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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요한 5,24)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곧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온다는 말씀입니다.
곧 신적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나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여태 사랑>
오늘 이사야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시온에게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라고 대답하고,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다시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엇박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은 사랑하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하느님은 은혜의 때에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의 날에 도와주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은혜를 받은 적이 없고 그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온만 이런 것이 아니고 사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은 이렇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고통일 뿐이고,
고통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그 은혜를 그때는 느끼지 못하여 버림받았다고 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은혜로 느끼곤 합니다.
사랑과 고통의 불일치요 때의 불일치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이런 우리 인간의 불일치와 달리 아버지 하느님과 당신 사이의 일치를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주님 친히 이렇게 정답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관상적 믿음이고, 믿음의 관상 때문입니다.
먼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런 믿음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는 관상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사랑이라는 믿음이 있고,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져도 그것이 바로 은총임을 봅니다.
그리고 벌어진 일들과 그 일을 벌인 인간들을 볼 때 그것들에 의해 현혹되지 않는 하느님 관상을 하기에
그것들로 인해 실망이나 절망이나 포기를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 생명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여태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여태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중단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좌절감이나 절망감 때문에 중단치 않는 사랑입니다.
내 사랑을 배신하는 그 인간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을 첫 자리에 모셔라>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충실히 머물렀고 그래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여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혹,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었다 해도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하고 한 번 기도드리는 것이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수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값집니다.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길 기도드립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
(성 알퐁소)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가시나무 새>
- 시인과 촌장(하덕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
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매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은 쉴 곳 없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으면, 이미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 손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사목회에게 『하.사.시.』를 읽히는 이유>
2005년 영화 <아일랜드>에서 줄거리는 두 명의 주인공인 링컨 식스 에코(Lincoln Six Echo)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링컨은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고도로 통제된 시설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구 오염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고 믿습니다.
외부 세계로의 유일한 탈출구는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오염되지 않은 곳으로 추정되는 ‘섬’으로 가는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링컨은 시설의 주민들이 실제로 외부 세계의 부유한 기증자에게 장기 이식 및 기타 생물학적 요구 사항을 제공할 목적으로 자란 복제품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섬은 조작된 개념입니다.
선택된다는 것은 실제로 장기 적출이나 대리모 역할을 위해 파견되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링컨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조던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합니다.
조던은 좀처럼 믿지 않습니다.
조던이 섬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링컨의 끊임없는 설득과 여러 정황을 통해 조던도 조금씩 링컨을 믿어갑니다.
그래서 아일랜드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함께 탈출을 감행합니다. .
본래 세상은 오염되지 않았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유전자를 준 이들에게 장기를 주기 위해 키워지는 클론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조던이 링컨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면 둘은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한 판단이 일치하지 않으면 둘의 사랑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누구는 사탄이 좋다고 하고 누구는 하느님이 좋다고 한다면 둘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요?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느님과 대등한 존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라고 하십니다.
심판의 권한을 넘긴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당신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라고 하십니다. .
어차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심판할 것이면 아버지가 심판하면 되지 왜 아드님께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을까요?
아드님의 심판이 당신의 심판과 일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당신과 대등하게 대하시는 방식입니다. .
저도 조원동 성당에 왔을 때 주교님께서 “전 신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고 하셨습니다.
주교좌 성당의 주인은 주교님입니다.
주교님께서 저에게 전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이는 제가 판단하는 것을 주교님께서 인정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교님께서 저를 대등한 위치로 올려주시는 방법이셨습니다. .
아기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으로 집어 먹으며 자신과 주위를 더럽힙니다.
이는 부모가 보기에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모릅니다.
그러면 아기와 부모는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아기에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치할 때 그들은 비로소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 수준으로 우리가 올라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
저는 사목회 위원들에게 ‘하.사.시.’를 읽힙니다.
저의 삶의 옳고 그름은 이 책을 기준으로 합니다.
만약 이분들이 매일 이 책을 읽고 자신들의 삶을 이 책의 모범과 일치시킨다면 저는 이분들에게 저 자신의 모든 권한을 맡길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저 혼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심판하시는 대로 심판하실 분이기에 아버지의 모든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것처럼,
신자들은 사제의 옳고 그름에 일치해야 하고, 사제는 주교의 옳고 그름이 일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대등해지기 위해 우리의 모든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이 그리스도의 그것과 일치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영생은 매일 우리 눈앞에 선물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무상으로 베푸신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믿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바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놀랍게도 그 선물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공평한 선물입니다.
마치 눈이 그 어디든 골고루 내리듯, 아침 서광이 세상 방방곡곡을 고루 비추듯, 그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선물을 주고자 하는 쪽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끝까지 거부하고 도망가는 사람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어 밝은 태양 빛이 비칠 때, 온몸으로 만끽하지 않고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막아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동족 유다인들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유다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로 고위층 인사들, 나름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 율법의 대가들로 자칭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들은 예수님을 범법자로 몰고 갔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위반한 죄, 신성 모독죄를 들이대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너무도 쉽게 선물을 받아안고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가난하고 고통받던 백성이었습니다.
천대받고 무시당하기를 밥 먹듯이 하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이었습니다.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단순하고 소박했던 그들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말씀 앞에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꺼이 수용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살아생전 하느님을 뵙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오늘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영생이 매일 우리 눈앞에 선물처럼 펼쳐지는데,
우리 스스로 눈을 막고 돌아서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수시로 주님 축복이 우리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을 피하려고 어둡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인데도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쳐 주시자(요한 5,9),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생각해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요한 5,16).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안식일에 쉬지 않고 병자를 고쳐 주는 일을 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는, 하느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쉬시지 않고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시던 일’은 천지창조 작업을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일’은 인간들을 보살피시고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창세기의 ‘쉬셨다.’ 라는 말은 천지창조 작업을 마무리하셨다는 뜻일 뿐이고,
하느님께서는 그 작업 후에도 쉬시지 않고 인간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시고 보호하시는 일은 계속 하고 계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시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에
당신도 요일과 상관없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만일에 한 순간이라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중단하신다면, 그 순간 우주 전체가 얼어붙을 것입니다.
(생명력을 잃어서 모든 것이 소멸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날마다 숨을 쉬는 일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끊임없이 숨을 쉬고 있습니다.
만일에 숨 쉬는 것을 멈춘다면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그 ‘숨’과 같은 것, 또는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또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존재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력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고, 살 수 있습니다.
그 생명력이 끊어지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뛰고 있는 ‘심장’으로, 또는 온 몸 속을 흐르는 ‘혈액’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가 많은데,
만일에 심장이 뛰는 것을 멈추고 혈액이 흐르지 않으면, 극심한 고통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잊어버리고 있어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고, 우리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브 1,3)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
더 줄이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과 모든 말씀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요한 5,25)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방법은 복잡하고 어렵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곧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방법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 6,68) 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나중으로 미루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당장 서둘러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지금’이 곧 ‘영원’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나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믿어라.
내 말을 믿고 내 뒤를 따라라.”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신경 쓰고 관심 갖고 걱정하다가 정말로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거나 버려도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것 하나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이고, 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또는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아무 쓸모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들, 우리가 능동적으로 버려야 할 쓰레기들입니다(필리 3,8).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닮의 여정” - 하느님 중심의 아버지의 자녀다운 삶>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
(시편 146,1-2)
하루하루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참 좋고 귀한 선물입니다.
3월은 성 요셉 성월이자 은총과 회개의 사순시기입니다.
3월31일 부활 대축일까지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참 좋은 시간들입니다.
문득 어제 어느 노정치가에게 방송시 언뜻 들은 삼실(三實)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진실(眞實), 절실(切實), 성실(誠實)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세 말마디는 그분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려는 사람이라면
삼실의 삶에 이어 삼감(三感)의 사람이 되어야 하나, 삼망(三望)의 사람이 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감사(感謝), 감동(感動), 감탄(感歎)의 삼감(三感)이라면,
절망(絶望), 원망(怨望), 실망(失望)이 삼망(三望)입니다.
참 감사하고 신기한 것은 제가 여기 요셉 수도원에 만36년 동안 정주하면서 막막하고 답답했을 때는 있었어도 결코 삼망(三望)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하느님 믿음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삼망(三望)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막막하고 답답할 때 참 많이 바라봤던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이었습니다.
자주 되뇌었던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말마디였고, 이어 참 많이도 인용했던 <하늘과 산>이라는 제 자작 애송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1997.2
무려 27년 전 시이지만 읽을 때마다 늘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늘이 평생 도반인 하느님을 상징한다면 산은 저를 상징합니다.
하늘과 산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과연 날로 신뢰와 사랑 깊어지는 하느님과의 관계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아, 여기가 천국입니다.”
아름다운 수도원 경관에 부러워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불편하고 힘든 남남만도 못한 관계라면 거기가 연옥이요 지옥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공동체 내에서 관계의 훈련,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에 공동기도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이란 물음만 있고 하느님이란 답이 없으면 평생 헤매게 됩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과의 관계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이사야 예언자이고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하느님은 아버지로 더 구체성을 띄게 됩니다.
3월 사순시기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 해야 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참된 영성의 표지가 겸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은 얼마나 좋은신 분인지요!
은총의 사순시기에 참 적절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의 참 아름다운 고백시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 주었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니 인공지능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영적 진보라기보다는 인간 공동체 정신의 퇴행, 영성의 쇠퇴를 보여줍니다.
<녹색평론> 185호 2024년 봄호의 특집은 “인류는 인공지능 시대를 건너갈 수 있을까”였습니다.
인공지능이 추세라 하지만 저에게는 “판도라의 열린 상자”처럼 웬지 인류의 미래가 불길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시를 쓰려면 하느님의 예언자이자 시인인 이사야처럼 이런 희망과 생명, 빛이 넘치는 구원의 시를 써야 할 것입니다.
평생 도반이자 평생 착한목자이신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 있는 참사람의 원형 이사야 예언자요, 예언자의 다음 하느님 사랑의 고백은 절정(絶頂)이자 절창(絶唱)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못 박듯한 하느님의 고백은 얼마나 절절한지요!
바로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도록 깊습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지칭하는데 어머니를 능가하는 “사랑의 어머니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어머니로 비견되는 하느님에 이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주저함없이 아버지로 고백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밀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깊이할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원대한 평생목표가 하나 있다면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하느님을 날로 닮아감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관계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백을 과감히 믿고 사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보여주신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 지금이 바로 그때, 구원의 때입니다.
모든 말씀에 앞서 반드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마디가 강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독보적인 관계의 깊이를 지닌 아들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날로 가까워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3월 성 요셉 성월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양부로서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父性)과 하느님 어머니의 모성(母性)을, 양성(兩性)을 겸비한 참으로 온전한 요셉 성인처럼 생각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기르시는 아버지시요,
정결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며,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께 간절히 청하오니,
하느님께 빌어 주시어,
저희가 예수님을 사랑하며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또한 죽을 때에 저희를 지켜 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심판을 뛰어넘는 구원의 열쇠>
서른여덟 해나 앓아오던 이를 고쳐주신 날이 하필 안식일이라, 유다인들은 안식일 법을 무시한다는 혐의를 씌워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수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그런데 이 말씀은 유다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맙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죄인인 주제에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 운운하다니!"
분명 안식일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 쉬신 일곱째 날을 기념합니다.
그러니 이를 수호하려는 유다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일곱째 날을 쉬라 하신 건, 영육의 휴식이 필요한 모든 이들, 보호받지 못하는 종과 짐승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제외됨 없이 차별 받지 않고 쉬게 하시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안식년에는 땅마저도 양분을 축적하도록 쉬게 놀리니까요.
쉼의 날을 통해 사람을 회복시키고 되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도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부를 축적하려고 약한 이들을 착취하고 제 잇속만 챙기는 불균등한 거래를 금지하시려는 조치였지만,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 정신은 희미해지고, "뭐는 되고 뭐는 안 되고" 하는 세부 항목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사랑의 계명에 이바지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리사욕을 챙기는 인간적·세속적 일은 목적 자체에서 구분이 되어야 하지만, 문자에 집착하면서 지킬 항목이 늘어나니 숙고와 성찰은 그쳐버렸습니다.
"아,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으니까,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결론만 말해주세요!" 하는 식으로 율법을 익히다 보니,
원 뜻과 정신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도는 묻혀버리고 그저 기계적으로 가부를 판별하는 방법론만 늘어나고 만 것이지요.
한번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릴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 복음사가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꽤 긴 부분을 반복해 할애하는 건,
성자이신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이 앞으로 펼쳐질 파스카 여정에 단초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에 대한 수용과 믿음이 듣는 이들의 구원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요한 5,22)
심판의 권한은 이제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이양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또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고 하시는데, 정말로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나약하고 부족하며 탐욕으로 들끓는 자신의 실존적 처지를 처절히 체험하며 귀양살이 인생 순례길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이라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엄청난 위안을 받습니다.
사실 철저한 믿음으로 아무리 열심히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심판이라는 단어 앞에 온전히 자유롭기는 어렵기에 그렇습니다.
과연 내 주제에 심판이라는 관문을 제대로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서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것, 그것이 심판을 뛰어넘는 구원의 열쇠라고 하십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는 마치 목적지에 이르는 지름길을 만난 듯, 지루한 컴퓨터 작업에서 단축키를 익힌 듯 반갑기 그지 없는 말씀인데, 유다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는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이는 어떻게 심판을 피하게 될까요?
그 답은 오늘 독서에 들어 있습니다.
"설령 여인들은 (제 젖먹이를) 잊는다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 답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의 절정이 제 몸에서 낳은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이 그보다 더 짙고 깊고 뜨겁고 애틋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런 하느님께서 아들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믿는 이에게 어찌 심판의 항목들과 잣대를 들이대실 수 있겠습니까?
사랑으로는 도저히 못할 일이 바로 그런 심판일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심판에 대한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을 믿고, 그 사랑의 결정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어느 여인보다 애끓는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율법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 가득한 사랑의 프리즘으로 우리를 비춰보시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심판의 다른 말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
(입당송)
오늘 미사를 여는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과연 구원은 하느님의 자애를 입고 다가옵니다.
믿는 우리에게 자애는 심판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1987년 겨울입니다.
저는 제대를 5달 앞둔 병장이었습니다.
일석점호를 앞둔 시간 내무반이 조금 소란스러웠습니다.
일직사관이 조용히 점호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낮에 일직사관과 장기를 두기도 했고, 평소에 친하게 지냈기에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일직사관도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우연히 손을 휘둘렀는데 그만 저의 뺨에 맞았고, 그때 저는 이가 깨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의도 된 바도 아니고, 저도 조용히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깨진 이에 크라운을 씌었습니다.
어느덧 37년이 지난 먼 옛날의 기억입니다.
댈러스에 오기 전부터 이에 불편이 있었는데 별 일 아닌 줄 알고 스케일링만 받고 댈러스로 왔습니다.
진통제를 먹어야 할 정도로 불편해서 치과엘 갔습니다.
검사 결과 크라운을 씌운 이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고 합니다.
신경치료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니 발치를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맨 안쪽에 있는 어금니이기에 굳이 임플란트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동의하였고, 20분 정도 걸려서 발치를 끝냈습니다.
‘앓던 이 빠지는 기분’이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발치하고 나니 통증도 없었습니다.
친절하신 의사 선생님은 제게 발치 후에 지켜야 할 사항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먼저 거즈를 발치된 부분을 넣어주고 이를 꼭 닫아 압력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압력이 있으면 쉽게 지혈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은 자연 치유력이 있어서 곧 새살이 돋고, 아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탄산음료를 마시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탄산가스가 발치 부분과 만나면 아무는데 지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발치 후에는 빨대를 사용하지 말고, 침도 자주 뱉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혈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음식도 죽이나 부드러운 것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죽을 먹었습니다.
음주와 흡연을 일주일 정도 금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지킬 수 있었는데 음주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댈러스에 부임해서 1주일도 안 되었기에 단체들과의 첫 인사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가볍게 한두 잔 마시면서 첫 인사의 자리도 마칠 수 있었고, 댈러스에서의 발치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모두 소중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心身不二’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음이 없는 몸처럼 사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갈등과 분쟁은 그릇된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몸은 하나의 개체를 이루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모두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음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몸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몸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은 어쩌면 인류라는 같은 영혼의 아픔과 고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바람이십니다.
막힌 것은 뚫어 주시고, 얼어붙은 것은 녹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온 몸을 바쳐서 우리들 구원을 위한 ‘숨구멍’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얼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질식해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공동체에 사랑과 기쁨을 주는 ‘숨구멍’과 같은 존재인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 미국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늦은 밤에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여성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여자는 이제 곧 자살할 것이라면서 자기의 지금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새벽까지 이 여성과 대화를 나눴고, 그녀가 삶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들을 하나하나 제시했습니다.
긴 설득 끝에 이 여성은 목숨을 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중에 이 여인을 만난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근거 중에 어떤 것이 그녀의 결심을 번복하게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것 중에는 그 어떤 것도 제게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결심을 번복하고 다시 힘을 내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녀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프랭클 박사의 자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세가 마음을 바꾸게 했고 자기 삶을 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말로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면서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자세에서 힘을 얻게 되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결코 혼자가 아님을, 나의 말도 귀 기울여 주는 함께 하는 누군가가 있음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늘 함께 하는 주님의 존재를 느끼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말을 들어주시고, 당신의 따뜻함 품으로 안아 주십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을 어기셨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시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지금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죽이려는 이유만을 찾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사랑임에도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니,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합니다.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 자체를, 즉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 삶 안에서 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아보는 사람만이 큰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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