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2018년 성탄절 메시지)
누가복음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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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탄생, 예수님의 오심을 축하하며,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간에 저는 친구 목사님으로부터 ‘기다림과 외면’이라는 제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가만 보니 나는 그분을 영접할 마음이 없다.
고통과 고난 속에 사선을 넘나드는 인생들과 여전히 죽고 또 살아나 또 죽어가는 그분을 받아들이기 참 어렵다. 이 추운 날, 굴뚝 위에서 노동자의 십자가를 짊어진 그분의 마음과 함께함이 두려워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분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셔서, 위험하고 고단한 일터의 상황을 세상에 드러내고 또 돌아가셨다. 그분의 수없는 죽음에 이젠 무감각해진다.
다시 죽어갈 수많은 이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세상을 향해 메시지를 보낸다. 그분은 언제나 저리 계시는데, 나는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며, 보고 싶은 그분은 어떤 모습으로 내 눈에 들어올 것인가? 정말, 기다리기는 하는 건가? 혹 다가온 그분을 외면하고, 호사스런 불빛 반짝이며, 오지 않아도 될 그분을 기다린다는 건가?’
이미 그분은 오셔서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오신 그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 욕심을 채워줄 우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이번 성탄절에는 빛으로 오신 그분의 임하심을 보고 느끼며 어두운 세상이 강요하는 모든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낼 수 있기를 기도하며,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 목자들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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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James Last가 작곡한 ‘Der Einsamer Hirte(The Lonely Shepherd/ 외로운 양치기)’라는 음악이 있습니다. 작곡가는 이 음악을 팬 플루트 연주가인 게오로게 잠피르에게 헌정했습니다. ‘외로운 양치기’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양치기의 현실은 목가적이거나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양치기라는 직업은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양을 가진 사람들이 목초지를 찾아서 매일 돌아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양을 양치기에 맡기고 일정의 급료를 지급했습니다. 양치기는 목초지를 찾고, 야영하고, 들짐승과 싸우고, 그것을 훔치려는 자들과 목숨을 건 혈투를 벌어야만 했습니다. 양치기와 개에 관한 프로그램에 나온 이야긴데, 오래전부터 양치기와 개는 연인처럼 친구처럼 한몸입니다. 안고 비비고 같이 누워 땅에서 잠을 잡니다. 양을 치러 갈 때엔 목엔 쇠로 만든 목줄을 매어주는데 표면에는 가시같이 뾰족한 것들이 있어서 개의 취약한 목을 보호해 줍니다. 그런데 숲 속에서 늑대와 사투를 벌이던 개가 죽습니다. 자신과 함께 온기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던 개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사랑하던 개를 잃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던 양치기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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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의 양치기는 사회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가진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당시 목자들은 자기의 양을 치기보다는 그 지방 부자들의 양이나 염소를 돌보기 위해 고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이 직업을 ‘정직하지 못한 직업’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목자를 고용할 만큼 많은 양과 염소를 소유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양과 염소가 몇 마리인지 알 수 없었으며, 몇 마리가 새끼를 배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기에, 목자들은 갓 태어난 새끼들을 주인 몰래 내다 팔거나 잡아먹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들짐승의 공격에 대해서 온 힘을 다해 양과 염소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 생명에 위험이 가해지면 양과 염소를 일정 정도 포기해도 주인이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이런 허점을 이용해서 들짐승의 습격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해서 몇 마리 빼돌리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대체로 묵인되는 세태였습니다. 그래서 계약기간이 끝난 후 목자를 고용한 이들은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양이나 염소를 빼돌렸을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고 내쫓기도 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유대인들은 목자를 정직하지 않은 직업, 정결하지 않은 직업군에 포함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실 당시 ‘목자’라는 직업은 천대받는 직업 중 하나였으며, 가장 낮은 자를 대표하는 이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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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치는 일은 오늘날 3D업종에 해당하는 직업이었고, 양치기는 각종 위험한 작업 상황에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은 삶이었으며,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저임금을 강요당하고 임금을 떼여도 항의는 고사하고 강제 추방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농민, 노동자, 청소부, 경비원……. 그들이 없으면, 살 수 없으면서도 그들을 외면하고, 능력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한다고 천시하는 사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낮고 천한 이들에게 천사들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의 비천한 자들과 낮은 자들을 위해 오셨음을 상징합니다. 소외된 자들과 지금 이 사회에서 낙오한 자들과 실패한 자들, 부당하게 손가락질당하는 이들에게로 오시는 예수님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이 예수님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오지 않아도 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예수님은 오셔서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신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오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성탄절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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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으로 오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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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중에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탄생과정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예수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다윗왕국과 같은 전성기를 이뤄줄 분이셔야 했기 때문에, 왕위를 이을 왕자가 태어나면 일상적으로 바치던 동방 박사들의 예물이 필요했습니다. 모세 전승에 서 있던 이스라엘에 왕으로 오시어 그들을 로마로부터 구원해 주실 분은 출애굽의 주인공 모세처럼 죽임을 당할 위협에 처해야 했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하신 일에 집중하고 있으므로, 예수님의 탄생이야기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영지주의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위한 책이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한마디 말씀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이에 비해서 누가복음은 세세하게 예수님의 탄생과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출생부터 마리아가 수태하는 과정과 마리아 찬가, 세레 요한의 출생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 상황 등이 세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유에 나셨다.’는 것까지 말입니다.
누가복음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으며, 그 역사는 바로 자신들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잉태하고, 호적 신고하고, 먹을 것을 위해 고단한 일을 하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으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의 일상으로 오신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곳, 저곳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으로 오십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역사에 일상에 오시는 예수님, 그분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대하는 바대로 교회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 한복판으로, 우리의 일상으로 오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구유로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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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는 가축의 ‘여물통’입니다. 우리는 어쩌다 ‘말구유’로 오해하고 있지만, 예수님 당시 ‘말’은 장군이나 권력가들이 타는 것이요, 그리 흔하게 일반 사람들이 키울 수 있는 가축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화에서 여물통에 눕혀진 예수님을 형상화했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는 그 상징성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여물통’에는 무엇이 담깁니까? ‘여물’이 담깁니다. 사람이 먹는 밥도 아닌 가축이 먹는 ‘여물’, 그런데 그 여물통에 예수님이 눕혀졌으니 가축들의 여물로 오신 것입니다. 여물의 역할은 뭡니까? 자신을 희생함으로 가축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가축을 키우는 일은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유로 오셨다는 것은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을 상징하는 동시에, ‘자신을 희생함으로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주시는 일은 하늘 뜻을 이어가는 아주 고귀한 일이지만, 보통의 사람들도 익숙한 여물통,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라면 친숙할 수 있는 여물통으로 오셔서 가난한 자들이나 부자나 모두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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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을 저술한 저자는 사도행전을 저술한 저자와 동일인으로 알려졌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작 연대가 61~63년인 점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이후에 탄생 이야기가 쓰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60년이 지난 시점에 쓰였으니 허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를 목격한 누가는 그분이 바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였으며, 그 관점에서 보니 그렇게 초라한 마구간 말구유에 오신 것도,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성탄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 것도 다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오신 후 2018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후에 읽습니다. 이천 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인류의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것을 읽어야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이요,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천 년 전에 오신 분으로 박물관에 모셔두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오늘, 지금, 여기로 오셔야 합니다. 그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 2018 성탄메시지
저는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손안에서 하나 되는 평화의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거짓 신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우리 안에 어둠을 몰아내길 바랍니다.
한남교회가 작아도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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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도들 드리면서,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라지만 말고 네가 해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왜 나에게 바라느냐?”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미루지 마십시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미루면, 제 친구 목사의 편지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 보니 나는 그분을 영접할 마음이 없다.
고통과 고난 속에 사선을 넘나드는 인생들과 여전히 죽고 또 살아나 또 죽어가는 그분을 받아들이기 참 어렵다. 이 추운 날, 굴뚝 위에서 노동자의 십자가를 짊어진 그분의 마음과 함께함이 두려워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분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셔서, 위험하고 고단한 일터의 상황을 세상에 드러내고 또 돌아가셨다. 그분의 수없는 죽음에 이젠 무감각해진다.
다시 죽어갈 수많은 이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세상을 향해 메시지를 보낸다. 그분은 언제나 저리 계시는데, 나는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며, 보고 싶은 그분은 어떤 모습으로 내 눈에 들어올 것인가? 정말, 기다리기는 하는 건가? 혹 다가온 그분을 외면하고, 호사스런 불빛 반짝이며, 오지 않아도 될 그분을 기다린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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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성탄절에는 아기 예수님을 마음 깊이 모시고,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에 큰 변화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