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버드가 적의 손에 넘어갔으니 이제 황도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적이 황도에 진입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낫셀이 자신에게 각 지방 영주들을 블랙버드로 집결시키자는 청원을 하였을 때 눈치챘어야 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 없게 되어버렸다.
“블랙버드가 뚫렸단 말인가! 이제 이대로 나의 여인제국 건설의 꿈은 사라진단 말이냐! 안된다! 나의 이상이 이대로 좌절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남자들의 씨를 말리고 여인들로만 구성된 제국의 건설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그대들 여인부의 관원들은 모두 이곳 여인부에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라! 나는 황제를 확보해야겠다!”
이미 마우스실버는 이성을 잃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고 또한 자신의 심복들이라 할 수 있는 여인부들의 앞이라 해도 감히 황제를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황제를 향해 무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쓸 경황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 황제를 인질로 잡으려는 심산이었다. 어차피 어린 허수아비 황제였고 실권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던 터였다.
안드레스의 성격상 비록 역모를 꾀해 황제가 된 트리스탄이었으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자신의 5촌 조카였으니 죽일 생각은 없을 것이며, 그러니 어린 황제 트리스탄을 인질로 삼아 위협한다면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가고 또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여인부의 여인들은 최후의 항전을 각오하며 마지막이 될 구호를 외쳤다.
“여인부 만세! 마우스실버 백작님 만세!”
“사내가 없는 여인들만의 제국 건설의 꿈이여! 영원하라!”
어느덧 황도 라도니아를 비추던 태양이 그 빛을 잃고 저물어 가고 있었다. 황태자 안드레스가 이끄는 대군은 블랙버드에 당도하였다. 그의 예상대로 모든 것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낫셀은 안드레스의 모습을 보자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고 기사로서 주군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전하! 신 낫셀 디 라이오스, 전하의 명을 받잡아 마녀를 추종하는 간악한 역도의 무리들을 척살하였으며, 또한 전하를 따라 거사에 가담코자 하는 의로운 영주들을 규합하였나이다!”
낫셀과 새로 가담한 영주들의 앞에 말을 타고 나타난 한 사나이. 그는 황금색 투구에 황금 갑옷으로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안드레스 리페 오스트리치 제국의 황태자이자 오늘 이 거사의 주역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제왕의 풍모를 목도한 영주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영웅이라면 반드시 대업을 이뤄 용상에 오를 것이라는 예감이 뇌리를 스치게 된 것이었다.
“낫셀 경 그대의 노고가 실로 컸도다. 내 어찌 그대의 공적을 잊을 수 있으랴. 그대야말로 이 거사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도다. 나 안드레스는 제국의 황태자로서 황실을 대표하여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파격적인 찬사였다. 낫셀이 행한 일은 그정도로 거사에 큰 도움이 되는 결정적인 일이었다. 안드레스와 낫셀 사이에 맺어진 맹약에 의한 작전. 사실 그것은 그 둘과 슬레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몰랐던 극비중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전략이었다.
그것이 갖는 의미는 실로 컸다. 블랙버드를 제압했다는 것은 곧 황도 진입의 통로를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이제는 그대로 황도를 습격하는 일만을 목전에 남겨두고 있는 셈이었다. 안드레스는 마지막으로 모두를 독려하고자 하였다.
“여러 영주들이 나를 돕겠다 하시니 오늘 내가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그대들의 용기와 의로운 결정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그대들의 명예로운 이름이 제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외다! 나 안드레스 리페 오스트리치는 제국의 황태자로서 빼앗긴 용상을 되찾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반드시 그대들을 공과에 걸맞는 보상을 할 것이오!
허니 이곳에 모인 영주들과 기사들, 또한 자랑스러운 나의 군사들! 모두가 나를 따라 영광의 승리를 맛볼 것이외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기사들은 종전의 진형을 유지하고 영주들은 각기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도록 하시오!
자, 자랑스러운 제국과 나의 군대여! 황도를 탈환하여 역적 도당을 벌하고 마녀의 수급을 베러 가자! 모두 출격하라!”
이것으로 드디어 황도 진입이 시작되었다. 5000여년 세월을 제국과 함께 해온 제국의 황도 라도니아에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할 싸움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안드레스 진영의 군세는 그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이에 비하여 황도 측의 군대는 이미 너무도 큰 타격을 입은 터에 제대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대의명분하에 일어난 안드레스의 군대는 황도 진입 불과 3시간만에 황도에 주둔하던 군대를 섬멸할 수 있었다. 제국력 5015년 6월 20일 밤 10시 경의 일이었다.
안드레스는 이제 황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황도를 지키던 실질적인 병력은 모두 패퇴하였으므로 황궁을 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와도 같은 일이었다. 불과 50여 미터나 될까, 눈앞에 그 모습이 명확히 드러나 있는 황궁의 모습을 보는 안드레스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저기 저곳에 있는 황궁이 바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신이 살던 바로 자신의 집이었다.
탄생부터 어린시절의 추억이, 또한 황태자의 책봉을 받던 기억이, 성년이 되어 지내던 청년기의 자신의 인생이 담겨져 있는 곳이었으니 다른 기사들이 황궁을 바라보는 심정과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뿐이던가. 자신을 낳아주신 어머니. 모후이신 태후께서 바로 저곳에 계신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잊고 살아온 모자의 정이 다시금 새록새록 살아나고 있었다. 어느덧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맑은 한방울 액체가 그가 타고 있던 말 안장에 떨어졌다.
슬레인 또한 어찌 가슴 벅찬 흥분에 빠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지금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어서 자신의 주군을 용상에 오르게 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전하! 경하드립니다. 이제 바로 황궁이 목전에 있나이다. 전하께오서는 우선 태후마마를 찾아뵈어 마마의 윤허를 얻어 적법한 절차에 의거하여 용상에 오르시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것이 법도에 합당한 절차일 것입니다. 마녀를 포박하여 압송하는 것과 여인부의 잔당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명해주시옵소서! 전하께서는 그것을 명하시고 태후마마를 속히 찾아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슬레인은 한치의 빈틈조차 없이 거사의 일정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미 어느 시점에서 어떤 일을 행해야 하는지를 완벽하게 계획하고 있었다. 슬레인 디 하이거, 그야말로 오늘 이 거사에 없어서는 안됐을 인물이었다. 본래 직업은 마법사이지만 온갖 학문과 병법에 통달하여 안드레스 진영의 군사전략가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슬레인의 말을 들은 안드레스는 곧이어 다시 한번 명을 내렸다.
“나의 기사들이여! 이제 대업의 달성이 목전에 달하였도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자 나의 기사들이여! 곤잘레스!”
안드레스는 곤잘레스의 이름을 호명하였다. 사실 지금까지 곤잘레스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편이었다. 이렇다할만한 큰 공을 세우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용병 출신이다보니 쟁쟁한 기사들 틈바구니에서 쉽사리 공적을 올리지 못하였던 터였다. 그런 그에게 공을 세우게 해주고자 하는 배려였다.
“예! 전하! 신 여기 있나이다! 하명하여 주시옵소서!”
“그대는 여인부를 장악하고 여인부의 간악하고 음탕한 계집들을 모두 척살하라!”
“예! 존명!”
곤잘레스에 이어서 다음 명령을 받은 기사는 리안이었다.
“리안!”
“예! 전하! 신 리안 디 루비스 전하의 곁에 있습니다!”
“지금 마녀 마우스실버 디 조이는 분명 어린 황제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대는 마우스실버를 생포하라! 마녀를 죽여서는 안된다. 마녀의 죄상은 내가 친국할 것이니 반드시 생포하도록 하라!”
“신 리안 디 루비스, 목숨을 걸고 반드시 전하의 명을 완수하겠나이다!”
“슬레인 경과 다른 기사들 및 영주들은 이곳에 남아 병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고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일에 대비한다! 또한 사자왕과 나르나스 경은 황궁의 후문과 그 일대를 장악하여 혼란을 틈타 도주를 시도하는 역적의 잔당들을 처단하라!”
거사의 마무리를 짓는 마지막 명령과도 다름이 없었다. 안드레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일거에 입을 모은 듯이 동시에 존명의 대답을 하자 그 소리가 웅장하였고 천지를 진동시킬 듯 하였다.
곤잘레스는 즉각 자신의 용병대를 이끌고 여인부를 습격하였다. 이때 여인부의 관원들은 회의실에 모두 집결해 있는 상태였다. 곤잘레스는 용병대의 선두에 서서 여인부 회의실 문을 부수고 쳐들어갔다.
“이 더러운 년들!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은 이 곤잘레스가 너희 더러운 계집들을 처단하고자 왔노라! 크하하하하하하하!”
우락부락한 용병 곤잘레스. 온몸이 우람한 근육에 뒤덮혀있고 그에 걸맞는 투박한 철퇴를 들고 나타난 그의 모습에 여인부 관원들은 겁에 질렸다. 그러나 곧 한 여성이 나머지 여인부 관원들을 독려하고자 선동을 하였다.
“여인부의 자랑스러운 여성들이여!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해 싸우자! 더러운 사내들의 씨를 말리고 여인들만 사는 제국을 건설하자!”
“여인부 만세! 여인 제국 건설 만세!”
무엇이 이 여인들을 이토록 몰아간 것일까. 이들은 남자들을 모두 죽여 없애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곤잘레스를 더욱 분노에 휩싸이게 만드는 도화선과도 같았다.
“이 더러운 마녀의 주구들을 모두 죽여라!”
곤잘레스는 힘찬 명령과 함께 자신이 먼저 선두에서 여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철퇴가 춤을 추듯 사방팔방을 휘돌았고 철퇴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피가 터지고 흘러내렸다. 그의 손에 걸린 여인부 관원들은 대부분 머리통이 으깨져서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여인부를 전멸시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개중에서 혼란을 틈타 도주를 시도한 자들도 몇 있었지만 황궁 후문에 배치되어 있는 사자왕의 군대에 의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여인부의 잔당을 완전히 소멸시킨 곤잘레스의 온몸은 피와 땀으로 뒤범벅되었다. 이것으로 마우스실버를 제외한 여인부 전원을 제거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와 같은 시점 리안은 황궁 중에서도 중심부인 황제의 집무실을 향했다. 황제의 집무실답게 화려한 샹들리에 장식과 호화로운 융단 등 호화로운 곳이었다. 명색이 제국의 지존이 기거하는 곳이었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호화로운 집무실 안쪽에 황제가 좌정하는 푹신푹신한 고급 쿠션이 들어있는 의자, 즉 용상이 보였다. 황제가 되는 것을 용상에 오른다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어린 황제, 아니 황제라고도 하기 힘든 힘없는 허수아비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 경원대공 트리스탄 리페 오스트리치는 용상에 앉아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표범왕 베르도를 충돌질하여 용상을 찬탈하고 제국의 실권을 장악, 또한 여인부라는 고금의 전례를 통틀어 그 유래가 없는 조직을 창설, 성거래특별법이라는 허무맹랑한 법을 시행시켜 제국을 혼돈에 빠져들게 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희대의 마녀 마우스실버가 서 있었다.
리안과 리안이 지휘하는 몇 명의 병사들 그리고 트리스탄, 마우스실버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병사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대치하였다. 무엇이 그토록 자신감을 주는 것인지 마녀 마우스실버는 은근한 미소까지 띄우며 리안을 맞이하였다.
“그대가 바로 암흑의 기사 리안 디 루비스인가! 그대가 바로 내 호의를 거절하고 자신의 주군에게로 돌아간 그 자로군. 후후..”
이 말이 지금 허수아비 황제와 마우스실버를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에게는 실로 치명적이었다. 눈앞에 선 검은 갑옷의 기사가 바로 그 명성도 높은 암흑의 기사라니 그들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맛보았고, 자연히 싸울 마음도 사라졌다. 그러나 바로 그 암흑의 기사 리안은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히 그리고 아주 서서히 자신의 칼을 마우스실버가 있는 곳을 향하였다.
“그렇다. 내가 바로 제국 황태자 전하의 기사, 리안 디 루비스이다. 네 년이 바로 제국을 망치고 사내들을 핍박한 마녀로구나. 독랄한 심성만큼이나 용모 또한 추악하구나.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주군의 명을 받아 대역모반의 죄인을 포박하겠다!”
기세 등등한 리안의 외침에도 마우스실버는 아직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소리 높여 음산한 웃음소리를 내기까지 하였다.
“깔깔깔... 사내들이란 족속은 하등하기 짝이 없어 존재 가치가 없었기에 나의 이상을 위해 싸웠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내가 준 재물과 미녀들을 마다하고 너의 주군에게 붙어있느냐?”
“일일이 상대하기조차 귀찮은 질문이로다. 정숙한 여인이 두 지아비를 섬기겠느냐. 이와 마찬가지다. 진정한 기사는 두 주군을 섬기지 않는 법이다. 이제 나의 칼을 받아라, 악랄한 마녀여!”
이 말을 끝으로 리안은 마우스실버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쪽은 악마의 힘을 빌어 제국을 혼돈에 빠뜨린 희대의 마녀이고 또한 다른 한쪽은 검은 갑옷, 검은 투구, 검은 망토에 검날마저 검은색의 검을 휘두르는 잔인하고 냉혹한 어찌보면 마녀보다 더 두려운 암흑의 기사였다. 어찌보면 서로가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는 듯 하였지만, 오늘 이곳에서 둘은 생사를 건 결투를 하고 있었다.
리안이 검은색 일변도의 무장을 갖추기도 하였지만 적에게 일절 인정을 베푸는 일이 없으며, 또한 그 표정이 항상 일관되어 웃는 모습을 본 자가 없었기에 암흑의 기사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항간에는 그가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그저 냉혈한일 것이라는 풍문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추측해 낸 오해였을 뿐이다. 그는 진정한 기사였으며, 또한 제국과 주군을 위한 뜨거운 충절을,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대장부였다. 이것은 이미 미츠힐 영지에서 루페르스의 회유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주군에게로 돌아온 일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젊은 사내에게 최고의 미인 50명을 준다고 하면 누군들 흔들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리안은 그것마저 뿌리친 진정한 기사도의 전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