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시인’ 윤동주, 그 인연(因緣)의 매듭 - 서정성의 언어 미학과 여인의 존재감 엄창섭 (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주간) 1. 운명적인 만남과 그 인연의 끈 어디까지나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이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正音社, 1948)의 간행으로 세상에 존재감을 지닌 민족 시인으로서 그 정체성을 평가받기까지 정병욱(鄭炳昱, 1922~1982) 교수의 공적은 지대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관 3층에서 7월 22일까지 「백영 정병욱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 개최되기에 본고의 기술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일단 1940년 연희전문 대학신문의 학생란에 정병욱의 투고로 인해 두 사람 간의 운명적 만남이 그렇게 맺어진다. 그보다 윤동주는 3년 선배로 다섯 살 위였지만 기숙사와 하숙집에서 2년간을 함께 지냈고 문학과 예술에 관해 논쟁하면서도 청정한 젊은 지성,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평생지기로서의 글벗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윤동주 삶의 일면은 정병욱의 회고담에 의해 세상에 밝혀졌다. 그는 윤동주의 첫인상을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一) 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멋쟁이였다.”라며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나라사랑, 1976)에서 술회하고 있다. 이처럼 윤동주가 자필 시집 3부를 쓰게 된 동기와 '풍화작용'이라는 시어로 몇 달간 고민했던 정황, 또 <별 헤는 밤>의 끝부분 4행을 첨가한 동기도 또렷이 살려냈다. 또 그는 강처중, 김삼불, 유영과 함께 ‘윤동주 추모회 및 시 감상회’도 주관하였고 시비 건립과 연세대에 윤동주 장학금 추진을 주도하면서 그의 시 보급에 열정을 쏟아온 족적은 오래 기억할 일이다. 까닭에 이 땅의 어느 지성보다 인생의 황혼기를 ‘민족시인 윤동주의 시혼을 기리는 소임’에 온몸을 불사르는 필자의 ‘정신적 큰 스승인 김우종(金宇鐘) 평론가’의 그 헌신적인 삶 또한 예외일 수 없기에 밝혀두기로 한다. 특히 윤동주의 대표시인 <별 헤는 밤>에 관한 뒷얘기로 어느 날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로 마무리된 초고를 정병욱에게 건네주었다. ‘어쩐지 끝이 좀 허(虛)한 느낌이 드네요.’라는 느낀 바를 전해 들은 윤동주는 뒷날, 시집 제1부의 <序詩>까지 첨가된 한 부(部)를 건네주었다. ‘지난번 정형이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1941.11.5.)”로 수정한 넉 줄을 넣었다.’라는 되 뇌임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 서울대 국문학과의 교수를 역임한 정병욱은 자신의 수필 <잊지 못할 윤동주>에서 “동주의 노랫소리는 이 땅의 방방곡곡에 메아리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으니 동주는 죽지 않았다... 줄임... 내 평생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은,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것이라.”고 자긍심을 토로했다. 또 자신의 호(號)를 윤동주의 시편인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흰 그림자)”과 연계 맺어 ‘백영(白影)임’을 자처한 관계도 그렇지만 여동생 정덕희가 동주의 남동생 윤일주와 혼인해 맺어진 그 인척관계도 우연은 아니다. 그간에 학술논문과 평전을 포함한 적지 않은 분량의 각종 연구물이 발표된 현상에서 ‘윤동주와 관계된 여성에 관한 자료나 물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단지 그의 당숙인 윤영춘의 ‘고향에서 전혀 여성을 사귄 일은 없다’는 전언과 1976년 정병욱의 ‘동주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세간에 밝혀졌을 뿐이다. 이 같은 정황에서 『신문예』의 지은경 발행인이 평론집 『인식의 지평』(책나라, 2022)에서 「동주의 여인 관계」(상계서, 18-20쪽)를 별개의 항목으로 구분 지어 주의 깊게 서술하고 있음은 주지할 바다. 2. 바람의 초상(肖像)과 별이 된 연인 지난 2017년 12월 4일 한국교회 건강연구원(원장 이효상 목사) 주최의 「시인 윤동주 탄생 백주년 기념」 특별강연회에서『윤동주 평전』(서정시학, 2014)의 저자이며 송몽규의 조카인 송우혜 소설가는 「별이 된 시인-윤동주가 사랑했던 여인」 특강에서 “윤동주는 잘 생기고 수줍은 청년이었으나 한 번도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친구와 후배는 이화 여전 여학생에 대해서 증언했고, 또 여동생인 윤혜원(권사)도 함북 온성 출신인 '박춘혜'라는 여학생을 적극적으로 사랑했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나온 시편 <봄>은 그의 시 전체에서 시적 정조가 가장 밝고 화사하고 즐거운 시다. 당시 박춘혜에게 느꼈던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매우 강렬하고 생생한 그 일면을 열띤 육성으로 일깨워준 일례다. 특히 1932년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고 은진중학에 입학 당시부터 비로소 동주(東柱)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그의 생애는 불과 ‘27년 1개월 16일’ 밖에 안 되지만, 아명인 해환(海煥, 해처럼 빛나라)과 달리 암울한 삶을 마감했다. 현실적으로 그가 처했던 시간대는 인류 역사상 험악했던 격동의 시기로 세계 1차 대전 중 중국 북간도 명동촌에서 출생하고 세계 2차 대전 중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처럼 격랑의 세월에 몸담았던 그 자신이 맑고 지순한 시를 써서 민족의 아픔을 위무(慰撫)하고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시대적 소임을 엄숙히 수행’하며 시적 상상력을 순수 서정시의 양식으로 형상화시킨 점은 못내 대견하다. 한편 시적 양식을 빌려 민족의 격조를 높이며 올곧게 자긍심을 지켜냈음도 그렇지만 마침내 가해 당사자인 일본인들도 윤동주의 시를 즐겨 찾아 읽으며 깊이 감동하는 문화충격은 관망할 바다. 본고에서 단편적이나 그 삶의 족적을 두 가지 키워드로 구분 지어 ‘삶과 시’의 이론 구축에 시사적 의미가 주어짐은 하나의 충격이다. 일제강점기 순전한 민족시인 윤동주는 조국이 겪었던 가혹한 굴레와 처참한 압제의 고통을 절감하다가 조국광복을 몇 개월 앞두고 ‘독립운동을 한 사상범이라’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 앞서 윤영춘 교수는 북간도에 머무를 때 윤동주의 삶에서 ‘여자’와 관련된 기억으로 “얼굴이 잘 생겨서 거리에 나가면 여학생들이 유심히 그의 얼굴을 보기도 하고 여자로부터 말을 건네받는 경우도 있었다. 하나 수줍은 그는 한 번도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라고 되뇌었다. 그는 조부로부터 근면과 관용성을, 기독교 장로인 부친(윤영석)에게서는 내성적 겸허함을, 또 모친으로부터는 온화와 치밀한 성품을 정신적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특히 ‘175센티의 훤칠한 신장에 잘 생기고 수줍은 청년으로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윤동주다. 굳이 그의 여성편력이라면 ‘연희전문 재학 중의 일과 동경 유학시절 입교 대학 영문과 재학 중’의 사연뿐이다. 그 첫 대상자인 이화 여전 학생은 연전 시절의 가장 절친한 후배 정병욱에 의해 비로소 알려졌다. 짐짓 아쉬움이 남는 정황은 신촌 기숙사에서 시내로 하숙을 옮겼다가 교외인 신촌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시내라 할 수 없는 북아현동으로 ‘왜 하숙을 옮겼느냐?’라는 그 막연한 추론은 못내 의문일 따름이다. 그 일에 관한 정병욱의 회고(回顧)로 “그 무렵 북아현동에는 동주 형의 아버님 친구로서 교사를 하다 전직하여 실업계에 투신한 분이 살고 계셨다. 동주 형은 그분을 매우 존경하여 그분 댁을 찾기도 하였다. 그분의 따님이 이화 여전 문과의 같은 졸업반이었고, 협성 교회와 케이블(Elmer M. Cable) 목사의 부인이 지도하는 바이블 클래스에 같이 출석하였다. 동주 형은 나이 어린 나에게 그 여자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 적은 없으나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동주 형은 아버님과 그 친구끼리 혹시 무슨 이야기가 오갔고, 그런 사실을 아버님께서 동주 형이 듣지나 않았는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이런 일도 혹시 이 무렵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처음으로 동주의 여성관계를 공개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으로는 동주 형과 그 여학생이 밖에서 만난 일은 없었다. 매일 같은 기차역에서 열차를 기다렸고 같은 차로 통학했으며 교회와 바이블 클래스에서 서로 건너다보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오가는 눈길에서 서로 마음만을 주고받았는지 모를 일이라 하겠다.” 또 한편 윤동주의 연전 시절 동급생인 강처중의 일화로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으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절대 고백하지 않았다. 그 여성도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이와 같이 그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이 대부분 알고 있었음을 배제하지 않을 때 그 여성도 알아차리고 내심 느꼈을 것이다. 그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졸업 즈음에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벙어리 사랑’도 함께 끝났다. 이 시기 이름을 순(順), 또는 순이(順伊)로 지칭한 시편 <사랑의 殿堂>과 <少年>을 통해서 그 가슴앓이를 유추할 뿐이다. 이 같은 일면은 1938년 6월 19일에 읊어낸 “順아 너는 내 殿에 언제 들어왔든 것이냐?/내사 언제 네 전에 들어갔든 것이냐?/...(중략).../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사랑의 殿堂)”의 보기에서나 1941년 3월 12일 자의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라는 절망적인 분위기를 이미지화한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눈 오는 地圖)”에서 그 정황은 예견된다. 그 당시 협성 교회는 이화 여전 음악관의 소강당에 자리한 건물로, 윤동주의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저희가 永遠히 슬플 것이오.(八福)”는 상이하게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예수의 산상설교 중 팔복(마태 5:3-12)은 다분히 자의적인 역설로 어둠 뒤의 그 슬픈 자화상에는 비장감이 묻어있다. 차제에 윤동주의 두 번째 그 사랑의 대상인 동경 유학 당시 성악 전공의 박춘혜는 함북 온성 출신이다. 그녀에 관한 사랑은 연전 시절의 말없이 아프기만 했던 양상과는 달리 다소 대조적이다. 여동생 윤혜원(勸士)의 증언처럼 ‘윤동주 시인이 동경에 유학한 뒷날 처음 여름방학을 맞아 1942년 7월 고향 집에 왔을 때, 그녀의 사진을 가족들에게 선뜻 내어놓았다. 이것은 결혼 상대자로 그녀를 정식 소개한 셈이다. 이 사진은 여학생이 막내 오빠와 오빠의 친구 이렇게 셋이서 찍은 것인데, 지성미가 풍기는 아주 좋은 인상이었다. 바로 윤동주는 연전 졸업 후 불과 다섯 달 뒤 결혼상대로 마음먹고 박춘혜의 사진을 자신의 가족들 앞에 내놓았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 사로잡혔으리란 것은 가늠된다. 모처럼 그가 연정을 품었던 그녀는 동경 유학시절에 만난 친구의 여동생이다. 동경유학생으로 막내 오빠와 함께 자취를 하였기에 윤동주는 그녀의 집안 사정도 비교적 잘 알고 지낸 편이다. 그녀는 목회자의 막내였고 오빠도 윤동주가 마음에 들어 누이동생의 남편감으로 마음에 두고 있던 낌새다. 언젠가 “내 동생 같은 여자만 있으면 나도 곧 장가가겠다.”면서 동생은 성격도 좋고 아주 좋은 여자라고 은근이 자랑도 곁들였다. 또 윤동주도 김치가 먹고 싶으면 그 집에 가서 식사를 자주 했다고 언급한 점에 비춰 그녀와의 행복한 결혼생활도 꿈꾸었으리라는 가증은 배제할 수 없다. 각론 하고 함북 온성은 북간도 용정과 가까운 곳이기에 박 목사라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 서로 간에 알만한 처지였을 것이다. 이 같은 예견은 조부 윤하현은 깨어있는 자의식의 지도자(長老)로서 신학문과 기독교를 정착시킨 연유로, 종교적 자의식을 지닌 윤동주는 유년시절부터 신앙심이 깊어 한 때 주일학교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비록 연전 시절 종교적인 회의도 깊었으나 온전한 신앙심으로 종교체험을 창작 모티프로 삼아 시문학에 전념하였다. 어쨌든 집안의 어른들마저 그에게 “가문 좋고 참 좋다. 잘 추진해봐라!”라고 격려까지 하였다. 그는 여름방학 후에 동경으로 돌아갈 때 그 사진을 놔두고 갔다. 새 학기가 되자 뜻밖에 용정으로 “그 여자가 이번 여름방학에 집에 갔다가 약혼하고 왔더라.”는 사연과 함께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그렇게 윤동주의 로맨스는 허무하게 끝났고 아픈 상처만 동경에서 쓴 시편 <봄>의 몽환(夢幻)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종달새의 날개 짓에 그 꿈만 부풀어 올랐다. 한 때나마 열띤 감정은 “즐거운 종달새야/어느 이랑에서나 즐겁게 솟쳐라(봄)”에서 가장 밝고 따뜻한 감성에 기인한 즐거운 시적 정조로 이채롭게 확증된다. 마치 ‘봄의 전령사인 종달새’의 벅차고 들뜬 정감의 수사적 기법은 박춘혜에게 빠져든 뜨거운 감정이 영혼의 울림으로 변형된 양상이다. 운명의 장난일까? 약속이나 한 듯이 그녀는 결혼하고 법학을 전공한 남편은 청진 재판소에서 법관으로 재직한다. 3. 시 의미의 틈새 좁히기와 문제의 여지 한국 현대시문학에서 동시대의 그 누구보다 천체나 기상학에 남다른 관심을 지닌 윤동주 시인의 시편에서 "별"은 지나친 의미의 확대나 상징적 처리가 아닌 자연현상 그대로의 해석이 합리적이다. 앞서 최병로는 ‘윤동주 문학과 한용운의 문학 속의 길의 이미지를 대비(對比)’해 서술하였다. 서로 간 종교 양상을 달리하는 두 시인의 시편에서 ‘바람, 별, 하늘, 길’ 등 빈도수 잦게 상징적으로 형사(形似)된 시어를 접할 것이다. 이처럼 ‘윤동주와 만해’의 경우뿐만 아니라, 타자 간의 시편을 통해 ‘한용운과 조지훈, 서정주’, ‘한용운과 타고르, 김동명’, ‘유치환과 니체’, ‘서정주와 보들레르’ 등과 상오관계 맺어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그 검색할 필요성은 타당하다. 근간에 정우택의 『시인의 발견, 尹東柱』(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에서 윤동주의 시적 주체는 “성찰하는 윤리적 주체뿐 아니라 사랑의 정념 그리고 탈주, 욕망하는 ‘청춘’이었다.”라는 지적은 뜻깊다. 그가 처한 시대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신으로부터 허락된 절대복종의 길을 걷겠노라는 확고한 신념은 비장할 따름이다. 그의 시편에 수용된 시어의 비교문학적 대비는 유념할 과제이나 그를 민족 시인이라는 범주에 묶어 단순한 시 의미도 지나치게 확대하여 본말을 거스르는 자의적 해석은 경계할 점이다. 여기서 어느 날 동지사대 영문학과 교수 집의 모임에서 일본 동기의 말이 끝났을 때 “여러분은 목숨 바칠 조국이 있지만 내게는 그런 조국이 없다.”란 울분에 젖은 윤동주의 절규도 그렇지만 그 자신의 시편 말미에 천황의 소화(昭和)가 아닌 서기(西紀)로 표기한 의중 하나도 소홀하게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전쟁의 암운(暗雲)이 점차로 짙어지던 세기말 상황에서 “아름다운 順伊의 얼골은 어린다.(少年)”를 나직한 음조로 읊조리며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 던 존귀한 별의 시인은 날(刃) 푸른 저항정신으로서 아름다운 창조적 자아성취를 위하여 부당한 인위적 대립구도와 철저하게 맞섰다. 그 자신은 주어진 현실에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며” 저항했지만 시대적 파고가 너무 거세어 끝내 감당치 못했다. 모쪼록 ‘사랑처럼 슬픈얼골-아름다운 順伊의 얼골’이 천상을 지향한 열린 동공에 클로즈업되는 현상은 ‘불멸의 초상’으로 굳혀진 윤동주 시인의 진면목을 구명하는 작업이기에 ‘그 연인과의 입맞춤이 황홀한 현기증임’을 기대할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