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에서 9차까지 배경원인
https://okss17.tistory.com/431
계속된십자군의실패,6차십자군,8차십자군,교황권의 몰락
https://adipo.tistory.com/m/entry/%EA%B3%84%EC%86%8D%EB%90%9C-%EC%8B%AD%EC%9E%90%EA%B5%B0%EC%9D%98-%EC%8B%A4%ED%8C%A8-%EC%A0%9C6%EC%B0%A8-%EC%8B%AD%EC%9E%90%EA%B5%B0-%EC%A0%9C8%EC%B0%A8-%EC%8B%AD%EC%9E%90%EA%B5%B0-%EA%B5%90%ED%99%A9%EA%B6%8C%EC%9D%98-%EB%AA%B0%EB%9D%BD-%EC%95%84%EB%B9%84%EB%87%BD-%EC%9C%A0%EC%88%98
임진왜란을 일으킨 천주교 예수회 ᆢ십자군
https://m.cafe.daum.net/Fullgospelgk/EMwg/226?searchView=Y
https://m.cafe.daum.net/Fullgospelgk/EMwg/569?svc=cafeapp
십자군원정
시대적배경
●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1099년)
https://namu.wiki/w/%EC%A0%9C1%EC%B0%A8%20%EC%8B%AD%EC%9E%90%EA%B5%B0%20%EC%9B%90%EC%A0%95
● 제2차 십자군 원정 (1147∼1149년)
https://namu.wiki/w/%EC%A0%9C2%EC%B0%A8%20%EC%8B%AD%EC%9E%90%EA%B5%B0%20%EC%9B%90%EC%A0%95
● 제3차 십자군 원정 (1188∼1192년)
https://namu.wiki/w/%EC%A0%9C3%EC%B0%A8%20%EC%8B%AD%EC%9E%90%EA%B5%B0%20%EC%9B%90%EC%A0%95
● 제4차 십자군 원정 (1202∼1204년)
https://namu.wiki/w/%EC%A0%9C4%EC%B0%A8%20%EC%8B%AD%EC%9E%90%EA%B5%B0%20%EC%9B%90%EC%A0%95
● 제5차 십자군 원정 (1217∼1221년)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mirejet&logNo=110089168791
● 제6차 십자군 원정 (1228∼1229년)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6%EC%B0%A8_%EC%8B%AD%EC%9E%90%EA%B5%B0
● 제7·8차 십자군 원정 (1248∼1254년)
▣ 십자군원정의 결과
십자군 원정
시대적 배경
1090 제1차(1096∼1099년)
1100
1110
1120
1130
1140 제2차(1147∼1149년)
1150
1160
1170
1180 제3차(1188∼1192년)
1190
1200 제4차(1202∼1204년)
1210 제5차(1217∼1221년)
1220 제6차(1228∼1229년)
1230
1240 제7·8차(1248∼1254년)
▣ 십자군 전쟁이란?
십자군 전쟁은 11세기말부터 13세기까지 8차례에 걸쳐서 이슬람교 세력이 그리스도의 무덤을 파괴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강탈함으로써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가 탈환하기 위해 일어난 쌍방간의 전쟁이다.
▣ 십자군의 명칭?
십자군이란 명칭은 이 전쟁에 참가했던 자들이 의복에 십자가 표지를 붙인 것에서 유래되었다.
▣ 역사적 배경과 원인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교 영향권에 있는 동유럽과 소아시아가
이슬람교 세력에 의해 점령되기 시작하였다 633∼643년에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등의 나라들이,
669∼798년에는 아프리카 북부가, 그리고 711∼719년에는 스페인이 정복되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가 위기를 느끼고 불안해하였다.
1010년에는 모슬렘 교도인 하킴(Hakim)군주가 당시 모슬렘 교도들에게까지 성지로 존중되어온 성지들을 강탈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을 파괴하였으며, 1048년 이래 터키의 셀주크 왕조가 동로마 제국의 소아시아 국경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070∼71년에는 셀주크 터키족이 지중해 동해안에 진출하여 팔레스타나 성지를 점령하고 순례자들을 박해하였다.
그런데 초기 교회때부터 순례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으므로, 특히 성지와 순례자들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로 생각되었다.
십자군의 참가자들은 두 가지의 동기를 가졌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겠다는 개인적인 신앙차원의 서원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군에 참가하는 동안 자기 가족과 재산을 교회가 보호하는 물질적인 이익과 대사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1099년)
1095년 삐아첸자(piacenza)와 끌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제국의 알레시오 황제가 파견한 자들로부터 동로마제국의 위급한 상황을 전해듣고 그리스도의 무덤을 되찾고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자고 호소하여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년)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돌아가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대한 열망, 동방과의 무역을 원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상업적인 야심등의 요인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특히 십자군에 참가하여 대사를 받고 전사할 경우 순교자가 된다는 것도 열성적인 신자들을 원정군에 쉽게 참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제1차 원정에서는 비조직적이고 계몽되지 않은 농부들도 많이 참가하여 교회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들이 라인 지방을 지날 때, 흥분한 나머지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로 유혈 참사가 일어났는데 발칸 지역을 지날때에도 지휘자의 통솔을 제대로 받지 않은 이들은 지방 주미들에게도 방화와 학살로 참극을 일으켰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많은 원정군들이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도 전에 셀주크족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원정군들이 악전고투 끝에 1098년 안티오키아를 함락하고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부녀자와 유아와 노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참살하는 비 그리스도교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서유럽에서 이곳까지 도달하는 전투에서 이슬람군들의 매복병들의 습격을 받아 매일 매일 수많은 동료들이 전사하는 가운데 겨우 살아 남은 이들의 보복심리와 이슬람 군들의 항전의 악순환이 서로를 살육의 참상으로 몰고 갔다. 이런 악순환의 결과는 생사의 기로에서 양측 모두 이성적인 자제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하게 생존의 본능만이 절대 기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제2차 십자군 원정 (1147∼1149년)
제2차 원정은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에뎃사가 함락(1144년)되면서 시작되었는데(1147∼1149),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의 설교로 추진되었지만 터키인들과의 여러번의 전투에서 전멸되어 결국 예루살렘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 제3차 십자군 원정 (1188∼1192년)
제3차 원정(1188∼1192)은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Friedrich)황제가 인솔한 잘 조직된 십자군들이 이코니움에서 터키인들과 싸워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황제가 1190년 살레프에서 익사함으로써 지휘자를 잃은 군대는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영국의 왕 리차드(Richard) 1세, 프랑스의 필립(Philipp) 2세등이 참가하여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십자군들이 성지의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고 살라딘 술탄과 화해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평화로운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 제4차 십자군 원정 (1202∼1204년)
제4차 원정(1202∼1204)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호소로 시작되어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두가 마지막으로 이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완전히 교황의 의사를 거스르고, 이기적이고 상업저인 이해관계에서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라가하고(1204. 4.13) 라틴 제국이 그곳에 설립되는 엉뚱한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 되시는 심하게 약탈되고 황폐하였으며, 이러한 난폭하고 비 이성적인 행동은 동서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동방세계의 방위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제5차 십자군 원정 (1217∼1221년)
제 5차 원정(1217∼1221년)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이 결정되어 1217년에 실행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파견을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아 파문을 받았다. 원정군은 동유럽의 신흥 그리스도 국가의 약소한 군사력으로 편성되어 이집트를 공격하여 다미에타를 공격하는 적은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지 재탈환을 복음 정신에 따라 평화로운 포교로 해야 한다는 본래의정신에 따라 무방비 상태로 성지에 가서 술탄을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술탄이 성인을 너그럽게 대우하여 풀려났고, 이것을 계기로 프란치스코회의 평화로운 선교활동이 성지에서 시작되었다.
● 제6차 십자군 원정 (1228∼1229년)
제 6차 원정(1228∼1229년)은 교회 당국과는 무관하게 파문중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개인적인 원정이었다. 그는 에집트 술탄과의 담판을 통해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반환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그후 1224년 결정적으로 다시 잃게 되었다.
● 제7·8차 십자군 원정 (1248∼1254년)
제 7차 원정(1248∼1254년) 및 8차 원정(1270년)이 모두 실패함으로써 실제적인 원정은 모두 끝났다.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는 우선 에집트를 정복한 후에 성지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1205년4월 카이로에서 완패당해 후퇴했는데 그의 군대에 전염병이 돌아 전의를 상실하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를 위해서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 자신은 이슬람에게 다미에타(Danietta)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서방에서는 차츰 십자군 원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되고 비폭력적인 설교를 통해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유럽 자체내에서는 이교도 문제, 즉 스페인의 무어인, 이교 슬라브인,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이단 등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다가왔다.
이로 인해 십자군 원정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 십자군원정의 결과
십자군 원정의 결과는 여러 가지 이다. :
서구 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계기를 마련했고 은둔적인 수도생황에서 병든 순례자에 대한 봉사와 이교도들로부터 성지를 보호하는 등 외적 활동을 활바하게 전개한 기사 수도회를 출현케 하였다.
또 비잔틴과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이 스콜라 사상으로 발전을 가능케 하였고 서구의 공동체 의식을 크게 강화하였다.
그러나 위와같은 긍정적인 결과 이외에도 교회 내.외적으로 씻을 수 없는 오점도 남겼다고 본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교황권이 신장되는 계기도 되었지만,
동시에 십자군 원저의 실패가 교황권이 크게 실추되는 결과도 가져왔다.
https://nyckcg.org/ministry/?p=3981
베네치아 상인과 십자가를 내건 약탈자에 역사상 최대의 문명파괴
4차 십자군(1202~1204)은 유럽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례로 꼽힌다. 그들의 목표는 이슬람에 빼앗긴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독교도 국가인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을 공격했다. 성스럽지도 않았다. 베네치아 상인들의 탐욕과 프랑스인들의 영토욕이 결합되어 그들은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문명파괴를 저질렀다. 로마제국의 마지막 후예 동로마제국의 혈맥은 서유럽의 무뢰배들에게 57년이나 끊겼다. 150년후에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을 때 비잔티움이 저항력을 상실할 정도로 약화된 것도 이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그림) /위키피디아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그림) /위키피디아
1198년 고황에 오른 이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는 제4차 십자군을 제창했다. 교황의 요청에 응한 인물은 샹파뉴의 백작 발라르두앵의 조프루아(Geoffroi de Villehardouin)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영주들이었다. 새로 조직할 십자군의 대표는 샹파뉴의 조프루아가 맡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빼앗으려면 이집트를 공격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러자면 육로로 가기보다는 해로로 가야 했다. 당시 서유럽에는 그 많은 군대를 수송할 선박을 갖춘 나라는 베네치아 공화국 뿐이었다.
엔리코 단둘로 /위키피디아
엔리코 단둘로 /위키피디아
1201년 조프루아가 이끄는 6인의 기사단은 베네치아로 갔다. 베네치아에는 팔순의 노익장 엔리코 단둘로(Enrico Dandolo)가 총독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십자군과 베네치아 사이에 협상이 벌어졌다.
조프루아가 이끄는 십자군 대표단은 4천5백명의 기사와 말, 9천명의 기사 수행원(종자), 2만명의 보명, 그리고 각종 군수품을 수송해 달라고 제의했다. 그러자 베네치아의 단둘로는 이 인원과 물자를 수송하려면 은 8만5천 마르크가 소용되니, 그 비용을 대라고 했다. 프랑스인 조프루아는 조건을 수락했다. 단둘로는 정복지의 절반을 베네치아가 갖는다는 부대조건도 달아 50척의 완전무장한 갤리선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대사기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예정된 날에 베네치아에 모인 병력은 십자군측에서 약속한 인원의 3분의1도 못되는 규모였다. 총사령관은 조프루아를 대신해 몽페라의 후작 보니파시가 맡았다. 원정군은 모병과 모금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일단 은 3만5천 마르크를 지불했다. 그랬더니 베네치아의 단둘로는 약속한대로 배를 준비했으므로, 약정된 금액 모두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단 한척의 배도 출항시킬수 없다고 배짱을 부렸다. 보니파니는 있는 돈 없는 돈 긁어 모아 1만4천 마르크를 더 만들어 주었다. 베네치아는 그것도 손에 넣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지불하지 않은 3만여 마르크를 더 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베네치아는 대기중인 십자군에 식량도 공급하지 않겠다고 겁을 주었다.
빈털터리가 된 십자군은 오도가도 할수 없는 처지였다. 영악한 장사꾼은 남의 곤경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챙긴다. 베네치아인들의 상술은 그런 것이었다. 단둘로는 이집트로 가기 전에 헝가리에 빼앗긴 아드리아해 건너편 달마티아(현재 크로아티아)의 차라(Zara)를 공격해 수복해준다면 채무를 연기해주겠다고 나왔다.
십자군을 이끌고 있는 보니파니는 백방으로 돈을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은 차라 공격에 나섰다. 1202년 11월 8일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함대 480척을 타고 차라를 공격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도, 이집트도 아닌 기독교 지역인 차라를 공격해 잔인하게 짓밟았다. 살육과 방화, 강간 등 승자의 약탈도 진행되었다.
분노한 교황은 십자군과 베네치아 모두를 파문했다. 성지 탈환에 나섰던 십자군이 파문되었으니, 그들은 이제 못할 짓이 없었다. 한번 사악한 길에 나서면 더 사악한 일도 두렵지 않은 법이다.
그때 또다른 사악한 자가 나타났으니, 동로마제국의 황태자 알렉시우스 4세(Alexius IV Angelus)였다. 그는 동로마제국 황제 이사키우스 앙겔루스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는 큰아버지 알렉시우스 3세의 쿠데타로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눈이 뽑혔고, 자신은 감옥에 있다가 탈출해 베네치아로 건너간 것이었다.
망명자 알렉시우스는 찬탈자인 백부를 내쫓고 자신을 비잔티움 제위에 올려준다면, 이집트 정복의 비용을 댈 것이며, 자비로 1만의 병사와 500명의 기사를 성지로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더해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로마 교회 관할권으로 넘기겠다고도 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장사도 없었다. 어차피 파문당한 몸, 십자군 기사들도 이젠 보이는게 돈과 영토밖에 없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로마에 넘겨주면 교황도 파문을 벗겨내주지 않겠는가.
사기극은 또다른 사기극을 낳는다. 알렉시우스 황자의 대사기극에 베네치아와 십자군이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1203년 6월 24일 베네치아에 소집된 4차 십자군은 1년만에 콘스탄티노플에 닻을 내렸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위키피디아
1204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위키피디아
찬탈자 알렉시우스 3세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방어준비를 하지 못했다. 조선소는 비었고, 남아있는 배라고는 내항에 있는 낡은 배 몇척이었다. 당연히 제해권은 베네치아에게 넘어갔다. 십자군의 주력인 프랑스인들은 육지로 상륙해 콘스탄티노플 육지 성벽을 에워쌌다. 해상과 육상에서 동시 공격이 이뤄졌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난공불락이었다. 이전에 사라센, 아바르, 불가르, 슬라브, 러시아가 숱하게 침공해 왔어도 저 견고한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었다.
베네치아 해군은 금각만(골든혼) 입구에 쳐놓은 쇠사슬을 끊어 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선박들을 겹쳐서 그 위에 공성장비를 올려 놓고 쇠뇌와 돌덩이를 쏘아댔다. 육지의 십자군은 성벽 위로 기어 올라갔다. 공격자들은 한군데만 집중 공격했다. 금각만과 육지 성벽이 만나는 곳이 가장 낮았는데, 이 곳이 공격목표였다. 쇠칼퀴를 성벽에 쏘아 올리고, 거기에 연결된 밧줄을 병사들이 타고 올라갔다. 방어자들은 성벽 위에서 밧줄을 끊어내고, 화살을 쏘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스믈 다섯 개 성루가 모두 베네치아의 수중에 떨어졌다. 동시에 십자군 육군병력이 성내로 들어갔다. 침략자들은 가옥에 불을 지르고 시내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찬탈자 알렉시우스는 도망을 쳤다.
시민들은 황제직을 빼앗기고 실명한채 감옥에 갇혀 있던 이사키우스 잉겔루스(Isaakius II Angelus)를 풀어내 제위에 올렸다. 이사키우스는 이 사건을 만든 아들 알렉시우스 4세를 공동황제로 올려서 문제를 일단 수습했다. 베네치아와 십자군은 금각만 건너편 갈라타 지구로 물러나서 알렉시우스가 약속한 금액을 지불하기를 기다렸다.
권력을 쥔 알렉시우스 4세는 지난해봄에 한 약속을 지킬수 없음을 곧 알게 되었다. 애당초 권력을 쥐기 위해 무리한 약속을 한데다 무능한 전임자가 국고를 바닥냈기 때문에 베네치아와 십자군에 줄 돈이 없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한 약속은 아버지 황제조차 아연실색하며 아들을 비난하게 했다.
알렉시우스는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엄청난 세금을 매기고 수도의 귀중품들을 지속적으로 수거해 갔다. 당연히 시민들의 반발을 샀고, 일부 과격파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는 베네치아 상인을 보복하고, 베네치아인들이 다시 보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알렉시우스의 반대파들은 십자군에 대한 빛 상환 약속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부채 상환을 중단했다. 양측은 다시 전쟁이 벌어질 상황으로 치달았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 성내에 진입한 십자군 /위키피디아
1204년 콘스탄티노플 성내에 진입한 십자군 /위키피디아
베네치아 총독 단둘로는 돈을 못받을 바에야 비잔티움 제국을 무력으로 정복해 제국의 부를 뜯어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단둘로에겐 명령만 내리면 움직이는 십자군 병력이 있었다. 그들은 금각만 건너편 갈라타 지역에 기다리며 굶주리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알렉시우스가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알렉시우스 무르주플루스라는 귀족이 반대파를 규합해 알렉시우스 4세를 폐위하고 자신이 알렉시우스 5세로서 제위에 올랐다. 그는 베네치아와 십자군에 대한 채무 불이행을 선언했다.
베네치아와 십자군측은 공격에 앞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에 어떻게 나눠먹을지를 협의했다. 황제는 양측중 한사람이 맡아 제국의 4분의1을 가져가고, 나머지를 베네치아와 십자군측이 반(3/8)씩 나눠먹는다는데 합의가 이뤄졌다.
이제 먹이감을 사냥하는 일만 남았다. 1204년 4월 9일 양측은 총공세에 나섰다. 1년전의 전투와 똑같은 양상이 벌어졌다. 다음날인 4월 10일 비잔티움군은 가교를 통해 탑으로 올라오는 십자군 병사들을 잘 막아냈으나, 한 개의 탑에 프랑스 기사 한명이 올라왔다. 그 기사는 비잔티움군의 무차별 공격을 받아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났다. 죽은줄 알았던 프랑스군이 살아나자, 탑을 수비하던 비잔티움군이 무서워 모두 도망치면서 탑은 십자군에게 점령되었다. 한 개 첨탑이 무너지자 분위기는 반전되어 십자군이 성내로 들어왔고, 비잔티움군은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베네치아 총독 단둘로는 비잔티움을 함락한 이후 병사들에게 3일간의 약탈을 허용했다. 십자군은 야만인이나 조금도 다를게 없었다. 당대에 세계 최대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야만의 파괴와 향연에 물들었다. 아름답고 훌륭한 예술작품들이 무지막지하게 파괴되었다.
한 목격자는 그날의 약탈을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그들은 성상들을 부수고 순교자들의 신성한 유물들을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곳에 집어던지고, 구세주의 살과 피를 여기저기 뿌렸다. …… 소피아 성당의 제단은 파괴되고 그 조각들은 자기들끼리 나눠가졌다. 그들은 말과 노새를 성당 안까지 끌고 들어와 제기, 연단, 문, 가구들을 닥치는대로 실어 날랐다. 짐을 못이겨 날과 노새 몇 마리가 쓰러지면 그들은 칼로 가차없이 죽어 성당 안에는 온통 짐승들의 피와 악취가 가득했다. …… 고결한 부인이나 정숙한 처녀들, 심지어 신에게 봉헌된 처녀들에게도 전혀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았다.”
콘스틴티노플에서 약탈해간 베네치아 산마리코 성당의 네 마리 마상 /위키피디아
콘스틴티노플에서 약탈해간 베네치아 산마리코 성당의 네 마리 마상 /위키피디아
서기 340년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로 삼은 이후 콘스탄티노플 역사에 이처럼 치욕적인 순간이 없었다. 150년후 이슬람의 술탄이 함락했을 때에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 와중에 프랑스인들은 광적인 파괴본능을 보였지만, 장사꾼 기질이 몸에 밴 베네치아인들은 냉정을 유지하며 돈이 될만한 보물은 고스란히 보존해 가져갔다. 현재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에 보관된 네 마리 청동 마상은 이 때 가져간 것이다.
질서가 회복된 이후 베네치아와 십자군은 협상을 벌여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황제로 선출했다. 황제는 양측의 합의대로 비잔티움의 4분의1을 차지했다.
황제는 프랑스인에게 넘겨주었지만, 최대수혜자는 베네치아였다. 단둘로는 황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비잔티움의 8분의3을 차지하며 실익을 챙겼다. 베네치아는 크레타, 로도스섬, 그리스의 펠레폰네소스 일대, 흑해 연안을 차지해 본국과 연결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해 지중해와 흑해의 무역을 독점했다.
동로마제국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1261년까지 57년간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 기간을 역사학자들은 라틴 제국(Latin Empire)이라 부른다. 이 기간에 옛 동로마제국의 황실과 귀족들은 소아시아 반도로 건너가 니케아 제국(Empire of Nicaea)을 건설하고, 아드리아해 동부에 에피루스 왕국(Despotate of Epirus), 흑해 남부 해안에 트레비존드 제국(Empire of Trebizond)을 각각 세웠다. 라틴 제국도 내부에 테살로니아 왕국, 아테네 공국, 아케아 공국 등으로 분리되어 이합집산을 하다가 1261년 니케아 제국에 의해 흡수합병되어 다시 동로마제국이 부활하게 된다. 하지만 부활한 동로마 제국은 제국이라 할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곧이어 소아시아에서 발흥한 오스만투르크에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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