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댄스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월드시네마 심사위원 특별상’
**베를린 국제 영화제 ‘최우수 아시아 영화상’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특별상’
**싱가폴 Asian Festival of 1st Films ‘최우수 다큐멘터리 감독상’
**바르셀로나 아시아 영화제 ‘최우수 디지털 시네마상’
영화에 대한 자세한 문의 사항은 프리비젼(T.511-5836)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평양 16km’
평양까지 16km.
창 밖의 경치를 보면서도
3명의 오빠들과 조카들을 생각한다.
동시에 나는, 내가 결코 조국의 품에 안긴 것도 아니며
혁명의 수도를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곳.
보고 싶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Story
“안녕!” 헤어짐이 아닌 만남의 인사이고 싶습니다.
나는 ‘재일 교포의 메카’로 불리 우는 도시,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빠 셋의 귀여운 막내 여동생으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15살에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일본으로 오셨고 해방을 맞은 후 정세에 따라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첫 눈에 반해 열렬히 프로포즈하여 결혼에 성공하셨다고 하는데, 평소 엄격한 성격의 아버지도 이 얘기가 나올 때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시곤 합니다. 부모님은 결혼 후 함께 열정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셨고, 오빠들이 청소년이 되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국’인 북한으로 보낼 결심을 하셨습니다.
오빠들이 떠나던 날. 6살이었던 나는 ‘귀국’의 의미도 모른 채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오빠들을 태운 배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셨습니다. 나는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후 평양의 실정을 들은 어머니는 오빠들에게 물자를 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린 조카가 난방이 안된 학교에서 동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이런 짓은 어미 밖에 못해준다”고 웃으시면서 겨울마다 큰 상자에 일회용 손난로를 가득 담아 보내주고 계십니다.
고집쟁이 아버지와 딸. 그들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오빠들과 달리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나는 자연히 아버지와 갈등이 깊었고, 심지어 대화조차 안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의 인생을 카메라에 담아 볼 것을 결심했고 10년간 렌즈를 통해 아버지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점차 변해 갔습니다. 머리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삶이 가슴으로 다가오며, 미움은 그리움으로, 갈등은 사랑으로 변해갔습니다. 어느 날 오빠들을 북한으로 보낸 것이 후회 되냐고 묻는 나에게 아버지는 진솔한 답변을 해 주셨고 난 앞으로 아버지와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곧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되고, 나는 아버지와 좀더 일찍 대화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About Movie
感… 가장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가장 공감되는 이야기!
양영희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조총련’이 운영하는 학교와 가정에서 ‘조국’인 북한에 충성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 왔다. 하지만 평양으로 ‘귀국’한 오빠들을 만나러 북한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조국의 현실이 이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깝고도 먼 두 나라, 북한과 일본을 오가며 그녀는 자신의 가족이 품고 있었던 특별한 이야기를 담담히 카메라에 기록하기 시작한다.
<디어 평양>은 어른이 된 딸의 목소리와 시선을 따라 한 가족의 특별한 사연과 사랑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가족 다큐멘터리의 맥을 잇고 있지만, 그 어떤 가족 영화보다도 인물간의 거리는 좁아지고 그에 따라 생생한 감정의 호흡과 진솔한 감성이 전달되는 영화이다. 양영희 감독의 가족은 우리와 같은 핏줄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처럼은 살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는, 이 세상 모든 가정에 존재하는 희로애락의 정서를 촘촘히 엮어냄으로써 얻어지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가족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와 공명하며 깊은 감동을 안겨 줄 것이다.
愛… 미움이 그리움으로, 갈등이 사랑으로 변해간다!
20대에는 대화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버지와 함께 밥 먹는 것 조차 싫었다고 하는 양영희 감독. 양영희 감독은 온통 북한과 관계된 대화만 하는 부모님과 늘 이질감을 느껴왔다고 한다. 부모님들이 ‘조총련’의 간부인데다가 세 아들이 모두 평양에서 가정을 이루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평양에 있는 조카들의 모습을 찍어 부모님께 보여드릴 목적으로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기에 영화 곳곳에는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흔적이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곧 그녀는 논픽션의 매력을 알아가면서 서서히 촬영의 강도를 높여 나갔고, 본격적으로 가족의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한지 10년 후 드디어 <디어 평양>을 완성해 낸다. 영화에는, 감독이기 이전에 한 명의 딸로서 아버지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양영희 감독의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절대 ‘조선’국적을 버리지 말라고 하던 아버지가 ‘한국’국적으로 바꿀 것을 허락하자 양영희 감독은 많이 놀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뜨거운 신념에 앞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아버지는 뜨거운 신념을 지닌 사상가 혹은 활동가였지만 그 보다 먼저 자신의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것이다. 오빠들을 북한으로 보낸 것이 후회스럽지 않냐는 솔직한 딸의 질문에, 똑같이 마음을 열고 솔직한 답을 들려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하며 양영희 감독은 카메라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眞… 다큐멘터리의 비상! 실재하기에 가장 아름답다!
12년에 걸쳐 제작된 비전향 장기수들을 다룬 실사 <송환>(2004, 김동원), 1966년 북한의 월드컵 8강 진출기 <천리마 축구단>(2005, 다니엘 고든), 북한 최고의 행사인 전승기념일 매스 게임에 참여하게 된 여중생 현순이와 송연이의 아기자기한 이야기 <어떤 나라>(2005, 다니엘 고든)는 모두 북한과 관계된 다큐멘터리들로, 다큐멘터리는 어렵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깨고 관객의 호평을 이끌어 내 주목 받았던 작품들이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은 일본에 실재하는 재일 교포 가정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슴 벅찬 감동을 전해주고, 무엇보다 실제적인 북한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내고 있기에 위의 수작들의 의미 있는 호평과 주목을 이어갈 작품으로 여겨진다. 또한 <디어 평양>에 내재되어 있는 갈등의 한 축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적 틀 안에서 자란 것이기에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욱 특별히 다가온다.
양영희 감독의 아버지는 세 아들이 북한으로 귀국하기 전에 가족사진을 찍은 이후로 다시 한번 모두 모여 가족 사진을 찍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간직해 왔다. 그래서 가족은 4년 늦은 아버지의 진갑 잔치를 평양의 ‘옥류관’에서 열기로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양영희 감독의 카메라는 2004년의 평양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아 낸다. 우리가 그 동안 TV를 통해 자주 접할 수 있었던 거대한 김일성 황금동상이나 추체 사상 탑, 매스 게임과 평양 거리의 풍경은 단순히 도식화된 북한의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현실적 입체감을 띄고 친밀하게 관객을 찾아간다. 그것은 생활인으로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오빠들의 가정이 더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조금 더 불편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곳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같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곳인 것이다.
力… 세계가 함께 눈물 흘린 감동 스토리!
<디어 평양>은 2006년 선댄스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월드 시네마 심사위원 특별상’과 베를린 국제 영화제 ‘최우수 아시아 영화상’을 거머쥐며 세계의 주목을 받고, 이외에도 야마가타 다큐멘터리 영화제 ‘특별상’, 싱가폴 Asian Festival of 1st films ‘최우수 다큐멘터리 감독상’, 바르셀로나 아시아 영화제 ‘최우수 디지털 시네마상’ 등을 수상하며 우리의 역사와 정서를 바탕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가 전세계인과 공감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러한 수상 결과는 <디어 평양>이 근대 한국 역사와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바탕으로 한 재일 한국인들의 회한과 고뇌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상당히 고무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는 화면을 통해 다가오는 가족애를 바탕으로 한 사랑과 갈등이라는 보편적인 정서가 전세계인들에게 진솔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디어 평양>은 그 누구보다도 바로 한국 관객들에게 가장 큰 감동을 전할 것이다.
Cast
아버지
딸 : 아버지 제 국적이 좀 복잡해요.
아버지 : 국적은 바꾸면 되지. 정말은 바꿀 필요가 없지만, 바꾸어도 할 수 없지.
딸 : 아버지는 안 바꾸세요?
아버지 : 안 바꿔! 절대 안 바꿔! 죽어도 안 바꿔!
딸 : 그럼 딸은 바꾸어도 괜찮은 거에여?
아버지 : 응. 너만 특별한 거야
딸 : 그래도 저에게 심술 안 부리시기에요.
아버지 : 그렇게 안 해. 절대 안 그럴거야. 바보!
제주도가 고향이지만 15살에 일본에서 해방을 맞은 후,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하고 사상가로 활동했다. 당시 ‘뿌리 없는 초목’ 같던 재일 한국인들의 비참한 삶을 개선 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는 한 편, 김일성에 의한 조국 통일 실현을 위한 정치적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부인도 함께 활동에 참여 하게 하였고 각각 18세, 16세, 14세였던 세 아들을 북한으로 ‘귀국’ 시켰다. 일본에 남은 딸에게도 계속해서 민족 교육을 시키지만 일본의 자유 분방한 문화 가운데 있던 딸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아버지와 딸은 갈등하게 된다.
<디어 평양>은 평생을 지켜온 ‘조국’에 대한 자신의 사상과 신념이 이젠 믿음이 되어 버린 굳건한 그의 모습 뒤로,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는 숨겨져 있던 평범한 가장의 모습을 그려 낸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는 딸이 ‘조국’인 북한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허락하게 되고 부녀는 갈등을 넘어 이미 이 세상 무엇보다 컸던 서로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현재 뇌경색으로 병상에 있다.
어머니
딸 : 뭘 보내면 가장 좋아해요?
엄마 : 학용품! 며느리들 말에 의하면 볼펜과 지우개.
부모밖에 못하는 짓이다!
딸 : 그건 정말 명언이네요. “부모 밖에 못하는 거라고”
엄마 : 박사가 될지 어떨지, 아이고! 연필! 연필 보내달라고
할머니는 조국에 짐을 보낼 때는 돈 드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하하하
재일교포 2세로 양공선씨를 만나 열렬한 구애를 받는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사상을 함께 공유하며 물질적 정신적으로 아낌없이 지원 한다. 세 아들이 모두 평양으로 떠나 버린 후, 끊임없이 생활 물자와 생활비를 지원하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끊임 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어머니상을 만나 볼 수 있다.
Director_양영희
조선고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연극을 했다. 아버지는 조총련계의 교포와 결혼하여 평범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서서히 논픽션에 끌리기 시작하고 있을 때, 나이 서른에 북한에 있는 조카들의 모습을 찍어 주기 위해 카메라를 구입하게 되었고 이후 실사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뉴욕의 뉴스쿨 대학 미디어 연구학과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다큐멘터리를 공부하였다. 첫 작품 <디어 평양>이 호평을 얻으며 두 번째 작품인 <선아, 또 하나의 나> 역시 주목 받고 있다. <선아, 또 하나의 나>는 현재 부산 국제 영화제 ‘아시아 다큐멘터리 네트워크’(AND) 의 공식 후원작으로 선정되어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Review_양석일 작가
1999년 9월 중순, 나는 모 출판사의 의뢰로 한 달 동안 아내와 함께 뉴욕으로 취재 여행을 갔었다. 표면적으로는 취재 여행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뉴욕에 살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구로다 세이타로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과 함께 거의 매일 밤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 즈음 ‘신주쿠양산박’ 극단이 뉴욕 재팬 소사이어티에서 카라 쥬로의 [소녀 도시로부터의 환성]이라는 작품을 공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구로다 세이타로와 함께 연극을 보러 갔는데 그 곳에서 우연히 카라 쥬로씨를 만나게 되었다. 연극이 끝난 뒤, 우리는 뉴욕에서의 해후를 겸한 종연 기념 파티로 케페 바에서 한잔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신주쿠양산박’ 극단의 대표인 김수진씨로부터 양영희씨를 소개 받았다. 나는 그녀가 재일한국인이면서 뉴욕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첫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당시엔 그녀가 무엇을 공부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 후, 나는 도쿄의 모임에서도 그녀를 만날 기회가 몇 번 있었다.그녀는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도쿄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내 주변에는 영화, 음악, 연극, 문학, 무용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재일 한국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나는 양영희씨도 막연히 그런 재일한국인 가운데 한 명 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녀로부터 <디어 평양>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시사회 초대장이 보내져 왔다. 난 솔직히 깜작 놀랐다. 사적인 자리에서 보았던 그녀는 활발하고 긍정적이면서도 명랑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아마도 배우이거나 음악과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영화감독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영화의 제목이 <디어 평양>이기에 영화를 만들기는 한 걸까 하는 의심마저도 들었다. 하지만 여기 저기서 상도 받은 작품이라고 하니, 속는 셈 치고 시사회장을 찾았다. 그런데 나는 놀랐고, 감동 받고, 울었다.
<디어 평양>은 그녀의 부친을 주인공으로 한 가족 영화였다. 부친은 오사카 조총련의 간부로 사회주의를 믿고, 김일성을 믿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믿고 있었다. 그녀의 부친은 1959년부터 시작된 ‘북조선 귀국사업’에 따라, 3명의 아들을 귀국시켰다. 그건 조국의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 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 북조선의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삼엄한 국제 상황 하에, 정치적으로 고립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북한과 일본의 관계 역시 납치 문제로 전혀 진전의 기미도 보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부친은 김정일 정권을 믿을 수 밖에 없다. 3명의 아들이 평양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국사업이 시작된지 10년이 지나며 재일한국인은 약 10만명이 귀국 했지만, 일본에 남은 가족들은 귀국한 가족을 위해, 계속 물심 양면으로 원조 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양영희씨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국한 재일한국인 중에는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인하여 굶어 죽은 사람들도 있다는 소리까지 들리고 있지만, 평양에서 살고 있는 양영희씨의 3명의 오빠들은 그래도 비교적 양호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건 그녀의 부친이 오사카 ‘조총련’의 간부이고 스스로 지원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백미는 부친이 평양의 ‘옥류관’에서 생일 잔치를 하는 장면이다. 부친은 파티를 끝내며 인사로, 자신은 아직도 조국과 김정일 장군에 대해 충성심이 부족하며 그 부족한 부분을 아들과 손자들이 대를 이어 채우겠다고 강조했다. 나는 부친의 마음에 거짓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왠지 공허하게 들렸다.
외동딸 양영희씨는 성장하면서 부친의 사상이나 믿음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념과 현실이 너무도 큰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상 낙원’이라 불리던 북조선은 황폐하게 변해버렸고 자유를 빼앗긴 민중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병으로 쓰러진 그녀의 부친에게 양영희씨는 계속해서 묻는다. “3명의 아들을 귀국시킨 거 후회 해?”라고… 그녀의 계속된 질문에 대답을 찾기가 어려웠던 부친은 애매한 말을 섞어 가면서.”이미 가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만, 안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그 땐 내가 조금 쉽게 생각했던 거 같구나” 라고 대답한다. 부친의 얼굴에는 회한과 고뇌의 그림자가 배어있었다. 그 회한과 고뇌는 재일한국인 60년의 역사이기도 하다.
자금이 없던 양영희씨는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로 10년간 촬영을 이어갔다. 그 끈기와 정신력에 자연스레 머리가 숙여진다.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지만, 양영희씨가 찍은 영상은, 일본 TV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상 – 거대한 김일성의 황금동상이나 주체 사상 탑, 매스 게임, 평양 거리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여진다. 이 영화는 은유적으로 평양의 이중적인 모습을 끌어내고 있다. 그로 인해 관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며 색다른 비평 정신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에 대한 강한 연대감과 깊은 사랑이 내재되어 있어 긍정적인 힘을 갖게 한다. 재일한국인 가운데, 또 한명의 자유로우면서 재능이 넘치는 인재가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Special Interview_With 오스기
** 오스기 : 1945년. 카나가와 출생. 1976년 <All Night 닛폰>이라는 “닛폰 라디오”를 통해 영화평론가 데뷔. 현재 일본 내에서 가장 큰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고 있는 영화평론가로서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출연하는 등, 다방면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고 있다. 특히, 온라인 <오스기의 영화 천국> 게시판(www.kbc.co.jp/radio/pao-n/eiga)을 통해 다양한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리뷰와 추천을 통해 네티즌들의 호응을 얻고 있으며, <오스기의 씨네버라이어티>라는 영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사랑의 메시지>
오스기 드라마틱하다고 할까 위험한 상황에서, 가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냈네요.
양영희 저는 재일한국인이라는 걸 숨기거나 회사를 위해 일본 이름을 쓰거나 주변
의 눈을 의식해서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게 정말 싫어요. 저는 한국인이고 부모님은 조총련 간부시고 3명의 오빠들은 평양에서 살고 있어요. 이 현실은 감춰야 할 것이 아니라, 그냥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숨겨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스기 감춰도 어쩔 수 없으니까. 나도 피코(오스기의 쌍둥이 형제, 게이)도 있는
그대로 거든요. 그게 영희씨하고 우리의 공통점이네요.
양영희 가족이 화제가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제가 가족에 대해서 사실 그대
로 오빠들은 지금 평양에 있다고 말하면 모두들 깜짝 놀라고 당황하면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요. 놀랍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사과까지 하는 건 솔직히 실례 아닌가요?
오스기 그런 반응을 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물어보지나 말지. 영희씨하고 저는 10년 전에 고베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처음 만났잖아요. 만나길 참 잘한 거 같아요. 영희씨의 체험담을 통해서 몰지각하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돌아 볼 수 있었으니까요. 거기다 매력도 있고, 머리도 좋고 말예요.
양영희 이왕이면 좀 더 띄워줘요! 지금 오스기씨가 한 말이요. 크게 좀 써주세요.
(웃음)
오스기 언젠가 영희씨가 가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을 거라고 기대는 하고 있었
지만, 정말로 “만들 거예요”라고 선언했을 때는 ‘너무 무모한 거 아냐.’ 라는 걱정을 솔직히 많이 했어요.
양영희 찍기 시작한 건 문제가 아니었는데, 가족의 이야기를 나 같은 사람이 과연 찍을 수 있을까. 아니, 찍는 것이 혹시 평양에 있는 오빠의 가족들에게 폐
가 되지 아닐까 고심을 거듭하다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요.
오스기 그렇게 고심한 시간이 있었기에 어려운 테마를 잘 그려낼 수 있었던 게 아
니겠어요. 나는 제작 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 영희씨를 응원하고 있었지만,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리라 믿고 있었어요.
양영희 고맙습니다.
오스기 미국에 유학할 때도 찍고 있었죠? 30대 중반에 느닷없이 “다큐멘터리 공
부를 하겠어요”라는 말을 하고는 뉴욕으로 날아가지 뭐예요. (웃음)
양영희 영어도 못하고, 돈도 없으면서 (웃음). 30대 중반에 들어서 새로운 걸 배운
다는 게 좀 무모하긴 했지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스기씨한테 상담을 했더니 “돈이 없어도, 남자랑 헤어지게 돼도, 부모님이 반대를 하셔도, 무슨 일이 있어도 가!” 라고 하면서 제 등을 떠밀어 주셨죠. 그래서 돈도 빌리고, 남자 친구 하고도 헤어지고, 부모님의 극렬한 반대도 무릅쓰고 뉴욕으로 떠났죠.
오스기 헤어져도 괜찮을 만한 남자 친구더구만.
양영희 우여곡절 끝에 뉴스쿨 대학 대학원 미디어 연구학과에 입학하고 3년 동안
공부를 하고 왔어요. 돌아올 때, 나리타 공항에서 오스기씨를 만나고는 막 울었죠. 그러고 보니 “돈이 없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졸업해야 해”라고 격려와 질책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웃음)
오스기 난 영희씨의 도쿄에 있는 엄마잖아요. 복잡한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미
국에서 영상에 대한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는 자체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그 당시엔 아직 조선 국적이어서 보통 여권은 갖고 있지 않았었죠?
양영희 맞아요. 미국은 북한하고 국교도 없는데다 9.11테러가 발생한 시기라서 재
입국 허가서에 비자를 받는 것이 너무 어려웠어요. 아버지께서 “오빠들이 평양에 있는데 여동생이 미국에 간다니 이게 무슨 말이 되는 소리냐!”며 반대가 심하시길래, 제가”역 핵사찰하고 비슷하네”라며 낄낄댔더니, “이게 정신 나갔냐!”며 정말 엄청나게 화를 내셨었어요.(웃음)
오스기 그런 갈등 속에서 만든 작품이 바로 <디어 평양>이군요.
<감독이 아는 평양, 그 일상은…>
오스기 보도되는 평양의 모습과 영희씨가 찍은 평양의 모습이 전혀 다른 걸 보고
정말 놀랐어요. 그리고 아직 열 다섯 살인 조카가 피아노 연주를 훌륭하게
해내는 장면이 있죠?
양영희 오락실도 없고, 인터넷도 할 수 없고, TV도 라디오도 재미없거든요. 그러
니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볼 수 있죠.
조카는 피아노가 있어서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오스기 컴퓨터가 고장 나도 직접 고친다면서요!
양영희 어린 아이들은 너무 너무 인터넷을 하고 싶어 하는데, 금지되어 있으니까,
컴퓨터를 마치 퍼즐 맞추기라도 하듯이 분해했다가는 다시 조립하고 다시 분해하는 것을 반복해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웬만한 고장은 직접 고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오스기 욕망은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부풀어 오르는 법이니까. 한 편으로는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이네요. 부모님은 아직도 평양에 있는 3명의 아들의 가족들에게 생활 물자를 보내고 계신다죠?
양영희 영화에서 보면 오빠 가족들이 좋은 방에서 생활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
실은 바닥에 난 구멍을 카페트로 가리고 있는 거에요. 오빠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3만엔인데요. 그 돈은 오빠들이 부업까지 하고 절약을 해도 하루 세끼 겨우 먹는 정도에요. 그래도 북한에서는 중상 정도의 생활 수준은 될거에요. 일본에 있는 가족들 입장에서는 그럭저럭 보내줄 수 있는 금액이라서 부모님은 손자들 때문이라도 열심히 보내고 계신 거에요. 평양에서 사는 오빠 가족들을 만나면, 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고 행운인 것인지 실감하게 되요. 저는 밥을 굶어본 적도 없고, 추위 때문에 울어본 적도 없거든요. 우리 조카들하고 비교하면 전 행복한 환경에 살고 있는 것이죠.
조카들에게 “너무 추워 힘들지?”하고 물으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것 저것 많이 보내주시니까, 정말 행복해요.” 라고 말해요. 그 애들이 그렇게 말 하는데, 제가 감히 어떻게 불만을 말 할 수 있겠어요.
오스기 그렇군요. 들은 적 있어요.
양영희 그러고 보니 말씀 드린 적 있군요.(웃음) 최근에는 ‘만경봉호’로 가족 방문
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노인들뿐이라서 약간이라도 젊은 제가 가면 아이들이 정말 기뻐해요. 영화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는 조카는 여자 아이인데, 제가 뉴욕에서 유학했다는 걸 동경해서, 가면 같이 자면서 이것 저것을 물어보곤 하죠. 한밤중까지 질문 공세가 이어진답니다.
오스기 영화에서는 천진난만하게만 보이는 조카들인데, 그 배경은 정말 드라마틱
하네요.
양영희 80년대부터 현재까지 정기적으로 평양에 가서 일반인을 만나는데요.
그곳에도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여자를 밝히는 아저씨도 있어요.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고, 바람 피는 사람들도 있고, 결혼 전에 아이를 낳는 사람도 있죠. 그리고 아무 할 일이 없어서 거리를 배회하는 불량 청소년 같은 아이들도 있어요. 일본과 마찬가지예요. 이 작품을 통해서 북한의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요.
오스기 오빠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의 풍경은 평온하고 일상 생활이 잘 담겨져 있다고 생각해요. 참 신선했어요. 북한 사람들도 그 나름대로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영희씨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 마음도 알 수 있었어요.
<40년에 이르는 아버지와 딸의 갈등>
양영희 제가 20대일 때는, 아버지와 같이 밥을 먹는 것도 싫었어요. 부모님의 사상도 그렇지만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평양에 있으니까, 식탁에서의 화제는 북한 일색이었거든요. 그러니 안 그래도 이데올로기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던 저로서는 늘 마음이 편하질 않았어요.
오스기 그러니까 불효하는 딸이란 얘기군요.
양영희 10년에 걸쳐 찍었지만, 처음에는 가족의 기록을 찍을 생각이었고,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할 생각은 없었어요. 아버지는 처음 3년 동안은 아예 카메라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웃어 주신 적도 없었거든요. 그리고 저 역시 아버지를 찍을 수 없었어요. 비디오 카메라가 없었다면, 아버지와 대화 조차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쑥스럽기도 해서…
오스기 결혼 못 한 거 갖고 또 한 말씀 하실 거고.
양영희 글쎄 말예요. 하지만 카메라를 가운데 두고 아버지를 대한 것으로 관계를
다시 구축했다고 생각해요. 저와 신념은 다르지만, 그 이외에는 너무나
귀여운 아버지에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면서 자식들을 끔찍하게 사랑
하는 아버지시죠. 저도 변하게 되었는데, 아버지의 모습을 자유롭게 찍기
시작하면서 ‘사고 방식이 달라도 같이 밥 먹는 것 정도는 괜찮네.’라고 생각했어요.
오스기 아버지와 딸이 서로 갈등을 어떻게 넘어서는지가 영화의 큰 테마이기도 하
죠. 영희씨와 아버지가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 서로의 차이를 인정했기 때문에 넘어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와의 화해를 이끌어낸 양영희라는 한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양영희 오빠들을 북한에 보낸 것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에 아버지가 솔직하게 대답
해 주셨을 때, 그리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싶다는 제게 “너의 일 때문이
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라고 말씀하셨을 때, 너무 깜짝 놀라서 하
마터면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 했어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버
지 나름대로 진지하게 저의 장래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다는 걸 알 수 있었
어요. ‘이 분도 지금까지 하고 싶은 많은 말을 삼키며 살아오셨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오스기 하지만 결혼 상대로 재일한국인과 한국인은 괜찮지만, 일본인은 안 된다는 건 전혀 변함이 없으시던데요. (웃음)
양영희 국적만 맞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게 어디 말이 돼요(웃음). 편집할 때
나라가 동서로 나누어졌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독일 사람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사회주의권으로부터 이민이 많은 미국 사람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정말 궁금했어요. 각 나라의 영화제에서는 재일한국인의 역사와 관계된 세부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와 딸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전달됐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어요. 관객으로부터 자신의 가족 얘기를 들었던 것도 정말 흥미 있는 일이었죠. 오빠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감정을 자제하며 만든 점은 영화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부족한 점일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보여주고 설명하지 않더라도 관객은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느낀다는 것을, 그리고 관객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오스기 영희씨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전해져야 할건 반드시 전해진
다고 생각해요. 평양에 있는 오빠들도 영희씨가 마음껏 표현하도록 응원해
주었다면서요?
양영희 평양에 있는 가족들을 모자이크 없이 드러냈는데, 어차피 보여줘야 한다면
그 모습 그대로 세계의 인정을 받는 편이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스기 그런데 부모님은 이 영화를 보셨나요?
양영희 아버지는 병환 때문에 보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어머니 혼자 보셨어
요. 아버지의 올곧고 뜨거운 인생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저의 가치관과는 다르고, 북한에 대해 저 나름대로 생각하는 게 있어 그 생각을 솔직하게 담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보시면 어떻게 느끼실까 솔직히 걱정이 됐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인생과 가족을 영화로 만들어줘서 고맙다” 고 말씀해주셨어요. 정말 기뻤어요. 아버지는 예전에 한국에서 범죄자 취급을 받던 자신이 주인공인데, 그런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 됐다는 얘기에 정말 놀라워하셨어요. 진지한 표정으로 “한국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던?” 하고 물으셨어요. “웃으면서 보던데요. 그리고 아버지 병환에 대해 걱정하던 걸요.” 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좀처럼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어요.
오스기 나도 영희씨의 영화와 관련이 되어 정말 기뻐요. 그리고 영희씨 아버지도
그렇고, 마음 속에 중심이 있는 사람은 괜찮은 거 같다고 생각해요.
양영희 어떤 나라에서도 그런 말을 들었어요. 일본에서는 “아버지의 가치관에는
찬성할 수 없지만, 곧은 마음만큼은 이해할 수 있어요!” 라며 열변을 토하는 분도 만날 수 있었어요(웃음).
오스기 어떤 형태가 되던,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다른 생각도 접할 수 있는 거구요. 아버지의 가치관이야 어찌 됐건 간에 자신이 선택한 길을 믿는 멋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충분히 잘 나타나 있다고 봐요.
<여자의 행복은 황야 저 편에?>
오스기 내가 영희씨와 대담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여기 저기 많은 장애물이 있고
원하지 않는 환경에 놓여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향해 돌
진해갈 수 있는 의지를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아무나 실행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다, 다큐멘터리를 결국 만들어 냈고, 게다가 세계
적으로 인정 받았잖아요. 영희씨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어요. 영화제에서
상을 받다니, 나로서는 평생 생각할 수도 없는 영예 아니겠어요, 정말 부
러워요! 여자로서의 행복을 버리고 유학을 간 보람이 있었어요.
양영희 저도 여자로서의 행복에 아직 미련은 남아 있다구요.
오스기 영희씨한테 했던 말이 있죠. 여자가 스스로 이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눈 앞에는 황야가 펼쳐져 있다고. 황야에서는 방해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죠. 그런데 어느 일정 장소에 도달하면 여자는 늘 이런 말을 해요. ”어디 좋은 남자 없을려나”라고 말예요. 영희씨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해요.
양영희 더 이상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그런 말 안 하면 좋은 남자가 나타나려나?
구성, 글/ 오치아이 유키
딸 : 아버지 파이팅! 같이 평양에 가야죠
아버지 : 파이팅! 평양 가자
“또 한번 가족들이 기다리는 평양으로 가자”
아버지를 추켜 세우기 위해 이 말을 거듭하면서
나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평양”이란 말의 깊은 뜻을
알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딸 : 아버지 휠체어라도 타고
어떤 일이 있어도 평양에 가자구요.
가족들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어요.
아버지 : 그래.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