우파에서조차 일부는 일본 정치인을 말할 때는 접두어처럼 ‘극우’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을 잘 알고 일본을 이용할 줄 알았던 정치인들이 이제는 없어서일까?
겉으로 드러난 정치인 외에 막후에서 한일관계를 훌륭하게 조율한 인물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의 세지마 류조(瀨島龍三)다. 그는 나카소네 총리가 대한(對韓) 경협차관 40억 달러 제공을 결정하는 데 숨은 조력자다. 당시 일본 재계에서는 한국이 적화되면 일본도 위험하다는 불안감에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언론에서는 세지마 류조를 ‘현해탄의 밀사’라고 부른다. 중요한 시기마다 세지마 류조가 한국과 일본을 연결했기 때문이다. 1990년 월간조선 8월호에는 전두환과 세지마 류조의 만남을 이병철 회장이 연결한 것으로 나온다.
1980년 3월경 이병철 회장이 세지마 류조에게 “한번 조용히 한국에 와서 전두환, 노태우 장군에게 좋은 충고를 해주었으면 한다”면서 “경제관계의 문제도 있을 것이니 도큐(東急) 그룹의 고토(五島昇) 회장과 동행해주었으면 한다”고 요청하고 같은 해 6월 두 사람은 서울에 와서 신라호텔에서 권익현 씨의 안내로 전두환 노태우 두 장군을 만났다는 것이다.
세지마 류조의 조언으로 한국에서 무역 종합상사 설립이 구체화 되는 과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1974년 이낙선 상공부 장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세지마 씨는 ‘한국에서의 종합상사 설립에 대한 계획서’를 제출했다.
이듬해 정부는 국내기업의 건의서와 ‘세지마 계획서’를 참고해 ‘종합상사 지정요령’을 공포, 종합상사 중심의 수출전략을 채택했다. 1975년 상공부는 삼성물산과 현대종합상사, LG상사, 대우인터내셔널, 효성물산 등 7개사를 종합상사로 지정했다.
세지마 류조는 이병철 회장과도 절친이었다. 삼성물산이 종합상사로 탈바꿈할 때 이병철 회장의 부탁으로 세지마 류조는 이토추상사의 부장급 4명을 삼성에 파견해 무역 업무를 도와주기도 했다. 70년대 한국 정치인에게 일본 대하소설 ‘대망’이 필독서였다면 80년대 기업인들에게는 일본 소설 ‘불모지대’가 필독서였다.
소설 ‘불모지대’의 실제 모델이 바로 세지마 류조였다. 당시 삼성 임직원은 ‘불모지대’를 읽고 독서발표회도 가졌다고 한다. 1986년 월간조선 9월호는 세지마 류조에 대해 자세하게 보도했다.
세지마 류조에 대한 첫머리는 “나카소네의 제갈량으로 국가 재편성에 참여, 일본 보수화의 책사 역할을 하면서 한일간의 새 파이프라인으로서 권익현·박태준·이병철 인맥을 창구로 하여 원대한 대한(對韓)작전을 펴고 있다”고 말한다.
1983년 1월 나카소네총리 방한 전 먼저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사전 조율한 인물이 바로 세지마 류조였다.
출처 : 미래한국 Weekly(http://www.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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