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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 5,1-15ㄷ
그 무렵
1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2 한번은 아람군이 약탈하러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곁에 있게 되었다.
3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
4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 주군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아뢰었다.
5 그러자 아람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써 보낼 터이니, 가 보시오.”
이리하여 나아만은 은 열 탈렌트와 금 육천 세켈과 예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가 임금님에게 닿는 대로, 내가 나의 신하 나아만을 임금님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십시오.”
7 이스라엘 임금은 이 편지를 읽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8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임금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9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10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11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12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성을 내며 발길을 옮겼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 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한가운데'라는 부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데려다 줍니다.
“너희 한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는 위대하시다.”
(이사 22,6)
“정녕 이제 내가 가서, 너 한가운데 머무르리라.”
(즈카 2,14))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루카 4,2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함은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이제라도 깨닫는>
사순 3주간이 되면서 전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할 이유를 하나하나 전합니다.
어제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심으로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과부와 나병 환자만 고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인인 나아만과 과부도 구해주신 분이라고 하여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성전 정화를 하지 않으셨으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으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어제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이 치우라는 말씀대로 잡것을 치웠다면, 주님 말씀을 듣고 민족 편견적인 믿음을 깼다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인간의 잘못된 믿음들이 여럿 드러납니다.
우선 이미 말씀드린 대로 민족 편견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편견이 본래 나쁜 것이지만 편견적인 믿음은 더 나쁜 것이고,
편견도 다른 편견이 아니라 민족적인 편견은 더더욱 나쁜 것이지요.
하느님께 대한 다른 민족의 믿음은 틀려먹었고 자기들의 믿음만 옳다는 편견,
하느님께서 자기들만의 하느님이시고 다른 민족은 사랑치 않으신다는 편견에서 더 나아가
다른 민족을 사랑하셔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실은 믿음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셔서도 안 되겠지요?
나아만의 믿음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많이 부족한 믿음이지요.
그는 치유를 받기 위해 엘리사에게 가는데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갑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갔으니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이랄까 믿음으로 간 것이고, 하느님을 믿고 간 것이 아니라 종이든 엘리사든 인간을 믿고 간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엘리사를 믿었다는 표는 엘리사가 자기의 치유를 위해 적극성과 정성을 더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의사가 치유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의사가 치유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 굳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시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의사가 얼마나 능력에 노력을 더하는지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의사를 통해 고쳐 주시는 거라고 믿으면 의사의 능력이나 노력이나 정성은 그리 중요치 않을 겁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집에까지 오실 필요도 없고 자기 종의 이마에 손을 얹어주실 필요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나아만은 또 요즘 자연 치유자들이 주장하듯 좋은 물이 치유해 줄 거라는 믿음도 비칩니다.
그래서 요르단강 물보다 자기 나라 강물이 더 좋다고 하고, 물로 씻는 세례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이 치유해준다고 믿습니다.
나아만은 또 치유를 받기 위해 자기의 정성도 극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정성이 부족하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 것이고, 결국 하느님 은총의 무상성 곧 거저 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들에게 밥을 줄 때 아들이 하는 짓 보고 줍니까?
예쁜 짓 하면 주고 미운 짓 하면 주지 않습니까?
먹고 싶어 하면 주고 먹기 싫어하면 안 주는 것 아닙니까?
필요하면 주고 필요치 않으면 주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인간의 정성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조건이 아니라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을 우리가 받는 조건임을 “이제야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한 나아만처럼 이제라도 깨닫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첫발이 중요하다>
현대를 지식 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난데없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넓혀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틀이 너무 강해 자기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희망합니다.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보를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얻게 된 정보는 흘려버릴 수 있지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선입견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진실과는 먼 정보에 상관없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지녔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품을 키워야 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 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주님의 가르침뿐 아니라 이웃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면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꿀도 약이라면 쓰다.’고 합니다.
충고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마음속 깊이 스며들지만, 우둔한 사람의 귀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충고하려거든, 먼저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아직도 성경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요즘 흥행하는 영화 <파묘>(2024)에서 많은 가축과 사람들이 죽어가자 정부는 곰의 소행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결국 귀여운 곰 한 마리를 발견하여 살릴까, 죽일까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무당과 풍수사, 장의사 합세한 주인공 팀은 그 원인이 관에서 나온 ‘험한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진짜 적과 싸웁니다.
현상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러 해석이 나옵니다.
누구나 자기가 가진 지식대로 판단합니다.
한 가지 현상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각자가 가진 믿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믿음을 키워주는 무엇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이끄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것을 해석하여 믿음을 얻고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는 어리석습니다.
개신교에서 아무리 성경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해도 그것은 틀렸습니다.
현상을 파악하는 능력은 전문가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2베드 1,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에 가십니다.
그리고 대놓고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믿음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십니다.
엘리야 때 하느님께서 기근을 주셨는데 예언자를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사렙타 과부에게만 보내신 것, 또 이스라엘에도 나병 환자가 있었지만, 이방인인 나아만만 치유해 주신 내용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성경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성경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해석해주는 이의 권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꽃 편지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랑을 고백한 대상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성경을 통해 구원의 믿음에 이른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분노를 터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에 의해 이뤄지는데 성경은 그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만을 설명하지, 그 믿음에 도달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 묵상을 하면 자기 생각 안에서 맴돌고, 성경 공부를 하면 그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을 성경을 통해 전달받을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2티모 3,15)
성경은 믿음을 주는 게 아니라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을 가장 완전히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지 성경을 파고들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각자의 믿음대로 해석되기 때문에 성경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기 가장 쉽습니다.
성경을 맹신하다가 성경을 이용해 자기 사상을 주입하는 이들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쓰였기에 성령님만이 참된 해석자이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장 완전한 성경 해석자입니다.
성령강림은 각자에게 내린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내렸습니다.
그곳에는 성모님도 계셨고 베드로도, 열두 사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개별적 해석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히고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성령으로 해석한 성경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2티모 3,16)
성경은 무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스텔스 전투기처럼 우리 힘만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무기입니다.
그러니 그 전투기를 잘 조종할 수 있는 이들에게 배워야 하는데 미국은 그 능력을 몇몇에만 부여하였습니다.
스텔스기를 만든 기술자들이 그 운행 능력을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자기 조국을 위해 맡깁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성령을 맡기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라 불린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교리는 성경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닌 교회를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배운 교리를 가르치는 도구입니다.
그러니 개신교처럼 성경을 절대화하여 각자가 자신이 옳은 해석을 한다고 하며 수백 개 종파로 갈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자렛은 성경은 가졌지만, 결국 예수님은 배척하였습니다.
성경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면서 성체성사나 고해성사를 배척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춥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혹시 우리도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 즉 선민의식으로 어깨에 힘 좀 주던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 말씀이 눈엣가시처럼 날카롭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즉시 유다인들에게 폭풍 분노를 유발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민사상에 젖어 으스대는 유다인들에게 삼십 육개월이나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도 과부가 많았지만, 엘리야는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에게만 파견되어 도움을 준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엘리사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는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진 사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어깨에 힘을 빼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나는 선택받은 그리스도인, 나는 선별된 사제, 특별한 불림 받은 수도자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날선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설교하시던 예수님을 밀치고 밀쳐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마침내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군중은 작정하고 예수님을 추락사시키려고 합세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일이고,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고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러온 메시아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분을 살상하려고 발버둥치는 나자렛 사람들의 악행은 정말이지 너무한 처사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처신을 보십시오.
저 같았으면, 즉시 분노로 이글거리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능력과 힘을 발휘해서 그 고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관되게 비폭력 노선을 고수하십니다.
하고 싶은 말씀은 속 시원하게 하신 다음, 지혜를 발휘하십니다.
벌써 떠나면 공생활과 인류 구원 사업에 큰 자질이 발생하니, 그들을 뒤로 하고 홀연히 길을 떠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어떤 분 보면 마음 속에 이는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한달 두달, 일년 이년, 그리고는 어느 순간 화산 폭발하듯 대폭발시킵니다.
순식간에 관계는 끝장나고,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마음속에 이는 분노를 너무 오래 쌓아두지 말아야겠습니다.
적정한 순간 적절한 언어로, 편안한 음성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내공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무조건 참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틈만 나면 대폭발을 시키면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 하나도 없습니다.
적정한 순간에 균형 잡히고 성숙한 표현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가운데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
오늘 복음 말씀은 나자렛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유대인들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고, 그들의 특권의식과 자만심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래서 자기들은 구원받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자만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잘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믿지 않고 거부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구원 문제에 대해서 별로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간절하지 않았던 것은 구원을 이미 보장받았다는 바로 그 특권의식과 자만심 때문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와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는 구약성경 열왕기 상권 17장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하신 일을 관점을 조금 바꿔서 생각하면, 사렙타의 과부만 엘리야 예언자를 맞아들인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규탄하는 엘리야 예언자를 박해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렙타의 과부는 엘리야 예언자를 맞아들였고, 엘리야 예언자는 그 과부 덕분에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 여자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맞아들인 것은 유대인들과 달리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겼음을, 또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했음을 나타냅니다.
엘리사 예언자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는 구약성경 열왕기 하권 5장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아만’만 고쳐 주신 것은 그 한 사람만 하느님께 청했기 때문이고,
다른 병자들이 치유의 은총을 못 받은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셔도 받지 않거나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유대인들의 특권의식과 자만심을 꾸짖으면서, 동시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이고,
구원은 유대인들만 받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자격만 갖춘다면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만을 선택해서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고 모독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화를 내면서(28절)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 죄인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법이었습니다(마르 14,64).
그렇지만 정당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군중이 함께 몰려들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29절) 법을 집행한 일이 아니라 그냥 ‘악한 집단 폭력’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라는 30절의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위엄과 힘에 압도되어서 어찌하지 못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아직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해칠 수 없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요한 8,20).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스스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꾸짖으신 것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타이르신 일이기도 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경고는 그리스도교에도 해당됩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실 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라고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해서,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이고, 저승의 세력이, 또는 악의 세력이 건들지 못하게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신 교회인데, 그리스도교가 망하는 일이 생기겠는가?
저승의 세력이 교회를 건들지 못하게 지켜 주겠다는 약속은 우리 쪽에서 예수님의 신앙인답게 살 때에만 유효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지켜 주겠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셨으니 예수님께서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가 문제다 - 답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인 회개뿐이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
(시편 43,3)
감로수(甘露水)같은 ‘시대의 현자’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으로 오늘 강론을 시작합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를 여니 새롭게 마음에 와닿은 말마디들입니다.
'교황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우리의 집을 짓도록" 격려했다.'
“무장해제는 도덕적 의무이다.”
“우리 모두 말하도록 하자: '충분합니다!', '좋습니다!'”
(Let us all say: “Enough!”, “please!”)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라는 철학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이 책 중 나오는 내용을 인용합니다.
"동양의 지혜는 역사 없이 존재한다.
이는 곧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는 뜻이며, 특정한 관념에 의해 역사를 고정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역사는 역사를 가질 수 없다.
공자를 비롯해 동양의 현자들이 세상에 대해 그 어떤 편견적인 시각을 투사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상 자체에 접근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로부터 자유로울 자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동양의 현자들과는 달리 성서의 현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하느님과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바로 그 대표적 인물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열왕기하권의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예언자입니다.
우선 제1독서의 나아만의 치유과정을 통해 우리의 무지의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에 대해 살펴봅니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다.’
오늘 제1독서는 나아만의 나병치유와 더불어 선입견과 편견의 무지의 병의 치유과정을 보여줍니다.
무지의 치유에 깨어있는 마음, 열려있는 마음의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어쨌든 나아만에게는 나병이 무지의 병의 치유에 전화위복이 되었음을 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잡아온 소녀가 구원의 도구 역할을 할 것을 누가 알았겠는지요!
이 또한 우리의 선입견을 깹니다.
사소한 작은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나아만의 방문에 두려움에 떠는 아람 임금 또한 무지의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자기만의 편견과 오해로 상황을 재단하고 절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의 등장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할 것입니다.”
나아만의 방문에도 전혀 두려움이 없이 의연한 엘리사는 참으로 무지로부터 자유로웠음을 봅니다.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합니다.
이또한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나아만의 근본적 무지의 병인 허영과 교만의 치유를 목표로하고 있음을 봅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 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말 그대로 겸손과 순종의 시험입니다.
나아만이 화를 내고 발길을 돌리면서 하는 말들이 그의 굳어진 선입견, 편견, 교만을 보여줍니다.
나병에 앞서 나아만의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교만의 무지의 병이 심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돌려 부하들의 간청대로 엘리사의 조언대로 겸손히 순종하여 따랐을 때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집니다.
어린아이같은 새살은 어린이같은 순수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무지의 치유에 순종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남으로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의 병도 치유된 나아만의 하느님 고백입니다.
참으로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치유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깨어 있는 마음, 열린 마음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무지의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주님을 만남으로 참으로 겸손해졌을 나아만은 온전한 건강의 참사람이 되었음을 봅니다.
나아만은 나병과 더불어 무지의 병까지 치유되게 만들었으니 전화위복입니다.
흡사 화답송 후렴 시편이 무지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영혼의 부르짖음처럼 들립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
(시편 42,3)
무지에 대한 답은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육신의 병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지의 병입니다.
탐욕, 질투, 절망, 원망, 미움, 분노, 두려움,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어리석음, 전쟁 등 끝없이 이어지는 부정적 마음의 현상들 무지로 인해 파생된 징후의 병들입니다.
참으로 이런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들이, 마음속 괴물들을 잘 길들인 이들이 현자요 예언자요 성인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무지로부터의 해방의 여정, 치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육신의 병도 대부분 이런 무지의 병으로부터 기인됩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은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의 무지의 병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나자렛 고향 회당에 모여있던 고향사람들에게도 예수님께 대한 선입견의 무지의 병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편견과 선입견, 질투에 사로잡힌 무지한 인간의 한계요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현상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비롭고 지혜로워 겸손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세상 연옥에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지로 인한 아비규환,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참 생존경쟁 치열한 참으로 혼란한 세상 전쟁터입니다.
주님은 엘리야 시대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의 예를 들면서, 또 엘리사 시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예를 들면서 고향 사람들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느님께는 차별이 없고 일체의 기득권도 무용지물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사렙타 과부처럼,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처럼 겸손히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순종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점입가경입니다.
무지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화가 잔뜩난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흡사 바위에 계란치기처럼 무지의 바위처럼 생각되는 나자렛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참으로 외롭고 고독했을 예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떠나시는 대자유인 예수님이십니다.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유일한 답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인 회개뿐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무지의 병의 치유 여정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무지의 병에 좋은 치유제는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시편 43,4)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마음을 열고 복음을 믿어야>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허물이 없는 사이일수록 더욱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심성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씨가 큰 집을 태울 수 있듯이, 사소하게 나간 말 한마디가 큰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농담처럼 사람의 신체에 대한 약점을 이야기하지만 듣는 사람은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예뻐만 보이는 장미의 정원에도 자세히 보면 잎이 찢어진 것도 있고, 벌레 먹은 것도 있고, 색이 바란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몸매가 균형 잡히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사람도 있겠지만, 선천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안타까운 사고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와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래서 치우거나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면 세상은 더욱 삭막해질 것입니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니 형의 반만 닮아봐라.’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소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라는 말을 자주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시리아의 왕은 이스라엘에 훌륭한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예언자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리아의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많은 선물을 주면서 나아만의 나병을 고칠 수 있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은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이스라엘 왕은 먼저 불평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가서 나병을 치유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고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의 부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아만은 부하의 말을 듣고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괴롭혔던 나병은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닫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제게 위로를 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미국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나라는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 등급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수능 시험 등급이고, 또 하나는 내신 등급입니다.
그런데 엄마들이 보는 자식의 등급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1등급: 공부를 잘한다.
2등급: 공부는 못하지만, 성격이 좋다.
3등급: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나쁘지만, 건강하다.
4등급: 지 아빠 닮았다.
공부 잘하는 것이 1등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아이를 위한 엄마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뭐라 하기도 뭐합니다.
하지만 성적을 위해 학원 열심히 다니고, 각종 스펙을 쌓느라고, 성격도, 건강도, 또 가족 간의 사랑도 잃는다면 성적과 스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오히려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습니다.
즉,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과는 다른 하느님 나라에 가는 기준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회당에 있던 고향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통해, 더 화가 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선택된 자기들만 당연히 구원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은총이 넘어감을 이야기했다고 화가 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얼굴만 닮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야 진정으로 닮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길에 들어가는 은총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지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갑니다.
그들은 구원의 은총을 걷어찼습니다.
겸손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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