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어쨌든 중요한 건 정성이지.
"독고환이 죽었습니다."
흑의를 입은 수하의 보고에 은색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눈을 크게 떴다.
"흡혈광마가? 그게 사실이냐?"
"정가장에서 서가장으로 가는 길목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사인(死因)은?"'
"고통에 몸부림쳤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만 외상은 전혀 없고, 독에 중독되지도 않았습니다. 뭔가 거대한 힘이 내부를 한바탕 휘저은 흔적이 미약하게 남아 있습니다."
"흐음......"
은색 장포의 중년인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거대한 힘이라...... 이를테면?"
흑의인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벼락에 맞아 죽은 것 같습니다."
"벼락? 외상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벼락에 맞으면 일반적으로 화상을 입는다. 뼈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으며 내장이 녹아 버리는 경우도 있다.
"흡혈광마가 워낙 강한 자라서 그런 듯합니다. 외상은 없었지만 죽은 흔적은 거의 벼락에 맞아 죽은 시체와 흡사합니다."
그의 수하가 그렇게 판단했으면 그런 것이다. 이런 일에 뛰어난 전문가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으니까.
"그럼 정말로 재수 없게, 지나가다 벼락을 맞아 죽었단 말이냐? 그 흡혈광마가?"
"현재 드러난 정황으로는 그렇습니다"
수하의 보고가 마무리되었다. 은색 장포의 중년인은 잠시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아. 조금 더 조사를 해보도록. 그리고 서가장이 멀쩡하다고?"
흑의인이 긴장한 얼굴로 보고를 시작했다.
"서가장 무사들은 대부분 살아남았습니다. 뛰어난 의원이 가세한 모양입니다. 반면 정가장과 염왕채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중년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시작부터 조짐이 좋지 않다. 구대흉마를 수하로 얻었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났다고 여겼따.
한데 첫 일부터 삐걱대고 있으니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게다가 구대흉마 중 하나를 얼토당토않게 잃었다.
"우리 말고 또 다른 비밀 세력이 있을지 모른다. 일단 서가장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말고 철저히 감시해. 분명히 서가장과 열결된 끈이 있을 것이다."
"서가장에 도움을 주는 의원은 어찌할까요?"
중년인은 고개를 저었다.
"알아서 해라. 아마 그놈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누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감시를 몇 명 붙이도록."
"존명."
중년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몇 번 휘저었다. 흑의인은 그 손짓에 고개를 깊이 숙인 후 물러갔다.
중년인이 입은 은색 장포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중년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거슬리는 놈들이 너무 많아. 하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모든 것은 내 손안에 들어오게 되어 있지. 언젠가 나는 저렇게 높은 하늘이 된다. 언젠가는."
중년인은 그렇게 중얼거린 후,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서가장은 결과적으로 정가장과 염왕채의 협공을 훌륭하게 물리쳐다. 단 한 번의 싸움이었지만 그 싸움으로 정가장과 염왕채는 크게 흔들렸다.
투입한 인원들 중 상당수가 죽거나 다쳐 불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서가장 무사들의 피해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다친 무사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아니 거의 모든 무사들이 크게 부상을 입었지만, 싸움이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 대부분이 거동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서무룡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진실이자 현실이니 믿어야 했다.
"그 약장수라는 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서무룡의 질문에 서가장 총관인 상문천이 대답했다.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사람을 붙였지만, 산으로 들어가는 순간 종적을 놓쳤다고 합니다."
"산이라, 산......"
서무룡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찾게. 어떻게든 찾아서 우리 서가장의 의원으로 삼아야겠네. 아니, 의원이 아니면 약사라도 삼아야겠네. 그자만 있다면 앞으로 서가장은 몇 배 더 강해질 걸세."
총관도 서무룡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무사들이 입은 상처는 정말로 지독했다. 총관이 보기에 무영의 치료는 너무나 난폭했다.
총관이 그 치료를 직접 경험했으니 누구보다 그 고통을 잘 알 수 있다.
너무 고통이 심해 무영을 쳐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아무 효과는 없는 치료가 괜한 고통을 유발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루 만에 사라졌다.
놀랍게도 신선고를 바른 상처가 눈에 띌 정도로 아물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내상을 입은 자들이었따. 그들의 내상은 단 하루 만에 깨끗이 나았다.
그런 대단한 약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길거리 약장수라 생각했던 자가 그렇게 뛰어난 약사이리란 생각도 절대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실책이었다. 그래서 치료를 마치고, 떠나는 무영을 아무도 잡지 않은 것이다.
서가장 사람들은 대부분 무영 때문에 고통을 당했으니 당시에는 무영에게 고마움을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만일 무영이 떠너갈 때 서하린이 있었다면 그녀가 말렸을테지만 공교롭게도 그녀는 그때 무영과 함께 있지 않았다.
"린이는 무얼 하고 있나?"
총관이 어색하게 웃었다. 서무룡은 그 표정만 보고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길길이 날뛰고 있는 모양이군."
"결과적으로 아가씨가 데려온 사람이었으니까요."
서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서하린이 그 약장수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서하린은 이제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시집을 갈 생각만 하면 된다.
"흐음...... 어쨌든 남궁세가라면 꽤 괜찮지."
이제 정가장과 염왕채가 흔들리고 있으니 당장 남궁세가와 손잡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니 언제가 되었건 남궁세가의 힘이 필요했다.
"남궁세가의 분들은 어쩌고 계시던가?"
"며칠 더 머무실 예정입니다.무사들이 완전히 정상을 되찾을 때가지 계시곘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나을 테지. 알았네. 자네는 이만 물러가게. 그 사람을 찾는 것에 조금 더 신경을 써주고, 남궁세가 분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해드리게."
"예. 그리 하겠습니다."
총관은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총관의 머리는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아주 복잡했다. 싸움이 끝났으니 그 정리도 해야 하고, 가주가 시킨 일도 해야 한다.
서무룡은 복잡한 표정으로 물러가는 총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총관의 힘이 절실할 때다. 서가장의 총관인 상문천은 아주 유능한 사람이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정말로 다행스러웠다.
당시 정가장이 뒤로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서가장에 있던 일꾼 대부분이 죽거나 다쳤다. 다행이 가족들은 무사했지만 그 와중에 총관이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총관은 다시 살아났다. 신선고에 의해서, 서무룡은 새삼 무영의 능력이 탐났다. 어떻게든 무영을 얻고 싶었다.
무영은 서가장에서 나온 다음부터 계속해서 산에서 약재를 모았다.
이번에는 좀 많은 양의 신선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스승님이 하남 유가장에 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신선단도 만들어야 했다.
"휴우, 스승님께서 약속하신 신선단을 과연 내가 만들 수 있을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리던 무영은 얼마 전 서하린에게 주었던 신선단을 떠올렸다. 그것은 무영이 처음으로 제대로 만든 신선단이었다.
효능은 둘째 치고 그것을 만드는데 들어간 노력과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드는 데 걸린 시간도 상당히 길었다. 무영은 그것을 만들면서 항상 서하린을 생각했다. 자신이 가장 먼저 만든 신선단은 서하린에게 주고 싶었다.
얼마 전에 서하린을 다시 만났을 때, 신선단을 복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하린의 몸에 흐르는 기도가 달라져 있었다.
사람 몸에 흐르는 기운과 기도를 한눈에 파악하는 것은 무영의 특기였다. 스승조차도 그 능력에 감탄했을 정도였다. 물론 스승의 능력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만.
"스승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무영의 스승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떨 때는 평범한 약장수처럼 보이다가도 때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선계에서 내려온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새로운 제자를 얻으셨을지도 모르겠네."
무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만일 새로운 제자를 얻었다면 자신에게도 사제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그 사제를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한 번도 보지 못한 사형이라는 자가 떠올랐다. 자신이 먹을 신선단을 들고 도망친 사람이다.
스승이 남긴 서찰에는 사실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그것을 읽을 때의 느낌이 그리 좋지 않았다.
"뭐, 신선단이야 이제 내가 만들어 먹을 수도 있으니까. 사형을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나으려나?"
만나면 신선단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고, 관계가 어색해 질 것이다. 아니, 굳이 묻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 왜 신선단을 들고 도망친 거지? 먹고 싶으면 그냥 스스로 만들어 먹으면 될 텐데 말이야."
스승님이 삼십 년 동안이나 연단을 한 신선단이라면 굉장한 효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효능을 가진 신선단을 만들고자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비록 실력은 스승님에 비해 한참이나 모자라지만 그 모자란 것들을 채울 방법이 있었다.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다. 재료를 정말로 좋은 걸로 쓰면 가능하다. 영산에 가서 그곳에 자라는 귀중한 약초나 열매를 따라 신선단을 만들면 효과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런 식의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도 신선단을 훔쳐 도망갔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무영은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차,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지. 빨리 약 만들 준비를 해야 또 우리 하린이 만나러 가지."
무영은 서하린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지난번에는 의미가 담긴 약을 줬으니 이제는 진짜 제대로 된 효과를 가진 약을 주고 싶었다.
무영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무영은 순식간에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산정의 맑고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무영은 눈을 빛내며 주변을 훑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영의 자루가 점점 잡초들로 무거워졌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떻던가?"
남궁철의 물음에 남궁혁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더군. 처음에는 탐탁지 않았찌만 이제는 반드시 얻어야 할 사람으로 보이네."
"나도 그렇게 봤네."
두 사람이 말하는 대상은 서하린이다. 그들은 남궁상룡이 서하린을 얻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이 사실 좋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전에 벌어진 싸움은 그들의 생각을 단번에 바꿔 버렸다.
서하린의 실력은 엄청났다.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발군일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녀의 나이가 이제 고작 스물이라는 점이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몇 년 안에 좌우쌍위와 대등한 실력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서가장의 검법이 운룡검법이었던가?"
"그렇지. 몇 백 년 전 십대고수 중 하나였던 운룡검 서원양이 쓰던 검법이네."
남궁철은 이렇게 무림의 역사나 무공의 근원에 대해 해박했다. 남궁혁이 생각에 잠겨들자 남궁철이 설명을 덧붙였다.
"다시 서원양은 운룡검법의 끝을 봤다고 전해지네. 검법의 끝을 보면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수도 있다는 뜻이지. 내가 보기에 서하린도 결국 그렇게 될 것 같네."
실로 파격적인 평가였다. 사실 지금 강하다고 해서 나중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고수의 영역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그 경지를 높이는 것이 더 힘들어진다.
지금 아무리 강해도 정체되어 버린다면 나중에 오히려 실력이 퇴보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네. 아마 대성한다 해도 십대고수가 될 수는 없을 걸세. 그 끝을 넘어서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다면 모를까."
남궁혁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만일 서가장에 서원양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나타나 운룡검법을 다듬고 더 높은 경지에 올라섰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서가장에서 그런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남궁세가를 비롯한 오대세가의 힘이었고 또한 구대문파의 힘이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과거 높은 경지에 올랐던 자들이 무수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수많은 경험이 축적되었다.
더 짧은 시간에 더 강해지는 법을 알고 있었기에 더 높은 경지에 발을 들일 확률이 월등히 높았다.
서가장이 그렇게 되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서하린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물론 서하린이 그 끝에 도달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종요한 건, 그 아이는 이제 서가장이 아니라 남궁세가의 힘이 되리란 점일세.
그 아이와 우리 상룡이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해 보게.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남궁철의 말에 남궁혁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 역시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남궁세가는 앞으로도 누대에 걸쳐 오대세가의 첫 손가락에 꼽히게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남궁혁이 은근히 말을 꺼내자 남궁철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약사 말이로군."
"맞네."
"데려가야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네."
남궁철은 무영을 떠올리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대단한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도 못해 봤다. 무영이 만든 요상단과 금창약은 정말로 굉장했다.
"그 약을 얻을 수 있다면 남궁세가의 힘은 지금보다 최소 두 배는 더 강해질 걸세."
남궁혁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문제는 돈이로군."
"아닐세. 그자는 떠돌이 약장수라 했네. 돈은 문제가 안 될걸세. 뭔가 사연이 있음이 분명하네.
그 사연을 해결해 줘야겠지. 어떤 사연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우리 남궁세가가 해결할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남궁혁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따. 그 약사가 서가장을 도와준 것도 순수한 호의였다. 돈도 한 푼 받지 않고 치료만 하고 사라진 걸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떠돌아다니는 이유는 아마 한 곳에 머물러선 안 되는 처지이기 때문이리라.
"누군가에 쫓겨 목숨을 위협받고 있거나, 반드시 찾아야 할 사람이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멍청한 자이거나 셋 중 하나로군."
"어느 쪽이든 데려가는데 문제가 없겠군."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무영을 찾는 것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그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무영은 분명히 다시 서가장을 찾아오게 되어 있다. 무영이 서하린을 바라볼 때의 눈빛을 두 사람도 확인했다.
'오로지 못할 나무지만, 계속 쳐다보면 좋지.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무영이 서하린을 좋아한다면, 그 마음을 이용해 남궁세가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훨씬 성심껏 일을 도와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일 아닌가. 서하린은 이제 곧 남궁세가 사람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상룡이는 뭘 하고 있나?"
"뻔하지 않나."
남궁철과 남궁혁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이었다면 못마땅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일단 그녀를 얻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영은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잡초 하나를 뽑았다.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그저 잡초일 뿐이지만 그에게는 그 어떤 약초보다 소중했다.
막 잡초를 뽑아 자루에 담은 무영은 고개를 들었다. 현재 무영이 있는 곳은 산 중턱이었다. 조금 더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이라 이 시간에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뭐야?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무영은 얼굴을 찌푸렸다. 산이 소란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산은 장중하고 움직일 줄 모르지만, 기운에 상당히 민감하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마구 들어오면 무영처럼 약초를 캐는 사람은 곤란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렇게 크지도 않은 산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오늘은 더 해봐야 시간 낭비군."
무영은 자루를 챙겼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산을 휘젓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산의 기운이 흔들렸다.
"쯧쯧. 다른 산으로 가야겠네."
무영은 미련 없이 산에서 내려갔다. 사람들의 기운이 미치지 않는 방향으로 골라서 갔기 때문에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간 무영은 순식간에 근처의 다른 산에 도착했다. 산을 찾아 움직이는 무영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그렇게 며칠 동안 무영과 무영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숨바꼭질이 계속되었다. 덕분에 무영은 약재를 모으는데 평소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영은 서가장에 도착했다. 문을 지키던 무사 두 명이 무영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명이 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갔고, 나머지 한 명이 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영은 갑작스런 환대에 잠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문을 연 무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사실 전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약사님께서 애써주신 덕분에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무영이 가장 먼저 치료해 준 사람이었다. 가장 부상이 심한 사람이었고, 아마 고통도 가장 많이 받았을 것이다
"아, 그렇군요. 이제 괜찮아 보이네요. 술은 안 드셨죠?"
술이라는 말에 무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당연하죠. 그랬다간 그 약을 또 발라야 할 텐데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당시의 고통이 생각난 듯 무사는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무영은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당분간은 무리하지 마시고 되도록 푹 쉬세요. 그럼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예. 물론입니다.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가주님께서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무영은 빙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제일 먼저 서하린을 보고 싶었다. 서하린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무사에게 물으려 하는데,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안으로 들어간 무사의 보고를 받은 서무룡이 총관과 몇몇 사람들과 함께 달려 나온 것이다. 그들 옆에는 남궁철과 남궁혁도 있었다.
"어서 오시게. 대체 어디를 갔다 오는 겐가. 내 얼마나 기다렸는데."
서무룡의 환대에 무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단 인사를 했다.
"또 뵙습니다."
무영은 그렇게 인사를 한 후, 주변을 둘러봤다. 서하린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서하린은 이 자리에 없었다.
무영이 계속 두리번거리자 서뮤룡이 나섰다.
"뭘 하고 있는 겐가? 어서 안으로 들어가게. 내 할 얘기가 있네. 아마 자네에게도 그리 나쁜 얘기는 아닐 걸세."
서무룡의 말에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서하린의 아버지다. 얘기를 한다고 나쁠 것은 없었다.
서무룡은 크게 기뻐하며 무영과 함께 내원으로 향했다. 남궁철과 남궁혁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서무룡이 무영을 데리고 간 곳은 내원의 자그마한 전각이었다. 안에는 큰 탁자가 있고, 의자도 많았다. 보통 가문의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곳이었다.
서무룡은 남궁철과 남궁혁이 끝까지 따라오자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두 분께서는 이만 거처로 돌아가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이쪽 약사 분과 긴히 나눌 얘기가 있어서......"
서무룡의 말에 나궁철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 긴히 나눌 얘기라는 것이 이 약사를 서가장에 영입하는 것이라면 나도 함께 이야기를 들어야겠소."
남궁철의 말에 서무룡의 안색이 변했다.
"그 말씀은......"
"그렇소. 남궁세가에서도 마침 유능한 의원과 약사가 필요해서 말이오. 이 약사라면 충분한 자격이 있지 않겠소?"
서무룡은 굳은 얼굴로 남궁철을 쳐다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은 그때까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남궁철과 서무룡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침무이 흘렀다. 하지만 결국 서무룡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남궁세가를 삽대하기에 아직 서가장은 지나칠 정도로 힘이 모자라다. 게다가 은혜도 입었다.
서무룡은 며칠 전 정가장, 염왕채와 싸울 때 좌우쌍위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남궁세가 최고수들의 위력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조금 심하게 과장하면 그들 둘이서 서가장 전체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정면으로 맞붙으면 필패였다. 그들은 그 정도로 강했다.
정가장과 염왕채가 그렇게 큰 피해를 입고 물러간 것도 좌우쌍위의 힘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서가장은 몰락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서무룡이 한 발 물러서자, 남궁철과 남궁혁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당당히 안으로 들어섰다.
탁자에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또 침묵이 흘렀다. 기다리다 못한 무영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별다른 용건이 없으시면 전 이만......"
"아, 잠시 기다리게."
무영이 일어서려는 것을 일단 서무룡이 막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네 우리 서가장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주겠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자네를 보호해 주겠네. 자네는 그저 요상단과 금창약만 만들어 주면 되네."
서무룡의 말에 무영의 눈이 커졌다.
"글쎄요.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무영은 상당히 곤란했다. 자신은 일단 이렇게 어딘가에 얽매여선 안 되는 사람이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고, 그 일이 끝나면 다시 산으로 올라가 스승이 남겨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스승의 신선단보다 더 뛰어난 신선단을 만들어야 한다.
"어느 정도의 보수를 원하나?"
서무룡의 말에 무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서가장이 과연 저 약사의 신변을 지킬 수 있겠소?"
남궁철의 말에 서무룡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남궁철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난번과 같은 공격이 또 있다면 이번에는 저 약사부터 죽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소?"
얼마 전 싸움에서 서가장은 일꾼 대부분이 죽었다.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게다가 무영은 대단한 약을 만들어내는 약사다.
적이 바보가 아니라면 무영부터 죽일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일단 납치를 하거나.
"우리 남궁세가라면 충분히 보호해 줄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장주?"
남궁철의 말에 서무룡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남궁세가라면 서가장처럼 맥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유하고 있는 무사의 수와 질 모두 엄청나기 때문이다.
남궁철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무영을 쳐다봤다.
"자, 지금 하는 얘기를 들었으니 무슨 말인지는 알겠고, 어떤가? 우리와 함께 남궁세가로 가지 않겠는가? 많은 보수를 야속하지."
남궁철의 말에 무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세가에 가는 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무영의 말에 남궁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반대로 서무룡의 얼굴이 밝아졌다.
"왜 그러는가?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나? 남궁세가의 힘이 미치는 한도에서는 모든 문제를 나서서 해결해 주겠네. 어떤가?"'
남궁철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서무룡의 안색이 다시 스러졌다. 무영은 그 말에도 그저 고개를 저었다.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느 한곳에 머물 수 없는 몸입니다."
무영이 재차 거절을 하자 남궁철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남궁세가가 어떤 곳인가. 무림의 수많은 무가들 중 가장 강하다는 다섯 가문 중 수위를 다투는 곳 아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는가?"
남궁철은 다시 한 발 물러나 물었다.
"스승님께서 하신 부탁이 있습니다. 그것을 해야 합니다."
"스승의 부탁이 뭔지를 모르지만, 그것을 하려면 뭐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돈도 그렇고 힘도 그렇고. 남궁세가가 그것에 도움을 주겠네. 이제 어떤가?"
남궁철의 말에 무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아무도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남궁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성격이 화급하고 감정을 불같이 토해내는 편이다. 그런 남궁철이 지금까지 참은 것만도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남궁철이 막 나서서 입을 열려는 찰나, 남궁혁이 그의 팔을 강하게 잡았다.
남궁철은 팔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통증에 정신을 차렸다.
"끄응,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한 번 잘 생각해 보게."
남궁철은 그렇게 이야기를 일단 마무리 지었다. 남궁혁이 아니었다면 불같이 화를 내고 무영에게 힘으로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 말해서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조금 더 흥분을 했다.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무영의 태도는 시종일관 당당했다. 남궁세가의 최고수 둘을 앞에 두고서도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아마 평범한 약사였다면 그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궁세가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남궁철은 그런 무영의 태도가 괘씸했다. 하지만 남궁혁은 달랐다.
그는 무영이 더 탐났다. 저런 자가 남궁세가에 들어와 그 능력을 열심히 발휘한다면 남궁세가의 앞날이 훨씬 더 밝아지지 않겠는가.
'게다가 스승이 있다고 했지. 스승이라...... 그렇게 뛰어난 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리 없는데.'
"혹시 자네의 스승이 누군지 물어도 되겠는가?"
"스승님께서는 그저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약을 파시는 분입니다."
무영의 대답을 남궁혁은 다르게 해석했다. 스승의 정체를 밝히기 싫다는 걸로 알아들었다. 남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이만 가보게.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좋은 관계였으면 좋겠네."
남궁혁의 말에 무영이 가볍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무영은 전각 밖으로 나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혁의 말은 뭔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말은 평범한 인사였지만 그 의미를 뜯어보면 마치 나중에 남궁세가에서 만나게 될 거라는 느낌이었다.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남궁세가가 같은 커다란 무가에서 약사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지 충분히 알고 있다.
"게다가 신선단의 진짜 효능을 알며 난리가 나겠지."
무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런, 하린이 어디 있는지 묻는 걸 깜빡 했네."
무영은 한참 걷다가 자신이 서하린의 방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가장은 꽤 넓은 편이라 대책 없이 돌아다녀봐야 서하린을 찾을 확률이 거의 없다. 게다가 서하린은 방에 있을텐데, 그 많은 방을 모두 들여다볼 수는 없지 않은가.
무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계속 걸었다. 일단 걷다가 사람을 만나면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반각쯤 더 걸었을 때, 무영은 걸음을 멈췄다.
서하린이 가만히 서서 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하린 역시 여기저기 뛰어다녔는지 얼굴에 땀방울이 흘렀다.
"찾았잖아요. 한자리에 좀 있지......."
서하린이 무영을 향해 걸어갔다. 무영은 가만히 선 채로 다가오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서하린은 무영 바로 앞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고 무영과 눈을 마주쳤다. 무영의 눈빛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오늘은 꼭 물어보려고 왔어요."
"뭘?"
"이름이요."
서하린의 말에 무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 안 했나?"
"안 했어요. 벌써 몇 번이나 만났는데."
서하린의 눈이 기대로 일렁였다. 무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무영이야."
"무영...... 이요?"
서하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너무나 익숙한 이름을 들어 버렸다. 설마 무영이라니......
"응, 화무영."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어때? 이제 기억 나?"
무영의 말에 서하린은 잠시 충격을 받은 듯 경직되었다. 그리고 이내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이 빰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흑, 흐윽.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 왔어요. 흐윽."
서하린이 울음을 터트리자 무영이 당황한 얼굴로 그녈르 달랬다.
"올 수가 없었어. 벼락 맞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살아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 말에 서하린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무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준 가락지. 가지고 있어요?"
"물론이지."
무영은 목에 매달린 실을 당겼다. 실에 매달린 옥가락지가 밖으로 딸려 나왔다. 그것을 확인한 서하린의 눈에서 또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얼굴은 왜 그렇게 바뀐 거예요?"
"아, 얼굴...... 바뀐 게 아니라 이게 원래 내 얼굴이야."
"예? 설마요."
"내가 몸에 병이 좀 있었던 모양이야. 스승님이 그걸 말끔히 고쳐주셨어. 물론 벼락 맞은 것도 도움이 좀 됐고."
서하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무영을 만났을 떄, 무영이 아니라 생각했던 이유가 바로 얼굴 때문이었다.
무영의 얼굴은 이렇게 매끈하지 않았다. 어릴 때의 기억이었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영의 얼굴은 한쪽이 기이하게 일그러져 갔다. 다른 아이들이 그것을 가지고 놀렸지만, 무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서하린은 그것이 싫었다. 다른 아이들이 무영을 놀리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과 많이 싸웠다. 물론 무영 몰래. 그래서 기억이 선명했다. 특별했으니까.
"스승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서하린의 물음에 무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스승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분이다. 하지만 가장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한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약장수셨지."
"예?"
"거리에서 약을 파는 약장수 말이야.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셨어."
서하린은 조심스럽게 무영의 표정을 살폈다. 너무나도 따뜻한 표정이었다. 서하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무영의 스승이 어떤 분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약은 어땠어?"
"아!"
서하린은 무영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물어보려 했던 질문이 남았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 약, 대체 뭐예요? 그런 영단을 그냥 제게 막 주셔도 되는 거예요?"
"그거 신선단이야. 내가 처음으로 만든."
"예?"
서하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영이 빙긋 웃었다.
"너 주려고 만든 거야."
"그, 그걸 오라버니가 만들었다고요?"
서하린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직 미숙해. 스승님을 따라가려면 멀었지."
서하린은 그제야 무영의 스승이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무영이 나뭇잎을 따다가 굉장히 약을 만들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스, 스승님이 정말로 대단하신 분인가 봐요."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신선 같은 분이시지."
서하린은 확신했다. 무영의 스승은 신선이라고. 신선에게 약을 만드는 비술을 배웠으니 그 실력이 평범할 리 없다.
그녀가 보기에 무영이 약을 만드는 비법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술이나 도술과 같은 능력이었다.
서하린은 자신이 먹은 영약을 어떻게 구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일 이 사실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간다면 무영은 절대 평온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
무영은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 있는 서하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남궁세가 소가주하고 혼례를 올린다며?"
무영은 가장 하고 싶었지만, 가장 하기 싫은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일단 말을 하고 나니 놀랄 만큼 마음이 편해졌다.
서하린은 무영의 질문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걸 누구한테 들었어요?"
"소문이 파다하던데 뭐, 소주에 오자마자 알았어."
서하린은 무영이 자신을 바로 찾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약간의 거리감이 남아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금 남아 있던 섭섭함이 깨끗이 사라졌다.
서하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 소문 잘못된 거예요. 제가 왜 남궁세가로 가요? 오라버니가 돌아왔는데."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무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무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뭐, 뭐야. 그런 농담을 함부로 하면 안 되지."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세요? 전 어릴 때 이미 제 짝은 오라버니라고 결정했어요. 이제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예요."
서하린의 당돌한 말에 무영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하고 아련한 감정이 샘솟듯 솟아났다.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행복했다.
두 사람이 내원의 작은 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소저, 여기 계셨구려. 한참이나 찾아다녔소. 하하하."
서하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남궁상룡이 미소를 머금은 채 서 있었다. 비록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그의 눈에는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의여자가 다른 사내와 즐겁게 얘기하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호오, 이분은 약장수 아니신가. 거리의 약장수."
남궁상룡의 말투에는 겸열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무영을 깔아뭉개고 싶었다.
힘을 쓰면 너무 간단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무림인이 힘없는 사람을 무력으로 핍박하는 것은 모양새가 너무 좋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 버틴 지위나 가문의 위세를 내세워 핍박하는 것도 사실 똑같은 일이었지만 남궁상룡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천한 약장수라 그런지 사태를 파악할 머리도 없나 보군. 슬슬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어떤가? 난 내 정혼자와 할 얘기가 있는데 말이야."
남궁상룡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무영을 노려봤다. 무영은 그 눈빛을 그저 담담히 받아넘겼다.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다. 하지만 옆에 있던 서하린은 그렇지 않았다.
"그만하세요. 이분은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던 분이에요. 그렇게 무례하게 대해도 좋은 분이 아닙니다."
서하린의 말에 남궁상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그놈을 두둔하는 거요? 내 앞에서?"
서하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전 어른들의 말씀에 끌려다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정혼은 어른들이 마음대로 정한 일이에요. 전 정혼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서하린의 말에 남궁상룡의 입가가 비틀렸다.
"정말로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 말이요? 소저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지금 그냥 몸을 빼면 서가장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소?
그리고 내가 없었다면 서가장이 그 격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 같소?"
남궁상룡의 말에 서하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점점 절 실망시키기는군요. 마음대로 하세요."
서하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오라버니, 가요."
서하린의 말에 무영이 몸을 일으켰다. 서하린의 분위기가 왠지 심상치 않아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 거야?"
무영의 물음에 서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남궁상룡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무영은 그런 서하린의 뒤를 황급히 따라갔다.
남궁상룡은 불길이 치솟은 눈으로 서하린과 무영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감히 나를 그따위로 대해? 훗, 그래봐야 내 손바닥 안에 있을 뿐이다. 네가 그렇게 싸고도는 저 약사가 죽어나도 그따위 소리를 또 할 수 있나 한 번 보겠다."
남궁상룡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치게 몸을 돌렸다.
"오라버니. 앞으로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되도록 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아요."
걱정이 듬북 담긴 서하린의 말에 무영이 빙긋 웃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도 꽤 한다고. 지난번에 약 팔 때 봤잖아. 아무리 힘 센 사람이 때려도 끄덕 안 하는 거 말이야. 나 그정도야. 하하하."
무영의 말에 서하린은 더 걱정스러웠다. 무림인에게 그런 애들 장난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영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이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무영은 그런 서하린의 옆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정말로." 무영이 서하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하린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살짝 치웠다.
"자꾸 애들 다루듯 하지 마세요. 저도 스무 살이나 된 처녀라고요."
"하하하. 알았어, 앞으로 조심할게."
무영은 기분 좋게 웃었다. 무영의 기분이 전해졌는지 서하린도 환하게 웃었다. 무영은 그녀의 아름다운 웃음에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이 따뜻했다.
서하린이 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무영은 약재를 맡겨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악재는 모두 지난번에 약을 만들었던 약방에 맡겨두었다.
신선단과 신선고를 사가며 사람들이 지을 미소를 떠올린 무영은 기분 좋게 걸었다.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팔 약뿐 아니라 서하린에게 줄 신선단도 만들어야 했다.
아니, 만들 준비를 해야 했다. 진짜 효과가 뛰어난 신선단은 만들 준비를 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았따.
"어쨌든 중요한 건 정성이지."
신선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으로 만든다는 스승의 말이 새삼 머리를 떠올랐다.
무영의 발거름이 점점 가벼워졌다.
첫댓글 잘 읽어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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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고 행복한 날 되세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2.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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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어 보겠슴당
편안한 하루가 되셔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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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운 시간 보내세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기쁜 3월 맞이 하십시요......
감사 드려요
즐거운 밤 보내셔요~*.*
재미있네요 시간이 금방 지나가요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봅니다.
고맙습니다.
재밌어서 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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