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지리산에 총성이 잦아지고 있었다. 토벌대의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지리산 여기저기에서 요란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공중지원을 요청하는 지상부대의 통신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날아드는 공군기들도 요란하게 폭격을 하고 다녔다. 본격적인 토벌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접전(接戰)이 벌어지면 전투는 오래가지 못했다. 화력과 병력에서 빨치산은 토벌대의 공격을 견뎌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교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빨치산과 끌려갔던 일반 주민들이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작전 사흘째인 12월 4일이 되자, 여러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린 부대는 수도사단의 기갑연대였다. 연대 전방지휘소(CP)를 구곡산에 설치한 뒤 중산리골과 거림 지역을 압박해 들어가던 기갑연대는 거림 일대에서 적과 마주쳤다.
작전 개시일인 D데이를 앞두고 벌어진 악양 전투에서 수도사단과 한 차례 교전을 벌였던 빨치산들이었다. 남로당 경남 도당 직할 부대들과 이영회라는 인물이 이끄는 57사단이 거림골을 거점으로 삼아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악양에서 주민들로부터 쌀을 비롯한 곡식과 소 등 가축을 빼앗는 ‘보급투쟁’을 벌인 뒤 그곳에 들어와 있었다.
빨치산 간호병으로 활동하다 붙잡힌 김봉숙이라는 여성이 전라북도의 포로수용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1952년 11월 촬영돼 미 사진전문지 라이프에 게재된 사진이다. 당시 18세였던 이 여성은 전장에서 두 명의 국군 부상병을 정성껏 치료해준 일이 밝혀진 덕분에 정상이 참작돼 풀려났다.
당시 이들과 전투를 벌였던 기갑연대 연대장 이용(예비역 소장·교통부 차관 역임) 대령은 그때의 전투 장면을 이렇게 회고했다.
“후방에 있던 예비 대대까지 끌어들여 거림골 일대를 포위했다. 우선 공군 연락장교를 통해 경남 사천의 공군 부대에 무조건 소리가 크게 나는 폭탄을 우리 부대 장병이 대공포판으로 표시하는 지역에 떨어뜨려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있지 않아 F-51 편대가 날아와 거림골에 8발 정도의 폭탄을 투하했다. 온 산이 쩌렁쩌렁했다….”
그는 폭격이 가해지자 흰옷 차림의 농민들이 폭탄 소리에 놀라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이어 종이로 만든 확성기로 “총을 쏘지 않을 테니 빨리 빠져나오라”고 하자, 수백 명이 소를 끌고 부대 쪽으로 넘어왔고, 기갑연대는 남아 있는 빨치산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다.
기갑연대는 이 전투로 저항하는 빨치산 34명을 사살하고 510명을 생포했다. 붙잡힌 사람 중에는 빨치산에 끌려 강제로 입산한 일반 주민이 많았다고 했다.
지리산을 북쪽에서 조여오던 8사단 21연대도 공을 세웠다. 이들은 활발하게 게릴라 활동을 펼쳤던 전북 도당 소속 부대와 마주친 뒤, 현장에서 10여 명을 사살하고 도망치는 적을 추격했다. 적의 뒤를 쫓아간 21연대는 5일과 6일 이틀 동안 포위망을 더 좁히면서 빨치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때까지 벌어진 게 지리산 1기 전반기 작전이었다. 그 며칠 동안 토벌대는 163명을 사살하고, 626명을 생포했다. 총기는 47정을 노획했다.
우리는 붙잡은 사람들을 포로수용소로 바로 옮겼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사령부가 있던 남원과 광주 두 곳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어 놓았다. 나는 남원에서 이들이 도착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바로 산에서 잡혀 내려오는 사람에게서는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코를 막지 않고서는 옆에 다가갈 수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남침한 북한군 병력의 일부로 내려왔다가, 퇴로(退路)가 막혀 도망치지 못하고 결국 지리산으로 숨어든 북한 장병, 북한군 점령 지역에서 각종 조직에 가담했다가 보복이 두려워 산으로 도망쳤던 부역자, 빨치산에게 강제로 끌려다니면서 잡일을 도왔던 일반 주민들이었다.
6·25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게릴라 활동을 펼쳤던 이른바 ‘구(舊) 빨치산’은 눈에 잘 띄지를 않았다. 산속에서 활동한 경력이 충분히 쌓여 있어 요령 좋게 도망갔던 모양이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DDT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 강력한 살충제는 지금이야 사람 몸에 함부로 뿌리지 않지만, 당시로선 사람에게 기생하는 이를 잡는 데 최고였다. DDT의 흰 가루를 모두 뒤집어썼지만 포로들은 출신에 따라 말투와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북쪽 사투리를 쓰는 정규 북한군 출신은 간부 또는 군사부 소속일수록 사납게 저항을 했다. 압도적인 무력에 굴복은 했지만 마음마저 접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직접 군사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정치부 소속 간부들은 그저 목숨만을 구걸하는 데 바빴다.
아울러 전쟁 전부터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활동했던 남로당 출신의 입산자들은 간부일수록 비굴할 정도로 목숨을 구걸했고, 오히려 말단 전투원일수록 버티는 태도를 보였다. 매우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간단했다.
군사 분야의 정규 북한군 간부들은 고지식했던 것이다. 북한이 선동하는 ‘해방전쟁’의 정당성을 미련할 정도로 믿으면서 군인으로서의 강직함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 방면의 간부나 남로당 출신의 간부들은 겉으로 약한 척하면서 내면적으로는 깊은 이념의 뿌리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당장 목숨을 구걸하는 비열한 태도를 연출해 살아나간 뒤 나중의 일을 도모(圖謀)하려는, 한 단계 높은 꾀를 부렸던 것이다. 보통의 북한군 병사 출신들은 이미 전쟁이 주는 잔인함과 비정함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포기도 빨랐다. 그러나 지역 출신이면서 빨치산 하부를 이루고 있던 자진 입산자들은 이념이라기보다는 가족 등을 잃은 한(恨)과 복수심에 젖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골은 매우 깊어 보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