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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겉옷에 담긴 비밀(3)
읽을말씀: 삼상2:18~19
주제말씀: 삼상2:19
“그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슨(Nathaniel Hawthorne)이 쓴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이 있습니다. 내용인 즉은 남북전쟁 직후,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을 듣습니다. 어니스트는 그런 사람을 빨리 만나보았으면 하는 기대 속에서 자신 역시 어찌하면 큰 바위 얼굴처럼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돈은 모았으나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상인, 정력과 의지는 있으나 온화함이 결여된 장군, 말은 잘하나 따듯한 사랑이 모자란 정치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노래하는 재능은 있어도 말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도시의 시인을 차례대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중 어느 누구도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인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자리에서 사람들은 그와 큰 바위 얼굴이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자라가고 있습니까?
* 한나의 아주 특별한 자녀교육법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삼상2:18,19)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 믿음의 여인 한나(Hannah)는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아들 사무엘을 교육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매년 드리는 제사(매년제)를 드리러 그의 남편 엘가나와 함께 실로에 올라갈 때마다 자신의 아들 사무엘에게 ‘작은 겉옷’(a little robe)을 손수 지어 입힘으로써 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19절)
사실 아이 사무엘은 당시 제사 집례자가 입던, 즉 제사장만이 입을 수 있던 제의용 옷인 ‘세마포 에봇’(18절) 외에, 매년 그의 어머니 한나가 손수 지어 가져왔던 ‘작은 겉옷’(19절)을 입고 지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 같이 작은 겉옷을 손수 지어 입혔으며, 또한 그 겉옷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작은 겉옷은 과연 어떤 종류의 옷이었을까요? 이는 정황상 제사장들이 에봇에 받쳐 입던 ‘에봇 받침 겉옷’(또는 세마포 겉옷)으로 추정됩니다. “너는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하되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 같이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그 옷 가장 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놓고 금방울을 간격으로 두어 달되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방울, 한 석류, 한 금 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출28:31~34)
이 ‘에봇 받침 겉옷’(히, 메일 하에포드)은 ‘에봇의 겉옷’이라는 뜻이나 에봇 안쪽에 입는 옷으로서, 에봇 위에 입지 않고 에봇을 받쳐 입는 옷이었습니다. 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옷인데 하단부에는 (경건한 행동과 엄숙한 마음 자세를 갖도록) 석류 자수와 금방울이 교대로 부착되어 있어서, 제사 집전 시 제사장이 어떤 행동을 취할 때마다 방울 소리가 올리게 되므로, 보다 신중한 태도를 갖도록 해 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겉옷은 세마포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세마포 겉옷’으로 일컬어졌으며, 종종 왕이나 귀족처럼 신분이 높고 권력 있는 자들이 입는 옷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때는 대개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독특한 옷단으로 그 테두리가 장식되어 있었구요. “다윗과 및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의 우두머리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대상15:27)
* 사무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들을 바라보다!
“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삼상2:19)
그렇다면 한나는 왜 벌써부터 사무엘에게 이런 겉옷을 지어 입히기 시작한 것일까요? 무슨 생각을 가지고서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하실 일들을 깨닫고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그녀는 하나님께서 장차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타락한 종교와 신앙을 회복시킬 제사장, 또한 왕이나 선지자 등과 같은 (하나님 앞에) 존귀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될 것임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는 후일 제사장 엘리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재차 확인되었구요.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니라...”(삼상2:35)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의 여인’ 한나처럼,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 자신 (또는 자녀들을) 통해 행하실 일들을 깨닫고 있습니까? 또한 이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나아가고 있습니까?
한편, 사무엘은 이 같은 한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분명 자신을 끊임없이 잊지 않고 기억해 준 어머니 한나에게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고, 또한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되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했을 경우 (물질적 풍요와 상관없이) 늘 불안해하고 초조해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아이 사무엘은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자신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아주 특별한 사람임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과 달라야 해, 같아선 안 돼. 오히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살아야 해.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특별한 사람이니깐!’ 사실 한 사람이 됨됨이는 그의 정체성(identity)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즉 자신을 ‘특별한 사람’, ‘존귀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렇게나 막 살게 되지 않지만, 반면에 자신을 ‘패배자’, ‘낙오자’, ‘루저’(loser)라고 간주하는 사람은 날개 없는 추락이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진배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한나는 매년 이 같이 작은 겉옷을 손수 지어 입힘으로써, 아이 사무엘을 늘 격려했으며 그의 사명감 역시 고취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사무엘 역시 매일 입는 ‘작은 겉옷’을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 나갔던 것이구요.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의 여인’ 한나처럼, 하나님께서 장차 내 자녀를 통해 행하실 일들을 깨닫고 있습니까? 또한 믿음의 눈으로 내 자녀를, 내 학생들을, 내 제자들을, 내 배우자를, 내 가족을 바라보면서, 부지런히 그들을 격려하고 세워나가고 있느냔 말입니다.
* 무엇을 입느냐에 따라서...
아마도 그녀는 (삼손의 부모처럼) 아이 사무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삿13:12)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눅1:66)라는 기대감과 함께 말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녀에게 한 가지 지혜를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작은 겉옷’이었던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입는 옷이었을까요? 사실 사람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종류에 따라서 그 생각이나 태도, 행동거지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대개 트레이닝복에 운동화를 신으면 그 활동이 자연스러워지는 반면, 정장스타일에 구두차림이면 조심스러워지곤 합니다. 청바지에 단화를 신으면 활동성이 확보되는 반면, 스커트에 힐을 신으면 상대적으로 조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복이나 교복을 입는 경우와 사복을 입은 경우 말이나 행동, 마음가짐 면에서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신분과 지위, 정체성 등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무엇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양식이 결정됩니다.
요셉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야곱이 17세 소년 요셉에게 입혀준 ‘채색옷’ 역시 한나가 어린 사무엘에게 지어 입혔던 ‘작은 겉옷’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창37:3)
물론 형들은 이 채색옷을 요셉에 향한 야곱의 노골적인 편애의 산물로 간주되었지만, 야곱과 요셉 두 사람에게는 남다른 의미의 산물이었음이 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즉 야곱은 요셉이 장차 하나님 앞에서 큰일을 행할 인물임을 직감한 채 그에게 특별한 옷을 지어 입혔을 것이며, 요셉 역시 그 채색옷을 볼 때마다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요셉의 채색옷은 ‘비싼 옷’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참고로, 요셉의 채색옷이 어떤 식으로 특별했는지, 곧 색이 화려했는지, 아니면 천, 직조 방법 혹은 가장자리나 소매의 기장이 달랐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옷을 묘사하는 히브리어는 여기서만 사용되고 있을 뿐, 다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자녀, 배우자, 제자, 성도들에게 ‘작은 겉옷’ 내지는 ‘채색옷’을 지어 입혀주고 있습니까? 물론 그런 것들을 실제로 지어 입혀주자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 속에 담긴 몇 가지 지혜를 빌려 쓰자는 것뿐입니다. 무엇 말입니까? 지속적인 격려와 칭찬, 그리고 끊임없는 신뢰와 지지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위대한 사람의 탄생 뒤에는 항상 칭찬하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의 CEO이었던 젝 웰치는 어릴 적에 그다지 잘하는 것도 없고, 말까지 더듬어서 항상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심하게 놀림을 받고 의기소침해진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말을 더듬는 것은 네 두뇌가 다른 사람보다 너무 빨리 돌아가서 그 생각을 입이 따라가지 못하는 거야.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네가 탁월해서 그런 거란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젝 웰치의 부모처럼, 항상 칭찬하고 늘 격려하고 있습니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말입니다. “너는 아주 특별한 아이야. 설령 말을 조금 더듬고, 행동이 조금 굼뜨고, 공부에서 조금 뒤쳐진다고 해도,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야 오히려 네가 탁월해서 그런 거야. 하나님이 너를 지으시되 다방면에서 다재다능한 사람이 아닌 몇까지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지었기 때문이야. 함께 그것을 찾아보지 않겠니?”
* 또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창30:37~39)
또한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30:37 이하는 야곱의 재산 증식에 대한 기록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야곱이 한 행위는 가나안 목동들이 짐승들의 생식 욕구를 자극시킬 때 흔히 사용했던 방법으로, 오늘날의 안목으로 보면 일종의 미신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 같은 방법을 승인하셨습니다. 벧엘 언약에 근거하여 그 방법을 재가해주신 것입니다.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창31:11,12)
하나님은 꿈을 통해 야곱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악한 것을 보았다. 열 번이나 너를 속여 네 품삯을 주지 않았음을 내가 보았노라. 그러므로 눈을 들어 보라! 내가 라반의 가축을 빼앗아 야곱 네게 주리라.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 아롱진 것들은 모두 네 것이 되리라’(31:7,9,11,12)
약속을 받은 야곱은 어찌 했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즉 양떼들이 늘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여러 종류 나무 가지들을 세워 두고, 양들로 하여금 보고 또 보게 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창30:37~39)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매일 무엇을 그리 보고 또 보고 있습니까?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TV 입니까? 아니면 신문이나 잡지입니까? 명심하십시오. 사람은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혹 세상 향락과 즐거움만을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머지않아 우리 역시 그것들처럼 무익하고 썩어질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혹 세상 물질이나 명예, 인기 등만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머지않아 우리 역시 그것들의 노예로 전락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라도 돌이키시길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시선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눈을 들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히12:2). 또한 땅의 것이 아닌 위에 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오직 그분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마6:33).
명심하십시오. (물론 소설이기는 하지만) 주인공 어니스트가 매일 같이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큰 바위 얼굴을 닮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날마다 주님을 바라볼 때 그분을 닮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아울러 우리는 무엇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한 사람이 됨됨이는 그의 정체성(identity)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역시 상고해 보았습니다. 바라건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롬13:12). 또한 방탕하거나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를 벗어버리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롬13:13,14).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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