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콰앙!!!
거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5평 남짓 될만한 공간에, 지하 시멘트 바닥이 흔히 그러하듯 매우
차고 습한 기운이 올라오는 그 곳에 양팔을 뒤로 포박하듯 묶인 채 무릎 꿇고 앉은 사내의 바로
곁으로 굵은 쇠파이프가 내리 꽂혔다. 자칫 잘못 했으면 그의 다리를 부러뜨릴 기세로. 하지만
굳이 그것이 그의 다리를 건들지 않더라도 그의 몰골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
잔뜩 부어서 이미 사라진 눈동자는 둘째 치고서라도, 뒤쪽으로 묶인 한 쪽 팔은 기형적으로
꺾여서 묶는다는 행위자체가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얼굴 군데군데 부어있는 모습과
곳곳에 생겨 난 상처, 퍼렇고 붉게 물들어버린 멍들과 부러져 버린 갈비 뼈 세 대는 이미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며 그의 숨을 힘겹게 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선 사내는 더 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건조한 목소리로 딱딱한 말투를 구사했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아가리 놀려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게도 지켜야 될 사람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퍽!!!!!!!!!
갈비뼈의 통증으로 거의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앉아 있던 그의 몸이 뒤쪽으로 확 꺾이며 바닥
위에 힘없이 너부러졌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잔뜩 부언 얼굴이 갑자기 압력을 가하는 사내의
신발에 의해 바닥과 밀착되었다. 차가운 한기가 그의 얼굴에 전해졌지만 그것은 느낄 새도 없이
지독하게 오싹한 공포가 그의 온 몸을 떨게 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만은 떨리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 자신은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고 그로
인해 행한 행동이다. 후회는 없다. 이미 각오 한 일이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의 소중한 존재를 내주면서, 그의 마음을 생각지 않았을 리 없다. 그리고 지금의 결과에
대해서도. 오히려 처음부터 배를 떼이고 시작할 거라는 예상보다 훨씬 양호한 상황이다.
“내게는 내 목숨 따윈 더 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내 목숨 따위로는 감히 비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근데 지금 넌 네 목숨 따위로 갚겠다고 하는 거냐 지금?”
빡!!!!!!!
“크헉!!!!!”
다시 한 번 가해지는 발길질에 부러진 갈비뼈가 폐부에 박히기라도 한 듯 그의 입에서 핏물
한 덩이가 쿨럭하고 넘어온다. 이미 이를 꽉 깨무는 것만으로 충격을 참아낼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그의 입에서 힘겨운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그 앞에 선 사내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몇몇의 사내들의 얼굴에는 동정의 빛 그 비슷한 것조차 없다. 그저 시릴 만큼 차가운 경멸과
분노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세계에서 배신을 행하되 절대 해선 안 될 것이 있다. 철칙. 적어도 그들 세계에게 다른
이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율.
[ 첫째, 무슨 일이 있어도 짭새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둘째, 이 세계에 머무는 자들만 상대하고 먼저 시비가오지 않는 이상 민간인에게는 손대지 않는다.
셋째, 조직원의 가족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다. ]
꼭 지킬 필요는 없다. 그래야만 한다는 법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 스스로가 정한 자신들의
테두리. 조금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 최대한의 양심과 도덕이 있다면 바로 이 세 가지
규율이 그것에 해당된다. 그것을 지키고서도 모든 이들 위에 서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진정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어긴다면 훨씬 더 그들 모두가 꿈꾸는 목표를 쉽게 이룩할 수 있다. 다만 모두의
정점에 선 자로서의 위엄이 깎일 뿐이다.
각설하고. 어쨌든 최득만은, 본의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규율 중 하나를 어겼다. 그것은
조직원들에게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행위였고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그 자신이 그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는 점차 힘겨워지는 숨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충격으로 쓰러져 병원에 있는 아내와 자신이
끌려올 때까지도 가지 말라면서 울며 매달리던 아이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어떻게든 버티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의 귀에 더 없이 감정이라곤 전혀 찾아보기 힘든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임신 7개월의 아내. 이제 겨우 세 살 배기가 된 아이. 딱 좋은 설정이군. 불행에 휩싸여 버릴
가족이 되기엔.”
“…….”
성운의 발이 갑작스레 자신의 턱을 밀어 올리듯 눌러오자 쓰러진 채 폐를 움켜잡고 괴로움을
호소하던 그의 숨이 멈칫한다. 그동안 마주하지 못했던 광기에 휩싸인 눈동자가 다시금 그의
몸에 공포의 전율을 전한다.
“네 목숨 따위 내게 필요가 없다. 당한 만큼 갚는다. 그것이 이곳의 철칙이다. 알고는 있나?”
“혀, 형님!!! 제발…큭!!!”
그의 확고하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면서 숨쉬는 것조차 힘겹던 입술이 애써 움직이려는
시도를 하려다 다시금 피를 토해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뒤쪽으로 묶여 있던 손을 부러진
팔을 비틀어 빼낸 다음 거의 매달리다시피 성운의 다리를 붙잡았다.
“제 가족……에게만은……!!”
잔뜩 부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더 없이 절박한 눈동자가 성운을 향해 빌고 또
빌었다.
잊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눈앞에서, 최현수라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사내의 모습을 보이던
그를 보면서 그가 진정 어떤 인간이었는지 잊고 있었던 자신의 한심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의 일만 보고 대처하고 그 대가를 너무 쉽게 갚으려 한 스스로의 바보스러움을 탓할
틈도 없었다. 막아야 했다. 이 사내라면 눈 한 번 깜짝 않고 자신이 가장 끔찍해 할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내다. 분명 그는 지금 자신의 머릿속을 오싹하게 만든 그 예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못 미더웠나. 네 가족 하나 구해주지 못할 것처럼? 그렇다 하더라도 현수에게만은
손대어선 안 되는 거였다. 설령 네가 날 팔아 남겼다고 해도 이토록 화가 나진 않았을 거다.
그건 네가 가장 잘 알 거였다. 네 그 잘난 입이 나불거린 것처럼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될
사람이 있었다면 넌 절대 현수에게 손 되어선 안 되었어. 그걸 어긴 스스로의 잘못을 탓해라.”
빠각!!!!!!!!!!!
아주 묵직한 소리가 크게 울렸고 성운의 바지자락을 힘겹게 붙들고 있던 손이 힘없이 내려갔다.
절박한 눈동자는 이미 눈꺼풀 너머로 사라졌고 파리하던 얼굴은 거의 검게 변해갈 지경이었다.
“아내가 있는 병원으로 보내.”
성운은 싸늘한 얼굴로 득만의 머리 바로 옆에 내려 꽂힌 다리를 바로하며 지시했다. 곁을 묵묵히
둘러싸고 있던 사내 둘이 익숙하다는 듯 득만을 들것에 실어 날랐다.
간만의 차이로 득만에게 마지막을 선사할 수도 있었던 발걸음을 멈춘 성운은 지독하게 씁쓸한
표정으로 득만이 흘리고 간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적어도……미덥지 못했던 것은. 강하지 못한 내 잘못 이었으니까.”
모두가 빠져나간 공허한 공감에 더없이 쓸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의 쓰디쓴 고통을 닮은
상처 입은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지금 자신의 곁에 없는 이를 그린다.
더 없이 고결하고 성스러운. 그 누구보다 맑고 순수한 자신의 성녀(聖女).
자신의 내면에 겹겹이 숨기고 숨겨 온,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질투가 나는 사람.
자신을 지독하게 중독 시켜놓고 정작 그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그 투명한 미소가
스스로를 감당하기 힘들만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 너무 사랑스러워서 불안한 사람.
자신의 사람. ……자신의 사랑.
그녀를 얻기 위해 미친 듯이 싸우고 죽였다. 그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더 없이 역겨운 짓도,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날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녀라는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인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거리낄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멀었다는 건가. 대체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한다는 거지. 이미 충분히 강해졌다
생각했고 그녀를 얻었다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아직 아니라고 한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고 안주하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나. 아니면 자신에겐 아직
그녀를 얻을 자격이 없는 것인가. 아직도 덜 강해진 것인가. 아니면 강해진 방법이 잘못 된 것인가.
……자신은. 자신은 대체 왜 그녀를 지키지 못했나.
지금 이 모든 상황에서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그녀를 밖으로 유인한 최득만도,
소중한 사람을 이용한 두 겹의 덫을 치는 더럽기 짝이 없는 계획을 세웠던 한태제도 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이 가장 한심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자신의 사람을 지키지 못한 스스로에게 뿜어지는 지독한 화를 멈출 수가 없다.
* * *
“아참, 그리고요. 누나.”
세제와 손을 맞잡은 후,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로 살짝 스며들며 더 없이 꿈결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에 잠시 말이 끊긴 틈을 타 달콤하니 잡아끄는 졸음에 빠져들려던
나를 세제가 불렀다. 노곤해지는 몸이 말을 내뱉는 것조차 귀찮아하며 입을 움직일 생각을
않았기에. 잡고 있는 손을 흔들어 듣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
“좀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르겠지만, 태제 형이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너무 미워하진 말아줘요.
형도 사실은 많이 아픈 사람이에요. 누나처럼 마음에 상처가 많아요. 많이 가엾은 사람이에요.”
“…….”
이번에 대답이 없었던 것은 졸음에 취해 나른했던 탓만은 아니었다. 단지 확실하게 대답해줄
마음도 용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세제의 부탁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다. 그리고 방금 세제가 요구한 것은 그 후자에 속한다. 적어도 태제의 태도가 변하지 않은 한,
나 또한 태제에 대한 껄끄러움을 마음대로 지워낼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는 지 세제가 내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잡곤 천천히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형도 많이 아팠어요. 아버지한테 버림 받고, 엄마랑 단 둘이 살게 되었는데 엄마가 형을 많이
피했데요. 어릴 때부터 형이 아버지하고 너무 닮아서 자신을 지독하게 이용만 해대고 버려버린
형의 아버지하고 너무 닮아서 엄마가 형한테 많이 모질게 했어요. 그런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아버질 만나고 날 낳아서, 형은 더 외로웠을 거예요. 자신에게 향하던 애정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다른 곳을 향하게 되었으니까.
그땐 형도 아주 어렸는데, 너무 여렸는데, 그랬는데 모두가 자신을 외면해 버렸으니까 많이
아팠을 거예요. 형이 정말 많이 외로웠다는 거 내가 가장 잘 알아요. 아버지가 아무리 잘 해
줬어도 아버진 내 아버지였으니까, 형은 내게서 아버질 빼앗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애써 거리감을 두려고 노력했어요.
그럴 필요 없는데, 난 형한테서 엄마를 빼앗았던 걸지도 모르는데. 형은 단지 내가 자신을
필사적으로 쫓아다녀 주었다고. 나만은 형의 곁에서 늘 졸졸 따라다녔다고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그게 너무 고마워서 아무것도 뺏고 싶지가 않았대요.
그러면 나마저 떠나버릴까 봐서요. 그래서 사고로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을 때, 나만이라도
살아남아줘서 고맙다고 막 울었어요. 자신이 혼자가 아니게 해 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착한 형이에요. 사실은 아주 많이 착한 사람이에요.
나한테만 착하게 군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아니에요. 형은 단지 나에게만 솔직할 뿐이에요.
나 때문에, 너무 힘들게만 사느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법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도 배우질 못해서 그래요.
형의 태도가 좀 삐뚤어 보이는 건, 함께 지내온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대하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 마음이 못 되서 그런 게 아니라 나라는 짐 때문에 너무 바쁘고
힘겹게 사느라 표현하는 법을 몰라서 그런 거라고 이해하고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누나.”
“…….”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어 입을 열지 않았던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엔 세제의 말에 딱히 뭐라 할
대답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태제도 사연이 많이 있는 것 같아서 아까처럼
쉽사리 싫다는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세제의 말대로, 지금의 태제가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되어버린 게 아닐 거라는.
태제도 그 나름대로 힘겨웠던 일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되어버렸을 거라는 약간의
안타까움이 들었다.
세제 말이 아니더라도, 내가 알고 있는 한 적어도 세제를 대할 때의 태제는. 누군가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따듯한 눈빛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눈빛을 보내는 타인이 조금만 더 늘어나도
태제는 훨씬 더 많은 이들과 함께하고 애써 자신이 혼자서 다 지고가려는 힘겨움이 덜할 텐데.
그러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 질 수 있을 텐데. 그러면 태제도 많이 변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
“아, 맞다. 얘기 하나 해 줄게요. 이걸 들으면 형이 얼마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투른지 알거예요.
1년쯤 전에 형이 비 오는 날에 거의 다 죽어가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주워온 적이 있어요.
울면서 자신의 손에 몸을 비비는 게 못내 불쌍해서 두고 오지 못하고 데리고 왔다면서. 그래서
병원에서 간단한 검사하고 주사도 맞춰서 집으로 데리고 온 거예요.
근데 그 때 난 막 수술 끝내고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었고 형은 일을 나가야 해서 고양이가
깨어났을 때쯤엔 내가 곁에 있었고 밥도 거의 내가 주었어요. 그 탓인지 고양이가 정작 자신을
구해준 형보다는 나를 훨씬 더 잘 따르는 거예요. 그걸 보더니 형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정말 웃긴 이야긴데요……, 형은 그 고양이를 막 괴롭혔어요.
자신이 데려 왔는데 고양이는 막상 내게만 매달리고 자신한테 쌀쌀맞게 구니까 많이 서운했는지
오히려 자신이 고양이가 옆에 오면 밀어내고 막 오지 말라고 쫓고 그래요. 그래놓고 고양이가
잠들어 있으면 몰래 다가가서 살펴보고. 왜 유치원 남자 아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그걸 표현 못하고 괴롭히고 그래서 애가 자길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더 표현은 못하고
또 더 괴롭히는 것처럼. 그렇게 유치하게 구는 거예요.
옆에서 보는데 어찌나 웃기던지. 고양이가 귀여워 죽겠으면서도 고양이가 자신을 안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자기도 절대 좋아한다는 표현 안 하고 그냥 막 괴롭히는데, 정말 귀여웠다니까요.”
말하면서 그 때 생각이 나는지 혼자서 키득거리는 세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태제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게 잘 매치가 안 되는 듯 하면서도 의외로 잘 어울릴 것도 같은 생각에 나도
따라 웃어버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저 혼자만 웃기 미안해 애써 죽이고 있던 세제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진다.
“형은 사람을 대할 때도 그래요.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상대방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싫어하는 것 같으면 금세 용기를 잃고 마음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해 버리고 실은
자신이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티를 절대 못내요. 상대가 조금 싫어하더라도 넉살좋게 웃으며
다가갈 줄 몰라요. 아마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 버림받고 어머니한테 외면당했던 기억 때문에
사람의 감정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해서 그런 걸 거예요.
쓸데없이 마음 줬다가 버림 받을까봐, 혹시라도 저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게 되더라도 나중에
언제 그랬냐는 듯 엄마처럼 자신을 외면해 버릴까봐,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꺼려하는
기운이 보이면 진즉에 마음을 거둬버리는고 마는 겁보예요. 겁보. 형은 강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아주 겁이 많거든요.
사람이 살다보면 꼭 그 사람을 좋아할 수만은 없는 건데,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조금쯤은
싫은 구석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것에서도 겁을 내서 형은 도무지 누군가를 붙잡지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 형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누나.”
‘아, 세 번째다.’
그 말이 벌써 세 번째나 반복 되는 거라는 사실을 혼자서 멍청히 떠올리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세제의 말에 귀 기울이느라 어느 새 졸음이 물러가 버려서인지 생각보다 쉽게
목소리가 나온다.
“태제 하는 거 봐서.”
“에잇. 그 대답은 좀 곤란한데. 말했다시피 형은 바보처럼 겁이 많아서, 자기 마음에 솔직하지
못해서 마음과는 다른 행동을 하고 게다가 막상 용기를 내더라도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도
몰라서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군다니까요. 그러니까 누나가 잘 좀 이해해줘요. 네에?”
제법 애교스럽게 부탁해오는 목소리가 귀여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법 큰 소리로. 그러자
세제가 허락의 뜻으로 알겠다면서 부정할 틈도 없이 빠르게 못을 박는다. 태제가 했으면
뻔뻔스럽다고 화를 냈을 지도 모를 그 행동이 세제가 하니 그저 귀여운 애교 정도로 보이는 걸
보니, 나도 사람 차별을 꽤 하는 것 같다. 이거 태제를 탓할 일만도 아니잖아, 라는 생각에 잠시
혼자 놀라고 있는 사이.
“아참, 그리고 이건 진짜 비밀인데요. 형이 누나한테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거든요. 뭔지 알아요?”
‘음. 사실 첫 번째 이유도 잘 모르겠는데.’ 라는 대답을 목구멍 속으로 되밀어 넣고는 ‘글쎄.’ 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대신 내뱉었다. 그러자 세제가 정말 이건 ‘일급비밀!’이라고 누차 강조를
하면서, 비밀스런 효과를 더하기 위해 목소리까지 조금 낮춘다.
“그건 누나가……엄마를 닮아서 그래요.”
아까부터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고
강요한 그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살짝 몸까지 틀어 간신히 내게 얼굴 일부분을 들이밀어 눈까지
마주친 채 이야기 하는 세제.
“……에? 내가?”
세제의 그 빛나는 옅은 갈색 눈동자를 마주보고 있던 나는 귀를 통해 들어온 말의 내용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해 몇 번이나 되새기고 나서야 얼빠진 반응을, 그것도 뒤 늦게 서야 보일 수 있었다.
그러자 세제가 미처 전하지 못한 내용을 덧붙인다.
“아, 생김새 이런 게 아니라 분위기 같은 게 엄마랑 많이 닮았어요. 전체적인 실루엣이나 느낌
같은 거요.”
“으음?”
잘 모르겠다는 듯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신음을 내뱉자 세제는 잠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더니 이내 아직까지도 맞잡고 있는 손을 보며 씩 웃는다.
“손도 닮았네요. 우리 엄마 손도 이렇게 길고 가늘어서 정말 예뻤거든요. 엄마도 누나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어요. 사실 난 엄마를 닮았거든요. 그래서 엄마도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
같은 게 굉장히 옅어서 아주 투명해 보이는 사람이었어요. 힘든 일을 많이 겪었는데도 여전히
곱고 고운사람. 곁에서 보고 있으면 단아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조용하니 안정되어 있는 그런 게 누나랑 닮았어요.”
“내, 내가 그렇게 보여?”
갑작스럽게 받은 과분한 평가에 난 당황해서 되물었다.
단아하다니, 차분하고 조용하다니. 여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얘기다. 대학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도 선배하고 동기들한테 덜렁거린다는 소릴 얼마나 들었으며 좀 오래되긴 했지만
엠티 갔을 때도 어린애처럼 이리저리 발발거린다고 정신 사납다는 평가까지 들었는걸.
왠지 세제가 나에 대해 엄청난 미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게 아니라며 대답해주고 말해주려는
찰나, 세제의 단호한 목소리가 내 가슴에 못을 박아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게 했다.
“정말 누난 겉모습만 보면 딱 엄마랑 닮았어요. 성격은 전혀 의외지만요.”
그, 그렇지. 내가 겉모습은 꽤 날카롭게 차분하게 생겼지. 암.
그렇지만……왠지 좀 섭섭한 생각이 드는 건 역시 어쩔 수가 없다.
‘윽.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말할 것까지야.’ 라는 혼잣말을 입속에서 웅얼거리고
있자니 세제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아마 그래서 형은 더 누나한테 친절해질 수가 없는 걸 거예요. 형은 엄마를 정말 많이 좋아해서,
너무 좋아해서 많이 미워하게 되었거든요. 형네 아버지한테 당하고만 버려진 엄마가 바보처럼
여겨져서. 그 때문에, 기껏해야 자신을 버린 남자와 얼굴이 똑같단 이유로 자신을 모른 척
방치 해 둘 바에야 차라리 복수라도 하지 왜 당하고만 있었냐는 생각에. 한참 힘들 사춘기 때
막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엄마를 많이 미워하게 되었대요. 잘은 모르지만 형아 아버지 집도 꽤
복잡하거든요.
그 뭐였더라? 아. 맞다. 아마 형네 아버지가 쌍둥이였을 거예요. 키도 체격도 얼굴도 모두 정말
똑같이 생긴 일란성. 근데 참 이상하죠? 정말 똑같이 생겼는데 엄마는 그 중에서 딱 한 사람만
사랑하게 되었어요. 더 없이 차갑고 냉정한 사람을. 사랑이란 감정과는 많이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는데도 막 사랑하게 되었대요. 그 사람이랑 완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보다
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아니라 그의 형을 사랑하게 되었데요.
얼굴도 모두 다 똑같으니까 이왕 좋아 할 거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하고 이루어지면 될 텐데,
사람 맘이 참 신기해서 그게 안 된대요. 그냥 척 봐도 냉정하고 결혼 할 때도 자신은 다른 것보다
자신의 일이 먼저다. 라고 그렇게 못을 박을 만큼 차가운 사람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얻고 싶다고 애원하던 남자보다 사랑하게 되었대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택해서 자신을 사랑하던 남자는 거의 미쳐 버렸는데도 어쩔 수가
없었대요.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거라고.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랬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았다고. 왜 그런 남자를 사랑했던 건지, 후회한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엄마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자신의 선택이니까 어쩔 수가 없다고. 모든 것은 자신이 선택했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집안과 재산을 모두 빼앗고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버렸어도 다른 사람을
원망 할 수가 없어서 더 힘들었대요.
그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그의 후계자를 빠득빠득 우겨서 겨우 빼앗아 왔는데 그게 오히려
더 괴로웠다고 그런 얘기를 엄마가 집에 혼자 남아 괜히 기분이 우울해져 술을 한 잔씩 할 때면
몇 번이나 내게 들려줬어요. 아마 너무 어려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이해하진 못해도 너무 여러 번 들어서 다 기억할 수 있는데, 그래서 지금은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하게 되어서 그 이야기를 차라리 잊고 싶어질 거라는 건 엄마도 몰랐나 봐요. 혹시라도
형이 우연히 라도 그 얘기를 듣게 될 거라는 걸 몰랐나 봐요. 그래서 형이 너무 아파할 거란 것도.”
애써 몸을 비틀어 내게 얼굴을 들이밀던 것이 힘들었는지 어느 새 제자리에 누워 눈빛을 마주
할 수 없게 된 세제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던 처음과 달리 마지막엔 목소리가 가늘게,
슬픔의 기운을 머금고 떨렸다.
“세제야…….”
그에 세제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말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다른 위로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했다.
나도 모르게 뭔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내가 세제에게, 결코 쉽사리 타인에게 들려주기 힘든 남편씨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했듯이
세제 또한 자신의 가장 중요하고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을지 모를 이야기를 내게 들려 준 것이다.
그런데 난 내가 받았던 것과 같은 도움을 세제에게 돌려 줄 수가 없다. 그 사실에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왜 이렇게 난 할 수 있는 게 없나. 하고. 적어도 이럴 때 위로가 되는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누나, 내 이름 한 번만 더 불러줘요.”
“어? 아, 응. 세제야.”
혼자서 스스로의 무능함을 탓하고 있는 사이, 세제의 자그만 목소리가 부탁한 말을 서둘러
실행했다.
“한번만 더요.”
“…세제야.”
“헤헷. 좋다. 누나, 난요 누나가 내 이름 불러주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지 몰라요.
막 때가 탄 듯 어지러웠던 머리가 ‘세제’로 빡빡 씻은 것처럼 더 없이 깨끗해지는 느낌이에요.”
“에? ―풋.”
이 상황에 과연 웃음을 터뜨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내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순수한 웃음을 터뜨리며 애써 날 위해 농담을
던지는 세제의 친절에. 이 착한 아이의 마음에. 진심으로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사그라지지 않는 고요한 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세제가 조금 전보다는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애증(愛憎). 사랑하고 증오한다. 혹은 사랑하기 때문에 증오한다. 아마 형은 그런 마음을
엄마에게 느끼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엄마를 닮은 누나가 조금
거북한가 봐요. 그러니까 배려심 많고 너무너무 착한 현수 누나가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줘요.”
“아. 응. 노력할게.”
처음 세제가 내게 부탁한 말에 지금이라면 이렇게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장 태제를
미워하지 않겠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해하려고 조금 더 노력 해 보리라는 다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워요, 누나. 그리고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모르고 표현할 줄도 모르는 바보 형이지만 정말
잘 부탁해요.”
“쿡. 꼭 세제가 형 같아. 그러고 보니 나보다도 더 어른스러운데?”
내 대답에 똑 부러지는 목소리도 다시 한 번 마무리를 하는 세제 덕분에 작게 웃으며 장난스레
말을 건네자 세제가 금세 뾰루퉁한 목소리로 투정을 부린다.
“그게 다 형아 때문이라니까요. 형이 날 위해서 주변을 너무 안 둘러본 것까지 내가 다
둘러보려다가 괜히 나만 애늙은이가 다 됐다니까요. 하긴, 매일 침대에 누워서 할 일 없이
책만 뒤적이고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만 잔뜩 한 탓도 있긴 하지만.”
“아. 나도 그랬는데, 난 아직 애 같다는 소리 많이 듣는 걸. 세제는 타고 난거야, 타고 났어.”
그에 또 장난기가 발동해 한 마디 더하자 금세 세제의 새초롬한 목소리가 조금 커진다.
“어?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에요, 누나? 칭찬 아닌 것 같은데?”
“글쎄. 무슨 뜻 일까나~.”
세제의 목소리에 잘 모르겠다는 듯 딴청을 피우자니 문득 ‘아무래도 나도 좀 뻔뻔하단 말이야.’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79.
[ 여어- 오랜만이야. ]
꽤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는 소식에 당장 연결하라는 명령을 내린 지 겨우 몇 초도 되지 않아
전화기를 타고 능글맞은 목소리가 자신의 귀를 스치는 순간, 그의 얼굴에 짙은 노기가 어린다.
단정하게 다물어져 있는 입술 사이로 그의 이가 강하게 맞부딪히면서 세 글자를 어렵사리
토해낸다.
“―한 태 제.”
[ 어이, 그렇게 무게 잡지 말라고 안 그래도 당신 무서운 거 세상이 다 아는데, 뭐. ]
성운의 살기가 고스란히 담은 목소리를 듣고도 기(氣)하나 죽지 않고 오히려 이죽거리기까지
하는 태제의 반응에 성운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벌써 이틀 째 그의 눈동자 속을 회오리치고 있는 분노는 갈 곳 없이 맴돌며 더욱 더 커져가고
있었다.
“고양이 새끼마냥 목숨 줄이 10개쯤 되는가보지.”
[ 그럴 리가. 난 그저 평범한 인간이지. 당신에 비하면 말이야. 그러니 당신이 너무 무서운
덕분에 매일매일 귀찮게도 50명이나 되는 보디가드들을 대동하고 다녀야 하게 되었다고. ]
여전히 듣는 이를 바짝 약 올리는 듯한 능글맞은 목소리로 성운의 지독하게 무거운 목소리를
맞받아 친 태제는 연신 우스워 죽겠다는 듯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 킥. 기껏해야 그딴 아줌마 하나 때문에 천하의 한성운이 하루아침에 쓸어버릴 수도 있는
우리를 손 하나 못 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기 해.
아. 당신도 눈 좀 올릴 필요가 있던데. 대체 그 아줌마 어디에 그렇게 빠졌나 모르겠단 말이야. ]
“혀를 뽑아내기 전에 아가리 닥쳐.”
성운과 얼굴을 마주 하고 있다고 해도 태제가 과연 그렇게나 쉽게 혀를 뽑아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성운의 눈동자는 지독하게 잔인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건 태제가 성운과 얼굴이 마주하고 있어야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고 안타깝게도 지금은
얼굴을 마주 할 수 없는 전화상의 대화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태제의 혀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공기의 파동으로 구현해냈다.
[ 킥. 키득. 이러니 내가 더 재밌다는 걸 똑똑하신 분이 왜 모르시나? 어쨌든 요새 주변에 당신
부하들이 어슬렁거리기에 안부 차 전화해 봤어. 아마 곧 한태민 새끼도 전화 할 거야. 솔직히
그 개새끼가 뭐라고 씨부리던 난 상관없어. 하지만 당분간 그 아줌만 내가 좀 데리고 있을
생각이거든. 그러니 걱정 말라고. 별로 괴롭힐 생각 같은 건 없어. 다만 우리 세제가 지겨워
할 때까지만 좀 붙잡아 둘까 할 뿐. 걱정하지 마, 굶기진 않을 테니까. 그럼,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하지. ―아, 참. 지금 곧바로 거처를 옮길 생각이야. 아무래도 계속해서 당신네
애새끼들이 어슬렁거리는 걸 보니 괜히 거슬려서 우리 세제한테까지 못 볼 꼴 보일지도 몰라서
말이야. 그럼, 정말로 이만. ―딸칵. 뚜. 뚜. 뚜――. ]
자신의 할 말만 모두 내뱉고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정도는 알고 있다는 듯 성운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빠르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태제. 그리고 그런 그의 행동이 현명했다는 듯,
엄청난 기세로 들고 있던 전화기를 통째로 뽑아 집어던져 버리는 성운.
“개새끼!!!!!!!”
쿠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책상위에 얌전히 얹어져 있던 전화기가 저 멀리 장식장아래까지 날아가
박힌다. 그리고 플라스틱의 탄력으로 몇 번 더 튕기며 아주 산산조각을 낸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성운은 그쪽엔 시선한 번 주지 않고 아직 책상위에 남아 있는
두 대의 전화기 중 하나의 버튼을 누르며 누군가를 호출했다.
바로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호출과 동시에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는 이를 성운의
차가운 시선이 흘끗 바라보았다.
“휼아.”
“예, 형님.”
그 찰나 같은 순간의 살기에도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경직된다. 그와 셀 수 없는 전쟁터를
함께 지내온 휼이었기에 그 시선이 뜻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건 일주일 안으로 끝낸다. 단 한 번이면 족하다. 모두 쓸어버린다. 쥐새끼 한 마리,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않도록 해라. 또한 섣불리 주먹을 내질러 일을 망치는 바보짓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두 마리 호랑이 새끼는 그 때까지 잠시 풀어둔다.
제 잘난 듯 날뛰다 지쳤을 때 잡는 게 더 쉬운 법이니까. 늙은 놈은 아버지께 받치고 젊은 놈은
내가 직접 처리하마. 나머진 모두 네 몫이다. 모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
휼이 예상한대로 그의 시선이 뜻하는 바는 전멸(全滅).
예외는 없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를 가로막는 모든 것에게 닿는 것은 죽음뿐이다.
지금부터는 법망을 피해 교묘한 기교를 부릴 번거로움도 없다.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이득을 거두어야 할 수고스런 머리싸움도 없다. 그들이 예의상 지켜주어야 할 법칙 따위도 없다.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는
그저 그들이 가진 총력(總力)을 다해 상대의 모든 것을 끝장낸다. 그들이 알고 있다고 해도,
설령 다른 누가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폭우를 알고 있다고 해도 그걸 막을 수 없듯이. 사람들이 허리케인을 출현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어찌 할 수 없듯이.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도 힘을 가진 자의.
강한 자가 지배하는 이 세계의 거스를 수 없는 자연적인 법칙이다.
모든 것은. 그의. 뜻대로.
* * *
“뭐?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세제가 이 상황인데 지금 어딜 간다고?!”
세제의 설득과도 같은 이야기에 넘어가서 이젠 좀 잘 대해주고 싶어도 꼭 자기가 알아서 재를
뿌리는 한태제군. 이번엔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가 했더니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세제의 요양을
위해 좋은 곳을 알아놨으니 서둘러 움직이란다.
수술 하고 채 하루도 안 된 상황에서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네 눈엔 [ 절대 안정 필요. ] 라는
저 마크가 안 보이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말리는 의사의 목소리가 안 들리 냔 말이다!
“아 씨발, 되게 시끄럽네. 그냥 얌전히 타라고. 세제에 관해서는 다 준비해 뒀으니까.”
‘전혀 안 보이는 안 들리는 모양이군.’
병원 뒷문에 몰래 주차해 놓은, 사방이 빽빽하게 선탠 되어 있는 밴의 문을 휙- 열어 재끼고
거의 던지다 시피 떠밀어 넣는다. 그제 서야 태제가 말 한, 다 준비 해 놨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으. 진짜 못 말려.”
이건 거의 이동 병원이다. 그냥 까맣기만 하던 차 내부는 어떻게 개조를 했는지 이건 119나
병원 구급차는 저리 가라의 수준이다. 사방에 온갖 약들과 기기들이 다 구비되어 있고 심지어
혈액을 보관하는 휴대용 냉장고마저 있었다. 게다가 갑작스런 움직임에 혹시라도 놀랄까봐
수면제로 잠들게 해 놓은 세제 옆에는 제법 익숙한 얼굴의 의사와 간호사까지.
내 기억이 맞다 면 예전에 의료 전문 TV에도 잠깐 얼굴을 비춘, 심장에 관해 권위 있다는
교수 중 한 명이었다. 근데 대체 어떻게 저런 사람을 친히 대동해 온 걸까.
저 만큼 유명하고 명성 있는 사람은 돈도 돈이지만 스케줄도 장난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예약해 두지 않고 바로 움직이게 하긴 힘들 텐데. 미리 잡힌 일정과 약속들을 일일이 다
취소하려면 자신의 이미지와 신뢰에 영향이 가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은 절대
쉬운 아닐 텐데 말이다.
뭐, 태제라면 가능할 것도 같긴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대체 어딜 가는 거지?
아까부터 놀란 눈으로 차 내부를 살피는 사이 어느 새 자동차는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꽤
한적한 국도에 안착해 있었다. 세제 때문인지 그렇게 속력을 내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느린 것도 아닌. 일반 국도의 정규 속도를 지키며 달리는 자동차는 직선으로 곧게 뻗은
도로를 상당히 오랫동안 달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몇 번인가 도로를 바꿔 타는 듯 하더니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그냥 길이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고속도로를 이용하진 않았다),
나중에는 어느 산을 타고 오르는 건지 차가 계속해서 굽어지며 돌고 있었다.
물론 이 때 앞쪽에 탑승하고 있던 태제가 엄청난 목소리로 세제 제대로 돌보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제 몸 가누기도 힘든 의사와 간호사는 거의 기진맥진해서 세제에게 달라붙었다.
그러고도 차는 한참을 계속 갔다. 세제를 위해 최대한 깨끗한 도로를 달리려고 한 탓인지 몰라도,
선탠 덕분에 어둡긴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배경이 분명 꽤 깊숙한 산중인데도 불구하고
도로는 깔끔했고 덕분에 차체에 흔들림은 거의 없었고 세제는 평온한 잠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끼익.
대체 얼마나 온 건지 몰라도 그렇게 적다고만 할 수 없는 시간을 달려온 자동차 덕분에 슬슬
눈꺼풀이 내려가며 졸고 있을 즈음. 드디어 차가 멈췄고 내가 머물고 있던 공간과 연결된 문도
열렸다.
“내려.”
다짜고짜 사람을 끌고 와 놓고 하나도 미안한 기색 없이(납치당한 상황이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서도), 내 손목을 붙들어 끌어내고는 의사와 간호사에게도 눈짓을 보내 내리게 한다.
그리고 계속 같이 달려왔는지 내가 타고 온 차 바로 뒤에 주차되는 검은 색 승용차에서 내린
등치 좋은 장정들에게 세제를 ‘아주 조심스럽게.’를 강조하며 옮길 것을 명령. 그들이 자신의
지시대로 ‘매우 조심스레’ 옮기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는 잡고 있던 내 손목을 잡아끌고
우리의 목적지라 여겨지는. 깊은 산골 한적한 별장과도 같아 보이는 곳으로 들어간다.
세제의 요양을 위해 알아뒀다는 말이 꼭 빈말은 아닌 듯, 내가 지금 처한 상황만 아니더라도
충분히 감탄하며 즐길 만큼 멋진 경관 속에 둘러싸여져 있는 3층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건물.
뒤쪽에는 험한 산새 탓에 생긴 절벽을 타고 물줄기가 작게 떨어지고 있고 아래쪽에 있는, 자연적
풍파로 인해 우묵하게 깎인 돌덩이가 그 물을 조금씩 모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절벽에서가 아니라 조금 먼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또 다른 내(川)가 있는 것도 같았다.
갈 수 있다면 나중에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앙증맞게 ‘졸졸’거리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런 감상적인 생각은 태제에게 끌려 들어가 거의 떠밀다 시피 앉힌, 어느 응접실의
의자에 도착하고서부터는 싹 사라져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거기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제가 전해 준 이야기를 듣고서부터.
“아줌마 덕분에 최득만이 아주 병신이 됐던데?”
“…….”
또 무슨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어 나도 모르고 입술을 질끈 깨물고 태제를 바라보았다. 스스로가
느낄 만큼 조금 날카롭게. 그 모습이 뭐가 그리 웃긴 지 태제는 기가 차다는 듯 웃는다.
“하! 왜? 재수 없어?”
‘그래!’ 라고 대답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목구멍을 넘어 입안까지
넘어온 그 말을 다시 꾹꾹 눌러놓고는 입을 꼭 다물었다.
“아줌마 덕분에 임신 7개월 된 아내랑 3살짜리 아기를 두고 거의 이승과 저승을 오락가락
한다더라. 갈비뼈가 폐에 박혔는데 꽤 깊숙했나보더라고. 그 외에 뼈 부러진 것도 상당하고.
그래도 일단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이긴 하지만. 아줌마 덕분에 사람 하나 병신 되는 거
진짜 일도 아니다. 그치?”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사실 따지고 보면 전부…….”
결국 나도 모르게 발끈해서 잔뜩 소리치던 나는 가장 중요한 말인. ‘너 때문이잖아!’ 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늘 그렇듯이 태제가 듣기 싫은 말은 녀석이 내뿜는 눈빛 공격에 막혀버린다.
“뭐 어쨌든. 앞으로 여기서 잘 지내보라고. 필요한 거 있으면 다 말하고. 참고로 미리 말해두지만
도망 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여기 오기 위해 뚫어 놓은 길이 아니라 일반 차들이 다니는
인근 도로까지 걸어서 5시간. 하지만 도로에 간다고 해도 워낙 변두리라 다니는 차도 없고
인근에 사람 사는 곳도 없어. 여긴 일부러 도피처로 만들어 놓은 별장이라서 최대한 눈에
안 띄도록 숨겨둔 장소거든. 여기서 차 없이 움직이려면 상당히 각오해야 될 거야.
게다가 숲 잘 못 걸어가다가 독사 만나는 거야 당연한 거고 말벌도 곳곳에 있지. 뭐 전갈이랑
지네가 있는지는 모르겠고. 별별 동물들도 꽤 있다고 들었어. 게 중에 육식인 것도 없다곤
장담 못해. 더군다나 곳곳에 절벽도 있어서 발 잘못 디뎠다가 세상 하직 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아, 물론 그 모든 것 전에 이 집 주위도 충분히 감시를 붙여 놓을 테지만.”
‘쳇. 이제 할 말 없으니까 괜히 또 협박이야.’
그렇게 투덜대긴 했지만 은근히 겁나는 것도 사실이다. 내 생각보다 훨씬 멀고 낯선 곳에 떨어져
있다는 확신과 이 익숙지 않은 곳에 분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위험성들. 그리고 얘기 도중
시끌 거리는 소리에 힐끔 창 밖을 바라보자 연신 줄지어 행렬하듯 들어오는 검은 차들에서
쏟아져 내리는, 남편씨의 저택에서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흡사한
분위기를 내뿜는 많은 수의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뭉쳐서, 적어도 이곳이 내게 만만하기만 한 그저 배경 좋은 어느 별장인
것만은 아니라는, 난 지금 이곳에 어떤 자격으로 ‘끌려 왔는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하지만 그런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었으니.
꼬르르륵-
바로 눈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나의 위장.
그래도 꼭 내 위장보고 뭐라 할 수만도 없는 게, 난 납치되어 온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평소에 어기면 무슨 벌이라도 맞는 마냥 그렇게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다가 연신
두, 세 끼를 굶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뭐.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괜히 머쓱한 생각에 이마를
긁적이고 있자니 난생 처음 들어보는. 천하의 한태제군이. 감히 숨 넘어 갈 듯 웃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킥!! 크…윽!! 푸하하!!! 하하하하하!!!!!!!!”
여태껏 비웃거나 냉소 지은 적은 수 없이 많지만. 내 앞에서 한 번도 그렇게 소리 내어 웃어
본 적 없던 태제여서. 창피하거나 민망한 것도 모르고 그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태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제는 한동안 내 그런 모습도 눈치 채지 못하고 더 웃는다.
아마도 자신이 웃는 도중 또 눈치 없이. 이번엔 자신에게 밥을 주지 않은 날 아주 날 망신
주려고 작정을 한 건지, 두 번 연달아서 울려버린 뱃고동 소리 덕분이 아닌 가 싶다.
‘윽. 진짜 창피하다.’
뒤 늦게 서야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손부채로 식히면서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방을 나서려는 데, 어째 뒤쪽이 심하게 당기는 느낌과 아무리
걸어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 폼이…….
“아줌마. 배가 소리치는 거 안 들려? 아무리 나하고 있기 싫더라도 일단 밥은 먹고 가라고.
정 싫으면 쌩 라이브로 그 소리 계속 들려주던지. 키득. 암튼 아줌만 진짜 못 말린다니까. 크큭.”
예상대로,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아직도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태제의 큼지막한 손에 옷 뒷덜미가
붙잡혀 있었다. 그런 태제의 손을 팔을 뒤쪽으로 뻗어 툭- 쳐 내고는 제법 쌀쌀맞다 싶은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너하고 먹다가 체할지도 모르는데.”
“아쭈. 또 개기네. 아줌마. 아줌마가 요새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잘난 척 하는 줄 모르겠는데
자꾸 그러면 확 집어 던지는 수가 있다. 조용히 입 다물고 따라 와.”
음. 그래, 네 인내심에 지금까지 참았으면 제법 참았지.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1층도 2층도 아닌 3층임을 깨닫고 모든 반항을 접었다.
절대 그 뒤에 태제가 읊어 준 메뉴들이 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뿐이어서가 아니다. 아마도.
-
이상하게,
일주일 만인데도...
왠지 엄청 오랜만에 온 느낌입니다^^;
요새 냥이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공부를 힘들만큼 열심히 했다. 는 건 아니구요.
놀고 싶어서 미칩니다.=_=;
다음 주 시험만 끝나면 이번 달 말에 체육대회하고 축제가 있거든요.
냥이는 동아리가 없으니 하는 일이 없다고 해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
놀고 싶어 진달까요.
게다가 다다음주에는 대학교 축제 기간이라서 또 주위가 술렁.
그래도 시험을 잘쳐야 놀기도 잘 놀거라고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만.
요즘은 정말 놀고 싶어요.
하지만 이 마음을 잘 추스려,
다음주 시험 끝나고 기쁜 마음으로 글 올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냥이는 이만 물러갑니다.
덧.
대강 내용을 계산해보니...
아마도 완결은, 예정했던 85편을 넘어 90편쯤에 날 것 같아요.
뭐 쓸게 그렇게 많냐고. 지겨워 하시면 미워잉~! ( …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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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또와-유나연재
[연애소설연재]
* 조.폭.의.꽃.이.되.다! *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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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어요^ㅁ^
지겹기는~방가운데...;;;다만 좀 빨리 올려주세요;;;;한동안 안나와서 오히려 심심했어요;;바쁘시더라도...독자를 생각해서....일찍..^0^;;하하..재밌게 잘 봤습니다(/__);;;
두 분 모두 감사합니다^^ /레드아쿠아님 : 제가 대한민국 고교생으로서 야자라는 것을 하는 이상; 평일에는 올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