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이도 집이 있다.
김민술
짙은 색깔 논에 벼가 한가득 짙고 푸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다. 1950년 한국전쟁은 유난히 더웠다. 그때 내 나이 열세 살, 전주에서 정읍시 감곡으로 아버지 따라 피난 갔다.
유사시 국가를 수호할 국방이 완전 무장하고 전투태세 갖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 광복 후 이승만 정부는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근데 북한이 일요일 새벽에 적막을 깨트리고 삼팔선을 넘어 왔다. 우리는 편안히 잠자고 있었고 혀를 찔렸다.
낙동강 교두보, 맥아더 장군 인천 상륙 아니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가능했을까? 전쟁 중에 보릿고개는 하늘보다 높았고 와중에 엄마 배고파 밥을 달라고 울었다. 피난 가고 남은 식구들이 농사 짓는데 기계아닌 사람 손으로 한모 두 모 벼를 심었다. 나는 어른들 뒤따라가며 쓰러진 벼를 세운다.
논에는 모심기 위해 써레로 펑퍼짐하게 골라 황토물이 출렁이고 가끔 발꿈치에 닥딱한 게 밟히면 손을 넣어보면 주먹만 한 우렁이가 잡혔다. 어른들 눈치 챌라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여러 번을 하니 주머니가 넘친다. 풀로 꾸러미 만들어 논두렁에 놔뒀다 일 끝나고 해 질 녘 엄마한테 드렸다. 엄마는 신기 했는지 모 품 팔고 밥 먹고 우렁이 잡고 아니고 내강 아지 등을 다독이신다. 나는 개선장군이 된냥 기분이 좋았다.
이튿날 점심때 엄마는 우렁이 삶아 된장찌개를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요리하셨다. 둥근 상에 가족이 함께 거친 밥이라도 우렁이 찌게 고추장 넣고 비벼 먹고 물 마시며 팔 구부려 베개 삼아도 즐거움이 또한 우렁이 툭 박이 속에 잊지 않을까? 소 돼지고기 궁할 때라 우렁이 찌개는 진수성찬,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우렁이도 두렁, 넘을 꾀가 있다는 속담이 있다 어리석은 못난 사람이라도 한 가지 꾀가 있다는 말, 우렁이도 껍데기가 있는데 그게 우렁이 집이다. 사람으로서 몸을 담을 집이 없으면 얼마나 불행하고 외롭겠는가, 우렁이는 연체동물로 민물에 살며 사람 몸의 영양을 좋게 하는 음식물이다. 어떤 장애로 인하여 경구적인 영양 섭취가 불가능 할 경우에 쓰이는 직장 영양으로 좋은 식품이다. 자양 滋養이 많아 식용으로 주목을 받으며 바다 없는 육지에서 열량이 높은 신선해 훌륭한 회 무침으로도 일품이다.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절로 나온다.
예전에 시골에서 사위와야 씨암탉 잡는다고 하고 특이한 귀한 손님이 오셔야 밥상에 달걀 말이 오르면 더 상에 놓을 것 없었다. 그런데도 우렁이는 신기한 음식인데도 아직도 대중화가 되지 않아 마음 아프다. 엄마가 우렁이 넣고 요리한 된장 찌개는 우리들 둥근상에 적극적이라서 누가 뭘 해도 아우 라를 풍긴다. 우렁이는 번식력이 강해 옅은 강이나 논에서 서식하며 자연스럽게 많은 종식을 할 수 있는데 대중화가 되지 않아 아쉽다. 엄마가 살아계시면 한식으로 우렁이 찌개를 전문으로 보편적 음식의 존재감을 찾고 싶은데 정말 아쉽다.
(2024.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