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live/qUn1V-2aMl4?si=O-87-TD3RdusB-1F
가룟 유다의 입맞춤 14:43~47
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하였더라
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제자들 14:48~52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
[오늘의 말씀 요약]
유다가 종교 지도자들이 파송한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춥니다. 이때 한 제자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 종의 귀를 칩니다. 강도를 잡는 것같이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이것은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
가룟 유다의 입맞춤 14:43~47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받기 위해 담대히 나아가십니다. 배반자 유다가 검과 몽치를 든 성전 경비대를 대동하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성전 경비대는 대제사장들이 파송한 자들입니다. 미리 약속한 신호대로 유다가 예수님께 입 맞추니 성전 경비대가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유다의 입맞춤은 존경의 입맞춤이 아니라 배반의 입맞춤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닌 ‘랍비’(선생님)라고 부릅니다(45절). 저항하는 과정에서 제자 중 하나가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쳐서 자릅니다(요 18:10). 예수님은 체포되는 위기 상황에서도 말고의 떨어진 귀를 고쳐 주십니다(눅 22:51). 고난의 순간에도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은 빛을 발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유다의 입맞춤은 어떤 의미인가요?
내가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할 때, 생각과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제자들 14:48~52
예수님은 체포되실 때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날마다 성전에 있을 때는 체포하지 않다가 강도를 잡듯 비겁하게 밤에 체포하는 대제사장들의 간교함은 비난하십니다. 예수님이 체포에 순응하신 것은 성경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사 53:7~8). 세 번에 걸친 수난 예고(8:31; 9:31; 10:33~34)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모두 두려워하며 도망가 버립니다(50절). 예수님이 당부하신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에 실패한 제자들이 위기 상황에서 보인 행동은 부끄러운 도주입니다. 모든 일의 첫 번째 준비는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잡히시자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했나요?
내가 기도로 준비하지 않아서 실패한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누구 편에 서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한 걸음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대적들은 전쟁하려는 태세로 달려들지만 예수님은 침착하십니다. 다 알고 계시고, 이미 준비가 끝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힘과 힘의 대결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대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해 제자들을 지키려 하십니다. 주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가룟 유다는 빛이신 예수님 곁에 서지 않고 어둠의 세력 앞잡이로 섰습니다. 힘없으신 예수님보다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 있으니, 누가 보더라도 유다는 줄을 잘 선 사람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예수님을 파는’ 자리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영광을 받는 자리라 하더라도 예수님을 파는 자리에 서지 마십시오. 그 자리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멸망의 자리입니다. 찬송가 147장의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라는 가사처럼, 우리는 누구 편에 서 있을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끌고 무엇을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잔을 받아 마심으로써 우리를 통해 누군가가 살아나고 자유를 얻는 구원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좇아 사랑과 섬김이 만드는 참된 평화를 일구는 성도가 되십시오.
예수님을 따라가는 요한복음 / 박대영_ 두란노
==================
한절묵상:마가복음 14장 49절
예수님의 잡히심은 성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던 때를 상기시키신 이유는 그분이 강도처럼 불의한 일을 해서 잡히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셨지만, 스스로 죄인처럼 되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에 대해 기록된 예언을 이루셨습니다(사 53:6). 말씀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삶은 성도의 신앙 모범입니다. 말씀 위에 서서 말씀을 이루는 삶에는 감동과 울림이 있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무시하고 반대하는 모든 의도와 행동은 그분의 주되심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 에드먼드 클라우니
오늘의 기도
주님! 제자들의 배신과 고통의 십자가 앞에서도 오롯이 사명의 길을 가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제 판단이나 감정, 이익을 따라 주님의 길을 막아서거나 주님과 멀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오직 성경을 이루기 원하셨던 주님을 떠나지 않고 따라가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48,49절 검과 몽치에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잡히셨습니다(사 53:12). 종교 지도자들이 보낸 경비병들은 마치 죄인처럼 예수님을 잡아가지만, 사실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려는 악한 소작농들일 뿐입니다(12:1-12).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정당하다면, 왜 낮에 사람들이 많은 성전에서 잡지 않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시고, 그렇다고 폭력에 굴복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자기 죽음으로 불법적인 폭력의 실체를 드러내십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43-45절 유다는 십자가 대신 검과 몽치를 드는 길을 선택합니다. 전에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주님을 팔아넘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인사도 주님을 배신하는 군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따랐지만, 그 길을 바라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길을 배신함으로 제 목적을 이룹니다. 나도 욕망을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십시오.
46,47절 곁에 섰던 한 제자(마 26:51; 눅 22:50)가 검을 빼듭니다. 그 역시 십자가의 길을 깨닫지 못한 것은 유다와 매한가지였습니다. 유다가 검과 몽치를 든 자 편에 섰다면, 이 제자는 검을 들어 예수님의 길을 대적한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가신다는 주님을 만류하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8:33)는 준엄한 책망을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고 다시 검을 들어 주님의 길을 막아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우리 열정이 주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50-52절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폭력으로 맞서길 거부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제자들은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폭력을 대하는 여러 선택지가 있습니다. 유다처럼 폭력의 편에 서고, 한 제자처럼 폭력으로 맞서고, 또 다른 제자처럼 굴복하고 도망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폭력에 굴복하지 않으심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시는 주님의 방식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강자의 폭력은 무엇입니까? 주의 제자로서 그들의 폭력에 어떻게 맞서겠습니까?
기도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폭력을 묵인하지 않고, 주님의 방식을 따라 맞서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290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오늘 본문은 가룟 유다의 안내를 받고 들이닥친 군인들이 주님을 체포한다는 이야기로, 그 때 제자들은 한결같이 다 도망갔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강도처럼 검과 몽치를 들고 잡으러 온 무리에게 잡히며, 그 모든 것이 성경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체포조의 당도, 한 제자의 저항, 예수님의 체포, 벗은 몸으로 도망간 청년 등입니다.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 ‘가룟유다가 군호로 스승인 예수에게 입을 맞추었다’는 말입니다. 스승의 뺨이나 손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것을 배반의 증표로 사용하니, 존경의 입맞춤이 아닌 배신의 입맞춤입니다. 파송된 무리의 무기는 검과 ‘몽치’입니다. ‘몽치’란 몽둥이를 말하는데 단순한 막대기가 아니라 살상용 무기를 말합니다. 그들은 종교행정자치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에서 정식적인 명령을 받고 나온 자들입니다. 그 날 밤 공회가 열리기 때문에 체포를 위해 파송된 것입니다.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 예수님의 체포당시 있었던 유일한 반박행동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칼을 뺀 사람은 베드로이고, 대제사장의 종은 ‘말고’라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어째서 칼을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솜씨로 종의 귀만 내리쳤는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열심당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당원은 실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무리들로, 그들은 무기를 늘 소지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의 칼을 베드로가 홧김에 빼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서 있는 사람의 귀만 내리칠 수 있는 것은 무사 급만 할 수 있는 칼 솜씨입니다. 베드로는 직업이 무사가 아니고 어부입니다. 어부의 솜씨대로 했다면 십중팔구 ‘말고’는 죽었을 것입니다. 내려친 칼이 귀만 벨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를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이 잘못되었던지 베드로의 직업이 어부가 아니었던지…… . 하지만 논박할 것 없이 성경의 기사도 허위가 아니고 베드로도 어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연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우연이란 결론은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주님은 말고의 귀를 고쳐줍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은 한이 없습니다. 이는 죽어가면서도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십자가의 예고편입니다.
▶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 ’어떤 청년이 삼베만을 거치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그들에게 잡히자 두른 것을 팽개치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는 말입니다. 익명의 그 청년은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사는 마가복음에만 있어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많은 주석가들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잠을 자다가 주님이 체포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옷 입을 틈도 없이 그 다급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 겟세마네로 뛰어 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주님이 체포된 상태였고 제자들이 뿔뿔이 도망가자 그도 덩달아 급히 피했다는 것입니다.
마가가 이러한 보도를 한 것은 당시 예수그리스도의 체포가 얼마나 긴박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주님의 체포는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켰고 따라서 벗은 몸이라도 도망쳐야 할 만큼 절박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자기만 알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베 홑이불’에 대한 연구보고가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대개 겉옷을 이불대신 덮고 잡니다. 따라서 홑이불은 겉옷입니다. 그렇다면 속옷이 일반 복입니다. 이 경우 청년은 급한 김에 겉옷만 입고 왔던 것입니다. 옷을 잡히자 그 옷을 벗고 도망가 그래서 벗은 몸이 된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현대인들이 입는 그런 속옷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마가복음에는 겉옷에 대한 기사가 많습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만진 것은 주님의 겉옷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 주십니다. 또 맹인 바디매오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달려가면서 벗어 버린 것이 겉옷입니다. 주님은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겉옷을 벗어 버린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만찬에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벗은 것입니다. 하지만 12제자 모두가 스승이 씻긴 그 발로 도망을 칩니다. 마찬가지 마가복음의 저자도 자기 겉옷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함께 있다고 그 사람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라고 스승의 능력이 그대로 전수되는 것은 아니지요. 겉옷은 의미가 없습니다. 본인에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장식된 것, 포장된 것 다 벗어버리고 오르지 주님의 말씀만을 붙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는 것이지, 자기 확신, 자기 소망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마가는 바울의 추종자요 베드로의 동역자가 됩니다. 성령 충만하여 기록한 것이 최초의 복음서, 마가복음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해야 할 것입니다. 마가의 삶이 그 증거입니다. 능력 있는 제자로 살면 좋겠습니다. 알몸이 될지라도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공급받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칼과 몽둥이로 무장한 것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반항을 고려했거나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체포하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며칠 전 성전의 상을 뒤집고 의자를 엎으시며 꾸짖으셨던 주님의 거룩한 분노가
또 다른 면으로는 그들에게 공격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대낮에는 도저히 체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기에
무기까지 들고 한 번에 자신들이 의도한 일을 끝내려
그 밤에 유다의 정보에 따라 산으로 찾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위함으로
주님께서 모든 이를 대신하여 유월절의 화목 제물로 바쳐지게 하신 것입니다.
모두 주님을 떠나고 무서움에 소중한 것들을 버렸지만
날마다 우리의 삶 한가운데 들어오시기 원하시고
그 죄를 대속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복된 인생으로 걸어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십자가의 길을 깨닫는 삶❞
배신과 핍박 그리고 비겁하게 도망한 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셔만 했습니다. -
✔ 십자가의 길에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자신의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43~46절).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중에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들과 함께 검과 몽치를 들고 왔습니다. 검이나 나무 막대기는 당시 일반적인 무기였으나 몽치, 즉 곤봉, 몽둥이는 폭도들을 진압할 때 사용한 특별한 무기였습니다.
유다는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서 자신이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임을 말해 놓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로 다가가서 ‘...랍비여...’하고 입을 맞춥니다. 유다의 입맞춤은 스승인 랍비에 대한 존경의 입맞춤이 아니라 거짓과 배신의 입맞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 자신의 욕망 때문에 끔찍한 배신을 당하시면서도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배신한 유다와 같은 자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악의적인 배신과 계략들이 난무하는 작금의 세상 속에서도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배신을 당할 수도 있고, 멸시를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주님이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임을 고백합니다. 입으로는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내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살아가므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말씀 앞에 비춰봅니다.
신앙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사회적 거리두기를 무시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는 그들의 내면에는 정치적 야욕과 세상적 욕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욕심과 욕망의 마음을 버리고 용서하고, 참고 또 참아 주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그릇된 열정을 버려야 합니다(47~49절).
예수님이 잡히시자 곁에 서 있던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47절). 요한은 구체적으로 시몬 베드로였고, 귀를 베인 대제사장의 종은 ‘말고’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저들을 향해 일격을 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는 이들에 대해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강도에게 하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며 책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어서도 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마저도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힘은 힘으로, 군사력은 군사력으로, 전쟁은 전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아울러 주님의 제자인 우리 자신이 세상을 정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여야 합니다. 내 자신의 무기는 칼과 몽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의 보혈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열정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열정이 베드로처럼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의 힘과 능력과 그릇된 열정이 아니라 기도와 용서와 사랑으로 주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비겁한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50~52절).
예수님이 잡히시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예수님과 직접 동고동락하며 많은 비유를 듣고, 기적을 보고도 잘못된 메시아사상과 진리를 깨닫지 못해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단 한명의 제자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있던 제자는 붙잡히게 되자 이불을 던져 버리고 맨몸으로 도망하는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고 시험이 닥치자 그들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십자가를 외면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당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핍박이 있을 수 있고, 손해가 있을 수도 있고, 따돌림도 당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겁한 그리스도인은 되지 않도록 깨어 있기를 소원합니다.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걸음이 나에게 주어진 진정한 축복의 여정임을 깨달아 헛된 욕망, 열정 그리고 비겁함을 과감히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막 14:43~52절)..
1.예수님을 넘기러 온 가룟유다(43-46절)
가룟유다는 은30을 받고 3년동안 스승으로 모셨던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는 그들과 신호를 만들어서 예수님을 넘겨주게 됩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아신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자신의 욕심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탐욕의 마음은 무서운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도 놓쳐버린 것입니다. 사단은 철저하게 이러한 가룟유다의 마음을 이용하여 그가 계획한 일를 행하고 맙니다. 가룟유다가 가진 탐욕의 틈은 너무나 큰 사단의 무기가 되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맙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사단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욕심의 틈바구니를 사탄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사단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틈은 없는지 늘 살펴보고 있는가?
2.도망간 제자들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심을 보고 3년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가 버립니다. 이것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쩜 인간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실패한것 같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걸 제자 하나 만들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심지어 어떤 젊은 사람은 홀몸으로 도망가는 진풍경까지 만들 정도로 그들은 유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렇게 유약하고 겁많고 비겁한 자들을 통하여 온 땅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 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사람이 가진 능력과 힘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을 받은 자들은 누구든지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알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우리가 약하고 모자라도 그분께서 뜻하시면 우리를 위대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묵상하기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나의 능력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의 말씀요약
유다가 유대교 지도자들이 파송한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한 제자는 칼을 빼어 대제사장
종의 귀를 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지금 자신을 잡으러 온 것은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예수님을 판 유다(14:43~46)
탐욕은 범죄의 도화선이 됩니다.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가룟 유다는 자기 이익을 위해 유대교
지도자들과 결탁해, 무기를 지닌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그는 친밀한 애정의 표시인
입맞춤을 신호로 배신을 실행에 옮깁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께 제자 훈련을 받았지만 유다의 본성은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참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 묵상 질문: 당시 유다와 예수님의 마음에는 각각 무엇이 가득했을까요?
- 적용 질문: 예수님을 팔거나 이용해 자기 잇속을 챙기는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혈기를 부린 베드로(14:47~49)
용기와 만용은 명백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흉악범처럼 체포되는 데 분개한 베드로는 검을 휘둘러
대제사장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항할 능력이 없어 무기력하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충심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생각으로 물리적인 힘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억울하고 괴로워도 잠잠히 인내하며 십자가를 수용하는 것이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는 길입니다.
- 묵상 질문: 베드로의 행동이 만용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주님보다 앞서서 경솔하게 행동하거나 혈기를 부린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도망한 제자들(14:50~52)
예수님보다 자기 목숨을 귀히 여기면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잠자다 나온 듯한 청년은 얼마나 급했던지 두르고 있던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할 정도였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습니다(요일 4:18).
자기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면 어떤 위협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 묵상 질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예수님의 제자답지 못하게 두려워하며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쳐 버린 순간은 언제인가요?
오늘의 기도
인간적인 충직함, 재빠른 계산, 준비되지 않은 영적 나태함으로는,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동행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연약하고 무력한 저이지만,
완전하신 주님의 사랑과 성령에 이끌려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소서!
마가복음 14:43~52 도망가는 제자들
예수님은 한 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 방울이 핏 방울이 되도록
아바 아버지여 !!!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말씀하셨지만
마음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약한 제자들이 졸고 있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진다.
첫번째 가룟 유다를 앞장세운 일단의 무리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다.(43)
유다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45)
무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체포한다.(46)
배신하면서도 선생님 하고 부르면서 입맞추는 유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혈압이 얼마나 올라갔을까?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 속아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이미 기도를 많이 하셨기에 벌써 용서하셨을까?
성경을 이루려 함이기에(49) 담담하셨을까?
'하나님 찬양'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가룟 유다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로 은 30개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제자.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돈 궤를 맡아 제정을 담당했던(요12:6) 핵심 측근 유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던 유다
그가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배반해 버린다.
그것도 아주 일상적인 인사법을 통해서 동료 제자들도 예수님도 속인다.
아주 지능적으로 속인다고 할 수 있다.
주님 내 안에도 겉다르고 속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와 사람에게 보일 때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겉 사람과 속사람이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영적 가면 가운데 광대놀음하고 있는 내 모습이 있습니다.
부지불식 간이라도 주님의 반역자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인간적 배신의 삶이 없도록 주여 붙잡아 주옵소서.
두번째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라 하는데 졸았던 사람이 행하는 행동이 보인다.
바로 베드로다.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갑자기 칼을 꺼내 대제사장 종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린다.(47)
대단한 검술이다. 어부가 언제 이런 검술을 연마했는지 모르겠다.
요한복음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말고라고 한다.(요18:10)
주님은 사람 낚는 어부로 불렀는데 살인하는 제자가 될뻔한 베드로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결정적인 순간에 혈기도 대응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대응하기 보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대응한다.
그렇습니다 주님
내가 영업하면서 모든 사람을 만날 때 먼저 기도하고 만나게 하시고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경험으로 내가 아는 인맥으로 하지 않게 하시고
먼저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당신이 주시는 능력으로 영업하게 하옵소서.
결정적인 순간에도 주님을 신뢰하며 의지하게 하옵시고
나의 힘과 능력으로 혈기로 대응하지 않게 하옵소서.
세번째 기도하지 않은 제자의 재미있는 모습이 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을 한다.(50)
그런데 이름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12제자 가운데 한 명인 것은 분명한 한 청년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자(51)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친다.(52)
캄캄한 한 밤중이니 벗은 몸으로 도망쳐도 누구인지 몰랐을 테니까
아마도 이글을 기록한 마가 자신의 경험담이 아닌가 하는 학자가 많다고 한다.
자기 집에서 최후 만찬을 하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따라왔던 모양이다.
아무튼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않으면
이렇게 벌거벗고 도망하는 수치와 창피를 당한다.
예수님을 따라 갈려고 애쓰는 모습은 기특했는데
벗은 몸으로 도망가는 제자 위기의 순간에는 이렇게 철저하게
배신하고 도망가는 모습을 본다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한없는 사랑과 용서로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자신의 몸으로 그 징벌을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의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버리심을
감당하심으로 온전한 구원을 허락하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날마다 그 구원의 감격으로 살아가며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높여드리는
거룩한 주님의 제자로 성령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가정과 자녀, 그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하늘의 창고를 열어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도 예배와 말씀의 기쁨을 허락하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존귀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