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순)으로 고소득 올린 용포(龍浦)마을
삼향면 용포리는 본래 나주군 삼향면의 지역으로 오룡산 밑에 포구가 형성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종 32년(1895년)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고, 1910년에는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정리, 용계리, 평전리, 덕치리, 추치리, 신동리, 와동리, 장항리, 극배동, 이동, 용강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용포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용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용포리의 유래와 같이 마을의 주산인 오룡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 앞에 포구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삼향면 용포3리 용포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로 마을 유래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월성 昔氏가 먼저 왔고 그 이후 밀양박씨, 광산김씨, 김해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무안세적지에는 인조 代에 차계남(車季南)(호- 한한당, 연안인)이 먼저 입향했고 후에 정조 代 안광언(安洸彦)(호-해강.순흥인)이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차계남은 인조대의 사람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경기도 수원시 봉황동에서 세거하다 병자의 난을 피해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공은 세상의 덧없음을 익히 알고 의리가 사라졌음을 통탄하여 세상에 나가지 않고 가호에 은거하였다. 또한 안광언은 순조대의 사람으로 나주 영산포 삼영리에서 세거하다가 연이은 흉년으로 이곳 용포로 와서 터를 잡았다. 공은 재성이 초범하고 문장이 높아 주변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으나 명리를 탐하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이곳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김해김씨의 족보를 보니 김명신이 18세기 초 영암 서호에서 이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여름철이 가장 바쁘고 실속 있는 계절이다. 바로 이 마을의 특산물인 순고구마 때문이다. 보통 고구마는 메꽃과의 여러해살이 덩굴풀의 하나로 대체로 뿌리를 수확하는 식품인데 이 마을의 고구마는 순을 이용해 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은 여름 한철에 최고 2,000만원의 소득을 올리기도 한다. 또한 쉬엄쉬엄 해도 500만원은 너끈히 번다고 하니 웬만한 농사보다는 소득이 휠씬 알차다. 예전의 이 시절에는 당산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거나 보리 자루를 지고 남창포구로 가 황석어(황실이)와 바꾸기 위해 가는 일이 일상적인 때이기도 했었다.
마을 앞의 들(野)을 만들이라 한다. 예전에는 이 들에 호남선 철도를 놓으면서 둑을 쌓아 조금만 비가 내려도 농경지가 물에 잠기는 일들이 허다했으나 현재는 호남선이 옮겨지고 물 관리가 잘 되면서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현재 그 자리에는 서해안 고속도로와 연결되어 광양까지 가는 국도 2호선 공사가 진행 중에 있으며, 811번 지방도로 확장공사도 병행해 건설되고 있어 철도로 두동강이 난 지역이 또 다시 앞 뒤로 도로에 묻힌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에는 바위(岩)로 인해 일로읍과 관련된 전설이 두 개나 있다.
첫째는 달바위의 전설이다 원래 일로읍 월암리 일로초등학교(체육관 뒤)교정에는 서 있는 바위가 하나 있다. 지금은 일로초등학교 주변에 건물이 들어서서 시야를 가리고 있지만 예전에는 그 바위를 일로 주변의 사방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용포 마을 솔잔등에서는 직선으로 그 바위를 볼 수 있어 사연들이 많았다. 즉 달이 비치는 날 그 바위를 보면 마치 남자의 성기가 발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마을 처녀들이 바람이 나고 특히 아줌마들은 불륜을 저지르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해서 어느 날 저녁에 용포의 남자들이 월암리의 바위를 밀어서 서있지 못하게 만들고 바위 주위에 대나무를 심어 볼 수 없게 만들자, 그 이후부터는 마을의 부녀자들이 진정되고 더 이상 나쁜 소문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는 일로읍 죽산리 당월촌의 범바위와 이 마을의 용과 관련된 이야기다. 아쉽게도 내용은 있지만 정확히 알고 있는 주민이 없어 채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마을에서 장상지지(將相之地)와 관련된 월성 석씨 ‘아기 장수’의 전설이 채록된 기록이 있어서 아마 그와 연결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이 마을에서는 자방포에 대한 새로운 유래가 있었다.
일로읍 당월촌에서 유래하는 이야기는 둑을 막을 때 자꾸 둑이 터지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거지였던 '자방‘이라는 사람을 제물로 해 둑을 완성시켰다 해서 붙어진 이름이란 것이다. 즉 인신공양의 결과물로서 얻어진 둑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용포에서는 둑을 쌓을 때 잠을 자고 나면 밤새 누가 쌓았는지도 모르게 상당 부분 쌓여져 있었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잠만 자고 나면 저절로 둑이 쌓여졌다 해서 자방포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곳의 자방포 간척지 바닥에는 왕대(王竹)들이 깔려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자방포 들을 농경지로 만들면서 염분 제거를 위해 바닥에 왕대를 넣고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삼향동초등학교의 전신인 ‘용포간이 학교’가 1939년에 세워졌다가 1948년 현재의 맥포리(극배+월계)로 옮겼다.
이 마을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오룡산 기슭의 구슬고랑(珠洞, 또는 玉洞), 서당고랑(書堂峙 ), 갱이고랑(更以洞) 등이 있다. 시누대가 많이 있었다는 대삽골도 있다. 또한 모룡지라는 곳은 오룡산의 맥을 이어받은 곳으로 지형상으로 물을 맞는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슬고랑에는 지금도 밭을 경작하기 위해 땅을 파면 옛날의 기와조각들이 무수하게 나온다고 한다.
811번 지방도로에서 용포 마을로 들어올 때 넘는 고개가 무네미[水?峙)다. 이 자리는 호남선 공사를 할 때 학이 날아간 자리라고 한다. 이 자리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 물이 지형상 임성리로 흘러야 하는데 거꾸로 용포리로 넘쳐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재는 옛날에 도둑들이 많이 있어서 일반인들이 낮에는 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지낸다. 마을회관 앞 당산나무에는 상석이 항상 자리하고 있어서 당산제의 시작이 오래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에는 차남진 제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조순형 집도 없다. 96세대 268명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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