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외방 전교회
죽음 예감
글 김광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종교적으로 로마와의 계약, 그리고 포교상으로 우위권에 있었다. 당시 교황청 포교성성은 이런 종교상의 우위권을 분쇄하기 위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열을 이용하여 1658년 선교단체의 설립을 인준했고 1664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창립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아시아에 약 4천 여명의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그 가운데 170명이 한국에 파견이 되었다.그들은 파견지에서 평생을 현지인들과 똑같이 생활해야 했던 것이다.떠난 조국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오직 죽음으로 보답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던 것이다. 한국에 파견 된 신부들 가운데 24명이 새남터나 갈매못과 같은 처형지에서 순교한 것만 보아도 그들의 신앙의 역정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모두가 20대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아시아로 파견될 때 종부성사까지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포옹을 한뒤에 순교의 길을 떠난 것이다.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25년의 일이다. 이미 신유박해란 큰 군란이 한차례 지나간 다음 사제 없는 교회에서 사제를 파견해달라는 움직임이 있었다. 교황은 당시 프랑스 외방전교회에 조선에 파견할 선교사를 부탁했으나 조선에서 입국을 승락할리가 없었다. 조선으로 간다는 것은 죽으러 간다는 말과 동의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은 신부들은 용감하게 조선 땅을 선택했던 것이다. 건강하고 잘생긴 신부들, 참으로 아까운 인재들이었다. 갈매못에서 순교한 세 프랑스 신부들을 비롯해 1839년 기해년 박해 때 순교의 길을 택한 모방, 앵베르, 샤스탕 신부 역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이었다. 그들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고급교육을 받았고 상류사회로 진출할 충분한 여건이 갖춰있었으나 스스로 주님의 고난의 길을 택했다. 당시로선 미개한 동양의 한쪽 구석 조선이란 나라가 그들의 이상을 펼쳐보일 가치가 있었는가 하는 것보다 주님의 나라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 더 큰 가치였기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천주교에 입교한 조선의 신자들과 생명을 함께 했던 것이다.
작가 조창원 바오로 형제는 순교현장에서 문득 떠오르는 영상을 재현하고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기도했고 마침내 응답을 받은 것이다. 눈물과 감동으로 그린 그림, 그것은 이미 몇호짜리가 얼마냐하는 세속의 가치를 침묵시키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의 그림들에게는 알지 못할 주님의 음성과 생각과 행동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주여!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나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 당시의 신부님들의 비장한 얼굴과 각오들을 생각하면 우리들의 생각은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죽음으로 바꿀만한 세상의 가치가 더 어디 있겠는가.
"주여! 우리는 당신을 따라 죽으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