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 우리나라의 시인․교육가(1908~1967). 통영 출생으로 호는 청마(靑馬)이다. 유치진의 동생이다. 《문예 월간》에 작품 <정적(靜寂)>을 발표하고 등단하였으며, 생명파 시인으로 불린다.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시작(詩作)을 병행하여 통산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하였다
1908년(1세) |
경남 통영 출생, 1959년에 발간한 자작시 해설집(구름에 그린다)에서 내가 태어난 곳은 "통영"이라고 밝혔다. |
1918년(11세) |
11세까지 외가 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하다. |
1922년(15세) |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渡日, 부장[豊山] 중학교에 입학하다. |
1923년(19세) |
豊山중학교 4학년 때 한의원을 하던 부친이 다른 사업에 손을 대어 실패하자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하다. |
1926년(20세) |
동래고보 5년 졸업(제4회).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다. 이 무렵《참새》(통영 참새 모임회 간행) 제2권 제1호(4집)에 토막侍 「短歌」9편을 발표하다. |
1928년(21세) |
연희전문 문과 1학년 중퇴. 다시 일본으로 가서 사진학원에 다닌 일이 있다. 이 해 10월, 11세부터 알고 지내던 경성 중앙보육 출신인 같은 고향의 安東權氏 在順과 결혼하다. 이 무렵 일본 아나키스트 시인 다카무라 고오타로(高村光太郞), 쿠사노 심뻬이(草野心平) 등과 鄭芝溶의 詩에 감명을 받다. |
1929년(22세) |
귀국. 형 동랑을 중심으로 童心ㆍ推想兒ㆍ張春植과 함께《掃除夫》회람지를 발간. 長女 仁全 출생하다. |
1930년(24세) |
詩「靜寂」을《문예중앙》(제2호)에 발표. 차녀 春妃 출생하다. |
1932년(25세) |
평양으로 이주. 몇 달간 사진관을 경영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문을 받고 詩作에 전념하다. 3녀 紫燕 출생하다. |
1934년(27세) |
부산으로 이주. 이듬대(1935년) 화신 연쇄점에 1년간 근무하다. |
1936년(29세) |
일본 동경으로 떠나는 李箱이 부산시 초량동 집으로 찾아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다. |
1937년(30세) |
통영으로 이주.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다. 이 무렵 시동인지《生理》를 崔上圭ㆍ張應斗ㆍ廉周用ㆍ朴永浦ㆍ柳致祥ㆍ催社春ㆍ金玘燮과 함께 부산 동구 초량에서 발행(제1집은 7월 1일, 제2집은 10월 1일), 이후 5집까지 간행되었다 하나 확실치 않음. |
1939년(32세) |
12월, 『靑馬詩?』를 金素澐의 소개로 알게 된 화가 具本雄의 부친이 경영한 靑色紙社에서 펴내다. 시「旗ㅅ발」외 53편 수록. |
1940년(33세) |
3월.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 사임. 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濱江省 延壽縣 維新區로 이주. 농장 관리인 및 정미소를 경영하다. 제2시집 『生命의 書』에 수록한 「首」, 「絶命地」, 「광야에 와서」등의 뛰어난 시가 이 때의 소산이다. |
1945년(38세) |
6월 말 귀국. 통영 문화유치원을 부인이 운영하다(1950년까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다.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하다. |
1946년(39세) |
청년문학가협회 초대부회장. 이어 회장이 되다. |
1947년(40세) |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을 수상하다. 5월, 시집 『生命의 書』(行文社 刊)를 펴내다. 詩「歸故」외 59편 수록. 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이 되다. |
1948년(41세) |
3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 사임하다. 4월,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다. 9월, 시집 『청령일기』(행문사 간)를 펴내다. 詩「동백꽃」외 34편 수록. |
1949년(42세) |
5월, 시집 『??日記』(행문사 간)를 펴내다. 詩「深山」외 65편 수록. 이 무렵 시동인지 《駱駝》를 주재. |
1950년(43세) |
6ㆍ25동란으로 부산으로 이사. 문인구국대를 조직, 육국 제3사단에 종군하다. 1950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다. |
1951년(44세) |
9월, 시집 『老兵과 더불어』(문예사 간)를 펴내다. 詩「好天」외 33편 수록. |
1953년(46세) |
4월, 수상록『예루살렘이 닭』(산호장 간)을 펴내다. 경북대학교 문리대 강사를 지내다(1953~1954년). |
1954년(47세) |
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피선되다. 《대구매일신문》에 칼럼을 쓰다 (1957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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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피선되다. 《대구매일신문》에 칼럼을 쓰다 (1957년까지). 10월, 시집『靑馬詩集』(문성사 간)(시집 『祈禱歌』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가 합본으로 나옴) 詩 「落花」외 총 1백 11편 수록. |
1955년(48세) |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을 사임하다. 1월, 경주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다(1955~1958년). |
1956년(49세) |
3월, 경상북도 제1회 문화상을 수상하다. |
1957년(50세) |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되다. 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재피선되다. 12월, 시집 『第9詩集』(한국출판사 간) 간행. 詩「春朝」외 38편 수록. |
1958년(51세) |
2월, 아시아 재단 자유문화상을 수상하다. 12월, 『柳致環 詩選』(正音社 刊)을 펴내다. |
1959년(52세) |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재피선되다. 9월, 경주고등학교 교장 사임하다. 3월, 수상록 『東方의 느티』(신구문화사 간)를 펴내다. 12월, 자작시 해설『구름에 그린다』(신흥출판사 간) 펴내다. |
1960년(53세) |
예술원 회원 재피선되다. 12월, 시집『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동서문화사 간)를 펴내다. 詩「봄바람에 안긴 한반도」외 53편 수록. |
1967년(60세) |
2월 13일 하오 9시 30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로를 당함. 부산대학병원으로 가는 도중 사망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