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불신… 저축률 10% 뒷돈·현금 거래문화 지하경제 확대 부추겨
베트남 중앙부처 말단 공무원 D씨(30). 대학 졸업 후 외국계 회사에서 잠깐 근무했다가 3년 전 공직(公職)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요즘 하노이 신흥 중심지인 쭝화(Trung Hoa) 지역에서 새로 월셋집을 찾고 있다. 이곳 아파트 월세는 30평대 기준으로 1000달러 안팎. 하지만 그의 월급은 200달러에 불과하다. "도대체 당신 월급으로 월세를 어떻게 내려고 하느냐"고 묻자, 그는 "월급(salary)은 적지만, 수입(income)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베트남에선 이른바 '보이지 않는 돈'이 움직이는 '지하 경제'가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최근 "베트남의 연간 지하경제 규모는 GDP의 15.6%로 5년 전(15%)보다 조금 확대됐다"는 자료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믿는 베트남인은 거의 없다. 이코노미스트인 레 당 조아잉(Doanh) 박사는 "최소한 GDP의 30%는 넘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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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찌민의 한 암시장에서 외국 돈과 현지 화폐를 환전하는 모습. 베트남 에서는 정부의 엄격한 외환관리 규제를 피해 암시장 거래가 성행한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베트남 지하 경제 규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베트남의 금괴(gold bar) 수입 실적. 지난 2001년 이후 베트남에 소매용으로 들여온 금괴는 약 600t. 그러나, 베트남 시중은행에 예치된 금괴는 고작 40t에 불과하다. 현지 일간지 뚜오이쩨는 "나머지 500여t, 시가로 약 150억 달러에 달하는 금괴는 장롱 속에 숨겨져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베트남인들의 뿌리깊은 은행 불신으로 민간 저축률이 10%대에 그쳐 "음지에서 떠도는 현금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분석도 나온다.
베트남 지하 경제의 상당 부분은 공무원과 기업인 사이에 오가는 '뒷돈' 문화가 지탱하고 있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평가한 지난해 베트남 부패지수는 180개국 중 128위. 호찌민의 모 한국계 기업 임원은 "공무원에게 주는 뒷돈은 인사치레가 아닌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털어놨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현금 거래 문화도 지하 경제 확대를 부추기고 있다. 베트남에선 웬만한 식당이나 상점에서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다. 지난 2~3년 동안 고가(高價) 아파트 분양이 줄을 이었던 호찌민에선 '검은 돈'이 시장의 큰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엣끼에우(viet kieu)'로 불리는 베트남 해외동포 자금도 지하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공식 송금액만 연간 8조원에 달하는 이들 자금은 부동산과 금 시장으로 흘러 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