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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사우스엔드에서 방공 감시원이 가스 비상훈련 때 민간인 방독면을 착용한 어머니와 자녀들에게 대피 경로를 알려주고 있다. 책미래 제공
1939년 만들어 3800만 개 보급 보복 두려워 獨 가스 공격 금지
영국 정부와 국민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초기 2년 동안, 그리고 그전에도 영국을 향한 모든 공격에 가스공격도 포함되리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제1차 세계대전 중 병사들을 향한 공격에 가스가 자주 사용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탈리아 줄리오 두에 장군처럼 공군력 우위의 전술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에 가스공격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펼치던 이들은 공중투하 폭탄이 떨어진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스공격이 빠르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고 대부분 예측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예측은 영국 정계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졌고, 그런 과정에서 과장돼 공포감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전국적인 공포는 적국의 폭격기가 언제든 영국 본토를 공격해 올 수 있다는 영국 공군의 주장으로 인해 커졌고, 그로 인해 또 다른 방식의 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모금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두에 장군뿐만 아니라 가스공격을 예상했던 모든 사람의 주장 대부분이 틀렸다는 것이 종전 무렵에야 입증됐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이 발발했던 1939년 9월, 인체에 치명적인 가스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국가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뿐이었다. 독일도 약 2900톤의 가스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가스를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가스 사용을 금했다. 또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독일은 치명적인 생화학 가스를 개발했지만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도 영국은 화학무기가 영국 민간인들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리라고 믿었다. 이런 인식은 그들의 공포를 확대해 사회적으로 하나의 신드롬을 만들었고, 그 중심에는 ‘방독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민간인들을 위한 방독면은 1939년 만들어져 무려 3800만 개의 방독면이 전국의 ‘모든’ 가구에 배치됐다.
모든 영국 국민들은 방독면을 판지로 된 보관함에 넣어 항상 휴대하도록 했다. 또 방독면을 갖고 다니지 않으면 각종 벌칙을 받았다. 방독면이 전 국민의 필수 소지품이 된 것이다. 그리고 방독면 착용방법을 설명하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었다. 심지어 아이와 유아들을 위한 특별한 마스크도 제작됐다. 방공 감시인들은 가스공격을 알리기 위해 나무로 만든 ‘딸랑이 경보기’(rattles)를 갖고 다녔다. 벨 소리는 경보 해제를 알리는 신호가 됐다.
하지만, 이런 범국민적인 가스공격 대비에는 큰 구멍이 있었다. 1차 대전 당시 이미 사용된 겨자 가스에 노출되면 피부에 심한 물집이 잡힐 것이 뻔했지만, 민간인에게는 방독면을 제외한 어떤 종류의 보호 의류도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정작 영국이 채택한 보호 수단이 실제적으로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방독면에 대한 관심은 서서히 사그라져 영국 국민들은 더 이상 방독면을 휴대하지 않게 됐다. 1940년이 되자 반드시 방독면을 갖고 다녀야 했던 병사들까지 휴대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이때는 독일이 생화학 독가스인 ‘타분’을 개발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또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는 더욱 치명적인 독가스 ‘사린’의 생산 준비를 마쳤으며, 가장 치명적인 독가스 ‘소만’은 개발 단계에 있었다. 하지만, 전쟁 초기나 후반이나 민간인뿐만 아니라 연합군의 그 어떤 부대도 방독면 외에 신경 독가스로부터 인체를 보호할 수 있는 어떠한 의류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국 시민에게 지급됐던 방독면은 어차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난리법석 덕분에 영국의 가스방어 장비와 감지기 그리고 오염제거 장비들은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르게 됐으니 가스공격 공포가 결과적으로 영국에 도움이 됐다고 봐야 할까.
<출처=‘2차대전 시크릿 100선’>
정리=김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