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새끼의 비상
이영혜
어렸을 때 우리 집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어려운 살림살이는 통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아버지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술을 친구삼아 자신을 위로하며 지냈다. 동화 속 미운 오리 새끼처럼 결국 스스로 날갯짓을 해 날아올라야 한다는 것을 저절로 깨달았다.
어린 동생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학교 다니느라 늘 바빴다. 중학교 3학년 때는 공납금 때문에 자주 교무실에 불려갔다. 교무실 구석에서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말을 들으며 귀를 접어 얼굴을 감쌌다. 친구들 틈에 어울려 졸업사진을 찍긴 했지만, 졸업장과 앨범은 받지 못한다고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도시로 가야겠다고 부모님에게 말했다. 여러모로 의지하던 딸이 도시로 간다는 말에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부족함을 원망하였고 아버지는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며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나를 말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엄마와 동생들을 뒤로하고 친척이 있는 대구로 왔다.
무작정 돈 벌겠다고 집을 나오긴 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대구에는 직물 공장이 많다면서 친척이 베 짜는 공장을 소개해주었다. 주야 2교대로 꼬박 12시간씩 일하고 가끔 잔업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하루에 18시간씩 공장에 붙어 있었다.
‘북실, 북실...,’ 밤 낮 없이 베 짜는 기계 소리를 듣고 있으면 딱따구리가 귀에 대고 쫓는 것 같았다. 어떤 여공은 그 소리가 노랫소리로 들린다고도 했지만 나는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여공들은 모두 같은 환경에서 기계처럼 일했고 누구 하나 일어서지 않아도 관심 없었다. 하루하루 사선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날을 보냈다.
반복되는 기계적인 노동에 지쳐 결국 다른 일을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등록했다. 자격증만 따면 사무직으로 옮길 수 있다는 원장의 말에 12시간에서 18시간씩 일하고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다.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통신에 관련된 자격증을 땄다.
공장 여공이 사무직으로 일하게 되어 우리 가족들이 자랑스러워했다. 처음에는 관심이 없던 여공들도 부러워했다. 나도 뛸 듯이 기뻤으나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미운 오리 새끼가 이제 털갈이 한 번 했을 뿐이었다.
사무실에 다니면서 대학을 졸업한 남자를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여 사업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 학교에 가지 않고 중·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하는 검정고시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남편에게 힌트를 얻어 아무도 모르게 입시학원에 등록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학원을 다녔다. 일 년 만에 중‧고등학교 모두 졸업을 인정하는 합격증을 받았다. 검정고시를 패스했다는 것을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만의 성취였기에 그동안 내가 얼마나 어렵게 땀을 쏟았는지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공감하지 못할 것 같아 비밀로 남겨두었다.
검정고시를 치르고 난 후부터 나의 갈증은 오히려 커졌다. 고등학교 졸업 증서를 받고 보니 대학도 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당장 일을 놓을 처지가 아니었다. 일과 공부할 병행할 수 있는 학교를 물색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가 제격이었다. 여러 전공 중에서 당시에 가장 인기 있고 전망 있는 유아교육학과를 선택했다. 기대와 긴장 속에 당당히 합격했고 4년 내내 장학생으로 학교를 마쳤다.
졸업식 날, 온 가족이 총출동해서 축하해 주었다. 네모 모양의 각이 있고 한쪽에 수술을 길게 내린 학사모를 쓰고 사진도 찍었다. 엄마와 언니는 처음 보는 학사모를 쓰고 사진 찍으며 감격을 말로 다 할 수 없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남편도 오랜만에 다시 써보는 학사모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졸업과 동시에 유치원 정교사와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어린이집에 취직해 선생님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자였고 직물 공장 여공이었던 내가 선생님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뒤늦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치고 얻은 호칭이라서 더 감회가 새로웠다.
아이들에게 좀 더 전문적이고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시기에 남편은 사업 부진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부부가 함께 방송통신대학교에 합격과 동시에 집에서 영어와 수학 과외 교습을 시작했다.
나에게 수업을 받은 학생들이 크고 작은 우수한 성적을 받으면서 점점 입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대기하는 상황이 생겼다. 어떤 학생은 전교권에서 놀았고, 어떤 학생은 전국 수학 경시대회에서 1%에 속하는 상패를 받아 오기도 했다. 학생들은“선생님! 잘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하며 상패를 나에게 주었다. 제자들에게 받은 상패는 우리 교습소의 자랑이었고 나의 자랑이었다.
그런 가운데 남편과 함께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하면서 평생교육사 자격증 취득과 함께 두 번째 학사모를 썼다. 남편은 영어교육전문가가 되었고 나는 유아교육부터 교육학까지 학위를 딴 교육전문가가 되었다. 그 옛날 미운 오리 새끼가 날개 손질을 끝내고 이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니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공부를 하고싶지만 형편과 사정이 맞지 않아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나처럼 늦게 공부를 시작한 만학도들도 많은 것을 보고 동지 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교육의 부재와 인재 육성을 위해 교육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교육부에서 발표했는데 사이버대학이라는 것이었다. 형편에 따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양한 직업과 진로를 선택할 수 있고 좀 더 보람되고 새로운 자신의 개발을 위해 선택하는 장이 마련된 것이었다.
동생에게 사이버대학을 권유했고 몇 년 후 동생은 영진사이버대학 1회 졸업자가 되었다. 그런 동생을 보며 자극을 받은 언니도 같은 학교 5회 졸업자가 되었다. 지금은 각자 대학에서 배운 전공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
나 또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여 부모와 노인에 대해 이해하고 사회의 취약계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배움은 학사에 머물지 않고 석사에 도전하기로 했다. 대구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지원했고 당당히 합격했다.
나의 비상은 배우려는 마음에서 출발했고 배움의 이유는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고자 하는 데로 전개되었다. 이제 더 큰 꿈을 꾼다. 석사과정을 마치면 박사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오랫동안 움츠려 있던 미운 오리 새끼가 거대한 날개를 펴고 더 큰 비상을 준비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