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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 예고와 제자들의 야망 10:32~40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오신 이유 10:41~45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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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인자가 맞게 될 고난과 부활에 대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요구하고, 이를 안 제자 열 명은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이 되라 하시며,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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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 예고와 제자들의 야망 10:32~40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사 53:8~9). 그 목적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제자들에게 세 번째 수난 예고와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그 상황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가시려는 고난의 길이 아닌 영광의 길을 꿈꿉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자신들을 보좌의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37절). 예수님을 고난의 메시아가 아닌 정치적 능력과 권위의 메시아로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39절). 그러나 이후 그들은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14:50).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고난과 죽음으로 영광을 얻는 삶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의 수난 예고 자리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무엇을 구했나요?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내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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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신 이유 10:41~45
‘섬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네오’는 ‘먼지를 뚫고 가다’라는 뜻으로, 먼지를 무릅쓰고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야망을 알게 된 제자들이 분노하자,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교훈하십니다(44절). 십자가 고난은 외면한 채 권력 얻기에 골몰하는 제자들에게 ‘섬김의 제자도’를 깨우치신 것입니다(9:35).
세상 권력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며 스스로 큰 자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사람이 큰 자로 인정받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섬김의 절정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드리신 십자가입니다(45절).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교훈하신 ‘섬김의 제자도’는 어떤 것인가요?
내가 겸손히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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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길
지구상에는 두 가지 중력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지구 중심에서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 중력의 영향을 받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마음 중심에서 끌어당기는 ‘이기심’이라는 중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자기중심성이라는 중력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난 예고를 세 번째 하실 때도 그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 달라며 이기적인 요청을 했습니다.
비행기가 중력을 극복하고 하늘로 날아오르듯, 우리도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의 중력을 극복할 길이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지배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낮아지시고 또 낮아지셔서 치욕스러운 십자가를 지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의 사랑.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심으로 우리를 높여 주시고 또 높여 주셔서 하늘 보좌에까지 우리를 높여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이를 아는 사람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길, 이타적인 사랑의 길이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순전한 복음 / 하용조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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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마가복음 10장 45절
사랑은 희생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자신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주저 없이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랑이 없는 이기적인 신앙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유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성도의 지향점, 제자의 길은 군림하고 빼앗고 섬김을 받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나누며 섬기는 낮은 곳이어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겸손함으로 나아가는 성도를 그분 곁으로 이끄신다. - 매튜 헨리
오늘의 기도
주님, 십자가 죽음으로 많은 영혼을 섬기러 오신 주님을 이용해 더 높아지려고만 했던 저의 교만과 욕심을 용서하소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될 때 으뜸이 되는 하나님 나라 원리를 마음에 새깁니다. 섬김받는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로 향하는 주님의 참제자가 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23 부름받아 나선 이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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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우리를 당신의 양으로 삼아 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당신 안에 거하게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그분의 양으로 삼아 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음성을 들려 주시고, 당신을 따르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그 큰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자
그분이 바로 구원의 유일한 문이 되시고,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분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하자
그분을 믿고, 그분의 백성으로, 그분의 제자로서 이 세상 속에서 그분을 전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야고보와 요한의 일로 화가 난 제자들에게 참 제자도를 가르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세 번째 수난 예고 직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이 되라 하시며,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 하십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수난과 부활의 예고,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 화를 내는 열 제자, 제자도의 가르침 등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 예수님께 어떤 것이든지 들어 달라는 청을 넣은 야고보와 요한의 말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모자가 함께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베드로와 함께 특별히 스승의 신임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는 자매간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는 이모요,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 사촌으로 그런 친족관계가 특별한 청을 넣은 단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고, 주님이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잔과 세례의 정확한 의미도 모릅니다. 다만, 다른 제자들보다는 먼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다고 큰소리 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크게 두 가지를 오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주님의 잔과 세례를 영광스러운 일로 착각했다는 점입니다. 다음, 설령 그것을 고난의 잔으로 알았다 하더라도 이제 곧 세워질 예수님의 왕국을 건설할 고난 정도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잔과 세례가 십자가의 수치이며, 극심한 순교의 고난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맹목적으로 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 - 대표적인 히브리 용법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함으로 그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세상의 질서와 요령은 하늘의 질서와 요령과는 정 반대라는 이야기입니다. 희생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대속물이 되어 희생하신 것은 그 좋은 롤모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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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에게 부탁한 두 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주 보좌 우편에 있는 우 정승의 자리와 보좌 좌편에 있는 좌 정승의 자리일 것입니다. 나머지 열 제자들이 듣고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총리와 부 총리 자리를 형제가 싹쓸이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혈전혈투가 벌어졌을 것 같습니다. 야고보 형제가 먼저 포문을 열었기 때문이지요. 잘못하다가는 정말 선수권을 빼앗겨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권좌싸움에서 밀려 나올 수 있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주님께서 비장한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던 도상에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역정도 내시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에게 자신이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자신이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잔은 고난의 잔이요, 그 세례는 장례의 세례입니다. 주님은 먼저 그 잔을 마시고, 그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기다리십니다. 어떤 재촉도 하지 않습니다. 그 기다림은 헛되지 않고, 그 기대는 실망을 주지 않았습니다. 주님처럼 그들도 똑같이 그 잔과 세례를 마시고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대와 믿음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리다툼을 하던 그들이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명은 십자가를 지시는 일입니다. 하늘의 능력을 입고 골고다로 향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왕의 화려한 대관식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모욕과 경멸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주신 사명과 받은 달란트에 최선을 다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본 받은 자들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그들 역시 받은 사명과 달란트에 최선을 다합니다. 본래 그런 그릇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의 기다림에 빗나감 없이 주님을 그대로 쫓습니다. 만약 그 때 그들이 주님의 뒤를 잇지 않았다면 그들의 손과 발로 사도행전의 역사는 쓰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진행되었겠지만 최소한 그들이 사도행전의 영광스러운 주인공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신 사명과 받은 재능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대평가는 물론 과소평가도 해서도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한 제자들이 그 모델들입니다. 보잘 것 없는 그들로 열방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보류해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그것에 매이다 보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일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획일지라도 결코 사람의 의도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나빠지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사고가 생길 수도 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영원히 그의 나라와 그의 일을 하지 못 하고 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다섯 달란트를 종에게 준 주인의 이야기는 그냥 재미있자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뜻을 세우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두면 그것을 이룰 방안이 창조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병행할 수 있는 지혜도 생길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기다림을 헛되지 않게 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더디지만 제자들처럼 주님께 실망 드리지 않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기다림은 없습니다. 시작도 있지만 끝도 있는 것이 세상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2-34절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앞서 가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놀라고 두려워해도, 또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을 당할 지 정확히 알고 계셔도 결연한 의지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45절), 자기 몸을 다 내어주시기까지 섬기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나는 앞서 가신 주님의 길을 어떤 모습으로 따르고 있습니까? 두렵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주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완주할 수 있도록 끝까지 기다려주실 것입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35-41절 권력에 대한 질긴 집착이 제자들의 귀를 막고 눈을 멀게 합니다. 우레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직설적으로 예수님께 자리를 부탁합니다. 주님은 앞으로 마시게 될 잔과 세례, 곧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단지 왕위에 등극하기 위해 거쳐야 할 위험과 희생이라 생각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이들의 청탁은 다른 제자들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하실 때마다 제자들은 권력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해도 그 말씀을 자기 식대로 왜곡하여 들을 수 있습니다.
42-45절 세상 나라는 힘의 원리를 따라 지배하고 군림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섬기고 희생하여 자기를 내어줍니다. 만약 우리 공동체가 자리 때문에 다투고 돈 때문에 분쟁을 일삼는다면, 하나님 나라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 받으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7)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제자들이 화를 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도 똑같은 권력욕이 있었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그 권력을 선점할까 조바심이 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권력을 탐하게 된 것은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예수님이 왕이 되실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는 것은 맞았지만, 그들이 예상한 방식이나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상한 방식은 백성의 선출이었고, 그들이 예상한 권력의 형태는 임의로 주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적인 것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막10:42~43)
오직 하나님 나라의 권세의 형태는 자기 맘대로 주관하여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
또한 하나님 나라의 권세의 임직은 백성의 선출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20:23)
세상은 남을 죽임으로 왕이 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죽으심으로 왕이 되셨습니다 세상은 남을 부림으로 왕이 되지만, 예수님은 남을 섬기심으로 왕이 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러므로 우리도 이와 같이 하여 아버지께 복 받는 자 되기 원합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는 삶❞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는 삶은 섬기는 삶이요, 겸손의 삶이요,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 눈이 바라보아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 죽기까지 낮아지신 주님을 바라봅니다(32~34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무리들에게 어느 정도 말씀하셨고, 이에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이 놀라고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예루살렘에서 잡히셔서 유대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인해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당할 고난과 죽음을 알고 계셨지만 당당하게 앞에 서서 걸어 가셨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시기로 작정하시면서 모형으로 드렸던 구약의 제사 의식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분명 고난의 길이요,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당하게 그 길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주님은 높은 곳에 서서 그리고 맨 뒤에서 구원의 길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낮고 낮은 그리고 험한 삶의 길을 앞에 서서 걸으시면서 참된 구원의 길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고백하는 나의 눈이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죽기까지 낮아지심을 몸소 보여주신 주님이십니다.
➲ 죽기까지 섬겨주신 주님을 바라봅니다(35~45절).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찾아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주님이 물으시자 ‘...장차 올 왕국에서 우리 중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37절)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주님이 마시게 될 잔과 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만은 탐하고 있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다른 제자들마저도 표현을 하지 안했을 뿐이지 똑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41절)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주님의 고난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자리를 꿈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다시 그들에게 섬김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45절,새번역).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섬김의 삶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섬김의 삶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부인하는 것과 동일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오직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나의 믿음을 진단하는 진단 키트(??)는 나의 섬김과 사랑을 통해 힘과 위로와 격려를 얻는 이웃이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다면 나의 믿음을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때야말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이 나라에 필요할 때가 아닌가 생각이 되어 집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고백하는 나의 눈이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죽기까지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셨던 주님이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권력을 향한 도발은 베드로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아마도 눈치 보며 함부로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 곧 모두 함께 주님과 그 힘든 여정을 함께 했는데 누가 먼저 주님 옆에 서고 누가 그들 중에 더 큰 자인가에 대한 주제에 대해 그들 중 세배대라는 부요한 어부의 아들들의 선제공격을 당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아 이 가운데서도 더 가진 자들에게 차별당해야 하는가?’
어리석고 세상적인 생각들이 그들을 사로잡았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가르침에 대한 생각은 온데간데없어져 버렸습니다.
답답하셨을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꾸짖지 않으시고 스스로 세상과 타협하며 살지 않으셨던 자신의 삶을 다시 상기시키며 섬기는 자, 자신을 내어주는 자가 으뜸이 되고 큰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또 스스로의 소유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오늘 본문의 제자들보다 얼마나 더 치열하고 냉정한 삶을 살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생명을 주신 것과 실 한오라기 걸치지 않고 태어난 존재들에게 이토록 풍성하게 부어주신 그 형용할 수 없는 은혜는 결국 우리에게 맡겨준 이들을 섬기며 그들을 위한 ‘종’이 되기 위함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나의 소유와 나의 생명 모두 주님께 기꺼이 드리고 그 귀한 섬김의 자리에 감사함으로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주님께서 가시는 길 (32-34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주어진 삶의 모든 결과를 아셨습니다. 그런데 그분 앞에 놓여진 길은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의 길도 아니고 가고 싶은 길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주어진 그 사명의 길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비록 그 길은 험하고 힘든 죽음의 길이지만 그 길이 죄에 빠진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길이기에 기꺼이 감당해 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거저 받은 성도로서 그 은혜를 늘 기억하고 감사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명의 길을 감사함으로 갈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가?
2.야고보와 요한의 요구 (35-45절)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질 자리에 대한 관심만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높고 낮음의 새로운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높여서 참된 높음의 자리에 서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이 세상에서의 높음에만 관심을 갖고 살지 않는가?
마가복음 10:32~45 영광의 자리에 먼저 앉지 말라
마가복음10장은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짓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들이 나타나는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이혼에 대한 질문, 어린 아이를 축복하시는 예수님,
부자 청년의 질문과 제자들과의 대화등등이 있었다.
오늘도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가시고 계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 보다 앞에 서서 예수님이 가신다.(32)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가 있으시다.
벌써 제자들에게 3번째 말씀해 주신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주겠고(33)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34) 하신다.
십자가가 기다리는 죽음의 길 죽으시러 가시는 길에도 제자들 보다 앞장 서서
당당하게 힘차게 걸어가시는 모습이 아름답고
자기의 분명한 사명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아는 인생이 아름답다.
이 사명을 실천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과 대조되는 제자들의 모습이 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말한다.
선생님이여 무엇이 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35)
너희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6)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
이 말을 다른 10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히 여긴다.(41)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계시는데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예고를 듣고도 제자들은 자기 욕심과 자기 생각에만 빠져있다.
야고보와 요한 만이 아니라 제자들은 동일한 마음이 있었나 보다.
속으로는 모두가 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야심이 있었나 보다.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또 특별 강의를 해 주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43)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4)
하나님 나라의 사고 방식과 세상의 사고방식의 차이 이다.
세상에서는 높아져야 한다고 한다.
지배해야 한다고 한다.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앞서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고 방식은 다르다.
높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야 하고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하나님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찌? 어떠한 가치관으로 살아야 할지를 결단하게 하옵소서.
세상 속에 살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
이런 가치관과 정체성 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세상의 상식과 가치관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 말씀의 기준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오른 뺨을 때리면 같이 때리지 않고 왼뺨을 내 밀게하시고
속 옷을 갖고자 하는 자에게 도둑이라 신고하지 않고 겉옷까지 주게하시며
구걸하는 자에게 못 본척하지 말고 거절하지 말게하시며
핍박하는 자에게 같이 핍박하지 말고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며
구제할 때에 방송하지 않고 은밀하게 하게 하시며
예수님 위해 생명을 잃는 것이 어리석음이 아니라 다시 얻음이요
자기를 높일 때에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며
남에게 줄 수록 가난해 지는 것이 아니라 부요해지는 주님 나라의 법칙
지는 자가 이기고
잃는 자가 얻고
죽는 자가 살게 되는 그 법칙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오늘의 말씀요약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임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야
고보와 요한은 주의 영광 중에 자신들을 주의 좌우편에 앉혀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으뜸이 되려면 모두의 종이 되어야 하며, 인자가 온 것은 섬기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세 번째 수난 예고(10:32~34)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은 세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앞의 두 번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주님이 당하실 죽음과 모욕을 생생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대 사람들이 기대하던 메시아의 모습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 맞추어 자신의 사명을 변경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죄인 구원을 위한 고난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십니다.
- 묵상 질문: 고난이 다가오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 적용 질문: 어렵고 힘들 줄 알지만, 하나님이 원하시기에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고난의 잔, 영광의 자리(10:35~40)
제자들은 여전히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차지할 자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 중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그 좌우편 자리를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잔’과 ‘세례’의 의미도 모른 채 자신들도 동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는 하나님 소관이라고 답하십니다. 제자들처럼 일한 대로 받고자 한다면
믿음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고난당하고 가진 것을 버리면서 주님을 따랐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까? 그래도 계속 따르는 것이 참믿음입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고 그분이 받는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 적용 질문: 보상을 바라는 믿음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나는 어떤가요?
진정으로 큰 자(10:41~45)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갈망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섬기는 자, 낮은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거하시면서 이미 예수님 스스로 이를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섬기는 종이 되려고 오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우리도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야고보와 요한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왜 화를 냈을까요?
- 적용 질문: 이웃과 공동체를 섬기는 삶을 어떻게 실천하면 좋을까요?
오늘의 기도
거듭 낮아짐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도 크고 높은 영광의 자리만 구하는
답답한 제자들의 모습이 제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세상의 논리를 거슬러 사는 것이 힘들지라도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섬김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가는 대로 욕망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복된 주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론 유혹과 욕심으로 눈이 흐려질 때에도
그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며
성령의 불로 모든 거짓되고
오염된 내 안의 죄악들을 태우사
정결한 백성으로 매 순간 다시 태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케 허락하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행함으로 성화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