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1,10.16-20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누울 자리’, ‘일자리’, ‘아버지 자리’, ‘앞자리’, ‘윗자리’
높이와 위치와 순서와 역할 등등~.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음을 지적하시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하시면서,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먼저,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또 “그들은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라고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란다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지?"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하신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마태 23,3)는 말씀을 되새겨보게 합니다.
사실 이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군중과 제자들에게 ‘배움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곧 그들의 말과 행실이 모순되고 언행이 불일치한다하더라도, 혹은 행실이 비록 모범이 되지 못하다할지라도, ‘그들의 말은 실행하고 지키는’ 겸손함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않는’ 분별과 지혜를 군중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고 있는가?
진정 ‘배우는 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23,11)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성찰과 반성>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은 저를 두고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김찬선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자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제 여기 밥상을 하면서 얘기를 나누다가 제가 말씀 나누기를 얼마나 했는지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한 5년 정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서 2008년부터 했다고 정정해서 말씀드렸는데,
이때 저의 마음 안에 제법 긴 기간 꾸준히 했다고 약간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이내 그런 저의 자세가 잘못된 자세라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의 육신의 누이가 요즘 강론이 영적으로 옛날만 못하니 더 깊이 묵상하고 나누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오늘 마침 주님께서도 이런 제가 들으라고 말씀하시어 다시 찔끔했습니다.
사실 16년 넘게 거의 매일 말씀을 나눴으니 그 기간과 말의 양이 엄청난데,
그 성찰과 반성과 나눔이 10분의 1만 실천으로 갔어도 저는 성인이 되었을 겁니다.
전기 작가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이런 저와 달랐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의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왔고 그의 온 존재를 채우고 있는 빛을 받은 사랑의 샘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어디에서나 그는 늘 예수께 사로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다른 지체에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주님의 말씀이 머리에 머물지 않고 가슴으로 가고, 가슴으로 그치지 않고 손과 발까지 전 존재적으로 가 실천에 이르는 것은 기간과 횟수와 같이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합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것은 제가 실천한 것이 아니라 제가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 말씀대로 여러분도 제 말을 실천의 말이라고 믿었다가 실망하지 마시고,
여러분이나 저나 같이 살아야 하고 살고 싶은 것을 나눈 것으로 받아들이시면,
더 나아가 여러분이 저보다 훨씬 더 잘 실천하시는 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대로 살아갑시다>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자를 거꾸로 하면 ‘푹’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백성을 위한 봉사자를 뽑는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의대 정원 문제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의료진은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요?
기득권을 유지하고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을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고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하신 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교만해졌음을 알아보는 가장 빠른 법>
매리언 존스(Marion Jones)
미국의 유명한 육상 선수인 존스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5개의 메달을 획득한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중에 경기력 향상 약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이로 인해 올림픽 메달이 박탈되고 명성이 손상되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
암스트롱은 특히 1999년부터 2005년까지 투르 드 프랑스에서 7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유명한 사이클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경력은 그가 장기 도핑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급락했고, 이로 인해 그는 모든 경력을 박탈당했습니다.
투르 드 프랑스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평생 프로 사이클 출전이 금지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그들은 말은 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열심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악한 생각과 행위가 가득했습니다.
위 인물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그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시며 스승이나 아버지란 소리를 듣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사제가 되었을 때 어른들이 높여주는 것에 취해 교만을 떨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아주 겸손한 것은 아니지만.
한 번은 제가 보좌신부 때 체육대회를 하고 있었는데 시장님이 와서 신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도 체육복을 입었기에 시장님과 공손히 인사하였습니다.
당시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시장님은 겸손해지려 노력하였지만, 저와 같이 젊은 청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뻣뻣하게 서서 손만 내밀었습니다.
한참을 인사하며 가시다가 신자들에게 여기 신부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주임 신부님은 오지 않으셨고 보좌 신부님만 오셨다며 신자들이 저를 지목하였습니다.
저에게 다가오더니 거의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저는 뻣뻣하게 서서 인사를 받아주었습니다.
어떤 자리에 올라 그만한 대접을 많이 받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그런 대접을 받지 않는 게 제일 좋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신부님이란 소리를 들어도 겸손해지려면 자신이 교만해졌는지 아닌지 알아보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바로 솔직함입니다.
그런데 저도 어떤 사진에서 위 시장처럼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저보다 나이가 많은 신자에게 한 손으로 뻣뻣하게 악수하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만 뒤에는 항상 감추는 죄가 존재합니다.
교만함의 시작은 위선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어떤 군인이 장군이 되어 사무실에 새로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너무 좋아서 뽐내고 싶어졌습니다.
마침 어떤 사병이 들어오니까 전화기를 집어 들고 “예, 대통령 각하.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병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병은 대답했습니다.
“전화선 연결하러 왔습니다….”
왜 위선과 거짓말이 교만일까요?
바로 내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두렁이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하느님까지도 속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명인들이 왜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질까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이강인 선수도 워낙 인기를 많이 얻다 보니 어린 나이에 그 인기를 주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주장에게 대들기 전에 위선적인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속이려는 마음이 있을 때 바로 ‘아, 내가 교만해져 있구나!’라고 생각해야 롱런할 수 있습니다.
마약 중독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그렇고, 과거의 빈곤과 학대, 그리고 임신과 같은 개인적인 문제를 고백한 오프라 윈프리가 그렇고, 성매매로 체포되었지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휴 그랜트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끝까지 감추려 하지 않고 겸손함을 지향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지위를 내려놓을 각오를 하고 솔직해짐을 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용기에 더 크게 감탄합니다.
누구나 다 죄를 짓고 속이며 살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인기를 얻고 성공하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패망의 원인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교만해졌음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주교가 되고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어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를 불렀지만, 그는 황홀경에 빠져 있어서 듣지 못했습니다.
짐짓 자기를 무시하는 줄 알고 문을 열고는 바로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를 발로 밟으며 “교만한 아우구스티노야!”라고 세 번 반복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자기의 위선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기에 위대한 인물입니다.
이웃을 판단할 때 뉘우치면 많이 늦습니다.
그것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두렁이로 가리려고 하는 것이 먼저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을 배척합시다>
높은 자리에 앉아 지도자 행세를 하지만, 구체적인 삶이나 인성이 조금도 뒷받침되지 않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이 꽤 엄중합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말씀에 저 역시 섬뜩한 느낌이 들면서도, 요즘 저는 조금 나이가 들면서, 이런 측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저는 요즘 시골에 살다 보니 주로 입고 다니는 옷은 명품 메이커와는 거리가 먼 태안 재래 시장표 만원짜리 작업복이나 추리닝입니다.
시골이다보니 어깨 힘줄 일도 없고 폼 잡을 일도 없습니다.
요즘 와서 결심한 것이 제일 힘든 일, 제일 궂은 일, 제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내 일이다, 생각하고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제 스스로 뭐든 하니 세상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자리에 앉을 때도, 피정 오시는 손님들을 가장 뷰가 좋은 자리로 안내하고, 저는 제일 구석 자리로 가서 앉습니다.
가급적 앉아 있지 않고 하루종일 서서 돌아다닙니다.
식탁 세팅하고 주방에서 조리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니 정말 편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처럼 내가 이렇게 산다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위선적인 마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스며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주교품에 막 오르셨을 때, 당신의 가족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교황님께서 저를 교황청의 고위 성직에 임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매우 영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교만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저는 사제 때와는 달리 저는 빨간 모자를 쓰고 빨간 수단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복 색깔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에 인도된 영혼들의 아름다움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혹시 나는>
회당의 집회 때에 신자들은 정면에 있는 성경 보관소를 향해서 앉고, 율법학자들은 그 성경 보관소를 등지고 신자들을 향해 단상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설교를 하거나 율법을 가르칩니다.
그 의자를 ‘모세의 자리’ 라고 부릅니다.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율법학자들의 임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라는 말씀은 모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 이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이 하는 말 전체가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들과 계명들만을 가리킵니다.
그들 자신들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해석, 또 바리사이파의 규칙 같은 것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다 실행하고 지켜라.” 라는 말씀은 “누가 전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말씀들과 계명들은 실행하고 지켜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 같은 위선자들의 삶은 본받지 마라. 그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뜻인데, 여기서 ‘행실’은 행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가리키고, 그들이 말하는 개인 의견이나 주장도 포함됩니다.
위선자들이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거나 변명하는 말들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말에 현혹되면 ‘진실한 삶’과 ‘위선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듣는 사람들’까지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말’과 ‘삶’이 다른 것을 비판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나 말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한 대로 사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위선자가 안 되려면 아예 말을 안 하는 것이 낫겠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해야 하고, 또 신앙인들은 기본적으로 복음 선포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아예 말을 안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을 아예 안 하겠다고 하면,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떻든 신앙인은 자신의 신앙을 ‘말’과 ‘삶’으로 증언하는 사람인데, ‘말로’ 하는 증언과 ‘삶으로’ 하는 증언이 다르면, 그 증언은 거짓 증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 하든지 삶으로 하든지 증언은 항상 똑같아야 합니다.
또 어제의 증언과 오늘의 증언도 똑같아야 합니다.
말과 삶이 다른 것도 위선이고, 상황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말을 바꾸는 것도 위선입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라는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이 온갖 규정들로 사람들을 압박하고 억압하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을 해방하고 구원하기 위한 은총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계명을 더 잘 실천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규칙들을 많이 만들어서 사람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이 온갖 규칙들과 규정들과 지침들을 실천하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자기들은 실천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왜 남들에게 시키기만 하고 자기들은 안 할까?
아마도 “그런 것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나 지키는 것이고, 나는 특별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지키지 않아도 된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특권의식, 우월감, 교만 등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특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지도자들은 더욱더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규칙이나 규정이나 지침 같은 것은 아예 만들지 않으면 더 좋고.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은 마약과 같고, 그것에 취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되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집니다.
하느님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칭찬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쪽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위선자인데도 위선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눈치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위선자들이 교묘하게 자신을 잘 꾸미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선자들 자신들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모르니까 고쳐서 바로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늘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합니다.
겸손도 마찬가지인데,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겸손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거짓 섬김과 낮춤’은 그 자체로 위선입니다.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내가 혹시 교만한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조심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 좋은 삶 - 참으로 잘 살았을 때, 잘 떠난다>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제 눈을 비추소서.
제 원수가 ‘내가 이겼다,’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13,4-5)
국내 사정이 4월10일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공천으로 참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공천 결과에 따른 반응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환히 드러납니다.
국민들에게는 반면교사가 됩니다.
참 아름답게 잘 떠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온갖 추태를 부림으로 배은망덕(背恩忘德)과 더불어 그동안 내적 삶이 어떠했는지 환히 드러납니다.
가장 고약한 것이 배은(背恩), 배신(背信), 배반(背叛)입니다.
문득 오늘 다산의 어록과 중국의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예화도 좋아 나눕니다.
“나무가 열매로 사람을 모으듯 어른은 성품으로 사람을 따르게 한다.”
- 다산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나무 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
- 사기
사람이 진실, 고결(高潔)하고 겸손하면 저절로 사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 살았을 때, 잘 떠납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떠날 때 일치와 평화의 선물을 남기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분열과 불화를 남깁니다.
늘 떠남을 준비하며 살아갈 때 하루하루 충실할 수 있을 것이며 떠날 때도 아름답게 향기처럼 떠날 수 있을 것이며 참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19년전, 2005년 참으로 수도원이 어려운 일을 겪던 해 써놨던 “떠날 때는 이렇게” 라는 시(詩)를 주일에 이어 최초로 공개합니다.
“떠날 때는 이렇게
자연이 또 참 좋은 스승이다
잘 떠남이
아름다움의 극치다
얼마나
힘들고도 중요한 잘 떠남이냐
향기로 남는 떠남도 있고
악취를 풍기며 상처나 짐을 남기는 떠남도 있다
떠나기가 마냥 서운해
봄에다
흰 눈 가득 순결한 사랑 안겨 주고
말없이 떠나는 겨울
얼마나 아름다운 떠남이냐!”
-2005.2.
얼마전 입춘(立春)과 우수(雨水)를 지나 내린 봄눈 내린 나무마다 설화(雪花)들 가득한 날에도 잘 어울리는 시입니다.
마침 주일 강론후 강론중 “봄이 되었다!”라는 시(詩)중에 나오는 “봄의 맑음”이라는 말마디가 자기 이름과 같다고 반색하던 ‘춘숙(春淑;봄춘, 맑을 숙) 도미니카’ 자매가 생각납니다.
이 말마디를 놓치지 않고 들은 경청의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어떻게 잘 떠날 수 있을까요?
마지막 떠남인 죽음 역시 언젠가의 갑작스런 선종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잘 살다 잘 떠날 때, 잘 떠나는 선종의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사순1주간 화요일 마태복음과 제1독서 이사야서가 잘 떠남을 위한 답을 줍니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침인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의 교회지도자들은 물론이고 교회밖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귀한 깨우침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지탄을 받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우리의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전반부는 이들의 언행이 불일치 함을 지적하며 이들의 허영을 단연히 배격하라 하십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되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말며,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드러내기 좋아하는 허영을 말끔히 일소하고 진실하라는 충고입니다.
진실이 힘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생략이 불가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말마디가 큰 울림을 줍니다.
이런 자각에 투철한 이들이 정말 겸손한 이들입니다.
만민평등이요 일체의 우상을 배격하라는 것입니다.
스승님이자 선생님은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 뿐이시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삶에 저절로 따라오는 내적자유와 내적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아버지는 하느님이고, 어머니는 교회이고, 모두는 형제다” 라는 말씀에 새삼 공감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효성스런 “자녀답게”, 형제들간에는 우애좋은 “형제답게” 살아갈 때 참 아름답고 품위있고 격조있는 삶이겠습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상호존중과 상호섬김의 겸손한 자세가 나오고 이런 이들이 주님의 참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거듭 강조되는 섬김과 겸손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명명되는 우리 수도공동체이고 우리에게 직분이 있다면 ‘섬김의 직분’,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우리의 여정이 있다면 ‘섬김의 여정’, 영성이 있다면 ‘섬김의 영성’ 하나뿐일 것입니다.
역시 섬김의 여정에서 여전히 초보자임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거짓 경신례와 참된 경신례가 뚜렷이 대조됩니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경청의 강조에 이어지는 거짓 경신례를 얼마나 혐오하는 하느님인지 실감있게 표현되는 다음 내용은 오늘 독서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향기도 역겹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도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눈을 가려버리라.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들어주지 않으리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이라면 빈손으로 와도 주님은 반기실 것입니다.
경신례의,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선행과 사랑, 정의가 통째로 사라진 헛된 경신례의 거부요, 이어 주님은 참된 경신례를 위해 필히 실천해야할 지침을 주십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다음 다섯 가지 명령은 모두가 실천을 명하는 “하라”는 동사들입니다.
“1.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2.너희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3.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4.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5.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도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에로의 방향전환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요, 회개는 실천의 열매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회개의 참 좋은 열매들이 경청, 진실, 겸손, 섬김, 선행, 사랑과 정의, 공정의 실천입니다.
이렇게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여 잘 살 때, 비로소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옳은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시편 50,2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목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지난 2월 2일 서울대교구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외국에 있어서 가지는 못했지만 새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서품식 직후에 교구장님은 새 사제들에게 첫 임지를 발표합니다.
제가 아는 새 사제의 첫 임지를 보았습니다.
새 사제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장소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본당의 규모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새 사제가 함께 살아야 할 본당 주임 신부입니다.
신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우지만 본당사목의 대부분은 첫 본당의 주임 신부에게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새 사제가 부임하는 첫 본당의 주임신부님은 잘 아는 후배 신부님입니다.
사목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분입니다.
열정과 헌신을 보여주는 분입니다.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분입니다.
앞으로 2년 동안 새 사제가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 좋겠습니다.
첫 시작이 잘 되었으니, 새 사제의 앞날에도 하느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3년 전에 저도 서품을 받고 새 사제로 첫 본당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이 부족한 저를 위해서 좋으신 본당 신부님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긍정의 마인드를 보여주었습니다.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아직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빈말이라도 남의 허물을 탓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남의 장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형식과 율법에 억매이지 않았습니다.
매일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교우들의 가게를 찾아보았고,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제게 한번도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늘 먼저 저의 의사를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젊은 사제가 더 필요하다면서 넉넉하게 예물을 주었습니다.
잘 먹어야 한다며 가끔 고기도 구워주었습니다.
신부님 사목의 모든 힘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신부님 방에 있는 기도 초는 눈물을 흘려서 작아졌습니다.
제 방에 있는 기도 초는 눈물 흘릴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게 사목의 모범을 보여 주신 첫 본당의 주임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목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사목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씀하십니다.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청개구리처럼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 하는 사목자가 있다면 공동체는 갈등과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죽기까지 실천하는 사목자가 있다면 공동체는 믿음의 줄기에서 사랑이 꽃피게 될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목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교만하고, 게으르고, 대접받기만 바라는 사목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목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제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사제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쓰레기를 넘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행복 수준을 높여 줍니다.
실제로 이들은 자기 계획에 대한 성취도가 높고, 꾸준함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범죄를 저질러서 돈을 번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언제 잡혀 들어갈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을 늘 간직하고 있기에, 돈을 모으지 못하고 대신 도박과 유흥, 방탕한 생활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의 불안감을 없애고 행복감을 높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면 무의식적으로 실패를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이의 말이 내 안에서 실재가 되어 나를 좌지우지 하게 됩니다.
지난겨울 중고등부 캠프 프로그램 중에 제주도 한라산 등반이 있었습니다.
힘들게 등반하는데, 한 친구가 허겁지겁 아래로 내려갑니다.
방금 지나갔던 등산객 중 한 명이 무엇인가를 떨어트렸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등산객이 놓고 간 검은색 봉지에 담긴 무언가를 들고 뛰어 내려가서 주고 왔습니다.
제가 “그 안에 뭐가 들었는데?”라고 물으니, “쓰레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버려야죠. 그래서 주고 왔어요.”
누가 내게 쓰레기를 넘겼습니다.
그 쓰레기를 받으면 어떨까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 쓰레기를 계속 손에 들고 있으면 계속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얼른 그 쓰레기를 다시 넘겨야 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감정적인 쓰레기들도 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긍정적인 힘을 가지고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렇게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쓰레기들을 넘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지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옳고 자기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모두 틀렸다면서 단죄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단죄를 받는 사람은 결국 죄인이 되어서 제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쓰레기를 넘기는 위선자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겸손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쓰레기를 넘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라는 귀한 선물을 건넬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통해서 높아질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