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터는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명기로 꼽히는 김부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부용金芙蓉(1812~1861, 49세)은 자는 운초雲楚, 호는 부용芙蓉으로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김부용은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었다.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부용은 기생이었으나 예술과 시문에 빛을 발휘해 성도의 ‘설교서薛校書’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김부용은 이 같은 허명을 내던지고 금수강산을 유람한 후 문을 굳게 닫고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녀를 이해해 주는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1755∼1845)을 만나고 부터 여장부다운 시정을 담은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운초당시고雲楚堂詩稿’와 ‘부용집芙蓉集’에 300여 편이 있다.
김부용이 회자되는 이유는 당대에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김부용이 성천기생으로 이름을 날리던 20대 후반이었다. 평안도로 유람 온 77세 김이양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연천 김이양은 예조․이조․병조․호조판서 등을 거쳤고 1826년 6월 72세에 벼슬에서 은퇴했을 때 순조 임금으로부터 ‘봉조하奉朝賀(정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이 관직에서 물러날 때 평생 녹봉을 받는 노후가 보장된 명예직)’를 하사받았다. 김이양은 평생 동안 꿈꾸던 산수 유람을 떠났는데 이때 평양에서 김부용을 만나게 된 것이다. 마침 대동강 연광정에서 평안감사 연회가 있었다. 평안도 관할구역 내 재임 중이던 김이양의 제자 성천부사 '유관준劉寬埈'이 기생 김부용을 데리고 가 인사를 시키면서 ‘저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오니 대감께서 맡아 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김이양이 대답하기를 ‘나는 77세에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하니 사양하겠다’며 그의 청을 거절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19세 김부용은 다음과 같은 말로 김이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면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세상에는 30객 노인이 있는가 하면 80객 청년도 있는 법입니다.’ 김이양은 김부용의 말에 탄복하고 받아들였다. 마침 김이양은 3년 전 부인을 잃고 혼자된 상태였기 때문에 김부용을 소실로 들이는데 큰 부담이 없었다. 덕분에 김부용은 ‘정실부인正室夫人’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김이양이 한양의 판서로 재수되어 몇 개월 떠나가 있을 동안 김이양을 그리워하며 시가 바로 ‘보탑시寶塔詩’다. 시는 탑 모양을 이루고 있어 ‘층시層詩’라고도 하며 ‘부용상사곡芙容相思曲’으로 유명하다. 다시 만나길 학수고대하던 김이양이 김부용을 불러 한양 남산 중턱에 신방을 꾸몄다. 이름하여 ‘녹천당綠泉堂'이다. 김부용이 26세, 김이양이 83세로 벼슬에서 물러나자 두 사람은 ‘원앙鴛鴦’ 처럼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만끽했다. 인연을 맺은 지 15년째인 1845년 이른 봄 김이양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 김부용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는데 이때 김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김부용에게 김이양은 사랑하는 남자이자 스승이었고 동지였다. 김부용은 그때부터 외부와 일체 교류를 끊고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눈을 감으면서 ‘내가 죽거든 대감님이 묻혀있는 천안의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 유언을 남기고 녹천당에서 49년의 생을 마감하였다.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기생으로 살아야했던 김부용의 기구한 운명을 김이양은 재능을 펼치며 당당히 살 수 있도록 방패막이 역할을 해 주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오직 타버린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나긴 밤을 새운 아름다운 불빛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쓰러지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영원한 지속이다’ 릴케Rainer Maria Rilke의 말이다.
․ 참고 : 조선 3대 기생은 ‘황진이, 매창, 김부용’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김부용’ 대신 ‘산홍’이라고도 한다.
김부용(金芙蓉) <제1話>
녹두꽃 빛깔의 하늘엔 새털구름이 몇 가닥 떠 있을 뿐 화창한 날씨다. 늦여름이지만 새벽공기는 달콤할 정도로 신선하다. 그런데 부용(金芙蓉·기명秋水·호雲楚·1820~1869)은 잠을 설쳤다. 신임사또가 열흘 후에 부임한다더니 모레 온다는 전갈이다.
환영을 준비하라는 전갈이 왔다. “부용아 새 사또가 모레 오신단다. 너도 준비를 해야겠다.” 수양모 설매(雪梅)가 호들갑을 떨며 들어왔다.
부용은 엊저녁에 잠을 설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강선루로 나가 머리를 식히려고 채비를 서두르는 찰나였다. “어디 나가려느냐?” “예 어머니 머리가 아파서 강선루에 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려고요...”
“새 사또께서 모레 오신다는데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번에 오시는 사또는 젊은 사또래. 인물도 옥골선풍에 헌헌장부로 인심까지 좋다는 소문이야! 젊은 사또가 열흘 후에 오신다더니 모레 오시는 것을 보면 네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모양이야... 이 기회에 우리 한몫 잡자! 어느새 네 나이도 열아홉이 되었어. 기생나이 이십이면 환갑이 되는 거야. 우물쭈물하다 너도 내 꼴이 되기 십상이야... 젊은 사또는 너를 보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거야! 이때 한 만냥 받아내야 돼...” 부용은 설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천(成川)사또는 이상하게 자주 바뀌었다. 일년을 겨우 넘길 뿐 이년을 채우는 사또는 지난해 떠난 이기연(가명) 뿐인데 그의 후임으로 서희순(가명)이 온다는 전갈이다. 옥골선풍의 젊은 사또라는 말에 부용도 마음이 쏠렸다.
이왕 수청을 들 바에야 헌헌장부 젊은이한테 몸을 여는 것이 마음도 편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또는 욕심이 있어 밤새 아래위로 오르내리기만 하지 정작 사내구실은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부용이 어느새 사내를 접한 지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숱한 사내들이 욕정을 채우고 떠나갔으나 마음을 흔들었던 남정네는 한사람도 없다. 그런데 젊은 옥골선풍의 사또가 온다는 말엔 왠지 궁금해져 갔다. 어차피 수청을 들을 바에야 늙수그레한 사또보다 헌헌장부의 젊은 사또에게 몸을 내어주는 편이 나으리란 생각이 들어서다.
열두살에 기적에 올라 4년 후인 열여섯살에 성천 명기(名妓)가 되어 새로 부임하는 사또의 단골 수청 기생이 되었다. 성천 사또가 자주 바뀌는 이유는 명기인 부용이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한다. 소문에 불과한 얘기지만 아무튼 일년을 겨우 넘기나 싶으면 예외 없이 새 사또가 오곤 하였다.
이유도 다양하다. 몸이 안 좋아 사직하는 사또에서부터 늙은 부모 봉양까지 임금이 들으면 사임을 윤허(允許·임금이 허가함)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들이다. 그런데 사실은 성천 명기인 부용을 오래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성천 사또로 부임을 희망하는 인물이 너무 많아 눈치가 보이기도 하지만 생명에 위험을 느껴 일년 정도로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 떠나간다는 얘기도 나돈다.
부용과 한번 합방을 하면 그만큼 치명적이라는 얘기다. 시와 노래, 그리고 춤에 미모까지 뛰어나 성천의 오절(五絶)이라 할만하다. 송도의 황진이(黃眞伊)·박연폭포(朴淵瀑布)와 서화담(徐花潭)을 ‘송도삼절’이라 한데에 비유한 것이다.
사실 부용은 평양 황진이·부안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의 3대 시기(詩妓)로 꼽히고 있다. 세 시기 모두 기생으로 천부적 문재에 뛰어나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예술의 창조적 에너지 메카로 세월의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다.
부용은 기생으로서 절정기다. 기력(妓歷) 3년이지만 그동안 거쳐 간 사또들이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사대부들이다. 사또라는 지방 목민관에 불과하지만 부용을 품으려고 경쟁적으로 성천 사또를 지망하는 현실적 배경이다. 이번에 부임해 오는 옥골선풍의 젊은 사또 역시 부용을 품으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뜨거운 속내일 게다.
성천 사또는 부용과 같이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지면 잠자리에 든다. 일심동체다. ‘옥 같은 얼굴 얼음 같은 살결이 애틋하게 여위었는데/ 봄바람에 열매 맺고/ 푸른 가지도 돋았는데/ 그치지 않고 봄소식을 알려주니 인간세상의 한스런 이별보다 오히려 나아라.’ 《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