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오상욱*38) 차례 1. 머리말 2. 尙古堂 金光遂의 家系와 蒐輯癖 3. 18世紀 士大夫들의 古董書畵 趣味와 影響
1) 古董書畵의 鑑賞과 實狀 2) 古董書畵의 影響과 繼承 4. 맺음말 <국문초록> 본고에서는 尙古堂의 家系와 당시 교유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18세기 고동서화가 갖는 의미와 그가 조선의 문인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후기 고동 서화 수집가로 알려진 김광수는 명나라 尙古 華珵(1438~1514)을 私淑하고 본받았 다. 好古에 마음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유불도[三敎]에 몰두한 것과 고동서화를 소장하고 감상하는 공간을 따로 마련한 것들을 비교해보면, 그는 화정을 닮아가려하였다. 그리고 수집벽은 가문과 부친 金東弼(1678~1737)의 영향을 받았 고, 조선후기 고동서화의 취미에 대해서 후대에 여러 문인들에 끼친 영향은 실로 컸다. 李德履, 南泰寬, 李匡師, 李德懋, 柳得恭, 朴齊家, 徐常修, 李廷燮 등의 문인 들에게 고동서화의 취미를 유행시키고 전파하는데 영향을 끼쳤으며, 나아가 청명 상하도 라는 서화를 통해 朴趾源, 李德懋, 洪大容, 李東山, 趙榮祏, 金昌業, 曹命采 등 고동서화의 취미 소장자를 밝히고, 훗날 청명상하도 가 서상수에게 계승되었듯 이 지식층의 고품격문화인 고동서화 취미를 계승한 것에 큰 공이 있다. 18, 19세기에 많은 수집가와 감식 전문가들이 등장하지만, 고동서화 개척자 겸 수집가이면서 옛것에 탁월한 재주와 취미를 겸비한 자는 金光遂였다. 특히 그는 서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日新書堂 訓長 / E-mail : osu8950@hanmail.net 民族文化, 한국고전번역원 http://dx.doi.org/10.15752/itkc.46..201512.145 Journal of Korean Classics ISSN 1738-4648 2015, 第四十六輯, pp.145~202 146 第46輯 화 그리고 청동 골동품을 소장하고 수집하는 癖이 있었는데, 그의 호 ‘尙古堂[옛 것 을 숭상하다]’을 보면 얼마나 옛것을 좋아하였는지를 단적으로 잘 알 수 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버렸듯이 나도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風雅를 선양하여 태평시대를 서로 이어놓음으로써 300년 조선의 풍속을 바꾸어놓은 일은 먼 훗날 혹 시라도 나를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며 스스로 300년 조선의 풍속을 바꾼 일, 즉 조선후기 문인들에게 고동서화 수집벽으로 확실하게 각인시킨 김광수였다. 18세기 고동서화가 갖는 의미는 골동품을 단순한 사치품으로 여기지 않고, 선인 들의 고아한 格調와 韻致가 깃든 高玩品으로서, 性情과 好古의 趣味를 길러주고, 風流와 情趣 있는 생활을 느끼게 하는 媒介物이었다. 또 단순한 수집보다는 그 眞 髓를 향유할 수 있는 안목과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정확한 감식력을 갖출 것을 강조 하였다. 이렇듯 고동서화의 완숙한 취미를 위해서는 충분한 수집욕과 소장욕이 필요 하며, 문인 취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전개되었던 고동서화의 수집에서 김광수라는 인물이 여러 고동서화를 소장하고서 문인들 사이에 볼거리로 제공하고, 함께 감상하 면서 고동서화에 대한 인식은 더욱 높아져 갔다. 나아가 고동서화 취미는 한층 豊饒 해졌고, 문인들의 격을 높이는데 일조하였으니, 상고당이라는 고동서화 수집가의 작 은 행동이 조선의 문인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켰으며, 고동서화 취미 유행에 있어 교두보 같은 역할을 하였다. 주제어 古董書畵, 尙古堂, 金光遂, 華珵, 徐常修, 淸明上河圖, 蒐輯癖, 燕行日記 1. 머리말 조선은 중국과의 燕行使臣에 대한 많은 기록물을 남겼고, 중국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였다. 특히 18세기에 행해진 연행사신을 통해 사행의 업무 외 에 다양한 문화의 수용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 고동서화의 주요 판매처인 琉璃廠 등을 통해 여러 古董과 書畵들이 조선으로 들어온다. 당 시 조선의 경화세족들은 그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古董書畵 수집 과 藏書處를 두는 독특한 취미를 갖는다. 이 시기에 본격적인 고동서화 소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47 장가들이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 尙古堂 金光遂(1699~1770)1)가 있다. 18세기 영조 때에 고동서화 수집가로 활동한 김광수, 그의 曾祖父 金禹 錫(1625~1691)은 刑曹判書․都承旨를 지냈으며, 부친은 樂健亭 金東弼 (1678~1737)은 吏曹判書를 지낸 명문집안의 경화세족이었다. 祖母 역시 풍산 홍씨 洪柱國(1623~1680)의 딸로 門閥의 자식이었다. 특히 曾祖父 金禹錫은 1677(숙종 3)년에 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친 金東 弼 역시 1729년(영조 5)에 冬至正使로 북경에 다녀온 기록을 미뤄본다면 상고당 김광수가 고동서화 수집에 대한 환경이 쉽게 조성되었으며, 고동서 화 수집과 감식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는 관 직에 오르지만 당쟁을 피해 헌신짝 버리듯 벼슬을 버리고 골동품에 취미를 갖고 일생을 書畵와 古董에 빠져 자기만의 멋을 가지고 살아간다. 대부분 의 수집가들이 서화를 주로 수집하는 것과는 달리 김광수는 器物이나 陶磁 器, 벼루, 먹 등 중국 전역의 고동서화와 국내의 碑文와 拓本 등도 함께 수집하였으며, 김광수를 古董書畵 蒐輯家라 부르는데 손색이 없을 정도였 다. 朴趾源(1737~1805), 李匡師(1705~1777), 李德壽(1673~1744), 申維 翰(1681~1752)의 글을 빌리자면2), 김광수는 국내외의 고동서화에 관심이 지극히 많았으며, 뛰어난 감상안까지 가졌다. 그는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면 서 평소 소장품들을 어루만지고 감상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는데, 원하는 것 은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수집․소장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노년에는 고동 서화의 취미로 인해 家勢가 기울어 곤궁한 처지에 몰리게 되었으니, 癖에 1) 尙古堂 金光遂 : 書畵古董 감식가 및 소장가 그리고 화가로 활동한 조선후기의 문인이 다. 본관은 尙州, 자는 成仲, 호가 尙古堂이다. 따로 전하는 문집은 없으며, 李匡師, 朴趾源, 申維翰, 李德壽 등 여러 문인들에 의해 행적이 전해진다. 2) 본고 2장, 3장에서 상고당 김광수의 수집벽과 고동서화 취미에 대한 해당 글이 모두 인용되어 있다. 148 第46輯 가까운 수집욕과 소장욕을 가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김광수는 自撰墓誌銘3)에서 “좋은 가문에 태어나 번잡하고 호사스러움을 싫어하여, 법과 구속을 벗어나 물정에 어둡고 편벽됨에 빠졌다. 괴기한 것을 좋아하는 고칠 수 없는 癖을 가져, 옛 물건과 서화․붓과 벼루 그리고 먹에 몰입했 다.”라며 스스로를 고동서화에 癖이 있다 말하고 있다. 그리고 朴趾源의 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 을 보면, 김광수는 여러 소 장품 가운데 유독 죽어서도 傑作 淸明上河圖4) 를 소장하고자 하였지만, 병이 들고 어느 날엔가 그 그림은 觀齋 徐常修(1735~1793)에게 넘어가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5). 이 일은 당시 지식층의 고품격문화인 고동서화 취미 가 계승된 사실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명상하도 와 관련하여 연행사신 에 대한 기록6)이 다소 있지만, 현재까지 김광수와 청명상하도 에 대한 한 문학적 관련 연구는 거의 없으며, 단지 김광수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는 아 니었지만, 연행관련 인물들 가운데 비교적 자주 언급이 되는 편이다.7) 3) 탁본첩에 적힌 제목은 ‘有名朝鮮尙古子金光遂生壙’이며, 묘지명을 七言詩 28句 196 字의 시로만 작성한 것이 특징이다. 상고당은 스스로 지은 자신의 묘지명을 원교에게 부탁하여 쓰게 하였는데, 언제 누가 돌에 새기고 탁본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원교 의 정성된 전서와 해서를 볼 수 있는 귀한 자료로 원교와 김광수의 관계가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4) ‘淸明上河圖’는 1120년경 중국 북송시대 한림학사였던 張擇端이 북송의 수도였던 汴 京의 청명절 풍경을 그린 풍속화로, 특히 인구가 약 80만 명에 이르는 번화한 汴京의 성안과 근교 사회 각 계층의 생활풍경을 훌륭하게 묘사해냈으며, 주로 표현한 대상은 노동자와 소시민들이었다. 훗날 풍속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서화 수집 열풍을 일으 킨 걸작으로 元․明․淸을 거치면서 수많은 화가의 模本이 성행하였다. 5) 本稿 주)69번 참조. 6) 觀我齋 趙榮祏(1686~1761)의 觀我齋稿 跋 ; 湛軒 洪大容(1731~1783)의 湛軒 書 燕記 ; 燕巖 朴趾源(1737~1805)의 燕巖集 熱河日記 ; 雅亭 李德懋(174 1~1793)의 靑莊館全書 ; 橘山 李裕元(1814~1888)의 林下筆記 ; 燃藜室 李肯翊 (1736~1806)의 燃藜室記述 등. 7) 김광수라는 인물자체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으며, 다만 연행관련 인물들을 거론할 때 여러 논문에서 잠깐 언급되고 있다. 윤위영, 연행록을 통해본 조․청문물 교류 , 경북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6. ; 徐仁範, 조선전기 연행록 사료의 가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49 17세 ●金德諴 - 慶州李氏 元誠의 女 (大司憲) (別提) 18세 ●자1.金卨 - 延安李氏 貴의 女 (禮賓寺正) (左贊成) 자2.金嚮 - 文化柳氏 思璟의 女 (佐郞) (判官) 당시 문인들, 京華士族과 富豪들이 갖는 고동서화의 의미는 ‘골동품을 완상하고 식견을 구비하는 것을 문인의 감
하였으며, 노론과 소론으로 갈릴 때 비록 그는 정치적으로 소론이 되었지만 스승과 벗의 관계 때문에 항상 노론적 성향을 잃지 않았다.16) 그래서 경종 1년(1721) 소론의 공격으로 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 4대신(金昌集․李頤 命․趙泰采․李健命)들이 처형 되고 王世弟로 있던 영조가 환관들의 모 함으로 위기에 몰렸던 때 이들 환관을 탄핵해 영조를 위기에서 구해낸 인물 이다. 형 金光遇는 縣監과 尙州牧使등 여러 관직을 역임17)한 관료문인으로, 관직에 오르기 전에는 외삼촌 李廷爕(1688~1744)과 문사 南泰寬(168 7~?)을 종일 따라 다니며,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며 과거공부를 멀리하였 다. 16) 김동필은 온건파 소론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당시 소론[緩少]의 입장에서 당쟁 관계 자료를 모아서 아들 김광진과 蒼筤을 편찬하여 집안에 보관하였다. 훗날 그의 현손 永植을 거쳐, 金觀鎬가 보관해 오다가 1985년 民族社에서 영인본으로 5책이 간행되었 다. 17) 李匡師, 圓嶠集 卷7, 碑誌銘表, 尙州牧使金公墓誌銘 : 今上七年錄蔭籍官, 自敦 寧府參奉, 間更義禁府都事, 三署主簿, 止司憲府監察. 任自果川, 洪川二縣監, 間經 杆城郡守, 海州判官, 潭陽府使, 尙州牧使, 止朔寧郡守, 終始廿七年, 多謝病棄, 無一 求得焉.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55 林川郡守18)를 지낸 동생 金光進은 大司憲․大提學․漢城府判尹․兵 曹判書를 지낸 경화세족 西坡 吳道一(1645~1703)의 둘째 아들 오수욱의 次女를 아내로 맞이한다19). 또한 김광진 처형의 부군 역시 풍산홍씨 명문 가 집안이며, 소론 온건파의 주장인 趙泰耉(1660~1723)의 外孫이 된다(김 광진은 당숙 金東赫에게 出系하였고, 김동혁은 趙泰耉의 사위가 된다). 여동생은 숙종의 여섯째아들 延齡君 李昍의 부인이 된다. 혼인관계를 살펴보면, 상고당은 명문가 집안으로 高官大爵의 집안과 주 로 혼인하였으며, 특히 왕족도 포함이 되었다. 그 가운데 祖母는 명문가 풍 산홍씨 洪柱國의 따님이요, 母親 역시 왕실집안의 임원군 이표의 딸로 전 형적인 경화세족이다. 그리고 경주이씨, 연안이씨, 풍산홍씨, 평산신씨, 한 산이씨, 문화류씨, 전주이씨, 완산이씨, 안동권씨, 해주오씨, 금천임씨, 전주 최씨 등 많은 명문집안과 結付되어 있다. 묘지명을 살펴보면, 김동필의 부친 김유의 묘지명을 崔錫鼎이 짓고 白下 尹淳이 적었다. 김동필의 묘지명은 西堂 李德壽가 짓고 圓嶠 李匡師가 적 었고, 신도비는 영의정 趙顯命이 썼다. 그리고 김광수의 형 김광우의 묘표 는 대사간 金勉行이 짓고 圓嶠 李匡師가 적었다. 김광수는 스스로 묘지명 을 짓고, 원교 이광사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따라서 거론된 인물들과 밀접 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광우는 영조 7년(1731년, 35세) 蔭籍[蔭敍制度]으로 관직에 올랐다. 돈령부 참봉부터 의금부 도사, 삼서주부를 거쳐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다. 18) 승정원일기, 영조 28년 5월 26일 (병술) / 1752년 乾隆(淸/高宗) 17년 : 吏批, 百官加 下批, 趙載浩爲大司憲, … 金光進爲林川郡守, … 已上加通政, … 傳敎. 19) 吳道一, 西坡集 卷29, 附錄, 年譜 : 二男遂郁, 娶高靈朴氏徵士郡守鐔女, 生二女, 男命溥[遂采第二子], 娶龍仁李氏今府尹普赫女. 女長適洪羽漢[父今郡守鼎輔], 次適 金光進[父今判書東弼]. 그리고 西堂私載 卷9, 墓誌銘 尹淑人墓誌銘 에도 같은 내 용이 실려 있다. 156 第46輯 부임해 과천, 홍천 두 현감을 지내고, 杆城郡守․海州判官․潭陽府使․ 尙州牧使를 거쳐 朔寧郡守에 이르렀다. 총 27년간 벼슬하였지만 대부분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물러나 하나도 구하고 얻은 것이 없었다.20) 윗글은 圓嶠集 尙州牧使金公墓誌銘 의 일부로, 김광수의 형 김광우 가 1731년(영조 7, 당시 35세) 蔭敍로 관직에 오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사 실 김덕함(1589, 增廣試 丙科 22위), 김설(1623, 庭試 丙科 1[探花郞]위), 김우석(1651, 別試 丙科 8위), 김유(1682, 增廣試 進士 三等), 김동필 (1704, 春塘臺試 乙科 亞元)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거급제자 출신으로, 김 광수 역시 1729년(英祖 5) 式年試 進士 三等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사회제도와 조상의 음덕으로 상고당 형제들은 蔭敍制度21)를 통해 관직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이렇듯 형 김광우는 외삼촌 이정섭과 문사 남 원빈을 따라,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며 과거공부를 멀리한 탓에 늦은 나이 35세에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장남의 입장으로 부모의 뜻을 받들고 집안을 전승하는 소임이 있기에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려 27년간 관 직 생활을 이어갔지만, “대부분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물러나 하나도 구하 고 얻은 것이 없었다.”라 스스로 말한다. 다른 형제와 달리 차남 김광수는 30세 때 式年試 진사시에 합격해 麟蹄郡守, 楊根郡守와 副使를 지내며 양반으로써의 존재를 증명해 보였다. (1) 상고당은 東國의 고관대작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독서에 빼어 나고 특출해서 그 名聲이 학교에 가득하였다. 尙古로 하여금 왕을 이롭게 20) 李匡師, 圓嶠集, 尙州牧使金公墓誌銘 : 今上七年錄蔭籍官. 自敦寧府參奉, 間更 義禁府都事, 三署主簿, 止司憲府監察. 任自果川, 洪川二縣監, 間經杆城郡守, 海州 判官, 潭陽府使, 尙州牧使, 止朔寧郡守, 終始廿七年, 多謝病棄, 無一求得焉. 21) 조선후기의 음서제도는 조선전기보다 완화되어 생원, 진사, 유학부터 정4품의 高爵도 가능하였다. 지역별로 서울출신의 자제들이 관직에 오를 기회가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형 김광우는 특권양반으로 가문과 지위를 계승하는 토대로 음서를 활용하였다.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57 하고 명부에 이름을 올려 詔書를 기다리고, 公卿의 부귀 얻기를 지푸라기 줍는 쉬운 일에 불과하였으나 상고당은 그것을 헌신짝 버리듯 하였다. 형제 와 종족들이 宗室에서 성을 내고, 붕우들이 문하에서 꾸짖고, 많은 지식인 들이 저잣거리에서 비방하더라도 상고는 그것을 뜬구름과 같이 여겼다. 이 윽고 나이가 들어 家勢는 나날이 기울고, 예전보다 소략해졌고, 종들은 나 날이 흩어져 온 집안이 蕭然히 霜雪이 내렸으나, 尙古의 기운은 더욱 豪放 하였다.22) (2) 부유한 집안에서 났지만 榮利를 가볍게 여기고, 쇄쇄히 세속을 벗어나 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이미 사마에 뽑혔으나 世路의 험난함을 당해 발 을 딛지 못하였다. 마침내 벼슬을 그만두고자 하여 判書公[부친]께 자신의 뜻을 아뢰었으나, 判書公은 그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오래 지나서야 그것 을 허락해주며 말하길 “너의 뜻을 따르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만 못하다.” 라 하였다.23) 윗글을 보면, 상고당은 世路의 험난함과 관직의 화려한 것이 싫다며 헌 신짝 버리듯 벼슬을 버린다. 당시 동생 김광진은 소론 조태구의 외손으로, 조태구는 사후에 1725년(영조 1) 辛壬士禍의 元兇으로 탄핵을 받고 관작 이 추탈되고 소론이 失勢를 하고, 그 여파로 김광진은 군수․첨정 등을 지 내다가 高陽에서 은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김광수는 관직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黨派의 卑劣함을 깨닫고 어느 날 벼슬을 버릴 것을 작심한다. 그는 과거에 올랐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 늘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고, 벼 22) 申維翰, 靑泉集 卷6, 尙古堂自叙後題 : 尙古堂主人生於東國軒冕之家, 少讀書 苕發而穎竪, 其聲蔚然在庠序矣. 使尙古而利用賓王, 策名待詔, 取公卿富貴, 亡足芥 拾, 而尙古棄之如敝屣. 兄弟宗族愾於室, 友朋誚於門, 衆知識姍笑於市, 尙古視之如 浮雲. 旣而歲且暮, 家日以落, 故舊日以踈, 僮僕日以散, 四壁蕭然立霜雪, 尙古氣益 豪. 23) 李德壽, 西堂私載 卷4, 尙古堂金氏傳 : 生於紈綺, 而薄榮利, 洒洒有出塵想. 旣 擢司馬, 見世路艱險無投足地. 遂欲廢公車業, 以其志告判書公. 判書公惜其才, 久而 後許之曰, “從若志不若强也. 158 第46輯 슬과 권세보다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며 평소 좋아한 고동서화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것저것 구애되는 것을 다 버리고 집안의 심한 반대와 친구들의 조롱과 주변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그는 尙古의 수집과 소장에 깊이 빠져 살아간다. 늘 그의 뒤에는 늘 부친 김동필의 이해와 적극적인 지 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특히 상고당은 중국의 書畵와 古董에 많은 관심이 가졌으며, 특히 명나 라의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또 수집가로서뿐 아니라 직접 그림( 花鳥圖 ․ 芭蕉 ․ 草蟲圖 등)을 그렸으며, 탁본을 모아 놓은 尙古書帖24)도 전 한다. 이렇듯 수집가이면서 화가로도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그의 생애는 크 게 조명 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로는 전하는 사적이 부족하고, 문집도 편찬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김광수의 생애를 알기위해서는 다른 문인들의 글을 통해 짜 맞추듯 올라가야 하지만, 알려진 특이점은 당시 그와 교유한 대부분의 문인들이 김광수를 ‘고동서화의 수집벽을 지닌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18세기 당시에 명문가의 경화세족들과 집안관계를 맺고 문벌을 유지해온 가문의 후손 상고당 김광수는 전형적인 경화세족의 가세를 바탕 으로 가문을 계승하며 부유한 신분을 누린다. 훗날 가문과 부친 김동필의 영향으로 고동서화 수집에도 상당한 유리함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옛것 24) 조선후기 李匡師․金光遂 등이 쓴 筆帖으로, 첫 장에 강가의 풍경을 그린 묵화 1편이 실려 있는데‚ 서명이나 낙관이 없어서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다. 다음으로 李匡師 가 쓴 金光遇(?-1760)의 碑銘 탁본이 실려 있다. 먼저 隸書로 ‘朝鮮尙州牧使金公光遇 之墓淑人安東權氏全州李氏竝祔’라고 쓰고 이어 楷書로 碑銘의 序와 銘文을 썼다. 이 碑銘은 1776년(영조 52)에 李匡師가 金光遇의 아들 金載億의 부탁을 받아 직접 짓고 쓴 것이다.(金光遇는 본관이 상주이고 자가 聖際로‚ 金光遂의 형이다.) 그 다음에는 金 光遂의 碑銘 탁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金光遂 자신이 직접 짓고 쓴 것으로 저작 시기는 밝혀져 있지 않다. 篆書로 ‘有明朝鮮尙古子金光遂之壙’이라고 쓴 다음 楷書로 碑銘을 썼으며‚ 끝에 ‘尙古子自銘’이라고 기록하였다.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해 제자료 중 -강문식)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59 을 좋아한 기질[好古]이 있었든 것에 대해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대 대로 명문가 집안의 형성이 상고당 김광수에게는 경화세족과 結託으로 이 어져 자연스럽게 고동서화의 취미와 結付되었든 것이다. 훗날 상고당의 손자 김노종이 그의 형 김만종을 상산김씨의 先山 長湍 에 장사지내려다가 옛 순장물과 송나라 錢을 발견한 사실이 林下筆記25) 에 전한다. 先山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값진 물품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상고당 집안사람들은 대대로 고동서화에 관심이 많았거나, 유독 상고당 김광수가 따로 선산 부근에 값진 물품을 묻어 보관하였거나, 아니면 상고당의 고동서화 취미가 자손들에게까지 전해졌을 거라는 가설을 두고 싶다. 아무튼 우연히 땅에서 값진 물품이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李圭景(1788~1863)의 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金東弼이 소장한 吳 道子26) 描金如來像 과 李光浩의 施僧千佛圖 가 있다. 이 千佛圖는 부 처가 마치 芥子만큼 자잘하게 되었는데, 화면에 물을 뿜어야 모양이 나타나 꿈틀거리는 것같이 보인다.”27) 그리고 “축 끝에는 작은 톱니바퀴를 설치하 고 양장철의 끝에 매달고 돌아가는 기관으로 삼았다. 하나의 곡조가 다하고 다시 다른 곡조를 하고자하면 오로지 鑰匙를 비틀면 된다. 이것은 다만 그 25) 林下筆記 卷33, 華東玉糝編 八角鏡 : “金尙古堂 金光遂의 손자 金魯鍾이 그 형 泰仁君 金萬鍾을 長湍의 산속에 장사 지내려고 묏자리를 파다가 옛날 사람의 순장물 과 宋나라 錢을 발견하였다. 송나라 전이 수백 개인데, 모두 元豐通寶로서 곧 靑苗錢 이었다. 팔각경 한 면에 ‘湖州眞正石念二叔照子鑑人面淸如明’이라는 銘이 새겨져 있 었다. 참으로 기이한 물건이었다. 옛날 사람은 대부분 ‘如’ 자를 ‘而’ 자로 활용하였다.” 26) ‘吳道子’는 盛唐시대의 민간인 화가로 궁정화가와 다르게 주로 절의 벽화를 그렸으며, 이름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민간에서 그의 명성이 자자해져 후에 궁정에 불려갔다. 특징으로는 線의 힘과 生動感있는 그림을 吳帶唐風이라 불린다. 특히 조선에서 오도 자의 친필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27) 五洲衍文長箋散稿, 釋典總說, 釋敎梵書佛經辨證說 : (佛畫)東國金東弼所藏吳 道子描金如來像. 李光浩施僧千佛圖. 佛小如芥子, 噴水始顯, 蠕蠕活動.” 160 第46輯 대강만을 논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김상고당(김동필:김광수의 부친)이 일 찍이 이 악기를 소장하였다.’라 하였다.”28)의 부친 김동필의 소장품에 대한 두 편의 글이 있다. 김동필은 골동품과 서화 등에 관심이 많았고 사는 집도 매우 화려하였으며, 특히 佛家의 書畵와 진귀한 물품의 수집취미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불교관련의 귀한 오도자 작품인 描金如來像 을 소장한 것과 또 당시에 진귀한 물품인 自鳴樂(태엽이 돌면서 저절로 음악이 연주되게 만든 악기)을 소장한 것이 그 例29)이다. 조부 金禹錫와 부친 金東弼이 연 행을 통해 보고 듣고 수집한 모든 것들이 김광수의 고동서화 수집과 감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추측한다. 그리고 西堂私載, 樂健亭記 를 보면, 판서 金東弼은 歐陽脩의 시에 서 뜻을 빌어 정자를 樂健亭이라 명하고, 이덕수가 김동필을 위해 1726년 樂健亭記 를 짓는다. 西堂 李德壽, 謙齋 鄭敾과 槎川 李秉淵(김동필의 이종사촌 형)은 김동필과 친구지간으로, 이들은 김동필의 초청으로 낙건정 에 자주 드나들었다. 한번은 1740년 정선이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서 낙건정 이 있는 행주 일대를 뛰어난 솜씨로 화폭에 담을 때, 이미 김동필이 세상을 뜬 지 3년이 지난 후였지만 김동필의 둘째아들인 尙古堂 金光遂가 이곳을 지키고 있으면서, 선친께서 하신 그대로 자신도 낙건정을 중심으로 그들과 교유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고동서화 수집과 감식자로서 겸재 28)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技藝類, 自鳴樂․自動戲辨證說 : 軸末設小牙輪, 繫羊腸鐵端, 以爲斡運之機關焉. 一調旣盡, 更欲他調, 則專在於捩以鑰匙, 此只論其 槪也. 有人言金尙古堂【東弼】曾藏此樂云. 29) 연암집 필세설 에 “虞夏․殷․周의 옛날 그릇이나 鍾繇․王羲之․顧愷之․吳道子 의 친필이 어찌 한 번이라도 압록강을 건너온 적이 있었으랴.” 하였으니, 오도자의 그림 은 진품을 구하기가 힘이 든다는 의미를 담는다. 또 김동필이 소장한 오도자의 描金如 來像가 진품인지 가품인지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김동필이 오도자의 그림을 소장한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아들 김광수도 역시 描金如來像 그림과 진귀한 물품 自鳴 樂을 보았을 것이며, 이로 인해 서화와 진귀한 물품의 고동에 대한 관심을 일찍부터 가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리고 김동필의 고동서화 수집 영향은 아마도 1677년에는 동지부사로 청을 다녀온 祖父 金禹錫에게 받았다 추측한다.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61 정선의 그림도 접하게 된다. 이렇듯 김광수는 명문집안의 자제로 부유한 환경과 조부 金禹錫와 부친 金東弼의 영향을 받아 고동서화 수집과 감식에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 으며, 특히 낙건정을 통해 부친의 친구이자 같은 고동서화에 취미를 둔 문 사 이덕수, 정선, 이병연 등과도 교유하였다. (1) 일찍이 文待詔[文徵明]의 화씨전 을 읽었는데 그 행적이 자못 서로 같았다. 마침내 그의 호[尙古]를 취해 자신의 호로 삼았다.30) (2) 밖으로 나라 안 여러 명산들을 유람하며 말하길 “아! 우리 조선의 땅은 좁아서 붕새가 나는 법을 닦지 못하니, 내 홑옷과 두 짝의 신으로 蹢躃하여 가더라도 오히려 동쪽 끝에 얽힐까 두렵거늘, 하물며 헐렁한 옷과 법관[官 職]으로 우물 안 개구리와 독안의 벌레에게 활보하고 높이 오르기를 권면 한다면 내 가슴이 답답하지 않겠는가?”하였다. … 대개 한나라 이하로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피우는 향은 오직 중화의 것이 이름나고 빼어나니, 조선에는 말 할 것이 없다. … 옛 賢衆을 사모하였고, 이에 하나의 일을 들어보면 비슷하며, 적이 皇朝때 이름난 華尙古[華珵]에 비유된다. 그로써 尙古堂이라 명명하고 낮추어서 스스로를 기른 것이다.31) (3) “華尙古는 이름이 정이요, 자는 여덕이다. 일찍이 벼슬살이가 官稱이 있었으나 그 때문에 벼슬살이가 오래가지 못했다. 또 성품이 옛것을 좋아하 였기에 그 관직에 알맞지 않다하여 버리고, 尚古生이라 불리웠다. … 상고 는 차남이다. … 또 즐겁고 한가로운 때에 이미 집안식솔을 데리고, 좋은 때 화창한 날에 객과 함께 한가로이 놀러 다녔다. 남쪽으로는 항주의 錢塘 으로부터 북쪽으로는 북경의 입구에 까지 수 백리 가운데의 名山과 勝景 30) 李德壽, 西堂私載 卷4, 尙古堂金氏傳 : 甞讀文待詔華氏傳, 謂其迹頗相類. 遂取 其號以自號. 31) 申維翰, 靑泉集 卷6, 尙古堂自叙後題 : 出而遊國中諸名山.曰, 唶我堣夷偏壤, 不 脩於鵬之背, 以吾單衫雙屐, 蹢躃而行, 猶惧罥礙於夫桑, 况勸我褒衣法冠, 濶步高驤 於科斗之井醢鷄之天, 奈吾䝱息何. … 大抵自漢以下, 舌燥於皇明, 所瓣香唯中華名 雋, 國朝則無言. … 慕古賢衆矣, 廼擧一事彷彿而竊比於皇朝聞人華尙古, 以命其堂 者, 卑以自牧歟. 162 第46輯 을 밟지 않은 곳이 없었다. 멀리 髙寄를 보고 黯然히 心思를 일으키는 것 이 옛날에 이미 흩어져 없어진 사람들의 풍취가 있었다. 집안에는 상고루가 있는데, 冠屨․盤盂․几榻 모두가 옛 사람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고 더욱 옛 法書, 名畫, 鼎彞에 속하는 것들을 좋아하였다.”32) (1)은 李德壽의 尙古堂金氏傳 ,
(2)는 申維翰의 尙古堂自叙後題 의 일부로, 김광수는 (1) “일찍이 文待詔(文徵明)의 화씨전 을 읽었는데 그 행적이 자못 서로 같았다.” 그리고 (2) “적이 皇朝때 이름난 華尙古[華珵] 에 비유된다.” 라 한 것처럼, 상고 화씨의 尙古趣味와 이것저것 비교해보니 자신과 모든 것이 비슷하였기에, 華珵의 호를 따서 자신의 호[尙古堂]로 삼는다. 바로 상고당 김광수는 명나라 상고 화정을 자신의 이상형으로 삼았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은 文徵明(1470~1559)의 甫田集, 華尙古小 傳 에 실린 글로, 김광수는 문징명의 글을 통해 화정을 처음 알게 된다. 화 정은 벼슬을 버리고 옛것을 숭상하는 삶을 살아가며 자신의 호를 尙古生이 라 하였다. 김광수는 華尙古小傳 을 읽으면서 특별히 感動되어 자신의 가치관도 바뀌게 되는데, 바로 尙古 華珵33)의 삶을 따르고자 華珵의 號인 尙古를 따서 자신의 호를 尙古堂으로 짓는다. 이처럼 화정과 김광수는 서 로 닮은 점이 많았다. 다시 말하자면 김광수가 화정을 닮고자 한 것이 맞을 것이다. 또 (3)을 보면, 화정은 자신의 집에 고동서화를 소장하고 감상하는 ‘尚古 32) 文徵明, 甫田集 卷27, 華尙古小傳 : 華尚古名珵, 字汝徳. 嘗仕有官稱, 以其仕不 久. 又性好古, 故遺其官不稱, 稱尚古生. … 尚古其次子也. … 又樂閒曠, 既家居率, 以良時勝日, 領客燕游. 南昉錢塘, 北盡京口, 數百里中, 名山勝境, 靡不踐歴. 遐矚髙 寄, 黯然興思有古逸人之風. 家有尚古樓, 凡冠屨盤盂几榻, 悉擬制古人, 尤好古法書 名畫鼎彞之属. 33) 華珵(1438~1514) : 명나라 藏书家, 刻书家로 江苏 无锡人으로, 호는 梦萱․尚古․尚 古生․华燧叔父이며 특히 尙古 華珵이라 불리웠다. 大官署丞에 除授되었고, 古物奇 器과 法书, 名画를 잘 감별하였으며, 藏書家로 유명하다.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63 樓’를 두었으며, 역시 김광수도 고동서화를 소장하고, 자신이 머무는 곳을 마련하고 ‘尙古堂’이라 불렀다. 김광수는 화정의 모습처럼 冠屨․盤盂․几 榻 등은 모두 옛 사람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고, 옛 法書, 名畫, 鼎彞 등을 좋아하며 화정의 모습과 닮아가고자 하였고, 화정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 였다. 또한 화정의 삶은 好古를 좋아하여 벼슬을 그만두었으며, 김광수 자 신도 화정처럼 벼슬을 그만두고 고동서화 수집과 감상에 평생을 보낸다. 화 정은 화가 沈周(1427~1507)와 각별한 관계를 이루었고, 김광수 역시 이광 사, 김국안등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동서화를 통해 세상 을 보았다. 그리고 화정과 김광수 모두 차남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또 화정 은 고동서화의 수집 외에도 항주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두루 명산과 승경 을 찾아다니며, 옛 사람의 山水遊覽에 대한 흥취를 즐겼는데, 역시 김광수 도 벼슬을 그만두고 조선의 勝景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상의 번잡한 것과 멀어지려 하였다. (2)를 보면 상고당의 고뇌가 그려진다. 결국 그는 화정에 게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게 되는데, 그는 무릇 명산에 노닐기를 좋아하 는 자는 지극한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어려움을 물리치지 않으면 절경을 찾아낼 수 없는 이치를 깨닫는다. 즉 그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을 ‘고동서화 趣味’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하였다. 이러한 공통된 사항들을 감 안한다면 김광수가 얼마나 화정을 닮으려 노력하고 흠모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대는 이미 옛 것을 숭상할진대 唐․宋은 明나라보다 옛날이고, 漢․ 魏는 唐․宋보다 옛날이고, 三代는 漢․魏보다 옛날이다. 그대는 지금 삼 대와 한․위, 당․송을 버리고서, 얘기하기 좋아하는 것은 명나라의 일들이 요, 읽기 좋아하는 것은 명나라 문장이니, 어디에 그 尙古란 뜻이 있는 것인 가?” 김광수가 말하길 “저는 우리나라 풍습이 좁아터진 것이 싫고, 우리나 라 문장이 번잡스럽고 진부한 것이 싫고, 우리나라 학문이 거칠고 얄팍한 164 第46輯 것이 싫습니다. 옛 것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지만 三代는 증명하기에 자료 가 충분치 못하고, 한․위는 증명할 수 있으나 너무 소략합니다. 하지만 당 나라는 한․위보다 상세하고, 송나라는 당나라보다도 상세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무릇 명나라는 그 세대가 가깝고, 서적도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제가 숭상하는 이유입니다.”라 하였다. … 저는 명나 라를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땅을 숭상하는 것일 뿐입니다.34) 李德壽의 尙古堂金氏傳 에 실린 글로, 이덕수와 김광수의 대화중 일 부이다. 이덕수는 김광수에게 漢魏부터 唐宋, 明의 옛날[古]에 대해서 김광 수가 오로지 明事와 明文만을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김광수는 조목조목 이유를 들면서 자신이 명나라의 古를 숭상하는 의도를 밝히고 있다. 우선 명나라는 세대가 가깝고, 서적도 갖추어져 있다는 유물론적 이유를 거론한 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 문물뿐만 아니라 중국 땅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숭 상한다는 뜻을 드러내면서 고동서화 수집벽의 범위를 스스로 말하고 있다. 申維翰의 靑泉集 尙古堂自叙後題 에 실린 글을 보면, “1743년 가을 나(신유한)는 도읍 아래에 세 들어 살았다. 상고(김광수)가 지나다 함께 얘기 나누다 내 곁에 金剛經, 圓覺經, 維摩經 등 여러 佛經를 보고는 뽐내고 손뼉을 치며 말하길 ‘이 路頭는 無縛無解하여 世法의 快活 를 가장 잘 證視해준다.’라 하였다. 尙古가 佛家를 좋아한 것은 佛家의 초 탈세계 때문이었다. 그 산수를 사랑하고 물건을 완상하는 癖이 모두 이와 같은 類다.35)” 34) 李德壽, 西堂私載 卷4, 尙古堂金氏傳 : 君旣古之尙矣, 唐宋視明爲古, 漢魏視唐 宋爲古, 三代視漢魏爲古. 君今捨三代漢魏唐宋, 而所喜談者, 明事. 所喜讀者, 明文, 烏在其尙古也. 君曰, 余惡東俗之齷齪也, 東文之冗陳也, 東學之粗淺也. 思反乎古, 而三代不足徵也. 漢魏足徵而略也. 唐詳於漢魏, 宋詳於唐, 而猶不能備. 夫明以其世 則近, 以其籍則備, 吾所以尙也. … 吾非明之尙, 尙中土耳. 35) 申維翰, 靑泉集 卷6, 尙古堂自叙後題 : 癸亥秋, 維翰僦居都下. 尙古過而與之語,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65 상고당은 불교에 조예가 깊었으며, 나아가 수집과 소장으로 이어진다. 김광 수와 신유한은 깊은 친구관계로, 그가 불교를 좋아하는 이유로 ‘超脫世累’ 를 언급하면서 김광수가 산수를 유람하고 물건을 완상하는 癖과 같은 類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林下筆記36)를 보면 김광수가 方氏墨譜에 나오는 寫經墨을 소장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方氏墨譜는 1589년에 휘주의 美 蔭堂에서 方于魯가 편찬한 것으로, 그 책에 寫經墨이라는 귀한 먹이 실려 있다. 김광수는 훗날 그 책속에 실린 상당수 물품들을 소장한 것으로 추측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사경묵이었다. 서화와 고동에 이어 佛家의 진귀 한 물품까지 수집하고 소장한 사실을 보면, 尙古堂이 佛家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다. 계해(1743)에 친구인 圓嶠 李匡師는 來道齋記 를 통해 김광수를 자신 과 비교하면서 수집가로써 김광수의 뛰어남 점을 5가지로 말하고 있다. (1) 성중은 재능이 높고 운치가 고매하다. 그 하는 일마다 옛사람을 그리워 하되 일의 규모나 意致가 반드시 양자강 이남의 명사들을 본받고자 하였 다. 반면에 나는 질박하고 거칠어서 조선사람의 비루한 습관을 떨쳐내지 못했다. (2) 성중은 서적을 폭넓게 이해하고 고금의 역사적 사실을 매우 잘 알았다. 그의 가슴속에는 진실로 二酉(호남성 沅陵縣의 서북쪽에 있는 大酉과 小 酉)에 감춰진 책을 모두 읽고 다섯 수레에 실린 서적을 모두 담으려는 욕심 을 가졌다. 그렇게 독서한 것이 밖으로 넘쳐흐르고 뿜어져 나온 말소리가, 見吾傍有金剛․圓覺․維摩諸書. 沾沾皷掌曰 “此路頭無縛無解, 最善證視世法快活. 尙古所喜於佛者, 爲其超脫世累. 其愛山水翫物之癖皆此類. 36) 林下筆記 卷34, 華東玉糝編 수집품 - 먹, “乾隆 초에 方于魯의 方氏墨譜에 의거해 먹을 만들고 內府에 소장하였다. 방우로는 먹 만드는 방법을 程君房에게 배웠 는데, 그 묵보가 세상에 나돌고 있다. … 우리나라에서는 尙古堂 金光遂의 寫經墨 가운 데 佛像이 있는 것이 있는데, 이 먹도 方氏墨譜에 나온 것이다.” 166 第46輯 귀한 옥(말과 시문)이 될 수 있었다. 옛사람의 성씨와 자호, 사는 곳과 계통, 행한 일과 행실을 자세하게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좁게도 스승으로부터 배운 구두를 조심스럽게 삼가 지킬 뿐 감히 諸家의 학설을 두루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3) 성중은 옛사람의 書畵와 갖가지 예술에 대하여 그 아름다움과 추함, 진품과 가품를 마치 九方歅[春秋 秦人]이 말[馬] 관상을 보듯이 분간해 내 었기에, 그의 밝은 눈을 터럭만큼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나는 글씨 하 나를 얻거나 그림 하나를 얻을 때면 몰래 그를 흉내내보았는데, 얻는 것이 있을 때는 기뻤지만 뜻에 맞지 않을 때는 팽개쳐 버렸다. 그래서 海嶽外史 (米黻,1051~1107)의 글씨가 大令(王獻之,348~388)로부터 나오고, 右丞 (王維,699~759)이 南宗畵를 그렸는지 분간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4) 성중은 六經 외에 外典에도 조예가 깊었고 독실하게 그것을 신봉하였 다. 三敎에는 상이한 가르침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나는 유가와 불 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때때로 훼방하는 말로 그를 비판하였으나 성중의 快辯을 대적하지는 못했다. (5) 성중은 남의 어려움에 달려가고, 남의 곤경을 불쌍히 여기기를 마치 飢 渴이 든 듯하였다. 반면에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성중은 껍데기 같은 一身의 명예를 벗어던지고 우주 사이에 높이 솟아난 사람이다. 나는 바로 졸렬한 법을 지키는 썩어빠진 선비에 불과하다.37) 이때(1743년, 癸亥) 김광수의 나이가 47세로 고동서화에 대해서 농익은 시기였다. 이광사는 김광수가 자신과 다른 점 5가지, 즉 (1)은 옛 사람을 37) 李匡師, 圓嶠集 卷8, 雜文, 來道齋記 : (1)成仲其才高其䪨邁, 其行事動慕古人, 其䂓摹意致, 必欲效揚子江以南人. 余質而野, 不能撥東人陋習. (2)成仲博洽墳籍, 淹 該今昔. 其胸中固欲窮二酉而包五車, 陵溢噴發於外者, 其咳唾皆可以抵鵲矣. 以至於 古人姓氏字號里系事行, 無不貫曉. 余齪齪然謹塾師之句讀, 而不敢泛注於諸家. (3) 成仲於古人書畫百藝, 姸媸眞鴈, 辨之如九方歅之相馬, 無得以毫髮逃者. 余得一書一 畫, 伏以效之. 而有得則喜之, 不合則舍之而已. 或不辨海嶽之出大令而右丞之爲南宗 也. (4)成仲六經之外, 又深外典而篤信之, 以爲三敎無異道. 余於儒釋無所得, 時以口 語攘之, 而不能敵成仲之快辨. (5)成仲赴人之難, 矜人之窮, 如飢渴. 而余未能焉, 盖 成仲形骸絀, 毁譽高出宇宙人也, 余卽一守拙法腐儒也.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67 그리워하고 양자강의 명사들을 본받고, (2)는 많은 수의 고금서적을 섭렵과 소장하였으며, (3)은 뛰어난 감식안이 있으며, (4)는 육경 외 三敎에도 조예 가 깊고, 그 가운데 佛家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5)는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연민이 있다 평가하고 있다. 이광사는 그가 진품과 가품을 전문가 수 준으로 구별하였고, 특별히 불가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남의 어려움을 헤아 릴 줄 아는 선비로 치켜세우고 있다. 즉 김광수라는 인물은 고동서화에 대 한 식견을 겸비하였으며, 뛰어난 감식안까지 갖추었음을 말하고 있다. 김광수의 수집벽과 감식안이 드러난 글을 보면, (1) 집안에는 모은 古書畵와 珍器가 쌓여 있는데 모두 천하의 명품이었고, 古詩文과 稗乘類 모두 천하의 奇書였다. 鑑識이 神妙하였으며, 물건이 뜻 에 맞는 것이 있으면 家勢가 기울어짐을 애석히 여기지 않았고 후한 값을 치뤘다.38) (2) 서화를 팔러 오는 사람이 있어 그것이 자신의 뜻에 맞으면 비록 옷을 벗고 곳간을 기울여 사더라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감상안이 있었기 때문에 소장한 바가 모두 精品이었다.39) 윗글은 김광수의 수집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은 申維翰의 靑泉集 尙古堂自叙後題 에 실린 글로, 집안에는 모은 古書畵와 珍器 그리고 古 詩文과 稗乘類 모두 천하의 귀한 것들로 구매에 있어 값을 따지지 않았다. 역시 (2) 李德壽의 西堂私載 尙古堂金氏傳 을 보더라도, 자신의 뜻에 맞는 물건이 있을 때에는 재물을 아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38) 申維翰, 靑泉集 卷6, 尙古堂自叙後題 , : 室中蓄古書畫珍器, 皆天下名品, 古詩文 稗乘, 皆天下奇書 鑑識神妙, 一物當意, 不惜傾家以厚直. 39) 李德壽, 西堂私載 卷4, 尙古堂金氏傳 : 有持書畫求售者, 苟其當於意, 雖解衣傾 廩, 無所惜然. 以其有賞鑑也, 所蓄皆精品. 168 第46輯 고동서화 수집에 집착한 상고당은 상당한 蒐輯癖을 가졌다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마음에 마땅하지 않으면 문득 찾아가서 “玄圃와 瑤池는 하나의 頑礦을 갖고는 얻지 못하는 것이다. 문장은 脫略하며, 나루를 건너는 뗏목이 패연 한 큰 물결에 잠겨 흐르듯 넘어가니, 神光蔭映으로 바라보면 전서체가 아 님을 알겠다.”라 말하였다.40) (2) 30년 이래로 成仲 金光遂가 옛 것을 좋아하는 버릇[癖]이 있어 처음으 로 漢ㆍ魏의 여러 비문의 법첩을 구입하였다. … 또 잘 알지 못한 것은 八 分書인데, 세상에 전해 오는 것이 없고 다만 夏承의 비문 법첩이 있으나 둔하고 연약해서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니 역시 가짜임을 의심할 것이 없 다.41) (3) 근세의 감상가로는 尙古堂 金氏를 일컫는다. 그러나 才思가 없으니 完 美하다고는 못 할 것이다. 대개 김씨는 감상학을 개창한 공이 있으나, 汝五 는 꿰뚫어보는 식견이 있어 눈에 닿는 모든 사물의 진위를 판별해 내는데 다가, 才思까지 겸비하여 감상을 잘하는 자라 하겠다.42) 윗글은 김광수의 감식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은 申維翰의 靑泉集 의 尙古堂自叙後題 에 실린 글로 구입한 고동서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찾아가서 전문가적 품평의 감식안으로 꾸짖었고, (2)는 李肯翊이 燃 藜室記述에서 書畫家를 평한 글의 일부로, 김광수는 옛 것을 좋아하는 40) 申維翰, 靑泉集 卷6, 尙古堂自叙後題 : 不當意, 輒推去曰 “玄圃瑤池, 着一頑礦 不得. 爲文章, 脫略津筏, 沛然以大激越淋漓, 神光蔭映, 望而知非雕篆語也.” 41) 李肯翊, 練藜室記述別集 卷14, 文藝典故, 書畫家 : 三十年來, 金光遂成仲, 癖於 古, 創購得漢魏諸碑 … 且不能者, 八分書, 世無傳, 只有夏承碑鈍脆甚不佳, 亦爲贋 無疑. 그리고 李匡師, 圓嶠書訣과 相同. 42) 朴趾源, 燕巖集 卷3, 孔雀舘文稿 說, 筆洗說 : 近世鑑賞家號稱尙古堂金氏, 然無 才思則未盡美矣, 葢金氏有開創之功 而汝五有透妙之識, 觸目森羅, 卞別眞贋, 兼乎 才思而善鑑賞者也.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69 버릇(古董書畵 蒐輯癖)이 있어 漢ㆍ魏의 여러 비문의 법첩을 구입한 것과 “비문 법첩이 역시 가짜임을 의심할 것이 없다.”라며 뛰어난 감식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로 김광수는 고동서화에 흥미가 많았으며 감식안이 이를 뒷 받침해주고 있다. 李德壽(1673∼1744)의 尙古堂金氏傳 에도 같은 내용 이 들어있는데, 김광수는 교유를 끊고 오로지 고동서화를 벌여두고 그것들 을 감상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으며, 조선의 소장품들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그는 고동서화의 수집과 소장 및 감식안에 뛰어났다. 그리고 (3)은 燕巖集 筆洗說 의 일부로, 이 글에서 박지원은 서상수와 김광수를 평가하였다. 연암은 김광수가 ‘鑑賞之學의 개창자’로써 인정하면서도, 서상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妙境을 깨달은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연암은 서상수가 감식에도 능했지만 창작도 겸비한 인물 이라고 칭찬하며 서상수를 김광수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서상수 가 뛰어난 고동서화 수집가이면서 감식능력을 가졌다라고 말하기에 앞서, 필자는 김광수라는 인물이 서상수보다 먼저 고동서화를 수집․소장 그리고 감상하는 길을 열었으며, 훗날 서상수는 김광수를 모범으로 뛰어난 감상가 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즉 김광수는 서상수보다 36년이나 앞선 인물로 누가 뭐라 해도 당대 최고의 고동서화 수집가이면서 감상학과 감식법에 대한 개척자적인 길을 연 최초의 인물로 평가하고 싶다. 강명관 교수도 朝鮮後期 京華世族과 古董書畵 趣味 에서 ‘김광수가 서상수보 다 낮추어 볼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43)라 평가하고 있다. 즉 훗날 서 43) 姜明官, 朝鮮後期 京華世族과 古董書畵 趣味 , 東洋漢文學硏究 12, 1998. 16면. “김광수는 어떤 다른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서화고동의 수집과 감상 그 자체를 목적으 로 추구한 최초의 사람이라 할 만하다. 박지원은 필세설 에서 김광수가 개창의 공은 있으되, 감식안은 透得하지 못했다고 낮추어 평가했지만 이것은 사실 좀 야박한 평가로 생각된다. ‘감식안이 신묘하여 한 물건이라도 마음에 들면 가산을 기울여 후한 값을 상지학’으로 敎養의 하나로 여겼 다. 고동서화는 이렇듯 문인의 취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문인의 감상지학’을 전제하여 조선후기의 古董書畵 蒐輯家 인 尙古堂 金光遂를 중심으로 ‘그는 왜 그토록 고동서화에 집중하였는가?’ 에 대한 궁금점을 갖고, 尙古堂의 家系와 당시 교유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18세기 고동서화가 갖는 의미와 그가 조선의 문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고찰 하는데 목적을 둔다. 2. 尙古堂 金光遂의 家系와 蒐輯癖 상고당의 문학은 전하는 자료가 거의 없어 논하기 어렵다. 유일하게 有 明朝鮮尙古子金光遂之壙 이 전하는데, 이는 김광수가 撰하고 이광사가 글을 쓴 것으로, 상고당 文章의 일면을 알 수 있다. <표1> 상산김씨 상고당 김광수 가계도(● : 김광수의 직속 가계 표시 부호) 치와 그 활용 , 明淸史硏究 30, 명청사학회, 2008. ; 신익철, 연행록을 통해본 18세기 전반 한중 서적교류의 양상 , 泰東古典硏究 25, 태동고전연구회, 2009. 등 다수. 그리 고 淸明上河圖 관련 논문은 고미술사에서 다룬 석사학위논문 1편과 학술논문 1편이 고작이다. 이윤조, 淸明上河圖 硏究-장택단본․구영본․청화원본 비교연구 성신여 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 이주현, 명청대 蘇州片 淸明上河圖 연구-仇英 款 蘇州片을 중심으로 , 美術史學 26,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2. 150 第46輯 19세 ●자1.金禹錫 - 豐川任氏 衡伯의 女 (刑曹判書) (承旨) 女1.壻 : 順興安氏 斗極 女2.壻 : 全州李氏 曾賢 女3.壻 : 靑松沈氏 思弘 20세 ●자1.金濡 - 豐山洪氏 柱國의 女 (進士) (禮曹參議) 자2.金演 - 平山申氏 汝哲의 女 (禮曹判書) (判中樞) 자3.金浣 - 平山申氏 命圭의 女 (通訓大夫) (贊成) 자4.金潤 - 韓山李氏의 基夏女 (縣監) (武判書) 21세 자1.金東翼 - 全州李氏 泓의 女 (戶曹佐郞) ●자2.金東弼 - 完山李氏 杓의 女 (判書) (林原君) 女1.壻 : 完山李氏 性之 22세 자1.金光遇 - 安東權氏 益寬의 女 (尙州牧使) (충청감사) ●자2.金光遂 - 完山李氏 箕恒의 女 (楊根郡守) (府使) 자3.金光進 - 海州吳氏 遂郁의 女 (林川郡守) (佐郞) 여1. 壻 : 延齡君 李昍 23세 자1.金載岳 - 錦城林氏 象元의 女 (縣監) (承旨) ●자2.金載彧 - 海州崔氏 範興의 女 (通德郞) (縣監) 자3.金載樸 - 全州崔氏 弘簡의 女 여1. 壻 : 韓山李氏 恒健의 女 24세 ●자1.金魯鍾 - 東萊鄭氏 冣淳의 女 자2.金大鍾 - 潘南朴氏 師莘의 女 자3.金晉鍾 - 全州崔氏 景淵의 女 여1.壻 : 海平尹氏 匡烈 여2.壻 : 潘南朴氏 魯壽 <표1>은 商山金氏世譜 계미보(1763년)8)를 기준으로 작성한 상고당 8) 1763에 편찬된 商山金氏世譜甲~癸編은 木活字으로, 世別 6段, 12行 24字 註雙行 이고, 內向2葉花紋魚尾으로 商山金氏譜所에서 제작되었다. 金光進의 서문과 金光獻,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51 김광수 가계도로써 金德諴(1562~1636) - 高祖 金卨(1595~1668) - 曾祖 金禹錫(1625~1691) - 祖父 金濡(1652~1693) - 先親 金東弼(1678~ 1737) - 尙古堂 金光遂(1699~1770)로 이어지는 가계를 구성한다. 계미보 에는 김광수에 대해 “자는 성중, 기묘생(1699), 郡守를 지냈다. ○기유년 (1729)에 진사에 오르다. 부인은 부사를 지낸 완산이씨 箕恒의 딸로, 참판 李壄의 손녀, 경주 李季珍의 외손이다. 신사년(1701)에 태어났다.”9) 기록 되어있다. 2004년 商山金氏大同譜 자료10)와 보완해보면, 김광수는 본관 이 商山, 字는 成仲, 號는 尙古堂으로, 1699년 12월 18일에 나서 1770년 11월 20일에 71세로 졸하였고, 부인은 1701년 1월 1일에 나서 1771년 11월 20일에 70세로 졸하였다. 김광수의 묘소는 선친을 모신 長湍 先山에 있으 며, 부인과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슬하에 金載岳(1730~?), 金載彧 (1738~1798), 金載樸(1741~1805), 여동생까지 3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 김재악의 출생(1730년)을 고려해보면 김광수는 1729년 진사에 오른 전후시 기에 혼인을 한 것으로 간주된다. (1) 상고당 김씨는 이름은 광수, 자는 성중으로 선조는 상주사람이다. 대사 헌 李德諴은 광해군 폐모론를 당해 절개를 지키다 北塞로 유배당했으며, 문충공 백사 李恒福(1556~1618)과 함께 칭송되었다. 3세 후손인 김동필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請議를 지녔고 한때의 名臣이였으며, 상고당 김광수 致龍, 道源의 발문이 있다. 본고에서는 별칭으로 癸未譜라 한다. 商山金氏世譜의 서발문을 보면 李演 그리고 金東弼, 金光遇, 金光進 등 3대에 걸쳐 족보를 수정․보완 하여 1763년에 큰일을 마쳤다기록하였다. 훗날 2004년 후손들이 商山金氏大同譜를 발간하였다. 9) 癸未譜 : 成仲, 己卯. 前郡守. ○己酉進士. 室完山李氏府使箕恒女, 參判壄孫, 縣慶 州金季珍外孫. 辛巳生. 10) 商山金氏大同譜, 2004 : 字成仲, 號尙古堂, 通訓大夫行楊根郡守. 肅宗己卯十二月 十八日生, 己酉進士. 庚寅八月十三日卒. 墓考墓東岡卯坐. 墓誌自撰, 圓嶠李匡師書. 前郡守. 配淑人完山李氏府使箕恒女, 祖參判壄, 曾祖蓮山君炯信, 外祖縣監慶州金季 珍. 辛巳正月一日生, 辛卯十一月二十日卒. 墓祔. 152 第46輯 는 그의 둘째아들이다. 나면서부터 곧고 청렴하였으며 옛것을 좋아했다.11) (2) 김군[金濡;김광수의 조부]이 豐山 洪氏에게 장가들었는데, 參議 洪柱 國의 딸이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金東翼은 進士출신으로 佐郞이 고, 둘째아들 金東弼은 文科출신으로 持平이고, 딸은 李性之에게 시집갔 다. 김동익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金光世, 金光啓이고, 딸은 윤태 동, 조재건에게 시집갔다. 김동필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金光遇, 金光遂, 金光進이고, 딸은 왕자 연령군 이훤의 부인이 되었다.12) (3) 부친 김동필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혜공으로, 경종 2년에 諫長으로 유독 역적(경종의 충신 김일경 사건)을 논박하며 죄를 밝히었고, 임금의 예우가 매우 깊었다. 모친 이씨는 宣祖의 종실 임원군 이표의 딸이 다. 공(김광우:김광수의 형)은 어진 부모에게 가르침을 받아 일찍이 덕의 자질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병이 잦았는데도 뜻은 편안하고 고요하였다. 외삼촌 저촌 이정섭과 문사 남원빈을 종일 따라 다니며, 시를 읊고 거문고 를 타며 과거공부를 멀리하였다.13) (4) 이조 판서 김동필이 졸하였다. 임금이 슬퍼하여 그의 廉雅하며 나라 위한 정성을 褒奬하고, 內需司에 명하여 관을 만들 재목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 김동필은 성품이 단정하고 선량하여 사람을 대할 때에 상서롭고 온화한 기운이 있었으며, 言議가 과격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조정에 서 吉士로 許與하였다. 그러나 그가 囑托을 굳게 막지 못하였고, 사는 집 11) 李德壽, 西堂私載 卷4, 雜著, 尙古堂金氏傳 : 尙古堂金氏者, 名光遂, 字成仲, 其 先尙州人. 大司憲諱德諴, 當光海廢母后, 抗節謫北塞, 與白沙李文忠公, 幷稱. 歷三 世有諱東弼, 官吏曹判書, 持淸議, 爲一時名臣. 君其仲子也. 生而狷潔好古. 12) 崔錫鼎, 明谷集 卷27, 墓誌, 粹孝先生墓誌銘 : 君娶豐山洪氏, 參議柱國女. 有二 男一女, 男東翼進士佐郞, 東弼文科持平, 女李性之. 東翼二男二女, 男光世․光啓, 女 尹泰東․趙載健. 東弼三男一女, 男光遇․光遂․光進, 女爲王子延齡君昍夫人. ; 朝 鮮王朝實錄肅宗 44卷, 32年(1706 丙戌/康熙) 45年) 12月10日(甲午) 1번째기사 : “연 령군 부인은 저작 김동필의 딸로 정하다(甲午/傳曰, 延齡君夫人, 定於著作金東弼女 子, 言于該曹.” 13) 李匡師, 圓嶠集 卷7, 碑誌銘表, 尙州牧使金公墓誌銘 : 考諱東弼, 行吏曹判書忠 惠公. 景廟二年, 以諫長獨論逆鏡罪, 今上禮遇甚重. 妣李夫人, 穆陵宗室林原君杓之 女. 公敎於賢父母, 夙有德器. 少善病, 志亦恬靜. 與舅樗村李公廷爕曁文士南元賓, 泰觀日從游, 哦詩彈琴棄擧業.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53 이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데 가까우니, 사람들이 간혹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다.14) 윗글을 살펴보면, 대략적으로 상고당의 가계와 성품, 생활모습 등을 짐작 할 수 있다. (1)은 김동필의 친구인 이덕수가 상고당을 위해 쓴 글로, 상고 당의 가계와 그가 옛것을 좋아했음[好古]을 말하고 있다. (2)는 明谷 崔錫 鼎(1646~1715)이 조부 金濡의 묘지명을 쓴 것으로, 가계 가운데 김동필의 딸이 왕족과 혼인한 관계를 밝히고 있다. (3)은 김광수의 친구 이광사가 그 의 형 김광우를 위해 쓴 묘지명으로, 상고당 부모와 형 김광우의 평소 행실 에 대해 언급하였다. (4)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로 김동필의 집이 매우 화 려하였다라는 객관적인 평가가 들어있다. <표1>과 제시된 글을 종합해보면, 김광수는 부친 김동필과 모친 完山李 氏 슬하에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형 金光遇(1696~1760), 동생 金光進 (1711~1776) 그리고 여동생이 있다. 그리고 상고당은 경화세족으로 상당 한 문벌의 명문집안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증조부 金禹錫은 刑曹判書․ 都承旨 등을 지냈으며, 위로 父親 金卨(禮賓寺正), 祖父 金洪(吏曹參判), 曾祖 金長琇(左承旨)의 후손이다. 그리고 김광수의 5대조 淸白吏 金德 諴15)은 상산김씨의 대표적인 인물로, 일찍이 조실부모하였으나 문예에 힘 14)朝鮮王朝實錄 英祖 44卷, 13年(1737 丁巳 / 청 乾隆 2年) 6月 2日(己未) 2번째 기사 : 吏曹判書金東弼卒. 上傷悼, 褒其廉雅爲國之誠, 命內司給柩材. 東弼性端良, 對人 有祥和之氣, 言議不喜矯激, 朝廷許以吉士. 然囑托不能牢杜, 第宅頗近侈華, 人或以 是短之. 15) 金德諴은 曾祖 金衡 - 祖父 金長琇 - 父 金洪의 가계를 갖는다. 그는 부친 김홍(吏曹 參判)과 모친(延安李氏 右部將 胤公의 딸)의 둘째아들로 工曹佐郞, 戶曹正郞 등 요 직을 지냈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훗날 吏曹判書에 追贈되었으며, 시호는 忠貞이다. 사 천의 龜溪書院, 온성의 忠谷書院, 배천의 文會書院, 북청의 老德書院, 안주의 淸川祠 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성옹유고가 있다. 154 第46輯 써 1587년(선조 20)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진사, 1589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리고 여러 요직을 지냈으며, 백사 李恒福의 후원을 받는 등 어려움에 처한 가문을 일으킨 인물이다. 曾祖 金禹錫은 1651년(효종 2) 별 시문과에 병과 급제를 시작으로 여러 요직을 거쳐 1686년 한성부판윤․형 조판서를 지냈으며, 1677년에는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특히 상고당의 부친 樂健亭 金東弼은 1704년(숙종 30) 春塘臺 文科에 을과 급제를 시작으로 1732년부터는 다시 漢城判尹․左參贊․兵曹判 書․刑曹判書․判義禁府事․禮曹判書 등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1729년 (영조 5)에는 冬至正使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老論계열의 金昌翕(1653~ 1722)문하에서 白下 尹淳(1680~1741), 李德壽, 李炳淵, 鄭歚 등과 수
윗글은 김광수의 감식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은 申維翰의 靑泉集 의 尙古堂自叙後題 에 실린 글로 구입한 고동서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찾아가서 전문가적 품평의 감식안으로 꾸짖었고, (2)는 李肯翊이 燃 藜室記述에서 書畫家를 평한 글의 일부로, 김광수는 옛 것을 좋아하는 40) 申維翰, 靑泉集 卷6, 尙古堂自叙後題 : 不當意, 輒推去曰 “玄圃瑤池, 着一頑礦 不得. 爲文章, 脫略津筏, 沛然以大激越淋漓, 神光蔭映, 望而知非雕篆語也.” 41) 李肯翊, 練藜室記述別集 卷14, 文藝典故, 書畫家 : 三十年來, 金光遂成仲, 癖於 古, 創購得漢魏諸碑 … 且不能者, 八分書, 世無傳, 只有夏承碑鈍脆甚不佳, 亦爲贋 無疑. 그리고 李匡師, 圓嶠書訣과 相同. 42) 朴趾源, 燕巖集 卷3, 孔雀舘文稿 說, 筆洗說 : 近世鑑賞家號稱尙古堂金氏, 然無 才思則未盡美矣, 葢金氏有開創之功 而汝五有透妙之識, 觸目森羅, 卞別眞贋, 兼乎 才思而善鑑賞者也.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69 버릇(古董書畵 蒐輯癖)이 있어 漢ㆍ魏의 여러 비문의 법첩을 구입한 것과 “비문 법첩이 역시 가짜임을 의심할 것이 없다.”라며 뛰어난 감식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로 김광수는 고동서화에 흥미가 많았으며 감식안이 이를 뒷 받침해주고 있다. 李德壽(1673∼1744)의 尙古堂金氏傳 에도 같은 내용 이 들어있는데, 김광수는 교유를 끊고 오로지 고동서화를 벌여두고 그것들 을 감상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으며, 조선의 소장품들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그는 고동서화의 수집과 소장 및 감식안에 뛰어났다. 그리고 (3)은 燕巖集 筆洗說 의 일부로, 이 글에서 박지원은 서상수와 김광수를 평가하였다. 연암은 김광수가 ‘鑑賞之學의 개창자’로써 인정하면서도, 서상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妙境을 깨달은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연암은 서상수가 감식에도 능했지만 창작도 겸비한 인물 이라고 칭찬하며 서상수를 김광수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서상수 가 뛰어난 고동서화 수집가이면서 감식능력을 가졌다라고 말하기에 앞서, 필자는 김광수라는 인물이 서상수보다 먼저 고동서화를 수집․소장 그리고 감상하는 길을 열었으며, 훗날 서상수는 김광수를 모범으로 뛰어난 감상가 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즉 김광수는 서상수보다 36년이나 앞선 인물로 누가 뭐라 해도 당대 최고의 고동서화 수집가이면서 감상학과 감식법에 대한 개척자적인 길을 연 최초의 인물로 평가하고 싶다. 강명관 교수도 朝鮮後期 京華世族과 古董書畵 趣味 에서 ‘김광수가 서상수보 다 낮추어 볼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43)라 평가하고 있다. 즉 훗날 서 43) 姜明官, 朝鮮後期 京華世族과 古董書畵 趣味 , 東洋漢文學硏究 12, 1998. 16면. “김광수는 어떤 다른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서화고동의 수집과 감상 그 자체를 목적으 로 추구한 최초의 사람이라 할 만하다. 박지원은 필세설 에서 김광수가 개창의 공은 있으되, 감식안은 透得하지 못했다고 낮추어 평가했지만 이것은 사실 좀 야박한 평가로 생각된다. ‘감식안이 신묘하여 한 물건이라도 마음에 들면 가산을 기울여 후한 값을 치 뤘다.’는 申維翰 등의 평가를 고려하건대 그렇게 낮추어 볼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 다." 170 第46輯 상수를 비롯한 조선후기 고동서화의 수집열풍이 김광수와 무관하다고 보기 는 어렵다는 뜻이다. 燕巖集 古董錄 44)을 보면, 서상수는 당시 사람들이 버리고자 했던 보잘 것 없는 옛 그릇이 희귀하고 진귀한 것임을 알아내는 심미안을 가졌 다. 그는 물건이 사람의 본성을 빼앗고 학문을 연마하는 학자의 심성을 거 칠게 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사물과 자연의 본질이나 이치를 터득하는데 없 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서상수는 김광수에게 고동 서화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훗날 백탑파의 일원으로 서울 근교의 白塔, 夢 踏亭, 挹淸亭과 觀齋[서상수가 거처하는 곳]를 중심으로 자주 朴趾源, 李 德懋, 柳得恭, 柳璉, 朴齊家, 李應鼎, 尹可基 등과 교유하며 함께 차를 마 시며 고동서화를 감상하곤 하였다. 이들은 고동서화에 대한 완상에만 그치 지 않고 그 본질까지도 탐구하고자 노력을 하였으며, 특히 서상수가 속한 백탑파는 앞서 김광수의 고동서화에 대해 모든 것을 전하는 하나의 場이 되었다. 이상으로 김광수의 가계와 수집벽에 대해 살펴보았다. 김광수는 自撰墓 誌銘 을 통해 스스로 고동서화에 癖이 있다하였다. 그는 국내외의 고동서 화에 지극히 관심이 많았으며, 뛰어난 감식안까지 가졌다.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평소 소장품들을 어루만지고 감상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는데, 癖에 가까운 수집욕과 소장욕으로 원하는 것은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손에 44) 朴趾源, 燕巖集 卷11, 別集, 熱河日記․盛京雜識․古董錄 : 文王鼎, 召父鼎, 亞 虎父鼎, 此商周上賞, 周王伯鼎, 單徒鼎, 周豊鼎, 皆唐天寶中局鑄, 軆小, 最宜書齋薰 燎. … 周大叔鼎, 周䜌鼎, 俱堪入書室淸供, 鼎爐之環耳僘口, 爪腹鷄腿, 皆爲下品, 不 堪入玩, 勿取可也. … 官窰法式品格, 大約窰與哥窰相同, 色取粉靑, 或卵白汁水瑩, 厚如凝脂, 爲上品, 其次淡白油灰色, 愼勿取之, 紋取氷裂鱔血爲上, 細碎紋紋之下品, 勿取可也, 其製亦多博古圖中取式者, 無論鼎彛甁壺觚尊諸式, 但短矮肥腹, 俗惡無足 入翫, 勿取可也.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71 넣었다. 훗날 노년에는 수집벽의 폐해로 家勢가 기울어 처지가 곤궁해지지 만 好古의 기운만은 여전하였다. 상고당의 가문은 문벌의 경화세족으로 상당한 부와 권력을 지녔으며, 이 를 바탕으로 고동서화의 수집과 소장에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리 고 고동서화 수집벽은 그의 가문과 자신을 이해해준 부친의 영향이 컸으며, ‘樂健亭’에서 고동서화를 매개로 부친의 친구인 이병연, 정선, 이덕수 등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을 만났고, 이어서 자신의 ‘尙古堂’ 공간을 통해 당시 경화세족 및 당색과 나이를 불문하고 여러 문인들과 교유를 하였다. 교유한 문인들은 대부분 만나면 좋은 향을 피우고, 이름난 차를 마시며, 뛰어난 감 식안으로 고동서화를 감상하였으며, 상고당 김광수를 따라 고동서화의 취 미를 함께 누렸다. 3. 18世紀 士大夫들의 古董書畵 趣味와 影響 古董書畵란 “古董은 ‘낡은 물건, 골동품’ 書畵는 ‘글씨와 그림’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정의하지만 조선후기의 고동서화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김성진 교수는 “문체반정의 직접적인 단서를 제공한 南公轍(1760~1840) 은 자신의 집에 있는 건물들을 古董閣․書畵齋․古董書畵閣 등으로 불렀 을 뿐 아니라, 서화에 대한 題跋을 묶어 따로 2권 분량의 ‘書畵跋尾’를 펴 내기도 하였다.45)”라 하였다. 南公轍의 글에 ‘古董書畵’라는 말46)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일을 계기47)로 정조는 文體反正이라는 반동적 문화정책을 45) 金聲振, 18, 9세기 韓日兩國의 明淸小品文 受容에 대한 比較硏究 , 한국문학논총, 2005, 한국문학회, 132면. 46) 南公轍, 金陵集 卷23, 宜寧南公轍元平著․書畵跋尾, 水精宮道人法書墨刻 : 此 帖中摹蘭亭序尤佳. 東坡詩云天下幾人學杜甫, 誰得其皮與其骨. 學蘭亭者亦然. 黃太 史亦云世人但學蘭亭面, 欲換凡骨無金丹. 此意學書者當知之, 古董書畵閣春雨中. 172 第46輯 시행하게 된다. 앞서 正祖가 직접 나서 이를 저지한 것에 대해 미뤄보면, 당시 고동서화가 지닌 의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이때 고동서화 의미는 평범한 사람과 선을 긋는 극단적 우월감, 즉 값비싼 물품의 소유와 감상을 통해서 표현되는 일종의 사치품이란 의미도 포함한다. 姜明官 교수 는 “18세기 이래로 중국으로부터 사치품의 수입이 급증했던바 그것의 주소 비처는 서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치품의 주 소비자는 서울의 경화세 족이었다. 곧 ‘唐學(中國風)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明淸間의 小品과 異書를 많이 소장하는 경우가 있고, 오로지 西洋의 曆數之學을 숭상하는 경우도 있고, 衣食․器皿을 燕京의 물품을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있 는데 그 폐단은 동일하다.48)’고 한 正祖의 지적은 18세기 이래 경화세족이 중국의 수입품의 주소비자이며, 이들의 생활이 높은 소비수준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음을 입증한다.”49)라 밝히고 있다. 즉 경화세족들 가운데는 자신 들의 명예와 부를 통해 당시 사회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서울이란 도시를 배경으로 높은 수준의 물질적 소비위에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며, 그 중 하나가 고동서화의 수집과 소장 취미였다. 당시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들에게 고동서화 취미는 도덕적 품성을 방해 하는 부정적 측면으로 인식되기도 하였지만, 조선 후기 18세기에 들어오면 서 고동서화 취미는 단순히 사물을 유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당시 의 사회경제와 사상을 나타내는 측면으로 상징적 변화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는 北宋의 문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明․淸 시대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서화의 경우 종래의 47) 靑莊館全書, 附錄下․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 大抵此事, 創始於南直閣公轍 對策, 用古董書畵四字. 羡慕中原, 嗜好小說, 爲近日之痼弊, 責敎截嚴. 南公與李玉 堂相璜, 至有問啓之命, 伊後沈金兩待敎, 沈象奎, 金祖淳, 次第有問啓之. 48) 弘齋全書 177, 日得錄․訓語 : 唐學有三種, 有多蓄明淸間小品異書者, 有專尙西 洋曆數之學者, 有衣飾器皿之喜用燕市之物者, 其弊則一也. 49) 姜明官, 앞의 논문, 8면.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73 궁정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수집 풍조가 고려 중기부터 일부 문인들 사이에 대두되어 조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골동품에 대한 관심은 조선 전기 왕공 사대부들의 개인적 취미에서 비롯해 서화 수집 취미로 시작되었으나, ‘쓸데 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소중한 자신의 본심을 잃는다[玩物 喪志]’라는 성리학적 이념 때문에 고조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 러 실학파 문인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인식되면서 골동품을 수집하고 완상 하는 풍조가 일어나게 되는데, 특히 18세기 말 朴趾源과 북학파 계열의 지 식인들 그리고 서얼출신의 문인들이50) 고동서화에 취미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燕京을 來往하면서 고동서화를 파는 점포에 들르거나, 골동 관계 문 헌 博古圖・西淸古鑑등을 접하게 되면서, 고동서화에 대한 식견이 높 아졌으며, 그들로 인해 당시 문인들 사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 다. 연암은 筆洗說 에서 “무릇 서화와 고동에는 수장가와 감상가가 있다. (夫書畵古董, 有收藏鑑賞二家.)”라 주장할 당시는 이미 김광수 말년의 상 황으로 간주된다. 즉 이미 18세기 초반부터 상고당 같은 고동서화의 수집과 소장을 전문으로 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고동서화에 대한 인식 변화를 보면, 조선 전기에는 ‘玩物喪志’의 경계 대상에서 조선후기는 ‘遊戱, 優越感, 奢 侈品’으로 변하는데, 성리학 이념이 解弛해지고 연행의 영향으로 중국과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는 상황에서 사대부와 경화세족간의 고동서화의 취미 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 古董書畵의 鑑賞과 實狀 18세기 사대부들의 古董書畵의 鑑賞과 實狀을 살피려면, 먼저 고동서화 취미의 문화생활을 들여다봐야 한다. 50)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유금, 서상수 등 백탑(오늘날 원각사 10층 석탑)근처에 모여 살면서 교유하였으며, 서얼출신의 문인들이 고동서화와 시를 매개로 同人을 형성한 일 종의 詩派 즉 白塔派가 있다. 174 第46輯 손님이 오면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며 法書․名畫․銅玉․彝鼎을 두고 品評하고 감상하였으며, 때로는 松園의 茶屋로 가서 차를 마시며, 향을 태 우고 명나라 먹으로 글을 쓰며, 書室에 들어가면 향을 피우고 圖書와 鼎彜 를 두고 보면서 好古의 취미를 즐겼다.51) 이는 南公轍(1760~1840)의 金 陵集과 金祖淳(1765~1832)의 楓皐集그리고 徐命善(1728~1791)의 屐園遺稿에 실린 글로, 당시 문인들은 서로 만나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 며, 好古의 취미를 즐긴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김광수 보다 적게는 30년에서 많게는 70년 후대의 인물로써 김광수가 친구 이광사를 만나 누린 일상의 문화생활들이 훗날 이들과 같은 사대부 경화세족들의 문화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문화의 先驅者가 바로 상고당 김광수였다. 바로 상고당의 일상과 경화세족의 문화생활을 살펴보 면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성중(김광수)은 이 서재에 기이한 서적과 특이한 문장을 모아 놓았고, 상고 시대의 쇠북과 솥, 오래된 비석을 모아 놓았으며, 이름난 향을 모아 놓았고, 고저에서 나는 우전차를 모아 두었으며, 단계 흡주의 벼루와 호주 산 붓, 휘주산 먹을 모아 두었다. 나(이광사)를 위해 늘 맛좋은 술을 마련해 두었다가 흥이 날 때마다 나를 생각했고, 나를 생각할 때마다 바로 말을 51) 金陵集, 潁翁續藁 卷5, 誌碣․自碣銘 : 置亭龍山廣陵之間, 多植梅菊松竹, 時 以幅巾野服, 出往逍遙. 客至, 焚香淸坐, 討論經史. 傍列古今法書名畫銅玉彝鼎, 評 品賞玩, 泊然無榮利之慕. ; 楓皐集 卷16, 雜著․雜錄 : 徐步到松園茶屋. 爾時中 秋, 明月槐影滿地, 只從葉底, 射入亮光, 幽朗可悅. 遂出松園所藏古香數枚, 爇銅鼎 內, 涎麝噴芳, 烟氣蓬勃, 若早霞捧日於雲濤中. 更吃凉茶一甌, 拂湖南薄箋, 用禿筆, 副松園求字體. 墨則明時所製也, 色黯如漆, 新發香, 更勝爐炷, 亦一快事. 仍念吾輩 遊戲轉頭, 便成陳迹, 若留此紙, 至明年此夜, 展讀, 已似今人誦古人書, 不亦快哉” ; 屐園遺稿 卷10, 玉局集, 徐景博墓碣銘 : 忠文公方官位隆赫, 軒駟溢門, 而入景 博之室則簾閣熏香, 左圖書而右鼎彜, 澹然若山澤之癯. 自少無外慕, 嗜墳典如芻豢, 尤致力於名物考證之學, 以楊升菴, 朱竹坨爲卷中友. ; 姜明官, 앞의 논문, 11~12면. 원문과 번역문 재인용.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75 보내 나를 불렀다. 그때마다 나도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문에 들어서면 서 로를 바라보고 손을 맞잡고서 웃었다. 서로 마주한 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책상 위에 놓인 책 몇 권을 들어 쓱 읽고 낡은 종이를 펼쳐 주나라 북에 쓰인 글과 한나라 묘갈 두어 개를 어루만지노라면, 성중은 벌써 손수 향을 사르고 있다가, 두건을 젖혀 쓰고 팔뚝을 드러낸 채 앉아서 손수 차를 달여 내게 마시도록 건넸다. 온종일 그렇게 편안하게 지내다가 저물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때에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 고, 집으로 돌아간 내가 다시 그리워져 바로 나를 부른 일도 있었다. 또 어 떤 때에는 일이 생겨 열흘이 지나도록 서로 만나지 못해 즐겁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이것이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너무도 좋아한 사연이자 이 서재를 그렇게 이름 붙인 이유이다.”52) 윗글은 圓嶠集 來道齋記 에 실린 글로, 계해년(1743) 상고당은 圓嶠 李匡師(1705~1777)를 위해 來道齋(字가 道甫인 圓嶠가 와서 머무는 집) 방 한 칸을 마련해 놓고 서로 만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광수(당시 44 세)의 日常이다. 그는 서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데, 서재에는 기이 한 서적과 특이한 문장들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향을 태우고 차를 마시면서 그것들을 감상하며 하루를 보낸다. 이따금 맛 좋은 술을 마련해 두었다가 이광사[당시 38세]를 불러 못 다한 얘기를 나눈다. 둘은 고동서화를 매개로 더욱 돈독해져 주고받는 말 또한 많았다. 이 두 사람은 온종일 보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다시 만난 적이 있었고, 때로는 만나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 고, 헤어진 후 그리워져 또 바로 부르고, 어떤 때에는 일이 생겨 열흘이 지 나도록 서로 만나지 못해 즐겁지 못한 적도 있었다하니, 둘의 관계가 대단 52) 圓嶠集 卷8, 雜文, 來道齋記 : 成仲於是齋, 蓄奇書異文, 蓄鍾鼎古碑, 蓄名香, 蓄 顧渚雨前茶, 蓄端歙之石湖之穎徽之煤, 爲余甞置好酒, 興發輒相思. 思輒以馬邀之, 余亦欣然而赴, 入門相向, 撫掌而笑, 相對無他言. 取案上書數局快讀, 展古紙橅周皷 漢碣二三, 則成仲己手焚香, 巾露臂坐, 自烹茶相喫, 夷猶竟日, 迫曛乃歸. 或累日不 歸, 歸輒復相思而邀. 或有事經旬不相參, 相爲之不樂也. 此吾兩人相好之篤, 而齋之 所以名也. 176 第46輯 히 막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광사의 스승 白下 尹淳은 김광수의 부친 김 동필과 동문지기로 이들은 이미 서로 알고지낸 사이였다). 즉 김광수의 일 상은 친구인 이광사를 만나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며 고동서화에 대해 논하 며 서로가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훗날 김광수는 자신의 墓誌銘을 직접 지어서 원교 이광사에게 부탁하기 에 이른다. 圓嶠 李匡師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白下 尹淳(1680~1741) 에게서 글씨를 배웠으나, 白下와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획의 변화가 있는 글씨를 써서 圓嶠體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는 상고당과의 친분으로 많은 문인들과의 교유하였으며, 특히 상고당의 수집품 가운데 귀한 漢碑나 石鼓 등의 많은 글씨와 古碑와 拓本帖 등을 최대한 수용해서 자신만의 書 體를 이루는데 도움을 받았다 추측한다. 그리고 李德履(1728~?)의 東茶記에 “내가 계해(1743년) 봄에 상고당 집에 들러 遼陽 선비 임씨가 보내준 차를 마신 적이 있는데, 잎이 작고 창이 없었다. … 주인이 소나무 아래에 자리를 만들어 서로 마주하였는데, 옆에 둔 차 화로와 다관은 모두 해묵은 골동품 그릇이었다.”53)라 기록했다. 來 道齋記 와 같은 해에 당시 15세의 이덕리가 상고당집에 들러 빼어난 소나 무 아래에서 중국산 귀한 차를 마시는데, 주변에 갖추어진 차 화로와 다관 은 모두 古董이었다. 또 이덕리는 東茶記에서 1760년 전라도 해안에 표 류했던 중국 선박에서 나온 차 이야기를 하는데, 이보다 앞서 1743년 상고 당을 만나 귀한 중국차를 맛보고 느꼈다. 김광수는 고동서화를 중심으로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심사 정․김광국과 가까이 지냈다. 玄齋 沈師正(1705~1769)이 그린 臥龍庵小 集圖 에는 1744년(영조 20) 여름 어느 날 상고자의 집 와룡암을 찾아가서 향을 사르고 차를 마시며 서화를 평론한 적이 있는데, 17세의 石農 金光國 53) 李德履, 東茶記 : 余於癸亥春, 過尙古堂, 飮遼陽士人任某所寄茶, 而葉小無槍, … 主人設席松下, 相對, 傍置茶爐, 爐罐, 皆古蕫彝器.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77 (1727~1797), 39세의 심사정, 45세의 김광수가 그림을 매개로 등장한다. 훗 날 1791년(정조 15) 환갑이 넘은 김광국은 가을에 우연히 譯官 李敏埴(字 用訥)의 처소를 지나다가 소장한 화권의 臥龍庵小集圖 를 보고 감회가 일어 글을 남겼는데, 석농의 발문을 통해보면, 이들은 나이차와 신분, 당색 의 구별 없이 상고당 김광수의 집에서 함께 어울려 향을 사르고 차를 마시 며 서화를 평론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洪儀泳(1750~1815)은 여러 畫師들과 교유하며 좋은 그림에 題 를 쓴 것이 매우 많았는데, 그 가운데 觀我齋畵帖발문에서 문인화가 觀 我齋 趙榮祏(1686~1761)은 “白岳山 아래에 살면서 鄭敾, 李秉淵과 이웃 이 되어 교유하면서 詩畵를 논하였다.”라 평가한 것을 미뤄보면, 조영석은 상고당을 비롯 김동필의 이종사촌 형 이병연, 심사정, 김광국, 조영석, 정선 등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아침나절 尙古堂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네. 듣자니 집을 둥그재[圓嶠] 아래로 옮기고 대청 앞에는 벽오동 나무를 심어 놓고 그 아래에서 손수 차를 달이며 鐵突(金鼎七의 아들로 金哲石, 당대 거문 고의 명수)을 시켜 거문고를 탄다고 하데.”54) 윗글은 燕巖集 放璚閣外傳․廣文者傳 에 실린 글로, 김광수는 圓 嶠 아래로 거처를 옮겼으며, 상고당 대청 앞에는 벽오동나무를 심고 거문고 名手인 김철석(1724~1776)을 시켜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는 여러 문사들 과 차를 달여 마시면서 풍류를 즐겼다. 또 損齋 趙載浩(1702~1762)는 좋 은 봄날에 김광수와 함께 尙古堂에 모여 읊은 詩55)가 전한다. 김광수는 雅 54) 燕巖集 卷8, 放璚閣外傳․廣文者傳 : 朝日尙古堂遣人勞我, 聞移家圓嶠下, 堂前 有碧梧桐樹, 常自煑茗其下, 使鐵突皷琴. 55) 趙載浩, 損齋集 卷1, 詩․會于春臺尙古堂寓舍 : 郭外行聽流水鳴, 春臺轉入路縱 橫. 穿來楡柳村何靜, 坐處溪山境始明. 芳草日斜携酒地, 亂砧風送浣衣聲. 評詩看畵 178 第46輯 會를 열어 차와 음악을 함께하였는데, 이때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의 노론뿐만 아니라 南人과 小北, 中庶層 문인까지 포괄하였으며, 그들 가운 데 대부분은 백탑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18,19세기 문인들의 문화생활은 고동서화의 취미를 단순히 사물을 유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진 않았고, 골동품과 서화에 한정짓지 않고, 서적과 焚香, 飮茶 그리 고 彈琴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를 갖는다. (1) 석농 김광국, 원빈은 그림을 알아보는 데 묘하니, 원빈이 그림을 보는 법은 神으로 하고, 形으로 하지 않았다. 온 천하의 좋아할 만한 물건 중에 도 원빈이 좋아하는 것이 없었으나, 그림을 애호하기가 다만 더욱 심하였 다. 때문에 그림을 소장한 것이 이와 같이 많았다. … 젊어서는 名下士 金 光遂 成仲, 李麟祥(1710~1760) 元靈과 사귀었는데 지금 원빈은 늙고 白 首가 되었고, 옛날 사귀던 사람들도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내가 처음 원빈과 사귀게 되었을 때 원빈이 나에게 畵帖의 발문을 써 달라 부탁하였 다.56) (2) 남태빈의 자는 원빈, 호는 동애로 의령 사람이다. 진사에 들어 주부가 되었고 文으로 한때 명성이 있었다. 상고당 김광수를 매우 좋아하였다. 하 루라도 보지 않으면 문득 마음이 추연해져 즐겁지 않다가 보면 또한 말하 지 않아도 늘 기쁜 듯하였다. … 사람들이 가끔 상고당을 비난하고 상고당 과 어울려 놀지 말라고 하면, 남태빈은 “흰 연꽃은 더러운 곳에서 피어난다. 꽃이 더러운 곳에서 핀다 해서 보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공(남태빈)의 風 儀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를 보는 자들은 傾倒하지 않는 자가 없었 俱淸事, 安得從君度此生. (其二) 朝衣已裂謝鍾鳴, 垂老難禁氣自橫. 一水限城塵事 凈, 千峰繞屋夕陽明. 歸時我馬依依影, 何處林鳩隱隱聲. 長日開樽猶苦短, 胡爲不樂 百年生. 56) 兪漢雋, 自著, 石農畵苑跋 : 石農金光國元賓玅於知畵, 元賓之看畵, 以神不以 形. 擧天下可好之物, 元賓無所愛, 愛畵顧益甚, 故畜之如此其盛也. … 少與名下士金 光遂成仲, 李麟祥元靈遊. 今元賓老白首, 舊從零落, 而余乃始交元賓相得也, 元賓求 余帖跋.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79 다. 만년에는 洞陰(경기도 포천) 산중에 거하였고, 시는 俊逸하였다. 자손 들은 가난하였으며 흩어지고 숨어사는 자들이 많았다.57) (1)은 著菴 兪漢雋(1732~1811)이 乙卯(1795)년에 石農 金光國(172 7~1797)의 그림에 발문을 적은 글의 일부이다. 유한준의 글을 빌리자면, 김광국과 원빈은 그림 보는 눈이 뛰어났으며, 많은 그림을 소장하였고 김광 수와 이인상 등과도 교유하였다. 특히 김광국은 어린 나이에 이미 상고당을 만나 고동서화를 접하게 되면서, 훗날 그의 그림 소장과 감식안의 일부는 당시 수집가이자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김광수의 영향을 받았다. (2)는 成 海應(1760~1839)이 硏經齋全集, 世好錄 에서 元賓 南泰寬에 대해 밝힌 대목이다. 南泰寬은 李匡師, 李廷爕(1688~1744.김광수의 외삼촌), 李德懋, 柳得恭, 朴齊家 등과 교유하였고, 상고당보다 12살이나 많았지만, 상고당을 매우 좋아해서 주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유를 변치 않는다. 또 원빈의 인생 후반부는 초라한 김광수의 인생과도 비슷한 면이 다소 보인 다. “상고당 김광수는 중국인 林本裕(1652~1732)와 그의 아들 林价와 사 귐이 가장 좋았다. 임본유가 기증한 바 孔林漢碑三種과 曹全碑는 탁본이 정교할 뿐 아니라 그 고증이 또한 상세하였고, 또 原拓으로 된 聖敎序․宣 德爐에는 유명인들이 찍은 印章이 매우 많았다.”58) 57) 成海應, 硏經齋全集 卷49, 世好錄․南泰寬 : “南公泰寬字元賓號東崖, 宜寧人. 中進士爲主簿, 以文名于時, 最與尙古堂金公光遂甚好. 一日不相見則輒愀然不樂, 見 亦無所言而常怡怡如也. … 人或訾尙古堂, 勿與遊尙古堂. 曰, “白蓮花發於汚穢中, 爲其汚穢而不之觀乎?” 公風儀動人, 見者無不傾倒. 晩居洞陰山中. 詩長於俊逸, 而 子孫貧甚多散佚.” 58) 吳慶錫, 天竹齋箚錄 : 尙古堂金光遂與中朝林本裕及其子价, 論交最善. 本裕所贈, 孔林漢碑三種及曹全碑, 非但精拓, 其考證甚詳. 又有原拓聖敎序․宣德爐, 名人所篆 印章甚多. 180 第46輯 윗글은 吳慶錫의 天竹齋箚錄에 실린 글로, 吳慶錫59)은 대대로 역관 의 집안으로 청나라를 자주 드나들며 인삼 등을 통해서 많은 고동서화를 수집한 인물이다. 그는 김광수가 중국인 임본유와 그의 아들 林价와 사귐이 각별하였다 적고 있다. 이런 각별한 관계로 임본유에게 여러 碑拓을 기증받 는데, 그 가운데에는 聖敎序(중국에서 새로 번역한 불교의 경전에 대하여 황제가 내린 서문)와 중국 명나라 선덕 때에 구리로 만든 화로 宣德爐, 그 탁본에는 名人들의 도장이 수두룩하였으니 김광수는 귀한 탁본 2점을 소장 한 것이고, 그것은 중국인과의 친분으로 입수된 것이다. 즉 김광수는 고동 서화 수집품 중 일부는 직접 중국인을 통해 기증받았음을 의미하며, 조선에 서 진귀한 고동서화를 수집하기로 유명한 그로써는 보통의 경화세족과 비 교해 조금은 다른 경로로 고동서화 수집이 이뤄졌음을 말한다. 白月碑는 옛날에는 榮川郡에 있었는데, 중간에 그 소재를 잃었다. 尙古 子 金光遂가 영천의 이웃 고을에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 碑를 어느 밭에서 찾아내서 운반해다가 관청에 두었는데, 그 탁본이 세상에 돌아다닌다. 뒤에 홍이계가 영천에 가서 그 碑를 찾아보았더니, 폐허가 된 정원에 버려져 있 었다. 얼른 사람들을 시켜서 메어 오게 한 다음, 주인에게 부탁하여 木匣을 짜서 바람과 비를 막게 하였다.60) 윗글은 李裕元(1814~1888)의 林下筆記 東京古蹟考 에 실린 글로, 59) 吳慶錫(1831~1879) : 역관․서화가․금석학자로 본관은 海州, 자는 元秬, 호는 亦 梅․鎭齋․天竹齋,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당상역관이며 지중추부사를 지낸 膺賢이 고, 아들은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吳世昌이다. 60) 李裕元, 林下筆記 卷34, 華東玉糝編, 東京古蹟考 : 白月碑, 舊在榮川, 中年失所 在, 尙古子金光遂守隣縣, 搜得於田間, 運置官廨, 印行于世, 後耳溪, 如榮川訪之, 棄 在廢園中, 亟使舁致, 托主人作木匣, 俾防風雨. 그리고 冠巖全書, 四宜堂志 ․
59) 吳慶錫(1831~1879) : 역관․서화가․금석학자로 본관은 海州, 자는 元秬, 호는 亦 梅․鎭齋․天竹齋,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당상역관이며 지중추부사를 지낸 膺賢이 고, 아들은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吳世昌이다. 60) 李裕元, 林下筆記 卷34, 華東玉糝編, 東京古蹟考 : 白月碑, 舊在榮川, 中年失所 在, 尙古子金光遂守隣縣, 搜得於田間, 運置官廨, 印行于世, 後耳溪, 如榮川訪之, 棄 在廢園中, 亟使舁致, 托主人作木匣, 俾防風雨. 그리고 冠巖全書, 四宜堂志 ․ 新 羅僧端目集金生書白月棲雲寺碑 와 嘉梧藁略, 玉磬觚賸記 ․耳溪集, 題白月 寺碑 에 실린 내용과 相同.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81 김광수가 영천군의 이웃 수령으로 있으면서 신라 김생이 집자한 작품으로 금석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白月碑61)를 발견하고 탁본하여 세상에 유통시키고, 훗날 금석문의 대가 耳溪 洪良浩(1724~1802)가 버려진 白月 碑를 다시 찾아 木匣을 짜서 바람과 비를 막게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洪良浩의 耳溪集 題白月寺碑 와 李裕元의 嘉梧藁略 玉 磬觚賸記 에도 실려 있다. 書畵 및 金石에도 관심이 많았던 김광수의 인 연으로 신라 김생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옛 비문 등을 탁본하 여 후세에 전한 업적 등은 훗날 금석학의 대가 이계 홍양호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白月碑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김광수는 중국 것만이 아닌 조선의 금석문에 대해서도 관심이 상당하였다는 점이다. 훗날 김광수와 홍 양호는 조선후기 금석학 연구에 상당한 기여62)가 있었다 평가된다. 김광수의 古董書畵 蒐輯癖은 처음에는 漢ㆍ魏의 여러 비문의 법첩을 구입하였다가, 발전되어 중국인과의 친분으로 孔林漢碑三種과 曹全碑 그 리고 聖敎序․宣德爐 탁본을 기증 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탁본과 서첩의 수집현상에 있어서도 그가 중심에 있었다. 이에 문을 닫고 交遊를 끊고 오로지 几榻을 깨끗이 소제하고 古書畫․ 金石․異書를 취하여 左右에 벌여 두고, 端溪硯과 隃麋墨과 兔毫․鼠鬚 로서 다른 나라에서 온 것을 구해 두지 않음이 없고 그것들을 어루만지고 61) ‘白月碑’는 太子寺郎空大師白月栖雲塔碑. 신라 金生(711~791)의 글씨를 집자해서 낭공대사의 入寂 한해 뒤에 孤雲 崔致遠의 동생이자 신라 말 고려 초 최고 문장가 崔 仁㳘(868~944)에 의해 완성되었다. 훗날 太子寺는 없어지고, 비석의 자취를 알 수 없 게 되었는데, 1509년(중종 4) 당시 榮川郡守 李沆에 의해서 발견되어 字民樓로 옮겨졌 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중국 사신에 의해 반출되는 상황을 맞았지만 비석이 크고 무거워 결국 비석을 가져가던 도중에 포기, 버려졌다. 그 이후 여러 차례의 곡절을 겪으며 비석 은 1918년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62) 성인근, 白月棲雲塔碑의 전래과정과 전승유형 , 서예학연구 10, 2007. ; 장지훈, 洪 良浩의 서예인식과 서예비평 , 서예학연구 20, 2012. 등 학술지에서 김광수와 홍양호 에 대한 금석학 기여를 다루고 있다. 182 第46輯 감상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가 바야흐로 정신을 집중하여 고인과 서로 만난 듯 할 때면, 세상의 썩고 비린 고기를 먹는 일도 그의 마음을 더럽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남의 집에 소장된 것이면 중국 것이나 우리나라 것이나 할 것 없이 그의 눈을 거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또 물건의 출처와 雅俗을 능히 분별할 수 있었기에 절반도 펼쳐보기 전에 진품인지 가짜인지 즉시 판단이 섰다. 서화를 팔러 오는 사람이 있어 그것이 자신의 뜻에 맞으 면 비록 옷을 벗고 곳간을 기울여 사더라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감상 안이 있었기 때문에 소장한 바가 모두 精品이었다. … 세상 모두가 나를 버렸듯이 나도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風雅를 선양하여 태 평시대를 서로 이어놓음으로써 300년 조선의 풍속을 바꾸어놓은 일은 먼 훗날 혹시라도 나를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63) 윗글은 李德壽(1673∼1744)의 尙古堂金氏傳 에 실린 글로, 김광수는 평소 교유를 끊고 서재에 귀한 고동서화를 벌여두고 그것들을 감상하는 것 을 낙을 삼고, 그것을 대할 때는 마치 옛 사람을 만난 듯 깊은 생각에 빠졌 다. 또 수집에 家産을 아끼지 않았으며, 조선의 소장품들 대부분이 그의 손 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사대부들의 고동서화의 수집과 소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감식안 또한 뛰어나 소장한 것 모두가 精品이었다. 또 그는 자신의 전부인 고동서화 蒐輯癖에 대해 훗날 누군가에 의해서 제 대로 평가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또 “세상 모두가 나를 버렸듯이 나도 세 상에 구하는 것이 없다.”라며 30살에 어렵게 진사가 되어, 벼슬은 副使에 머물렀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고동서화에 몰입한 자신을 두고 하는 恨歎과 63) 李德壽, 西堂私載 卷4, 尙古堂金氏傳 : 於是, 閉戶絶交遊, 唯凈掃几榻, 取古書 畫金石異書, 列置左右, 端溪之硯, 隃麋之墨, 兔毫鼠鬚之産於異國者, 無不畢致. 摩 挲閱玩以爲樂, 方其冥然神會. 若與古人者相接, 視世之啄腐餐腥, 無足以累其懷. 以 是凡人家所藏, 無論中州東土, 鮮有漏其眼. 又能辨其出處雅俗, 展閱未半, 眞贋立判, 有持書畫求售者, 苟其當於意. 雖解衣傾廩, 無所惜然, 以其有賞鑑也. 所蓄皆精品. … 甞言世皆棄我, 我亦無求於世, 然揚扢風雅, 點綴太平, 爲三百年本朝破俗, 則後或 有知余者.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83 自照의 뜻이 내비친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버려진 존재로 인식하면서도, “300년 조선의 풍속을 바꾸어놓은 일은 먼 훗날 혹시라도 나를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며 자신으로 인해 조선사회의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자각하며 자신의 공을 스스로 致賀하였다. 지금까지 김광수처럼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고동서화를 전문적으로 수집하고 감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 으며, 조선에서 고동서화 소장의 붐을 일으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덕수는 부친 김동필과 交遊之間으로 김광수 보다 26살이 더 많다. 그 리고 산 사람을 위해 傳을 짓는 것은 드문 경우인데도, 그는 어린 김광수를 위해 尙古堂金氏傳 64)을 흔쾌히 지어주었다. 이것은 고동서화의 취미가 같았고, 세대가 흘러 흔적도 없이 사라질 자신을 위해 세상에 알리고자 한 의도가 있었으며, 또한 상고당은 이덕수의 글을 통해 자신의 乖愎한 수집벽 이 먼 훗날 제대로 평가 받기를 기대하였다. 그의 기대대로 훗날 李匡師, 金光國, 徐常修 같은 전문 수집가들이 등장하는데 밑거름 역할을 하였고,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고동서화 수집가 김광수’로 膾炙되고 있다. 또 64) 李德壽, 西堂私載 卷4, 尙古堂金氏傳 : 신유(1741년) 8월 나는 상소문의 배척을 당해 빈양(경기도 양평)의 觴村에 유배 갔었는데, 상고가 말 타고 작은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서 이르렀다. 언송암에서 만나 하룻밤을 묵었다. 밤이 다 하도록 맞장구치며 三 敎에 대해 얘기 나눴다. 그러다 명나라 사람의 文에 미쳐서는 이윽고 나에게 말하길 “저의 나이가 그대보다 적습니다. 반드시 그대보다는 나중에 죽을 것인데 그때 되면 그대의 글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그대가 미리 나를 위해 傳(尙古堂金氏傳)을 지어 후세로 하여금 저를 알게 해주십시오.”라 하였다. 상고는 명나라 사람들을 좋아하 였으며 이로써 더욱 돈독해졌다. 산 사람을 위해 전을 짓는 것은 옛날부터 일찍이 그런 일이 없었는데, 비록 있더라도 매우 드물었다. 王弇州(王世貞)의 여러 사람들에 이르러 비로소 그것을 하는 것이 성대해졌다. (조선에서는) 상고의 의도가 아마도 처음일 것이 다. 이에 곧 적고 상고당김씨전 이라 하였다.(辛酉八月, 余見擠於白簡, 歸濱陽之觴 村, 尙古駕片舸, 逆浪而至. 見訪於偃松菴, 留一宿, 夜秉燭, 抵掌而談三敎. 以及乎明 人之文, 旣已謂余曰, 吾年比子爲少, 其必後子而死, 不得子之文也. 幸子預爲我立傳, 使後世知有我也. 尙古之喜明人. 於是乎爲尤篤矣. 爲生人立傳, 古盖未甞有, 雖有而 亦罕. 至王弇州諸人, 始盛爲之, 尙古之意殆其祖. 於是乎乃書, 以爲尙古堂金氏傳.) 이때가 1741년으로 상고당의 나이가 42세로 벼슬을 버린 후의 일이다. 184 第46輯 한 朴趾源은 그를 가리켜 “鑑賞之學의 開創者”라 평가하였으니, 이미 새 로운 문화를 만든 장본인이자 수집가로써도 인정된 셈이다. 2) 古董書畵의 影響과 繼承 18세기 古董書畵 수집으로 인한 폐단이 사회곳곳에서 나타난다. 특히 상 고당은 고동서화에 애정이 많아 비싼 자금을 들여 많은 수의 고동서화를 구입하였지만 말년에는 힘든 삶을 營爲한다. 김씨는 골동품이나 서화의 감상에 정밀하여, 절묘한 작품을 만나면 보는 대로 집안에 있는 자금을 다 털고, 田宅까지도 다 팔아서 보태었다. 이 때 문에 국내의 진귀한 물건들은 모두 다 김씨에게 돌아갔다. 그렇게 하자니 집안은 날로 더욱 가난해졌다. 老境에 이르러서는, “나는 이제 눈이 어두워 졌으니 평생 눈에 갖다 바쳤던 것을 입에 갖다 바칠 수밖에 없다.” 하면서 물건들을 내놓았으나, 팔리는 값은 사들인 값의 10분의 2, 3도 되지 않았으 며, 이도 이미 다 빠져 버린 상태라 이른바 ‘입에 갖다 바치는’ 것이라곤 모두 국물이나 가루음식뿐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65) 윗글은 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 의 일부로, 김광수가 고동서화에 취미 로 인해 많은 물품을 구입한 일 때문에 훗날 家勢가 기울고 노년에는 어려 운 상황에 처한다. 일찍이 그는 문벌의 경화세족의 자제로, 상당량의 재산 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다 소진할 만큼 고동서화를 많이 수집하였다. 그 일 로인해 결국에는 노비까지 떠나버리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고, 부득이 수집 한 고동서화를 다시 되팔아 생계를 잇고자 하지만, 받는 돈은 매정하게도 65) 朴趾源, 燕巖集 卷7, 別集, 鍾北小選 題跋, 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 : 金氏精賞鑑 古董書畵, 遇所妙絶, 輒竭家資, 賣田宅以繼之, 以故域中寶玩盡歸金氏, 家日益貧, 旣老則曰, 吾已眼暗矣, 平生供眼者, 可以供口已, 然所售値不過十之二三, 齒已豁, 所謂供口者, 皆膏汁磨屑, 可恨可恨.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85 그가 사들인 값의 20~30%에 불과하였으니, 김광수 말년에는 예전에 비해 고동서화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고, 이미 조선사회 전역에 상당수의 고동서 화가 유통․확산되었음을 암시한다. 그토록 평생을 愛之重之한 고동서화 들이 어려움에 처한 老境에는 큰 이득도 되지 못하였고, 오로지 남은 것은 늙은 몸과 어두운 눈 그리고 이는 다 빠져버려 고작 먹는 것은 국물이나 가루음식뿐이었으니 참으로 말년의 초라한 행색이 안쓰럽다. (1) 한성의 손노인은 본래 부자였다. 성품이 古董을 좋아했으나 골동품을 감정할 안목은 없어, 사람들이 그에게 가짜를 주고 비싼 값을 받아 속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로 인해 결국 집안이 거덜 나게 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속았다는 사실을 여전히 눈치 채지 못했다. 홀로 방안에 앉아 端溪硯에 오 래된 먹을 갈아 묵향을 맡고, 한나라 도자기에 좋은 차를 다려 마시며 말하 길 “이런 정도면 굶주림과 추위를 몰아낼 수 있지!”라 했다. 이웃사람 중에 아침밥을 가져다주면 문득 손사래를 치면서 말하길 “나는 중생들이 주는 것은 받지 않소이다.”라 했다.66) (2) 녹록하게 벼슬 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며 집이 본래 부유해서 돈 쓰 기를 더러운 흙같이 하였다오. 고금의 法書, 名畵, 칼, 거문고, 彝器, 기이한 화초들을 널리 수집하여 한번 맘에 드는 것을 만나면 천금도 아끼지 않았 으며, 駿馬와 이름난 매가 늘 그의 좌우에 있었지요. 이제는 늙어서 백발이 되자 송곳과 끌을 주머니에 넣고 명산을 두루 노닐어 이미 한라산을 한 번 들어갔고 백두산을 두 번이나 올랐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손수 돌에 다 새겼으니,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람이 있는 줄을 알게 하려는 것이 라 하오.” … 하루는 그가 내가 묵고 있던 집으로 찾아와서 청했다. “내가 이제 늙어서 다 죽게 되었소. 마음은 벌써 죽고 터럭만 남았으며, 거처하는 곳은 모두 僧菴이오. 그대의 글에 의탁하여 후세에 이름이 전해지기를 원 하오.” 나는 그가 늙어서도 자신의 포부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66) 趙秀三, 秋齋紀異, 古董老子 : 漢城孫老, 本富翁也. 性好古蕫而無藻識, 人多售 贋品騙重直, 以故家竟懸磬. 翁猶不覺見欺, 獨坐一室, 磨古墨於端硯嗅之, 㵸佳茗於 漢甆啜之曰, 此足以遣飢寒. 隣人有饋早饍者, 輒麾去之曰, 我不受衆人惠也. 186 第46輯 슬프게 여겨, 드디어 예전에 유람 중에 만났던 사람과 문답한 것을 써서 돌려주고 또 그를 위해 다음과 같이 偈를 설하였다.67) (1)은 趙秀三(1762~1894)이 지은 秋齋紀異 古董老子 의 일부로, 김 광수 말년에 골동품 수집 붐으로 인한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 시 선비들이 즐기든 풍류, 즉 좋은 향을 피우고, 이름난 차를 마시며 값비싼 고동서화를 감상하는 일을 孫노인도 하였다. 당시 조선사회에 사대부들의 고동서화를 즐기는 풍류가 사회전반에까지 퍼져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의 생활보다 골동품에 즐거워하는 이러한 新部類의 등장이 조 선후기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고상한 취미를 즐기 기 위해서는 많은 富 외에도 뛰어난 감식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김광수의 말년 또한 孫노인과 별반 다 르지 않았으니, 당시 고동서화 취미로 인한 폐해가 비단 손노인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2)는 燕巖集, 髮僧菴記 의 일부로, 연암이 金弘淵이란 인물을 통해 당시 고동서화의 폐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암은 금강산을 유람하다 바위에 새겨진 김홍연 이름을 보고 주변인을 통해 그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여정에서 그를 만나게 된다. 그는 양반은 아니었지만 큰 부자로 호화로운 소비생활인 고동서화 수집에 취미가 있었으며, 이를 위해 막대한 돈을 탕진하기에 이른다. 그 후 늙고 가세가 기운 상황에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애쓰는 철없는 노인 김홍연의 모습이 영락없는 (1)의 손노인을 연상케하며, 노년의 김광수의 모습에서도 손노인과 김홍연이 또렷하게 교 차된다. 67) 燕巖集 卷1, 煙湘閣, 髮僧菴記 : 不肯碌碌求仕進, 家本富厚, 用財如糞土. 傍蓄 古今法書名畵, 劒琴彛器, 奇花異卉, 遇一可意, 不惜千金. 駿馬名鷹, 動在左右. 今旣 老白首, 則囊置錐鑿, 遍遊名山, 已一入漢挐, 再登長白, 輒手自刻石, 使後世知有是 人云. … 一日詣余寓邸而請曰, 吾今老且死, 心則先死. 特髮存耳, 所居皆僧菴也. 願 托子文而傳焉. 余悲其志老猶不忘者存, 遂書其舊與遊客答問者以歸之, 且爲之說.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87 淸明上河圖 를 통해본 古董書畵의 繼承을 살펴보면, 그림은 李童山이 소장하고 있다. 내가 병중에 무료하여 빌려다가 보았 다. 마침내 그 수를 대략 기록하고 돌려주었다. 갑신(1704년) 정월에 宗甫 (조영석의 자)는 기록한다.68) 윗글은 趙榮祏(1686~1761)의 淸明上河圖跋 의 일부로, 1704년 李童 山이 청명상하도 를 소장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淸明上河圖 자료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동산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밝 히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조영석과 친분이 있는 정도로 추측된다. 이미 1704년(갑신)에 趙榮祏은 李童山이 소장한 청명상하도 를 玩賞하였으며, 그 영향으로 자신의 풍속화에 대한 시각변화가 일어난다. 훗날 조영석은 尹 斗緖(1668~1715)와 더불어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성행을 이끌었으며, 특히 그의 화풍은 金弘道(1745~1806), 李麟祥 등 많은 풍속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조영석은 白岳山 아래에 살면서 李秉淵과 교 유한 인물로 상고당과 인연이 있으며, 1704년 이후의 어느 날엔가 상고당도 청명상하도 를 玩賞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1) 이 두루마리 그림[淸明上河圖]은 尙古堂 金氏의 소장으로서 仇十洲 의 진품이라 여기어 훗날 자신이 죽으면 무덤에 같이 묻히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씨가 병이 들자 다시 觀齋 徐常修 徐氏의 소장품이 되었 다. 당연히 묘품에 속한다. … 아무리 세심한 사람이 열 번 이상 완상했더라 도 매양 다시 그림을 펼쳐 보면 문득 빠뜨린 것을 다시 보게 된다. 절대로 오래 완상해서는 안 된다. 자못 눈을 버릴까 두려워서다.69) 68) 趙榮祏, 觀我齋稿 卷3, 跋, 淸明上河圖跋 : 圖李童山所藏也, 余病中無所聊遣, 借而閱之, 遂畧記其數而歸之, 甲申元月日, 宗甫記. 69) 朴趾源, 燕巖集 卷7, 別集, 鍾北小選 題跋, 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 : 此軸, 乃尙 188 第46輯 (2) 이 두루마리 그림을 그리자면 10년 세월은 걸렸을 터이다. 이 두루마리 그림을 제외하고도 내가 본 것을 세어 보면 이미 일곱 종이나 된다. 十洲가 15세의 丁年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면 이것은 95세 때의 작품에 해당할 터인데, 그때까지도 두 눈이 어둡거나 백태가 끼지 않고 털끝만큼이나 섬세 하게 그릴 수 있었단 말인가.70) (3) 나는 이 그림에 발문을 지은 것이 이미 여러 번이었다. 모두 다 十洲 仇英의 그림이라 일컫고 있으니,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위조품인 가? 중국의 江南 사람들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정 에 어두우니, 이 두루마리 그림이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온 것이 많은 것 은 당연한 일이다.71) (1)은 연암 박지원의 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 으로, 김광수의 소장품인 淸明上河圖 가 묘품에 속하며, 나중 병이 들어 서상수에게 계승되어 再所 藏된 정황을 말하고 있다. 再所藏者 서상수는 고동서화를 매개로 여러 문 인들 틈에서 상고당과 활발한 교유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청명상하도 에 대해서 연암은 생동감과 디테일이 살아있는 걸작으로 평가72)하였고, 이런 걸작이 언제쯤 김광수의 소장품이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부장품으로 청명상하도 를 선택한 이유로는, 첫째로 상당히 구하 古金氏所藏, 以爲仇十洲眞蹟, 誓以殉他日斧堂, 金氏旣病, 復爲觀齋徐氏所蓄, 當屬 妙品. … 雖使細心人十廻玩繹, 每復開軸, 輒得所遺, 切勿久玩, 頗懼眼眚.” 70) 朴趾源, 燕巖集 卷7, 別集, 鍾北小選 題跋, 淸明上河圖跋 : 爲此軸當費十年工 夫, 除此軸, 計吾所觀已七本, 十洲自十五丁年始此, 當壽九十五, 雙眸能不眊昏翳花, 爲秋豪爭纖否. 71) 朴趾源, 燕巖集 卷7, 別集, 鍾北小選 題跋, 湛軒所藏淸明上河圖跋 : 吾爲跋此 圖, 亦已多矣, 皆稱仇英十洲孰爲眞蹟, 孰爲贋本. 吳兒狡獪, 東俗眯眊, 宜乎其此軸 之多東渡鴨水也. 72) 朴趾源, 燕巖集 卷7, 別集, 鍾北小選 題跋, 淸明上河圖跋 : “그림 속의 거리와 점포들은 어슴푸레하여 꿈결 같고, 콩알만 한 사람과 겨자씨 같은 말들은 소리쳐 불러 야 할 만큼 가물가물하다. 그중 특히 거위를 몰고 가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세심하게 그렸다. (街行術敞, 依依如夢, 豆人芥馬, 渺渺可喚, 最是驅鵝生動有意.)”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89 기 힘든 희귀한 書畵 청명상하도 를 소장함으로 갖는 優越感 때문이고, 둘째로 ‘尙古堂’이란 號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광수는 죽어서도 부장품들 과 예술적 감흥을 누리려 한 의도가 있었다. 김광수는 자신이 소유한 청명상하도 가 妙品으로 仇英73)의 작품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연암은 절대로 오래 완상할 것이 못 된다며 조잡 한 그림에 불과하다 平價切下하였다. 연암은 필세설 에서 조선에는 蘇州 에서 제작된 서화 위조품이 많다74)고 지적75)한바 있다. (2)는 박지원의 湛軒所藏淸明上河圖跋 로, 모작의 대가 구영이 그린 73) 仇英(1498?~1552) : 명대 화가로 字는 实父․实甫, 号는 十洲, 江苏太仓인이다. 沈 周, 文徵明, 唐寅과 ‘明四家’라 불리웠다. 74) 朴趾源, 燕巖集 卷3, 孔雀舘文稿 說, 筆洗說 : 東方雖或有收藏家, 而載籍則建陽 之坊刻, 書畵則金閶之贋本爾.” 75) 이주현, 명청대 蘇州片 淸明上河圖 연구 : 仇英 款 蘇州片을 중심으로 , 美術史學, 2012, 168면. “文徵明이 1544년에 쓴 淸明上河圖記 의 전문을 보면, 청명상하도 는 원래 宋代 翰林畵師 張擇端이 그린 것을 仇英이 臨摹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구영이 장택단의 그림을 臨摹하였다는 점과 이후 畵券은 북경으 로 가 宋大理家에 전해졌고, 훗날 仇英이 模寫하였다는 대목이다. 바로 模作品이 북경 미술시장에 나오게 된 계기가 된다. 구영의 화풍은 소주편 제작자들에게 좋은 위조의 대상이 되어 그의 贋作이 명말, 청대의 미술 시장에 많이 나돌았다. 항원변의 손자 項聲 表는 “구영의 작품 중 세상에 나온 것의 열 중 아홉이 贋作이다. 사람의 눈은 색채의 화려함을 보고 문득 찬탄하게 되는데, 이는 진적[眞龍]을 보지 못한 연고이다.”라고 하 였고, 謝希曾은 “세상에 전해지는 九什洲의 그림 가운데 진본이 적고 품격이 높은 작품 역시 보기 드물다.”고 하였다. 楊天璧은 1834년 구영의 인물화에 발문을 남기며 “九什 洲의 그림 중에는 진적이 매우 드문데 文徵明의 跋文이 있는 것들 역시 贋作[위조품] 이 많다.”고 하였다.” ; 이주현, 같은 책, 193면. “명청대 청명상하도가 蘇州에서 다량 제작되었던 데는 蘇州문인이 중심이 된 수장가들의 수장열기가 있었다. 북경본 장택단 의 청명상하도가 蘇州의 수장가들에게 수장되고 그 畵名이 높아져 경쟁적으로 수장되 면서 무명화가들에게 의한 소주편 청명상하도가 미술시장에 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소주편 청명상하도는 대부분 청대 이후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요녕성本을 기본으로 풍속적인 요소가 첨가되면서 그 도상이 큰 변화 없이 전승되었다. … 청대 후기가 되어 청명상하도가 전국의 미술시장으로 확산되면서 수준도 천차만별이 되었음을 알 수 있 었다. 또한 소주편의 도상적 영향하에서 지역 화풍을 첨가하여 북경 혹은 楊州에서 제 작된 청명상하도 역시 출현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190 第46輯 청명상하도 가 국내에 이미 유행하였고, 소장한 자들이 여럿이며, 진품이 아닌 臨摹作 중에서도 구영의 작품을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로 위조품이 많 이 유통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仇英은 생몰연대[1498(一說1509)~1552]가 불확실하지만 대략 43세 또는 54세에 죽은 사실을 토대로 본다면, 기껏해야 3~4개의 모작이 가능하단 결론이 난다. 그런데 박지원이 본 모작만 8종으 로, 담헌이 소장한 작품 역시 구영이 그린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그리고 모작을 그리는데도 10년이라는 많은 시간과 공이 든다는 사실이 말해 주듯 이, 청명상하도 라는 작품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된다. 仇英 이외 화가들의 模作[模作畵家로는 明 趙浙, 仇英, 淸 深元 등]들이 상당수 제작되어 국내에 유통되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 으며, 贋作의 청명상하도 가 다수 제작되어 중국 전역의 미술시장으로 확 대 유통되면서 그림 수준도 천차만별이며, 이후 蘇州 소장가들에게 소장되 어 소주편 청명상하도 가 제작되어 미술시장에 유통되고, 北京, 楊州본의 청명상하도 가 제작되었고, 이런 화권들이 북경 미술시장의 琉璃廠 등을 통해 중국과 조선 燕行使臣團에게 판매되었다. 현재도 한국, 일본 그리고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 동일한 작품명으로 널리 펴져 있다. 즉 걸작이란 명성에 걸맞게 모작 또한 상당수 그려졌다. (3)을 통해 보면, 청명상하도 가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 온 것이 많았 음을 알 수 있다. 국내로 들어온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조선에서 열망한 작품 가운데 하나였음은 확실하다. 또 연암집의 天山獵騎圖跋文 에서도 “獵騎圖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는 모두 다섯 軸이 있는데, 陳 居中이 그린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라며, 국내로 들어온 서화의 품목 가 운데 구영의 청명상하도 외에 또 다른 모작인 天山獵騎圖 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박지원이 쓴 日修齋所藏淸明上河圖跋 76), 觀齋所藏 76) 朴趾源, 燕巖集 卷7, 別集, 鍾北小選 題跋, 日修齋所藏淸明上河圖跋 : 汴京盛 時, 爲四十萬戶, 崇禎末, 周王守汴, 闖將羅汝才, 號曹操者, 三次來圍, 而貨寶山積,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91 淸明上河圖跋 , 淸明上河圖跋 , 湛軒所藏淸明上河圖跋 등을 통해서 구영의 작품이 국내에서 유통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靑莊館全書 雅亭遺稿에 실린 城市全圖 七言古詩 1百韻 에서 李德懋 역시 청명 상하도 를 언급하면서 성시의 繁華된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연암 및 연암 그룹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도 이 그림을 보았다. (1) 또 서화를 꺼내 보여 주었는데, 그림은 山精木魅圖 1軸, 淸明上河圖 1축이요, 글씨는 趙子昂(趙孟頫의 자)의 글씨가 1축이요, 米芾(송나라의 서화가)의 天馬歌 1축이었다. 이것들은 모두 御物로 황제가 내왕하였던 까 닭에 이와 같이 놓아 둔 것이다.77) (2) 또 중국 그림 한 軸을 붉은 칠한 櫃에 담아 놓았는데, 축 위에 ‘淸明上 河圖’라 적혀 있다. 이런 것들을 벌여 둔 것은 뽐내려는 뜻인가 보다.78) (1)은 老稼齋燕行日記 癸巳년 正月 19日에 대한 기록으로, 金昌集의 아우 金昌業(1658~1721)은 숙종 38년(1712) 임진년 冬至使 兼 謝恩使 金 昌集의 打角 自辟軍官으로 北京의 廟堂에 들어가서 청명상하도 를 구경 한다. 당시 廟堂은 문지기가 지키고, 사신의 출입이 금지된 공간임에도 불 구하고 金昌業 일행은 고동서화를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서, 결국 남의 도움을 받아 여러 고동서화와 청명상하도 를 완상하고, 돌아와서 보고 들 은 것을 기록으로 남겨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2)는 奉使日本時聞 士女海沸, 資糧器械, 無不取諸城中而用之, 故汴最久陷, 方其受圍久, 糧盡人相食, 麥升可直銀千百, 人蔘白朮茯苓諸藥物旣食盡, 則水中紅虫, 糞窖蠐螬, 皆貨以寶玉, 而不可得, 及河决城沒, 一夜之間, 遂成澤國, 而周府八面閣黃金胡盧, 纔見其頭, 吾 每玩此圖, 想當日之繁華, 而其複殿周廊層臺疊榭, 未甞不撫心於周府之金胡盧. 77) 金昌業, 老稼齋燕行日記 卷4, 癸巳正月十九日丁酉 : 又出書畫, 畫, 山精木魅圖 一軸, 淸明上河圖一軸, 書, 趙子昂筆一軸, 米芾天馬歌一軸也, 此皆御物, 以皇帝所 嘗來往, 故位置如此也. 78) 曹命采, 奉使日本時聞見錄, 三月十一日乙未 : 又以唐畫一軸, 盛紅漆樻, 而軸上 書淸明上河圖, 此等排置, 似是誇耀之意也. 192 第46輯 見錄의 일부로, 英祖 24년(1748)에 通信使 洪啓禧ㆍ副使 南泰耆와 함께 三使臣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 온 從事官 曹命采(1700~1764)가 淸明 上河圖 를 보았다. (1),(2) 두 글은 조선의 문인들이 1713년 중국과 1748년 일본에서 청명 상하도 를 본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 앞서 1704년(이동산 소장) 이전에 이 미 국내에 유입되어 소장되었을 가능성을 갖고 본다면, (1),(2)에 제시된 연 행사신과 통신사의 경우는 이미 청명상하도 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을 가 능성이 크며, 국외에서 제대로 된 작품을 완상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청명상하도는 이미 17세기 전후반에 국내로 유입되었고, 18세기 초반 1704년에 이동산이 처음 소장하였으며, 조영석이 이것을 빌려다가 주변 문 인들과 돌려가며 감상하였다. 이후 18세기 중반에 연행사신과 통신사의 일 원들이 거듭 청명상하도의 실체를 확인하였다. 이로 인해 훗날 조선에서는 더욱 畵卷所藏에 매달리고, 여러차례 문인들에게 소장되었다가, 어느 시기 엔가 상고당에게 소장되었다. 상고당 말년에 또다시 서상수에게로 繼承되 는 一連의 過程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청명상하도 의 수집과 소장의 영향 으로, 크게는 후대에 太平城市圖 같은 작품에 영향을 미쳤으며, 작게는 다수의 문인들이 풍속도를 모방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한 예로 靑莊館 全書, 耳目口心書五 에 “어떤 사람이 觀我齋 趙榮祏이 그린 동국 風俗 圖를 수집해 그대로 그린 것이 70여 帖이나 되었는데 煙客 許泌(1709~ 1768)이 상말로 評했다.”79)를 보면 알만 하다. 이렇듯 청명상하도 는 단순 그림으로서의 가치 뿐 아니라, 중국의 문화 를 조선에 알리는 큰 변화를 꾀하였다. 특히 조선사회의 고동서화 소장 유 행에도 한 몫을 하였으며, 고동서화의 계승이라는 새로운 문화양상을 만들 79)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52, 耳目口心書五 : 有人輯摹趙觀我齋榮祏所畵東國風 俗, 凡七十餘帖, 許烟客泌, 以俚諺評之.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93 어냈다. 바로 예술적 심미안을 가졌고 수집과 감상에 대해 一家見이 있는, 소위 상고당 같은 고동서화 수집벽을 가진 이들을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조선사회에서 청명상하도 를 보았다는 것은 당시 경화세족들의 고동서 화 취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18세기 당시 경화세족간에는 淸明上河 圖 가 이미 국내에 두루 알려졌고, 청명상하도 를 소장하는 것만으로 이 미 誇示 목적과 고동서화에 대한 식견과 바탕이 풍부해지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마치 청명상하도 를 직접 보았고 또는 소장한 서상수, 박지원, 이 덕무, 홍대용, 이동산, 조영석, 김창업, 曹命采 등은 대부분 김광수를 중심 으로 일정한 雅會를 통해 교유를 하고, 고동서화에 대해 정보를 주고받은 문인들이었다. 이상으로 18世紀 士大夫들의 古董書畵의 影響과 繼承에 대해 살펴보 았다. 김광수는 집안에 古董書畵와 珍器가 가득하며 모두가 천하명품이며, 마음에 드는 물품이 있으면 큰돈을 들여서라도 구입하였으니, 말 그대로 고 동서화의 수집벽을 가진 수집광이었으며, 고동서화에 개척자적인 평가와 감식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중국의 고동서화가 연행을 통해 국내에 유 입되면서 18세기 사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고동서화의 취미’에 대해 서 예술적 심미안을 가졌고 수집과 감상에 대해 一家見이 있는, 소위 상고 당 같은 고동서화 수집벽을 가진 자들이 등장한다. 이후 18세기 후반 19세 기 전반까지 상당수가 김광수의 영향을 받았다. 상고당 김광수가 고동서화 의 수집벽을 가졌다는 사실은 本稿의 [2. 尙古堂 金光遂의 家系와 蒐輯 癖]을 통해 확인을 하였으며, 그는 조선사회의 여러 문인 李德履, 南泰寬, 李匡師, 李德懋, 柳得恭, 朴齊家, 徐常修, 李廷燮, 沈師正, 金光國, 洪儀 泳, 趙榮祏, 曺命采, 申維翰, 李德壽, 李秉淵, 鄭敾, 崔錫鼎, 尹淳 등과 교유를 통해 고동서화 수집과 소장에 대해 상당한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훗 날 백탑파의 문인 취미에도 직접적인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朴趾 源, 李德懋, 洪大容, 李東山, 趙榮祏, 金昌業, 曹命采 등 청명상하도 에 194 第46輯 대해 언급된 인물을 비롯해 훗날 서상수에게 지식층의 고품격문화인 고동 서화 취미를 계승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상고당 김광수는 조선사회에서 문인들의 고동서화 취미에 있어 교두보 같은 역할 을 하였다 말할 수 있다. 4. 맺음말 조선은 두 차례의 전란을 거친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사회 경제적 변화 를 맞게 된다. 기존 주자성리학의 가치체계가 瓦解되어가고 사회경제개혁 을 念願하는 實學이 발생하게 되는데, 實事求是․利用厚生․經世致用을 근간으로 한 실학파를 통해 정치, 문화, 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하였고, 실학 파의 개혁운동으로 청나라 등 서양의 과학문명을 조선에 알리는 계기가 되 고 사회변화의 촉매제가 되었다. 18세기는 문화 격동기 문예부흥의 시기로 신흥 대도시에서 발흥했던 古董書畵 수집취미, 직업 광대와 장인의 문화, 풍속화ㆍ진경산수화 등이 출현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에 古董書畵 수집취 미가 구체화되어 갔다. 18세기 전반부터 고동서화의 수집과 소장 그리고 감 상학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식자층들이 생겨나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또한 표출된다. 이때 전형적인 사대부적 기질과는 다른 새로운 식자층이 출 현하는데, 그중에는 고동서화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수집가 김광수가 있었 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고당 김광수는 명나라 상고 화정을 자신의 이상형으로 삼았다. 그 이유는 서로의 삶이 비슷하였으며, 또한 닮고자 하 는 마음이 통해 김광수는 화정의 삶을 닮으려고 노력한다. 상고당 김광수와 교유한 인물의 대부분은 경화세족이자 관료문인으로, 정작 자신은 벼슬을 버리고 尙古의 뜻을 좇았지만, 자신을 알아준 사람 역시 문인들이었다. 김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95 광수의 고동서화 수집벽은 어려서부터 그의 가문과 부친 김동필의 영향을 받았고, 후대에 여러 문인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교유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통해 그가 고동서화의 수집벽을 가졌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을 하였으 며, 이런 수집벽이 李德履, 南泰寬, 李匡師, 李德懋, 柳得恭, 朴齊家, 徐常 修, 李廷燮, 沈師正, 金光國, 洪儀泳, 趙榮祏, 曺命采, 申維翰, 李德壽, 李秉淵, 鄭敾, 崔錫鼎, 尹淳 등의 문인들에게 고동서화의 취미를 유행․전 파하는데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나아가 청명상하도 라는 서화를 통해 朴 趾源, 李德懋, 洪大容, 李東山, 趙榮祏, 金昌業, 曹命采 등 고동서화의 취 미 소장자를 밝히고, 훗날 청명상하도 가 서상수에게 계승되었듯이 지식 층의 고품격문화인 고동서화 취미를 계승한 것에 큰 공이 있다. 18세기 사대부들의 고동서화 취미는 비단 고동과 서화에만 한정짓지 않 고 나아가 서적과 焚香, 飮茶 그리고 彈琴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이해되 어져야 한다. 김광수와 같은 열정과 집념을 지닌 수집가와 고동서화의 감식 안을 가진 학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후에 이들의 영향을 받아 고동서 화를 소장하고 감상하는 수집가가 많이 등장한다. 18, 19세기에 많은 수집 가와 감식 전문가들이 등장하지만, 고동서화 개척자 겸 수집가이면서 옛것 에 탁월한 재주와 취미를 겸비한 자는 金光遂였다. 특히 그의 수집벽은 그 의 호 ‘尙古堂[옛 것을 숭상하다]’을 보면 얼마나 옛것을 좋아하였는지를 단적으로 잘 알 수 있다. 또 “세상 모두가 나를 버렸듯이 나도 세상에 구하 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風雅를 선양하여 태평시대를 서로 이어놓음으로 써 300년 조선의 풍속을 바꾸어놓은 일은 먼 훗날 혹시라도 나를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며 스스로 300년 조선의 풍속을 바꾼 일, 즉 조선후기 문인들에게 고동서화 수집벽으로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아! 지금 천하의 화상고 역시 명성이 들리지 않는데 동해의 나라에서 나 타났으니 매우 기이하도다. 바위 굴 속에서 이 사람을 찾아도 보지 못하는 196 第46輯 데 사대부의 집안에서 나왔으니 또 매우 기이하도다. 내 나이 60여세에 비 로소 상고를 보았는데 상고는 아직 50살도 못 되었으나 예로부터 서로 안 것처럼 기뻤다. 오히려 나의 하루가 苦短한 것이 한스러웠다. 일찍이 從容 히 말하길 ‘그대는 참으로 천하의 기이한 선비요, 신선처럼 노닐도다. 그러 나 함께 기이함에 대해 말할만하나, 아직은 함께 도에 대해 말할만하지 않 다. 옛날 道에 노닌 자들은 歸眞反樸하여, 眞하면 無妄하고, 樸하면 無名 하니, 柱下漆園[노자장자] 모두 이러하였다.’라 하니, 尙古는 내 말을 옳다 고 하였다.80) 申維翰의 尙古堂自叙後題 에 실린 글로, 신유한은 김광수보다 18살 많지만, 김광수를 옛 친구처럼 반가워하였으니, 고동서화의 취미가 같아서 가능한 일이다. 또 김광수를 도가의 류와 같다면서 그의 기이한 면을 상기 시킨다. 선비로써 벼슬하지 않는 것은 당시의 문인들 대열에 끼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지만, 김광수는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 好古, 尙古를 내세워 고동서화 수집에 열을 올려 많은 물품 등을 수집․소장한다. 그는 이러한 것을 혼자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마음이 맞으면 서로 어울려 당색과 나이 등을 막론하고 함께 차를 마시며 향을 피우고 고동서화를 감상하였다. 하지 만 일각에서는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 경우도 있었지만, 김광수는 훗 날 자신이 ‘수집벽’이 조선의 풍속을 바꾸어놓은 것에 대해 강한 믿음이 있 었고, 혹시라도 훗날 나를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라며 好古에 대한 자신 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국내의 고동서화들은 주로 청나라 사신[燕行]을 통해 유입되었으며, 특 히 김광수는 연행으로 유입된 고동서화를 수집․소장하였으며, 때로는 직 80) 申維翰, 靑泉集 卷6, 尙古堂自叙後題 : 噫噫, 今天下華尙古亦未聞, 而見於東海 之國何奇也. 巖穴中覓此人不可見, 而出於軒冕之家, 又何奇也. 葢余年六十餘, 始見 尙古, 尙古猶未五十也已. 驩如舊相識. 自恨吾日苦短. 嘗從容曰 “子誠天下奇士, 仙 仙乎遊矣, 然可與語奇, 未可與語道. 古之游於道者, 歸眞反樸, 眞則無妄, 樸則無名, 柱下漆園皆是也.” 尙古是吾言.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97 접 친한 중국인에게 탁본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수집벽을 가진 그의 수집 목록에는 청명상하도 라는 걸작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작품이 某處를 통해 국내에 들어와 이동산을 거쳐 자신이 소장하게 된다. 1704년 李童山 이 소장한 청명상하도 를 중심으로, 고동서화 수집가이면서 감식자인 김 광수와의 관계를 통해 18세기 사회상 속에 고동서화 취미의 실상과 영향 그리고 서상수에게 계승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김광수는 家勢가 기울어져 가는 상황에서도 尙古의 마음을 놓지 않은 만큼, 그에게 고동서화의 수집은 단순한 취미 이상의 것이었다. 18세기 고동서화가 갖는 의미는 골동품을 단순한 사치품으로 여기지 않 고, 선인들의 고아한 格調와 韻致가 깃든 高玩品으로서, 性情과 好古의 趣味를 길러주고, 風流와 情趣 있는 생활을 느끼게 하는 媒介物이었다. 또 단순한 수집보다는 그 眞髓를 향유할 수 있는 안목과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정확한 감식력을 갖출 것을 강조하였다. 이렇듯 고동서화의 완숙한 취미를 위해서는 충분한 수집욕과 소장욕 그리고 감식안이 필요하였으며, 문인 취 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전개되었던 고동서화의 수집에서 김광수라는 인 물이 여러 고동서화를 소장하고서 문인들 사이에 볼거리로 제공하고, 함께 감상하면서 고동서화에 대한 인식은 더욱 높아져 갔다. 그로인해 고동서화 취미는 한층 豊饒해졌고, 문인들의 격을 높이는데 일조하였으니, 상고당이 라는 고동서화 수집가의 작은 행동이 조선의 문인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켰 으며, 고동서화 취미 유행에 있어 교두보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상으로 尙古堂 金光遂의 家系와 당시 교유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18 세기 고동서화가 갖는 의미와 그가 조선의 문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살펴보 았다. 김광수는 고동서화의 개척자적인 평가와 감식자로서의 면모를 갖추 었으며, 그의 상산김씨 가문과 부친 김동필의 영향으로 일찍이 옛 것에 관 심이 있었으며, 평생을 고동서화의 취미에 몰두하며 세상을 살았다. 18세기 중국의 고동서화들이 연행을 통해 국내에 유입되면서 그동안 사족들의 전 198 第46輯 유물로만 여겨졌던 ‘고동서화의 취미’에 대해서 고동서화를 소장하고 감상 하는 수집가가 속속 등장하는데, 이들 가운데 상고당 김광수가 있었다. 그 는 온 열정을 쏟아 여러 문인들에게 고동서화의 수집과 소장 그리고 감식안 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훗날 자신처럼 수집가이자 감식안을 가진 서 상수라는 인물에게 고동서화를 계승하였다. 필자는 상고당 김광수를 ‘18세기 고동서화 취미 유행에 있어 교두보 같은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 내리고 싶다. 그리고 김광수의 부족한 생애와 행적 에 대한 부분은 추후 더 연구노력해서 후고에 밝힐 것을 기약한다.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199 참․고․문․헌 <원전자료> 金景善, 燕轅直指. 柳得恭, 燕臺再遊錄. 柳壽垣, 迂書. 柳長源, 常變通攷. 文徵明, 甫田集. 朴思浩, 心田稿. 朴趾源, 熱河日記. 徐有聞, 戊午燕行錄. 成大中, 靑城雜記. 申維翰, 靑泉集.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李肯翊, 燃藜室記述. 李德懋, 靑莊館全書. 李德履, 東茶記. 李德壽, 西堂私載. 李裕元, 林下筆記. 李宜顯, 庚子燕行雜識. 曹命采, 奉使日本時聞見錄. 趙秀三, 秋齋紀異. 趙榮祏, 觀我齋稿. 洪大容, 湛軒書. 燕行錄選集 20篇(한국고전번역원 자료). <단행본> 姜明官, 조선시대 문학 예술의 생성 공간 , 소명출판, 1999. 白南柱, 韓國의 古美術 : 骨董品愛護家必携 , 二友出版社, 1977. 商山金氏大同譜, 商山金氏第六次大同譜編纂委員會 [編]. 鳳儀齋, 2004. 商山金氏世譜 甲~癸編, 商山金氏譜所, 1763. 200 第46輯 <연구논문> 姜明官, 조선후기 경화세족과 고동서화 취미 , 동양한문학연구 12, 1998. 金聲振, 18,9세기 韓日兩國의 明淸小品文 受容에 대한 比較硏究 , 한국문학논총 41, 한국문학회, 2005. 김희경, 文化 : 朝鮮後期 城市風俗圖의 類型別 特徵 硏究 , 溫知論叢 16, 2007. 노대환, 숙종․영조대 對明義理論의 정치․사회적 기능 , 韓國文化 32, 2003. 朴現圭, 조선 사신들이 견문한 北京 琉璃廠 , 中國學報 45, 한국중국학회, 2002. 徐仁範, 조선전기 연행록 사료의 가치와 그 활용 , 明淸史硏究 30, 명청사학회, 2008. 유봉학, 18․9세기 大明義理論과 對淸意識의 推移 , 한신논문집 5, 1988. 윤위영, 연행록을 통해본 조․청 문물 교류 , 경북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6. 이주현, 명청대 蘇州片 淸明上河圖 연구 : 仇英 款 蘇州片을 중심으로 , 美術史學, 2012. 주명희, 18ㆍ19세기 서울 문인지식인층의 고동서화 취미에 나타난 차문화 : 문인 아회 와 아회도를 중심으로 , 성균관대학교 생활과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尙古堂 金光遂의 古董書畵 趣味와 繼承에 대하여 201 Abstract A Study of Sanggodang Kim Gwang-su’s Genealogy and His Mania for Collecting Ol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Oh, Sang-uk*81) This study will explore the meaning of ol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in the late Joseon period. Focus will be placed on the collector Sanggodang Kim Gwang-su(1699-1770) and the influence he had on the literary men with whom he interacted. Kim Gwang-su, well known in the late Joseon as a collector of ol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took the Ming literatus Hwajeong (Hua Cheng 華珵, 1438-1514) as his model. His decision to resign his office, immerse himself in the three religions of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to enjoy antiquities and establish a separate place in which he could both store and appreciate old paintings and calligraphy, was modeled on Hwajeong’s life. His mania for collecting was probably influenced by his father Kim Dong-pil (1678-1737). Kim Gwang-su in turn influenced future generations by his taste in old paintings and calligraphy. In particular, his mania was taken up by Lee Deok-ri, Nam Tae-gwan, Lee Gwang-sa, Lee Jeong-seop, Lee Deok-mu, Yu Deuk-gong, Park Je-ga, and Seo Sang-su. The painting Spring Festival along the River (cheongmyeong sanghado) made a great contribution by transmitting high cultural tastes to intellectuals such as Seo Sang-su as well as Park Ji-won, Lee Deok-mu, Hong Dae-yong, Lee Dong-san, Cho Young-seok, Kim Changeop and Cho Myeong-chae. Among many collectors and connoisseurs of the 18th and 19th centuries, Kim Gwang-suwas known as a pioneering collector of ol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who had remarkable taste. In addition to the ol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already mentioned, he also collected bronze antiquities. His pen name, Sanggodang (Hall of Reverencing Antiquity), reflects this interest. His collecting mania changed 300 years of literati custom. He commented on this himself, * Doctor's course in Dept. of Chinese Writing, Graduate School, Pusan National University / E-mail : osu8950@hanmail.net 202 第46輯 saying: “Just as the entire world abandoned me, so I have nothing to seek from the world. But someone far in the future will probably recognize me for changing three hundred years of Joseon customs by taking the lead in connecting peaceful eras.” The antiques were regarded not only as simple luxuries but also as works of art transmitting the nobility and refinement of their predecessors, which served to help people develop their character, arouse their interest in enjoying old items and provide refined tastes and an elegant life. Emphasis was placed on training artistic judgment in enjoying the essence of the art and on developing a correct appreciation in ascertaining the truth rather than simply collecting items. A strong desire to collect and possess items was required to obtain maturity in taste with regard to ol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Except for Kim Gwang-su, almost nobody had collected and appreciated paint, calligraphic works, and antiquities on the basis of wide-ranging knowledge. It would not be an exaggeration to say that he set off a boom for collecting ol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in the Joseon period. He served as a bridge, connecting contemporary literati with the ol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that had come into fashion. It is a considered opinion that the simple fact of Kimg Gwang-su’s collecting ol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made a huge difference in Joseon. [Key words] Old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古董書畵), Sanggodang (尙古堂), Seo Sang-su (徐常修), Cheongmyeong sanghado (淸明上河圖), collecting mania (蒐輯癖), Yeonhaeng ilgi (燕行日記) 논문 접수일: 2015. 10. 21. 심사 완료일: 2015. 11. 12. 게재 확정일: 2015. 12.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