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관 시인>>
<<전영관 시인의 양력>>
* 1961년 충남 청양 출생.
* 2007년 하동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수상.
* 2008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에 시 당선.
* 2010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 2011년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
* 2014년 한성기 문학상 수상.
* 시집 : 『바람의 전입신고』,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 산문집 : 『그대가 생각날 때마다 길을 잃는다』, 『슬퍼할 권리』, 『이별과 이별하기』.
<<전영관 시인의 대표 시>>
그늘 제조법/전영관
불 꺼진 시장통로는 삼우제 끝난 상가 같다
어둠이 발목을 휘감으며 질겨진다
고양이가 떡집 좌판 밑에 웅크리고 이쪽을 응시한다
예민함이란 공포를 미화한 방패임을 들킨 듯
날카로운 동공을 세운다
손님이 놓고 간 생선가게 비린내가
통나무 도마 틈새에 남아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바람풍선은 척추를 접은 채 잠들어 있다
내복가게 마네킹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의 굳은 표정이 낯설지 않다
아침햇살 분주한 건널목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어둠에 익숙한 나는 습관대로 머뭇거리다가
낙타처럼 눈을 가늘게 떠본다
그늘이란 비겁한 경계나 완충지대가 아닌
마음의 빗장을 풀어도 괜찮은 침대 같은 곳이다
뒷골목으로 들어서며 번번 실패한 그늘 제조법을 아쉬워한다
어둠과 빛을 배합하는 연금술로 구전되었으나
자신만의 비방이 첨가되어야 휴식처가 완성될 것이다
제조법을 답습만 했을 뿐
나만의 방식은 한 행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늘은 몇 방울 빛으로 희석해서 제조할 수 없다는 증명이라며
형광등은 단번에 방을 밝혀버린다
어둠과 빛의 황금비에 추가할 비방은 아버지와 나란히 이마를 식히던
살구나무 둥치에나 남아 있을 것 같다
오늘도, 표정 없는 천장과 눈을 맞춘다
바람의 전입신고/전영관
가구들은 나보다 판단이 빠르다
체념을 발판삼아 한 걸음 먼저 적재함에 오른 표정을
악천후라고 기록해 둔다
나의 부탁대로 마지막까지 견뎠을 책상 나사못이
참을성을 뚫고 튀어나왔다 새벽의 관절이
나와 함께 삐걱거릴 때에도 자신의 자세를 지탱했을 것이다
기타는 끊어진 줄을 기다리느라 목이 더 길어졌지만
처음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비가 오면 함께 노래를 불렀었다
음표들은 방을 맴돌다 가라앉을 뿐 간벽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옆방과 등을 맞대고 사는 TV에게 배운 처세술이다
어깨를 좁혀 선반에 나란히 서 있을 수 있었던 책들을
마구잡이로 라면 박스에 포개 넣어버린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장르로 퀴퀴한 이론을 섞을 것이다
함지 몇 개와 냄비는 공복의 습성까지 가져가려는 듯 덜걱거린다
그 위로 노숙자 안색의 재떨이도 던져 넣는다
옷가지 몇을 챙기다가 습관적으로 무릎 구부리던
바지를 가방에 구겨버린다 구두는
오랜 눈치로 발을 감싸며 떨어지지 않는다
기사가 복부비만형 가방을 들어 준다
시동을 거는 순간 두 번을 함께 보낸 겨울이 부르릉,
진저리로 인사를 대신한다
구름은 나보다 사태파악에 둔하다
희멀건 얼굴로 하늘만 긁는다 전입신고서에 이번 주소지를
봄의 변방이라고 기록하겠다 전출지를 묻는다면
악천후의 중심이었다고 추가하겠다
침묵 - 未/12/전영관
기흉(氣胸) 든 것처럼
돌확만 한 몸통을 출렁거리며 사내가 운다
거미가 천장을 귀퉁이부터 염하고 있는 영안실
회칠한 벽의 균열들도 조문객처럼 머뭇거린다
울음소리에 익숙한 형광등은 시들어 가는 국화를
이곳의 예의라는 듯 파리한 안색으로 바꿔 놓는다
발인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새벽인데
두 장 넘겨지고 그만인 방명록을 본다
조문이란 마지막이란 뜻을 가슴에 음각하는 일
어른들 몰래 서리태 한 되를 참외와 바꿔 먹은 비밀결사였다고
네 어미와 손톱 밑 까맣던 소꿉동무였다고
동네 할머니들이 밭고랑 필체로 줄지어 섰다
마지막 줄에 너무 늦은 내 이름을 세운다
굳은살 두툼한 손이 된 친구와 다르게 사무원 필체의 내 이름이
서먹하게 읽히고 마음 한 자락도 접혀진다
향은 음습했던 생의 냄새들을 지워 보내는 방법
출렁거리는 친구의 등과 공명하듯 연기도 절룩거린다
어머니 영정은 양보다 순하게 웃고 계신다
양은 가죽이 벗겨지는 순간에도 침묵하지만
새끼를 부를 때는 소리를 낸다던데
젖먹이도 어미를 찾을 때에만 울음소리를 낸다 하던데
묵중했던 내 친구
가을밤에 푹 젖은 산이 되어서 운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혼자 듣고 달려왔다 한다
손만 잡고, 끝내 한 말씀 못하셨다 한다
쇠말뚝 하나가 출렁거리는 저 등을 관통하고 솟아올라
내 폐부까지 찔러버리는 것 같다
자원봉사/전영관
햇살도 동해(凍害) 입어 푸석하게 흩어져 버리는
4월엔 슬픔이 잘 만져지지 않는다
황사는 타클라마칸을 떠나온 유민처럼 부유하다가
잘못 찾아온 줄도 모르고 창틀에 모여 있다
그들의 입국신청서는 바람에 희석된 필체
방 안 얼굴들과 비슷한 풍화를 겪었다고 유추할 수 있을 뿐
봄비는 입국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이들의 언어를 투명한 가루로 건조시켜 버렸는지
실내에 퇴적된 정적은 깊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퇴락했지만, 한때는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 나갔고
사막의 내지(內地)에서도 물을 길어 올렸던 부족의 대표인 양
안간힘으로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예의란 늦은 봄 내복 같은 것
낯선 손님들이 진행하는 수순을 예견하고 있는지
각기 다른 문양으로 침식된 얼굴들이 한가지 시선으로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납작한 방석들은 폐허를 지키는 주춧돌
습곡처럼 변형된 담요를 들어 올리자
명예도 내력도 흔적으로 뒤섞이면 구분할 가치가 없다는 듯
오후 햇살에 살비듬만 반짝거렸다
4월엔 슬픔이 잘 지워지지 않는다
목욕탕엔 알몸으로 웅크린 몇몇이 익숙해지지 않는 표정으로
풍화암 절리 같은 척추를 드러낸 채
앞설 것 없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노을에 대한 강박(强迫)/전영관
돌이켜 보면, 내가 키운 짐승이다
시뻘건 아가리로 들어갈 것은 나의 회의(懷疑)뿐
나무들은 잎을 접고 어둠 속 하나로 뭉쳐지는 데
가로등은 거부 못할 일이라는 듯 환히, 머리를 조아린다
공포는 피하고만 싶던 방향에서 시작되는 법
서쪽만 바라보는 내 습성을 알아챈 저 짐승이
하구언 근처로 서식지를 결정했을 것이다
제 종족을 맞이하겠다고 도주하던 그림자는
가로등 불빛에 족적을 들킬 때마다 흔들린다
이미 몇몇을 집어삼켰다는 증거가 강물에 번들거리는 지금
가능한 도피 방법은 이 자리를 지키는 것뿐
역광으로 찬연했던 억새들이 허리 숙이고
홀로 선 버즘나무도 몸 떨며 제 잎을 떨어트리고 마는 것이
두려움 아니라 철 이른 바람인 까닭을
나는 밀려들 어둠이 황망해 알아채지 못했다
경계병처럼 하늘을 배회하던 구름이
저 짐승의 아가리를 짙은 윤곽으로 강조해 주지만
낭자한 출혈 끝에 먹히고 말 일
자신은 캄캄한 포만감으로 세상을 덮은 채 숙면하는 동안
응시하는 것 외에 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자들은
나처럼 웅크린 불면을 공물(供物)로 바쳐야 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저녁마다
나를 먹어 치우는 짐승을 사육하고 있다
아버지의 연필/전영관
풍구의 회오리가 가슴께를 후려친다
갈탄의 낭자한 선혈 사이로
피 맛을 본 강철이 달아오른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강철연필은 학력편차가 크다
몇 자의 비문만 학습한 경우가 있고
공덕문을 줄줄이 암기하는 실력파도 있다
까막눈 돌쟁이는 단지 내장된 글자들을
강철연필로 파내는 것뿐이다
거북이나 두꺼비를 만나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환절기에는 떠나는 사람들 많다
해마다 반복되는 덕분에 그의 한문 실력도
지명이나 이름자에 두각을 나타냈다
담금질로 단단해지는 것은 강철뿐
돌쟁이의 가슴은 반비례로 물렁해졌다
구부리는 법을 터득한 까닭에 굽실거렸어도
칠십 평생 부러지지 않았다 그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덕분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 적 있다
아버지는 물푸레나무들과 뒷산으로 올라가
겨우내 돌아오지 않았다
강철연필들은 처음으로 주인의 이름을 새겼고
얼어붙은 산 밑 저수지에서 떵떵
망치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찬물에 손이라도 씻는지 지난 봄에는 물푸레
푸른 물이 내려오기도 했다 오늘도
녹슨 강철연필들만 벌겋게 복습 중이다
旌 旋 全 公 重 鉉 之 墓
혼술/전영관
노인 문상 다녀온 사람과
악상(惡喪)에 울고 온 사람을 구분했던 거
인정한다
악수할 때 망인이 스미는 것 같았다
비탄의 온도
독성의 농도도 다르니까 망설이게 된다
생활력은 예민한 비겁함이다
목숨이 멈춰지지 않아서 하루를 밀고 다녔다
질투가 심해서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열등감을 느꼈다
전지가위에 아랫도리를 잘리고 비명 지르는 꽃
유리 화병은 그런 부위들이 보이고 소름 끼쳐서
도자기 화병을 샀다
단풍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노을을 퍼다가 나무에 붓고 싶었다
서녘까지 걸어갈 동행을 찾곤 했다
어디부터 거짓말했는지 다시 읽는 강박 때문에
일기를 중단했다
슬퍼 보인다면 이미 슬픈 사람이다
퇴근/전영관
생활의 의문이란
바람에게 행선지를 묻는 일
연애도 안부도 없이 상스러운 거리에는
돌아보면 눈빛 깊어지는 사람들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들
강이 먼 도시에 저녁이 오면 노을로 하루를 씻고
집에 돌아와 갓난쟁이의 맑은 이마에
순은의 별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아라
생계의 고단함을
아내의 흐트러진 귀밑머리에서 찾아보아라
습관성 후회란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직후에 스치는 아쉬움
잔 욕심의 이복형제 같은 것들일 뿐이다
다친 손가락 같이
실수가 잦은 오늘을 견뎠으니 애썼다
능란한 바람도 모퉁이에 무릎 다치고
운다
갈대밭에서/전영관
물오리가
유년의 바람과 숨바꼭질하다가
떨어뜨린 깃털
빛바랜 햇빛 한 조각 덮고
파르르 떨며 졸고 있네.
갈대숲 헤치고 닫힌 기억의 문 열면
감춰두었던 비밀들이
하얀 알에서 부화되어
성장통(成長痛)을 앓고
빽빽이 자란
이 욕망의 숲에서
나는 어떤 길을 내며 갈 것인가.
갈대숲에 바람이 불면
몸살을 앓던 젊은 날들이여
솟대로 올라 앉아
지금 어디를 향해 눈길을 보내고 있는지.
아직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연약한 몸이지만
발 디딘 곳은 튼실한 뿌리로 박혀있어
저 강물 물결도 일으킬 수 있는 힘은
너를 감싸 안을 수 있나니.
섬나리꽃/전영관
오래 정박할 수 없는
배 한 척 사랑한
노랑 나리꽃 하나
저 혼자
섬 언덕 위에 소리 없이 피어
기다리다 기다리다
혼자 지는 꽃
내려다보면
보이는 곳 모두 길인데
한 번도 섬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피었다는 것이
저리도 슬픈 꽃
섬 나리꽃
그래서 바다는
하루 종일 울고도
또 밤 새워 울고 있고.
바 람/전영관
솔숲에서 내려와
옥수수수염을 어루만지다가
토마토 방울을 흔들다가
꼬투리 속 강낭콩알 세다가
토란잎 위 물방울 모아
한 방울로 똑 떨어지네.
아직은
더운 여름이네.
불혹의 집/전영관
늦도록 야근이라도 했을까 두런두런
손 씻는 버드나무 야윈 팔 사이로
고단한 새벽만 우련하다
해쓱하게 마른버짐 핀 얼굴로 산은
종아리까지 발 담근 채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갈대들의 연두 빛 걸음걸이를 헤아리는 중인데
청태 자욱한 자갈밭에 드문드문
헤집어 놓은 자리들 뽀얗다 지느러미 뭉툭해지도록
거친 바닥을 밤 새 뒤척인 흔적이리니
세월이 잔잔하게 무두질한 강물도 속내는 그렇지 않아
우락부락 높낮이가 있고 마름과 줄풀의 허름한 자리도
예정되어 있으리니 철 이른 연밭
무진무진 찾아든 열사흘 달빛이 물안개와
결 곱게 버무려지면서 불혹의 집을 세운다
유혹 아닌 것 없고 흔들리지 아니한 순간도 없더라만
봄이면 구멍 숭숭한 연근 속으로 환한 꽃빛이 들어차고
미물들도 알자리를 저리 뽀얗게 마련하는 것과 같이
물푸레 손잡이 닳아지도록 날품팔이 아버지
망치질로 노임 채우던 소리의 깊이를
날계란 하나와 밀가루 한 움큼 계란떡으로 어머니
올망졸망 오남매 두레상으로 부르던 소리의 넓이를
철들은 줄 알았던 불혹의 어린 아들은
부지런한 아침볕이 짚어주는 물가를 따라가며
성긴 눈으로 가늠해본다
지금껏 어떤 터를 헤집고 있었는지
그 자리 오롯이 우리 식구 모여앉아 있는지
안부/전영관
멀리서 보면
울음과 웃음이 비슷하게 보인다
타인은 관심 없고
제 것만 강요하는 우리끼리 잡담한다
겸손한 척 거리를 두는 습관을
우아한 외면 혹은 비겁이라 조롱했다
우리들 하루란
칭병(稱病)하고 누운 사람을 문병 가는 일
잡아당겨보면 내부가 자명해지는 서랍처럼
거짓말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
돌아서 안녕이라 손 흔들어도
우는지 웃는지 몰라서 편안한 거리를
그대들과 유지하고 있다
귀촌/전영관
오후 네 시의 햇살은 손이 느리다
옆집 숟가락까지 챙기는 산촌의 오지랖처럼
호박이며 무와 가지까지 매만진다
당신은 등 돌리고 앉아 오가리들과 자분자분
비밀이라도 있는 듯 들췄다가
남이 들을까 가만히 덮고
여고 동창생 표정으로 내가 모를 것을 나눈다
겉마르기 전에는 탱탱했으니
사소한 것들도 내남없이 화려했던 날은 있는 것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귀촌한다고 우쭐대면서
진지한 척 머리로만 예행한다
조붓한 당신 뒷모습을 콩밭에 앉혀놨다가
주방으로 가는 걸음걸이를
파스 사러 읍내 나가는 길 위에 올려본다
서울 새댁 곱다느니 머리숱도 많다느니
허리 굽은 인사말을 붙이며 노인네들도 동행하겠지
읍내 나갔으니 중국집까지 들르겠지
아내는 콩밭에 앉히고 읍내 심부름이나 시키고
녹슨 보습만큼 게으른 나는
밭고랑과 씨름하다가 삽자루 팽개치고 씩씩거리겠지
멀찍이서 구경하는 이장에게 너스레나 떨겠지
군대에서도 삽질은 잘했는데
돌밭이라 삽이 먹히지 않는다고
도시에서 남용했던 핑계를 꺼내겠지
걸음 느린 햇살 아래 손부채질을 해대겠지
정선 몰운대/전영관
나무와 사람은 슬픔의 속도가 다를 것
투신할 것도 아니면서
새들의 높이에서 아래를 보면
사랑의 문장이 바람에 흩어지는 것 같아
아프다
나무의 슬픔은
천 갈래로 몸이 갈라지고 뒤틀리면서
백 년 동안 천천히 머무는데
어제의 상실과 몰락 따위를 한탄하였다
벼랑을 움켜쥐고 선 소나무는
몸피를 키우는 일보다
쓰러지지 않으려 뿌리만 더 굵어졌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것들이나 차지하려고 악력을 키웠다
건성으로 타인의 역경을 칭찬하듯
드러난 뿌리들을 감탄하였다
애련(愛戀)을 앓는 이에게 여기를 권하겠다
하늘을 우러르면 슬픔도 흩어질 것
백년 소나무 곁에 앉은 채로 풍장을 치러달라고
바람에게 부탁했다
지진/전영관
진앙으로부터 열다섯 걸음 안팎의
초록에 균열이 간다 예감한 듯
뭉게구름을 걷어내며 두어 걸음 물러나는
허공의 이마는 깊은 물빛이다
골목을 질주하던 작달비도 허벅지의 힘을 빼고
회화나무 꽃들이 한꺼번에 떨어진다
균열이란
철물점 차양 안에 고여 있는 낮잠을
몸 낮춰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땡볕과
밤마다 가로수에 붉은 빛을 숙성시키는 나트륨등의
은밀한 움직임이 드러나는 틈이다
이 강력한 사변에 대해 준비하는 자세란 다만,
진앙의 귀뚜라미를 생각하는 것
균열로부터 시작될 붉음을 기록하기 위하여
첫 행을 비워두는 일
느릅나무 양복점/전영관
물에 불려도 다림질해도
불거진 무릎은 제 모습을 찾지 못한다
책상에 문드러진 팔꿈치도 매끈함을 잃었다
펴지지 않는 어깨는 누가 두드려주나
봄에 적어놨던 산철쭉 주소와
기러기 울음을 채록한 악보를 주머니에 넣었는데
밑이 터져 버렸다 좋은 날 쓰려고 아껴두었던
함박웃음 몇 조각도 간 곳 없다
안색을 거들어주던 깃은 주저앉았고
단춧구멍은 채워도 삐걱거릴 만큼 헐겁다
아버지가 달아주신 채로 오십 년을 지나쳤으니
수시로 기워주시던 어머니도 팔순을 넘겼으니
알아서 새로이 장만할 때가 된 거다
느릅나무 그늘에 한나절 기다렸다가 맞춤으로
그림자 한 벌 챙겨 입고 돌아갈 참이다
파랑주의보/전영관
묵호항 어판장 지붕이나 두드릴까 죽변항 가서
포장마차 천막 들추고 난바다 이야기나 출렁거릴까
바람은 뭍으로 돌아가야 할 길을 엎어버린다
바람과 파도의 가계도 위에서는
나도 당신도 허약한 승객이라서
도동항 어느 방에 보퉁이처럼 무릎 맞대고
식은 칼국수 같은 오후나 달그락거린다
낡은 이불을 몇 번 더 덮어야 할지
소용없는 가늠이나 한다
바람과 파도처럼 남남이었다가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사람이 되기까지
누구를 흔들고 하냥 기다리게 했는지
서로 시선을 섞으면서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되짚어 보느라 조용조용 황망한 오후
내려오는 것/전영관
애인을 바꾸듯
이불을 도톰한 새것으로 덮었다
고양이도 잠자리를 발코니에서 침대로 바꿨다
서로를 껴안듯이 털이 조밀해졌다
얼음발톱을 가진 손돌바람이
제 세상이니 추위를 수긍하라고
허공의 솜뭉치를 쫓아버린다
기압골이 가팔라지는 절기라서
약속에 늦어 비탈을 내려가는 느낌이다
사진 찍힐 때 렌즈를 바라보는 마음은
실망이 감춰진 기대감 같은 것
그런 마음으로 새벽 알람을 설정하기로 했다
상강(霜降)은 충분히 학습됐는데
모르고 서릿발을 밟아서 바삭, 부서질 때
있는지도 몰랐던 죄책감이 엎질러진다
서리는 돋는데 내려온다고 표현한 사람을 생각한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까
실망도 감염되지 않는다
구부러진 채로 박혀 있는 못에게
벽이 끝까지 저항한 것이라서
허약함을 비관하지 말라고
포기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쓸모 있다며 거기에만 외투를 걸었다
그늘이 떠난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릿발이 물이 되도록 흐느끼고 있다
오늘/전영관
복권 사러가자는 말에 토 달지 않았다
거금을 도모하는 동업자의 묵계默契
함박눈과 벚꽃을 일등 상금으로
신이 전달해준다
일 년에 한 두 번은 일등에 당첨되는 셈인데
경제관념 모자라고 낭만이나 넘치는 신의 은유다
거기는 지폐가 필요 없고 앙갚음도 없을 테니까
지루한 천사들은 다이어트가 절실할 것이다
침침해서 눈 영양제 샀다
책에서 지혜라는 독이 나오는 것 같다
중독된 자는 남을 가르치려든다
해독하면 책을 쓴다
치킨보다는 삼계탕 먹기로 했다
다 벗었는데 다리 벌린다면 민망할 테니까
논어를 통독한 조리사가 발목을 묶었을 것이다
페미니스트로서 풀어주었다
생계라는 결박이 풀린다면
노을 지는 남태평양으로 뛰어가겠다
쓸데없이 다정한 신이
우리를 생의 이인삼각으로 묶었을 것이다
절뚝절뚝 늦게 도착할까봐
아내 앞의 닭다리도 풀어놓았다
기복/전영관
누군가의 갑질인 듯 이틀 내내 비가 내렸다
젖은 양말을 신으면 불행해진다던데
벗지 않고 다녔다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고춧가루통을 떨어트려 유리가 박살나고
바닥에 피멍처럼 번졌다
뼈와 피를 분리하듯 청소하는 동안
엎어질 것 같은 식초병을 잡아주었다
허둥거리는 알바의 등에 서리는 것들을
삼류무당처럼 바라보았다
옷가게 따라다니다가 다리아파서
진달래는 분홍 단벌인데도 아름답다 말했다가
혼자 지내게 되었다
라일락이 5월의 기억을 독점하는지
향기를 실컷 마셔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담배를 태웠다
맥박을 표절한 손목시계가 늦어지면
심장이 지쳤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벽시계가 자꾸 늦어져서 불안해졌다
손목시계와 엇갈리면 누군가를 놓치는 느낌이다
절망 실망 같은 것들보다
권태가 사람을 천천히 확실하게 죽인다
혐오는 희미한 두려움을 감추고 있다
퇴고를 거듭하다가 자신과 타협하는 시인처럼
지난 실수들을 덮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