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토지소유의 성격에 대한 연구사는 화전(和田:와다)의 토지국유설에 의해서 출발된다. 그는 복전(福田:후꾸다)의 봉건제 결여론을 보강하고 수많은 국유지분쟁을 그들에게 유리하게 처리하여 토지조사사업의 악랄성을 은폐하려는 의도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던 사적 토지소유의 발전조차도 그는 오히려 토지소유의 혼란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항하여 전후의 견해들은 모두가 토지사유설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지사유설은 당시 농민들의 “자기 노동에 기초한 소유”의 본원적 축적을 확인하는 데에만 그쳤을 뿐 국가적 토지소유와 사적 대토지소유가 부재하였음을 증명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사회의 봉건적 토지소유는 농민적 토지소유와 그 위에 존재하는 타인 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토지소유라는 중층적 구조를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자유로운 농민적 토지소유의 성립은 곧 이러한 타인 노동에 기초한 토지소유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19세기의 경우 이러한 타인 노동에 기초한 토지소유의 해체와 농민적 토지소유의 발전은 과연 어디에까지 이른 것일까? 최근의 연구들은 식민지 권력에 의한 본격적인 원축(源畜)과정이었던 토지조사사업에 이르기 직전에, 이미 한국의 토지소유는 사실상의 근대적 일물일권적 소유에 도달해 있었다는 점에 일치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자생적 원축(源畜)이 봉건사회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확보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한 “자기의 노동에 기초한 소유”의 내재적 발전은 무엇보다 집약농법의 혁신적 발전에 의해 보증된 것이라 하겠다.
먼저 궁도박사(宫嶋博史:미야지마 히로시)는 조선시대를 연작농법단계로 보고 이 단계에서 자기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토지소유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앙법〔水田〕과 2년 3작식〔旱田〕 작부체계의 발전으로 농업생산력 발전이 강화되며, 이것은 오히려 원축을 통하여 농민적 토지소유를 해체해 나가는 방향을 보였다 한다. 그러한 자생적 원축과정과는 달리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토지수탈은 세계사상 유례없이 급속하게 농민을 토지소유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켰다는 점에서 대비한다. 즉 그는 종래 강조되어온 식민지권력의 군사적·폭력적 수탈보다는 이미 사실상의 근대적 토지소유에 가깝게 발전된 토지를 법률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통하여 분해해 나갔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이영훈은 비교적 궁도(宮嶋)의 주장에 충실하면서 오히려 그보다 나아가 조선시대 농민층의 사적토지소유지화의 획기를 18세기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특히 “농노제적 소경영의 일반적 성립”이 궁도의 주장처럼 조선 초기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이앙법의 광범위한 보급이 전제된 18세기 이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의 특유의 설인, 호(戶)의 분석을 통하여 이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는 지금껏 주호경영내에서 은폐된 비자립적 협호경영이 그 스스로의 자립성을 확보하는 단계를 ‘제4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단계라 보고, 그 시기를 18세기 이후로 잡고 있다. 그의 이러한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 궁도(宮嶋)의 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보다 이 시대의 자본주의 맹아설을 철저하게 비판한 뒤, 국가적 토지소유(공동체적 소유의 국가적 집중) 및 국가권력의 전제성이란 아시아적 특질이 한층 강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그는 그러한 근거에서 식민지화 과정에서 나타난 일제의 토지 약탈은 구래의 전제적 국가권력을 계승함으로써 아시아적 특질과 반동성을 지녔다고 보는 듯하다.
(2) 19세기 농민의 토지소유 성격
무엇보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점은 이들은 모두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종래와 같은 전통적 방법론과는 달리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만 나누어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궁도(宮嶋)는 중촌철(中村哲:나까무라)의 국가적 농노제론을 기준으로 검증을 시작하였지만, 문제는 조선시대가 이 가설에 제대로 맞지 않으므로 ‘제3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가 본 조선 전기사회는 ① 솔거 노비 등의 예속적 노동력을 이용한 직영지경영을 행한 유형과, ② 소농민경영에 토지를 대여하여 지대를 수취하는 유형의 사적 대토지 소유가 지배적으로 존재하였으며, 이중에도 ① 유형이 ② 유형보다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있어 노비는 전체인구의 1/3~1/2에 이르렀으며 그 지배적인 부분이었던 솔거노비들은 자기 경리를 가진 유형(솔하노비)이 대부분이어서, 이들은 노동노예가 아니라 농노와 같은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이들 솔하노비의 부역노동에 기초한 직영지적 농장경영이 이 시대의 사회적 생산력을 대표하였음이 분명한 이상, 조선 전기에서 조선 후기로의 이행은 고전장원단계에서 지대장원단계로의 이행임이 분명하며, 이의 규명은 무엇보다 이 시대 농법전환의 본질파악에 기초해야만 할 것이다.
최근의 이론들은 하나같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사정에 넣은 소유의 역사”를 목표로 농법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된다. 17세기 후반부터를 전환기로 한 새로운 집약농법의 확립은 대체로 주지하는 바와 같이 18세기 후반쯤에 일단 완료되었다. 이는 종래의 분종중심에서 분전의 추비를 요체로 하는 시비법 전환과 노동생산성 중심의 축력우선에서 다양한 인력농구의 집약적 개발이용이란 농구전환을 그 요체로 하였다. 이러한 농법전환문제는 무엇보다도 토지생산력을 크게 높임으로써 소농민 경영의 안정화와 발전에 기여하였으므로, 병작반수에 기초한 순수장원제적 지주경영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와 같은 비록 작은 사적 대토지 소유의 형태를 띤다 해도 지주경영은 분명히 발전적 양상을 보였는데 무엇보다 노동지대에서 생산물지대로의 발전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생산물지대는 타조에서 도조로 점차 정액화 되었으며, 그러한 경향은 상업적 농업이 주로 이뤄진 한전(旱田)에서 두드러졌다. 여기에서 비록 달팽이 걸음이지만 부농층 가운데서 자본주의 맹아가 존재할 여지가 충분하였던 점이다.
한편 이영훈은 호적분석에서 밝혀진 조선 초기의 복합가족 형태에서 연역해낸 주호―협호 관계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였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노비의 경우는 안정적인 가족 구성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듯이,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압도적인 조선 전기 그리고 농법혁신에 따른 소경영의 자립이 분명하였던 조선 후기의 경우, 그 존립범위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가적 지배·국가적 토지소유의 존재도 역시 지나치게 과장하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타인의 노동의 착취에 근거하는 소유로서의 국가적 토지소유는 사적 대토지소유와 더불어 법제상 보다 상위의 것으로 농민적 토지소유 위에 존립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어느 것이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였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뿐만 아니라 과전제·직전제 등의 수조권 분급제의 해체 후인 조선 후기에 있어 국가적 토지소유는 역전·둔전 등의 국유소작지를 제외한 민전에서는 점차 강도를 잃어갔음이 분명하다. 봉건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국가권력의 하부구조 파악은 점차 허구화 되었으며, 그러한 사정은 양전사업의 지나친 지체 등에서 더욱 분명히 보여진다. 고전장원단계로부터 지대장원단계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18세기 이후부터의 집약농법의 획기적 발전에 기초한 농민층의 양극분해가 진행됨으로써 농민은 소상품 생산자로 점차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농민층 분해는 봉건사회 안에 자본주의 맹아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즉 그것은 농·공간의 분리과정과 더불어 농업에 있어 부농경영과 공업에 있어서의 선대제·매뉴팩쳐 경영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립된 농민적 토지소유는 이제 19세기에 이르러 더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힘입어 사실상의 일물일권적 토지소유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3)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태와 토지개혁사상
개항기 한국의 토지는 민유지(民有地;民田)·관유지(官有地)·궁유지(宮有地)로 나눠져 있었다. 이는 조선 전기의 토지제도인 과전법과 직전법이 임진왜란으로 붕괴됨에 따라 성립된 것으로서, 기본적으로 농민의 경작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있어 민전은 대부분 지배적인 생산관계였던 지주·소작관계하에 놓여 있었으며, 특히 지주적 토지소유가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한국의 사회계층은 지주계급이 1할, 자작농이 2~3할 정도, 소작농이 6~7할 정도로 점하였던 것을 보아도 지주적 토지소유가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주적 토지소유는 소작지의 황폐화와 같은 소극적 저항으로부터 소작료의 항조·거납운동 등의 대지주투쟁과 봉건정부의 통치질서를 거부하는 농민전쟁의 와중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농민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을 위한 토지 개혁사상은 실학에서 비롯되었다. 최초의 토지개혁론을 편 반계 유형원의 균전론은 토지국유의 원칙을 세웠으며, 뒤이어 제기된 성호 이익과 연암 박지원의 한전론은 토지소유의 상한과 하한을 법으로 정한 뒤 장기에 걸친 매매를 통하여 토지를 재분배하고자 한 온건한 것이었다.
그러한 실학의 토지개혁사상은 다산 정약용의 여전론과 정전론에 의해 집약되었다. 전자에서 다산은 봉건적인 지주소작제를 철폐하고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약 30여 호를 단위로 협동농장을 만든 뒤 그 생산물은 투하노동량에 따라 분배한다는 혁신적인 농지제도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보다 점진적 인 방안으로서 소작농민을 독립자영화하려는 보다 현실성 있는 개혁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적인 토지개혁안들은 결국 봉건지배층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농민전쟁을 전후하여 농민층에 의해 끈질기게 주장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민전에서의 토지소유권은 국가에서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며, 범법행위를 하지 않았을 경우에 국가에서 관권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인없는 땅을 타인에게 이급하거나 한광처(閒曠處)를 신전으로 개간한 자에게는 그 신전의 소유권을 인정해 줄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소유권은 당시의 토지대장인 양안과 토지문기로서 표시되었으며, 양안에는 지목·지형·지위등급·면적·사표(四標)·전주(田主) 등이 기록되었다. 이러한 양안은 한 번 양전에 의해서 작성되면 정정이나 첨가는 일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법제상(경국대전)의 연한인 20년마다의 개량이 지켜지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7,80년이나 100년이 넘도록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토지의 소유주는 현실적으로 매매에 의하여 빈번히 교체되고 있었으며, 토지가 매매되면 매매문기가 작성되고, 이것이 개량시(改量時)의 토지소유권 이전을 위한 증빙서류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토지의 매매문기에는 매매 연월일, 매매 당사자들의 서명날인, 증인·집필인의 서명날인, 토지의 소재지, 자호지번(字號地番), 전답면적 등이 기록되었다.
역시 그러한 사정은 궁방전의 절수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이른바 궁방전은 임란 후의 혼란기에 양안(量案)상의 황무지를 국왕의 가족 및 친족에게 왕패를 내려 하사한 전답이었다. 그러나 점차 개간이 진행되어 나가자 이들 토지의 실제 경작자들은『경국대전』·『수교집록』·『양전사목』 등을 근거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이 제도는 점차 18세기부터는 강력한 농민저항에 부딪쳐 ‘절수’보다는 토지구입 비용을 궁방에다 내리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결국 “무릇 놀고 있는 땅은 개간한 자를 주인으로 한다”는 『속대전』 호전(戶典)조의 규정이 정착되었을 뿐 아니라, 궁방의 권위와 왕패·입안(立案:증명서)을 내세운 궁차·도장들의 횡점은 농민들의 끈질긴 소송과 문기 앞에서 패소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경작권을 기반으로 발전된 토지소유권의 확립 그 자체가 바로 근대법적 소유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농민적 토지소유의 발전을 표시하는 기준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당시의 현실적인 소유권은 애초부터 아무런 신분적인 제약이 없었으며, 누구든지 능력만 있으면 마음대로 토지를 매입하여 자손대대로 상속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민전에서부터 경작권을 중심으로 한 토지소유권의 확립은 무엇보다 봉건적 지주·전호관계의 재생산과 그러한 질곡에도 불구하고 자기노동에 기초한 완전한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을 위한 치열한 농민투쟁을 유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일본을 선두로 한 외래자본주의의 고리대적·전기적 토지침탈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2) 일제의 토지침탈과 농민투쟁
(1) 개항 초 외국인 토지소유문제
앞서 우리는 19세기에 이르면 집약농법의 획기적 발전에 힘입어 근대법적 토지소유에 가까운 토지소유가 성립되었을 뿐 아니라 완전한 농민적 토지소유를 지향한 농민투쟁이 도처에서 전개되고 있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1876년의 개항은 그들 일족의 봉건적 특권을 위해 일본을 위시한 자본주의 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던 민씨일파집권의 결과였다. 개항에서 갑오농민전쟁까지의 19년간은 대체로 일본의 거류지 무역독점기(1876~1882)와 청·일 양국의 각축기(1883~1895)로 나누어 진다. 특히 전자의 시기에 있어서 한국무역구조는 자유무역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무관세 무역의 강제, 일본화폐의 유통, 영사 재판권 및 조계제도에 비호된 거류민의 증대, 그리고 일본상인에 대한 자금예속화 등을 주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3년부터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대외무역은 청·일 양국 상인의 격렬한 경쟁양상과 일본의 상대적 후퇴를 보여주었다.
개항을 맞아 조선정부는 외국인들의 한국내에 있어서의 토지·가옥 등의 부동산 소유를 금지하는 규정을 다소나마 완화하고 있었다. 즉 병자수호조약의 제4관에 실린 “조선국 정부는 두 항구를 개설하여 일본 국민의 차지(借地), 건축 및 거주의 자유를 허한다”는 규정이 그것이다. 이는 부산과 장차 개항할 항구에 일본인이 토지를 빌려 집을 짓고 거주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규정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여기에는 일본인이 개항장일망정 토지를 소유해도 좋다는 명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사정은 한미조약 제6관의 “해당하는 장소의 정한 경계 안에서만 거주·채방(債方)·조지(租地)·건옥(建屋) 등을 하도록 한다”〔准其在該處所定界內, 居住·債方·租地·建屋, 任其自便〕라는 문귀에서 역시 확인되어진다. 그러나 1883년에 체결된 한영조약(제4관 제1항)에서는 ‘영조(永租)’ 및 ‘전행영조지(轉行永租地)’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 조약 제4관 제4항에서는 “외국인(영국인)이 조계와 그 주위 10리 이내에 있어서는 토지 및 가옥을 소유하고 납세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이른바 개항과 더불어 한국정부는 조계내의 차지(건축·거주)만을 허용한 처음의 조약문을 완화하여 한영조약에서는 조계와 그 주위 10리 안의 토지 및 가옥에 대한 외국인의 소유를 허용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와 같은 외국인 토지소유는 지방세 등의 세금을 납세함으로써만 보증되는 것이었다.
한편 이와 같이 제한된 외국인 토지소유 허용방침은 일본인들의 토지약탈에 대한 일정한 제약을 가하려는 광무연간의 양전(量田)·지계(地契)사업에서의 ‘지계아문직원 및 처무규정’에서도 그대로 견지되었다.
“산림·토지·전답·가사(家舍)는 대한국인(大韓國人)외에는 소유주가 될 수 없을 것. 단, 각 항구내에는 이 한도에 있지 아니할 것”(제10조)이란 내용이 그것이다. 즉 한국인외에는 누구도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도 각 항구내에는 이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광무(光武)정권은 각국과의 조약문으로 허용된 범위를 제외하고 관유·사유의 전토·산림·천택(川澤)·가옥을 외국인에게 몰래 팔거나, 몰래 붙어서 이름을 빌려주거나 혹은 이름을 빌려준 사람에게 몰래 파는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는 법규도 마련하고 있었다. 또한 해당 관리로서 이를 팔도록 허용한 자도 같은 죄에 처한다는 ‘국권양손율(國權攘損律)’이 『형법대전』(1905)에 실려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조계와 그 주위 10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있어서 적어도 1905년까지는 한국정부가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법으로 강력히 규제하려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정부의 토지수호의지는 전혀 군사적·외교적·경제적 실력이 뒷받침 되지 못하였던 점에서 점차 그 기초부터 흔들릴 우려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외국상인 특히 일본인들은 처음부터 한국의 우수한 농산물을 부등가(不等價) 교환을 통해 앗아가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일제는 이들 농업의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인 토지의 사유권을 여러 가지 불법적인 방법으로 획득함으로써, 더욱 효율적으로 그들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기여하려 획책하였다. 다음에서 이와 같은 한국정부의 삼엄한 대응책을 무시한 채 감행되었던 이 시대 일본인들의 토지 약탈 실태를 개항 전기와 반식민지의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자.
(2) 한말 일본인 토지침탈의 실태
ㄱ. 개항 전기 미곡수출의 실태
개항을 계기로 하여 한국농업은 결국 세계자본주의 시장의 소용돌이 속으로 편입되었다. 이와 같은 편입은 상품의 수출이란 형태로 실현되었다. 개항 전기까지의 무역은 우리의 곡물·우피·금을 수출하고, 외국(처음에는 영국제가 주류였으나 점차 일본제로 대치됨)의 자본제적 섬유제품을 수입하는 것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였다. 이러한 ‘면미교환체제(綿米交換體制)’의 무역구조는 무엇보다 일본자본주의의 산업자본확립에 기여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는 그들 산업자본의 확립과 관련한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침략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경제적 수단에 의한 침략이란 성격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본자본주의의 경제적 침략의 초기적 특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 이후가 되면 이러한 사정은 역전되었다. 이제 일본은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자본을 확립하였을 뿐 아니라, 청일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일본제 면제품을 기반으로 한국·대만·중국시장을 확보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은 꾸준히 발전하여 왔던 농업에서의 자본주의 맹아들과 농민경제의 해체 몰락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봉건위기에 직면하였던 지주층의 생산 소비수준을 상회하는 지주계급에 의한 과잉 미곡수출은 쌀값의 급격한 상승과 식량위기 그리고 봉건정부에 의한 방곡령 실시 등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불안정하던 미곡과는 달리 비교적 자연적 조건에 적응력이 강한 ‘콩’〔大豆〕은 품종개량과 작부면적의 확대 등을 통하여 농민 스스로에 의한 상품화가 진전되고 있었다. 적어도 농민전쟁까지의 시기에는 미곡수출은 아직 생산지 쌀값까지 크게 변동시킬 만큼의 규모가 되지 못하였고, 대두는 주식이 아니었으므로 상업적 농업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곡수출은 보다 많은 이윤획득을 노린 지주층의 경영강화를 초래하였으며, 고율의 봉건적 현물지대는 상품화되고, 그 수익은 다시 토지구입을 위해 투자되었다. 그러한 봉건적 지주경영의 강화는 봉건정부를 필두로 봉건적 조세·지대·고리대 수탈로 귀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개항을 맞아 봉건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이는 결국 가혹한 농민수탈로 나타나고 있었다. 미곡수출은 여러 형태의 유통구조를 거쳐 전개되고 있었다. 미곡은 개항지 객주(客主)의 우위 아래 전개되었던 ‘농민→산지 및 포구객주→중개곡물상→개항지 객주→거류지 일본상’이란 유통구조를 통하여 주로 수출되었다. 아직은 일본상인에게의 판매를 독점했던 ‘개항지 객주’라는 조선상인이 유통과정을 장악하여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민전쟁 이후의 시기가 되면 일본상인이 직접 내륙으로 행상하여 곡물을 개항지로 매집해오는 유통구조가 더욱 확대되었다. 일본상인들은 국내유통세를 탈세하였으며 그들 화폐를 유통시킬 수 있었던 유리한 조건 때문에 그들은 직접 내륙으로 진출하였으며, 점차 자금선대를 통한 유통과정의 지배를 진전시켰던 것이다. 이제 한국의 농민과 상인들은 일본상인들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서 불리한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갑오개혁으로 조세의 금납화가 실현되었으므로, 농민들은 환금과 비자급적인 생필품을 마련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강제적인 궁박한 판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쌀값이 가장 싼 추수 직후에 정확한 시세를 알지 못한 채 헐값으로 팔거나 입도선매(立稻先賣)로 손실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위로부터 강제된 상품화폐경제에 떠밀려 농민경제의 악화와 빈농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봉건적 위기의 심화에 따른 봉건지배층과 지주층들의 봉건반동적 압박과 ‘면미교환체제’에 편승한 일본자본주의의 경제적 침략을 양면으로 받고 있었던 농민경제는 이제 고리대 자본을 앞세운 전기적 자본의 토지소유로의 침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자본주의의 토지침탈은 그들 자본의 전기적 속성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이제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장악 아래 전개되어온 종속적 미곡수출을 더욱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농민들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침탈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자본주의의 한국토지소유를 노린 새로운 진출은 전기적 자본이 갖는 약탈성·사기성·횡포성이 함께 집약된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ㄴ. 전기적 자본에 의한 토지침탈
개항 전기의 무역구조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경제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로의 편입이 빚은 ‘면미교환체제’로 집약되어진다. 더구나 부등가 교환에다 유통구조마저 점차 일본상인에게 장악되었으므로, 농민경영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무엇보다 토지는 모든 사업경영의 장소였으므로, 외국상인들은 이미 개항 초부터 조계와 그 주위 10리의 토지·가옥들을 임차 및 소유하고, 창고·공장을 건설하려 하고 있었다.
첫째,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토지침탈이 본격화된 것은 대체로 갑오농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고 추정된다. 1903년을 예로 들면, 벌써 100정보 이상의 소유자가 9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또한 1904년에 전라도 관찰사 이용식(李容植)의 조사에 의하면, 군산·목포항의 일본인이 우리 농토를 몰래 사들인 면적은 임피(臨陂)·만경(萬頃)·부안(扶安) 등 십여 군데서 모두 790섬지기〔石落〕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본격적인 농장창설의 목적보다는 주로 개항장 인근의 상가나 시가지 예정지역, 그리고 택지들을 매입함으로써 토지투기를 기도하는 측면이 더욱 컸었다고 보여진다. 이처럼 비록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집적한 일본인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1904년까지는 한반도를 둘러 싼 열강들의 쟁탈전에서 일본의 우위가 분명하지 않았으므로, 이는 위험 부담을 몰래 안은 채 은밀히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의 정치적 상황은 한국정부의 조계 밖의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규정을 무력화하고 이러한 위험부담을 제거해 줌으로 인해, 이제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토지소유를 위해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그들의 대재벌들을 선두로 한 대규모 토지자본까지 대대적으로 진출함으로써 그들의 전기적 측면을 노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이와 같은 일본인들의 토지침탈은 주로 미곡의 주산지였던 삼남지방의 평야지대에 집중되어 있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당시 일인들의 한국농업 조사보고서인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1904)에 의하면, 기후·토양·교통·무역량 등의 여러 조건으로 보아 북부지방의 청천강·대동강유역, 중부지방의 평택부근, 남부지방의 금강·영산강·낙동강유역을 적지로 권장하였다. 이들 중에서 금강·영산강·낙동강유역은 토지의 비옥도뿐 아니라 개항장과의 수운교통으로서도 유리한 경제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최근의 한 연구는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파헤쳐 전북에는 금강·동진강·만경강의 3대 하천유역인 군산부근과 전주 평야, 전남에는 영산강유역의 광주·나주를 포함한 광주평원, 경남에는 낙동강유역을 포함한 김해평야 그리고 경기도에는 광덕강유역의 수원·진위일대에 일본인 대지주가 밀집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들 지역은 논이 밀집한 곡창지대였을 뿐 아니라 철도·항만 등의 교통이 편리하였으므로, 일본인 지주들은 봉건지대로 수취한 쌀을 주위의 개항지로 쉽게 실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인들의 토지침탈은 토양의 비옥도나 기후와 풍토가 알맞는 토지뿐 아니라, 미곡수출에 편리한 위치의 토지에 집중되었다 하겠다.
세째, 그러면 이 시기에 한국의 토지를 침탈한 일본인 자본의 성격을 살펴보자. 대체로 이들은 그 대부분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들어온 전기적 자본으로서, 고리대자본과 쌍동이적 성격을 갖는 소규모 상인자본이었다고 생각된다. 초기에 온 이들 일본인들은 ‘단견(短見)’하고 성질이 포악하며 무식한 무뢰한들이었고, 그들의 상행위는 사기적이고 약탈적이었다 한다. 따라서 그들은 대자본에 의한 장가투자보다는 자금의 회전율이 높고 이윤이 큰 소상업·고리대업·전당업 등을 주된 직업으로 행하여 온 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권총과 망원경을 휴대하고 2·3백리를 토지구입차 외출할 정도로 위험부담을 안은 모험상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1902년 경에는 목포 흥농협회(興農協會)를 만들어 단체를 구성하였을 뿐 아니라, 1904년 경에는 다수의 일인농업회사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소규모 토지소유자가 압도적이었지만 이 단계에도 화족지주(華族地主)였던 세천농장(細川農場)(전주·익산·김제 등), 미곡상인 출신의 상업자본이었던 불이흥업회사(不二興業會社) (옥구·익산 등), 재벌지주였던 한국흥업회사(韓國興業會社)(황주·대전), 그리고 대식농장(大食農場)(임피·익산·김제 등)들이 이미 진출하고 있었다. 1898년 말 각 개항지에 거주한 외국인들의 수를 보면 일본인이 약 15,062인, 청국인이 약 2,530인, 기타가 약 220인이었다 한다. 이처럼 당시 한국토지의 불법적 침탈에는 일본인이 절대다수를 점하였지만 청국인들도 일부나마 가담하고 있었다. 즉 1894년 이전에는 청국상인들도 “현재 청상(淸商)은 내지에 지소(地所)·가옥(家屋)을 소유하고 점포를 벌이고 있다”는 말에서처럼 청국상인들에 의한 토지침탈 사례도 산견된다. 또한 “구미인이 오래 전부터 내지에 거역(居域)을 두고 경지를 매수하여 자신이 경작에 종사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한국관리로부터 퇴거를 요구받아도 이를 행한 바 없었으며, 이를 요구할 관리도 중앙정부의 명령 때문에 퇴거하지 않을 줄 알면서 의식적으로 퇴거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1904년 경에는 외국인이 주택을 갖고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으며, 또한 “한국정부는 이전에는 간혹 철퇴를 요구한 바가 있은 것 같으나 현금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아니 할 뿐 아니라, 외국인에 대하여 조세영수증을 교부하고 공공연히 그 소유를 인정한 관아도 있어 본방인은 가옥의 차주(借主) 구입 건축을 불문하고 아무런 지장없이 자유로이 토지를 매수하는 상황”이었다. 이 시대 일본인을 선두로 한 외국인의 토지소유는 처음에는 한국정부의 규제를 받았으나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가 되면 대부분 용인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편 이들 일본인들의 농업경영유형을 보면 규모에 관계없이 절대다수가 소작제로 경영하고 있었다. 그 예로서 1904년에 태인군수 손병호가 조사한 「전북지방 군에 대한 외국인 잠매실수사검성책」에 대한 김용섭의 연구에 따르면 전북지방에는 41명의 외국인이 774섬지기 7마지기 5되지기〔升落只〕의 토지를 불법으로 매점 또는 전당잡고 있었다 한다. 41명의 외국인 가운데서 1명은 서양인이었고, 1명은 일본인 전당주였으며, 나머지 39명은 일본인 매주(買主)들이었다. 다음 〈표 1〉은 이들 39명의 토지소유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100섬지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자도 2명이나 되었으나, 1섬지기 이하의 토지를 가진 자도 12명이나 있어, 이들은 아마 소농민으로서 자작농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본인 자작농이나 자소작농은 그 대부분이 서울·인천·평양 등의 대도시나 그 부근에서 과수·소채·낙농·조림 등의 작목에 종사하였다 한다. 그에 비해 미곡생산에는 철저히 지주경영을 행하였고 스스로 영농을 행하는 자는 얼마되지 않았다 한다. 이와 같이 이 시대 한국 토지를 침탈한 일본인 자본을 선두로 한 외국인자본들은 고리대자본으로 대표되는 전기적 자본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미곡의 경우 그들은 대부분 소작농에 기초한 지주경영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 1〉전북지방에서의 일본인의 토지소유 현황
섬지기(石落)
1섬 미만
1섬 이상
5섬 이상
10섬 이상
20섬 이상
30섬 이상
40섬 이상
50섬 이상
60섬 이상
70섬 이상
80섬 이상
90섬 이상
100섬 이상
합계
인원
12
9
6
4
4
2
―
―
―
―
―
―
2
39
* 자료:金容燮, 「光武年間의 量田·地契事業」, 『韓國近代農業史硏究』(一潮閣, 1975), p. 619, 표 35.
네째, 일본인들의 침탈이 이루어진 토지는 대체로 앞서 언급한 삼남평야지대의 수전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신개간지가 아니라 기간지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약탈적인 토지침탈의 동기가 곧 미곡수출을 더욱 효율화하기 위한 것이라 고백하고 있듯이, 통상무역의 융성을 통한 이익확보를 위해 토지를 매수하고 농사를 경영하였다. 비록 그들이 “한국농사의 진흥, 농사의 개량 시작”이란 위장간판을 내세웠다 해도 그들의 속셈은 자명한 것이라 하겠다. 물론 그들은 처음에는 각 개항지에서의 토지·시가지·점포·가옥 등을 임차·소유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1883년 8월 30일에 조인된 인천항 일본인 거류지 차입증서에 의하면, 인천의 경우 거류지는 거의 무상에 가까운 대가로서 일본인에게 영구히 대여한 사례에 해당된다. 원산에는 대략 500평이 한 구역으로 나누어 졌는데, 영구히 이의 차지권을 확보하는 데는 일본영사관의 허가만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다시 무상으로 일본인에게 불하하였다. 더구나 ‘퇴한령(退韓令)’의 제정으로 거류지내에는 한국인의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자기의 땅과 가옥마저 버리고 퇴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이처럼 거류지를 먼저 무상으로 약탈한 뒤에 한국인 상가로 진출하였으며, 마침내 내륙지방의 토지·건물의 침탈을 위해 진출하였던 것이다. 1898년의 『황성신문』은 “외국인의 한성개시(漢城開市)는 기유조약(己酉條約)이어니와 내지 각 군에 개시(開市)치 못함은 통상조약에 전재하거늘, 근일 외국인이 내지 각 군 요지(要地)에 개시한 즉 대한인민의 상권이 외국인에게 전귀(全歸)하니 불개탄(不慨嘆)하리오”라고 기술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내륙지방으로의 토지침탈은 높은 이윤율에 이끌려 곧 삼남지방의 ‘수전’으로 집중하는 현상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그들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비옥한 우등지만을 골라 침탈하였던 것이다.
다섯째, 그들은 어떠한 방법과 수단을 통하여 이러한 한국토지들을 불법으로 침탈하였던가를 살펴보자. 이 시대 일본인들에 의한 “토지매수는 현금으로 하는 경우와 저당유질(抵當流質)에 의한 것”이 있었다. 대체로 전자의 방법은 무엇보다 현금으로 직접 구입하는 것이며, 후자의 방법은 토지를 저당으로 고리대부업을 하여 저당유질에 의해 담보로 잡은 토지를 장악해 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하나같이 후자의 방법이 보다 보편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른바 “정식으로 토지를 매입하여도 물론 의외의 염가로 점령할 수 있음은 틀림없으나, 조선에서는 이보다 더 일층 편리하고 더 일층 염가로 점령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저당유질이라는 것이다. 저당사업은 조선에서는 가장 유력한 사업이며 그 유리함에 비하여 위험은 극히 적으므로 다소 자본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이 방법에 의하여 점령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원래 저당을 해야 할 빈곤한 한인이므로 일단 저당한 이상은 이를 반환받는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며, 십중팔구는 모두 유질이 되어 대금주의 사복을 채우는 것이 상례이다. 대다수의 대금주도 역시 이 유질을 예기하고 기한이 차면 곧 유질물을 탈취할 수 있도록 매도 증서를 받고 연후에 그 실가의 1/3 정도를 대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지어는 처음부터 담보된 토지·가옥을 빼앗을 목적으로 돈을 주어놓고 기한에 이르러서는 채무자가 변제하러 와도 고의로 받지않고 기간경과 후에 저당물을 비용을 들이지 않고 강제로 압수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한다. 그러한 상황은 봉건적 조세수탈과 일본을 선두로 외래자본주의의 상품화폐 경제적 수탈이라는 이중의 중압 아래 놓여진 빈농들의 전락과 밀접한 관련하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빈농들이 차금을 필요로 하는 시기는 주로 하작물의 농번기였던 5월~9월에 이르는 시기이며, 이는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한다. “요컨대 자가식량이 감소했을 뿐 아니라 마침 농번기여서 자가의 경작에 분망하여 남에게 노동을 팔 여지가 없을 경우였으므로, 차금을 반환하는 자는 10인 중 5~6 내지 7~8인으로서 나머지는 유질”되어 일본인의 소유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또한 한인의 토지를 매각 또는 저당하려고 하는 태도를 마치 “어류와 야채 또는 신탄류를 팔러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기(文記)목록을 가지고 일본인들에게 배회하여 조금이라도 값 좋은 상대자를 발견하려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식량확보에 급급하였던 소빈농층들을 주요한 고리대적 수탈대상으로 하여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토지침탈이 추진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인들의 토지침탈이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선인의 배외사상이 의외로 강하여 토지매수에 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당방의 행동을 저해하였거나 토지매수에 나선 일본인이 납치 피살되는 경우도 적지않았다. 그러한 양면성은 이른바 일반적인 토지에 있어서는 농민들이 좀처럼 처분하려 하지 않았으나, 약점이 있는 토지, 즉 농민전쟁의 패배 후 농민적 토지소유가 좌절된 토지가 주로 일본인에게 처분되었다는 것으로 해명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전북 연안의 농민개간지였던 균전 3,000섬지기를 황실에서 그 소유권을 빼앗으려 하자, 결국 세력이 약한 농민들은 이 땅을 일본인에게 팔아 넘겨 버렸던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고리대적 토지침탈은 소상인에서 대농업회사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동경에 본점을 둔 한국흥업주식회사의 경우 고리대부업이 정관에도 표명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토지매입을 행한 사례를 보아도 현금으로 바로 매입한 금액보다 저당대부를 행한 것이 더욱 많았다 한다. 만약 대부금에 대한 원리금을 농민이 상환치 못하였다면 그들은 토지가격의 반값으로 그 토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원리금을 상환받은 경우라 해도 심지어 3개월에서1년만에 원금의 2배를 거두어 들일 수 있었으므로 무엇보다 그들은 대부업에 주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른바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토지침탈은 그들이 내세운 외면의 가면과는 달리 여전히 그들의 경제행위가 전기적 자본운동의 범주에 머물고 있었음을 웅변해 준다.
그러면 이처럼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매수한 토지들은 어떻게 그 소유권을 자기 것으로 확보·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천전교이(淺田喬二:아사다 교오지)에 의하면 “일본인에 의한 토지수탈방법으로서는 조선인 명의의 차용(수단 ①), 조선인 관리에 청탁하여 자기명의로 등록(수단 ②), 반영구적인 토지 사용수익권 획득(수단 ③), 사는 사람(買主)의 명의가 없는 문기(文記)의 제작(수단 ④), 저당증서와 방매문기의 이중작성(수단 ⑤) 등의 여러 수단”이 동원되고 있었다. ①의 수단을 보면 일본인이 거류지로부터 10리 밖에 있는 토지를 불법적으로 매입하였다 해도 이는 결국 법률이론상 지상권만을 취득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인을 납세자로 하여 간접적으로 조세를 납부케 하는 방법을 처음에는 채택하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확실한 소유권을 취득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일본인의 토지침탈에는 그들이 직접 나 서기도 했지만 대부분외 경우 마을의 한국인 유력자가 중개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그러나 ②의 수단과 같이 일본인이 직접 그들 명의로 납세자가 되는 경우도 한국인 관리들은 세금수취에만 신경을 썼지 납세자가 누구인지는 의심하지 않았다 한다. 처음에는 그들도 거류지 밖 10리의 토지에 투자하는 것이 극히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광무개혁을 주도한 이용익과 같은 관리들은 일본인들의 토지소유를 불법시하여 저항했지만 결국 통감부의 압력에 굴복하였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지방군수들은 징세고지서를 일본인에게 배포함으로써 일본인 소유를 기정사실화 하였다 한다.
심지어 1905년 4월 황주군에서는 탁지부에 일본인에게 토지를 매도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조회하였는데, 위로부터 뜻대로 하라는 지령을 받았을 정도였다. ③의 수단은 인천·원산 등 조계지의 영구차지권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상으로 일본인이 취득하는 과정에서 구사되었다. ④의 수단은 일본인들이 토지매매를 통한 문기작성에서 구사하였다. “토지매매의 방법은 매도자로부터 신구 문기를 수교함으로써 일체의 권리가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옮겨지는 것이며 관아에는 아무런 계출도 필요치 않다. 신구 문기에는 몇 마지기〔斗落〕 혹은 몇 일갈이〔日耕]의 토지를 얼마의 가격으로 모씨로부터 모씨에게 매도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기입하고, 사람을 택하여 구전을 주고 보증인을 세워 연명(連名)하는 것이며, 이것이 즉 매도증서이다.” 이처럼 토지매매는 보증인을 세워 신문기와 구문기를 사적으로, 주고 받음으로써 성립되고 굳이 관청에 제출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사는 사람인 일본인의 이름을 기입하지 않아도 매매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본방인(일본인) 중에는 때로 문기에 공공연하게 자기 즉 사는 사람의 이름을 쓰는 예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직까지 공적으로는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 사는 사람의 성명을(문기에:필자) 쓰지 않고, ㉡ 확실한 한인을 소유명의주로 하며, ㉢ 저당할 약속을 하고 후일 다시 찾지 못하게 증서면의 금액을 과대하게 하고, ㉣ 사용과 수확을 마음대로 한다는 권리를 미리 얻어 두었다가, ㉤ 전당법에 의하여 상당연한이 경과한 후 자기의 명의로 옮기는 등의 방법”으로 불법적인 토지소유를 숨길 수 있었던 것이었다. 특히 이중 ㉠의 방법은 곧 위에서 말한 ④의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위 ⑤수단의 경우는 토지저당증서와 토지방매문기를 함께 작성하는 경우였는데 이 역시 위 ㉢, ㉣, ㉤의 방법과 일치한다.
여섯째, 그들은 왜 한국 토지의 소유권 침탈을 상당한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추진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 일본인 토지침탈의 경제적 배경은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규명해 보자. 무엇보다 이는 풍년·흉년에 크게 좌우되는 미곡수집물량과 농산물가격의 변동에 따른 마곡수출의 불안정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이윤 극대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구나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특히 지가가 일본에 비해 극히 저렴했으므로, 토지소유에 대한 투자에 비해 그 이윤율이 일본의 경우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지가는 지대(地帶)와 시기에 따른 차이가 있으나 일본의 지가에 비하면 1/30~1/10정도에 불과한 저렴한 것이다. 1907~8년에 강경의 상등전은 1단보에 15원 내지 50원, 중등전 30원, 한전(旱田) 상등전 15원 내지 17원, 중등전 5원, 원야는 5원 내외”였던 것이다. 그처럼 값싼 지가 때문에 일본에서의 농업수익에 비한다면 1905년 경의 경우 “한국에서 전답을 매수해서 한인에게 소작시키는 것이 연평균 1할 2~3푼의 이익을 거둘수 있는 까닭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 명백하다”는 것이 바로 그들의 판단이었다. 이른바 값싼 지가 때문에 연평균 10%가 넘는 높은 이윤율이 보증되었던 것이다. 당시 군산지방에 관한 기록을 보면 1/3소작료와 세금, 종자를 소작인이 부담하는 경우는 토지투자에 대한 수익율이 23% 강(强)이 되며, 세금 등은 일본인 지주가 부담하고 수확을 반분(半分)할 경우는 26% 약(弱), 그리고 지주 소작간에 명확한 약속이 없을 경우에는 26% 강(强)의 높은 수준에 달하였다 한다. 다음 〈표 2〉는 천전(淺田:아사다)이 계산한 한국과 일본의 300평에 대한 토지매매가격(V) 순수익(R) 토지 이윤율(i)을 보여준다. 조사지역을 보면 한국은 군산지방이었고 일본은 북해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었으며 각각 보통의 논에 대한 평균치였다.
이를 보면 일본의 경우를 100이라 할 때 당시 같은 면적의 한국 토지 가격은 7.4, 그리고 순수익(지대)은 26.7에 달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즉 한국의 농경지는 단위면적당 순수익과 토지가격이 크게 싼 반면 4배나 높은 이윤율을 올리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일본자본의 침탈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북 군산 부근의 소작료 및 토지이윤율을 계산한 다음 〈표 3〉을 보면 그와 같은 토지이윤율은 도시근접지보다 도시 원격지가 더욱 높았다. 그러므로 일인들의 토지침탈은 처음의 거류지 10리 안에서 점차 거류지 밖의 남부 평야지대로 뻗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표 2〉조선과 일본의 수전매매가격, 순수익 및 토지이윤율의 비교 (단위:反當円, %)
구분
매매가격(V)
순수익(R)
토지 이윤율(i)
조선
14.50
3.75
25.86
일본
194.00
10.16
6.27
* 자료:淺田喬二, 『日本帝國主義と舊植民地地主制』 (御茶の水書房, 1968), p. 75, 제3·4표
이상에서 우리는 개항에서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까지를 대상으로 주로 일본인들의 전기 자본에 의한 토지침탈에 대해 여섯 측면에서 고찰해 보았다. 이와 같은 일본자본주의의 가장 추악한 일면은 이후에는 더욱 본격적으로 노출되었으며, 한국농민들의 가장 치열한 투쟁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농민경제의 근본을 뒤흔든 미곡수출과 일본인의 불법적인 토지침탈은 우리 농민들의 다양하고 끈질긴 투쟁에 직면하고 있었다.
〈표 3〉전라북도 군산부근의 소작료 이윤율 (단위:円, %)
지대별토지
도시근교지
도시원격지
지가
소작료
소작료이윤율
지가
소작료
소작료이윤율
상전(一斗落)
15
1.68
11.2
10
1.68
16.8
중전(〃)
10
1.14
11.4
7
1.14
16.3
하전(〃)
5
0.06
12
4
0.06
16
* 자료:淺田喬二, 『日本帝國主義と舊植民地地主制』, p. 75, 제3·3표.
(3) 농민층의 대응과 투쟁
개항 전기(1876~1894) 한국농업은 개항 전에 비해 질적·구조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따라서 개항이 가져온 외래자본주의에 의한 착취보다는 아직도 농민대중은 봉건적 생산관계에 의한 수탈을 주요한 투쟁대상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봉건지배층의 말기적 수탈양상은 갑오농민전쟁에서 제시된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조항에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비록 문헌에 따라 13개조항(『대한계년사』)에서 38개조항(『청음유사』)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으나, 각각 2조항의 반침략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반봉건적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특징은 개항과함께 봉건위기는 더욱 가혹한 농민수탈로 나타났으며, 이는 곧 완전한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을 지향한 농민투쟁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농민층의 반봉건투쟁은 1862년대 민란과 갑오농민전쟁을 잇는 30년 동안에도 무수한 산발적 투쟁을 보였다. 1875~1890년 사이에 기록된 민란만도 약43건에 달하였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농민투쟁들은 특정의 봉건지주와 행정기관을 대상으로 하는 무수한 작은 민란들을 그 배후에 깔고서 완전한 농민적 토지소유 실현과 봉건적 생산관계 개편을 지향하는 농민운동이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농업전쟁 직전에 일어난 합덕지(合德池)의 수세문제를 중심으로 한 특정의 봉건지주 이정규에 대한 농민투쟁사례도 그러한 흐름의 하나였다.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은 그야말로 봉건체제에 대한 농민에너지의 최대의 도전이었다. 여기에는 영세 소·빈농층을 주력으로 중농 부농층과 다수의 소상품생산자층이 가담하고 있었으므로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에는 이들 각 계층들의 권익을 지키려는 요구가 골고루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특히 전주화약(1894년 6월 10일)에서 받아 들여진 폐정개혁안에는 “토지를 평균으로 분작케 할 것”이란 ‘균전론’적인 조항이 마지막에 들어 있었는데, 이는 곧 조선 후기 이래 농민들이 줄기차게 갈구하여온 완전한 농민적 토지소유실현을 위한 토지개혁의 요구가 비로소 구체화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농민전쟁은 봉건직 지주 전호제와 지주적 토지소유를 해체하고 농민적 토지소유의 완전한 실현을 지향한 총체적·전면적 농민운동이었던 것이다.
개항 전기의 농민투쟁이 비록 반봉건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었다해도 일본인 미곡상인으로 대표된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항쟁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개항과 더불어 나타난 새로운 현상인 미곡의 상품화와 수출확대는 점차 그 유통구조가 일본인 미곡상인에게 장악됨으로써 심각한 질곡으로 변하여 갔다. 즉 농민들은 ‘청전판매’ ‘입도선매’의 방법에 의해 일본인 상인·매판상인들의 고리대적 수탈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세상납금을 이용한 지방관의 미곡상품화 추세도 결국 농민들의 조세수탈과중을 초래하였으므로, 미곡수출에 근거한 이 시대의 무역구조 때문에 무수한 몰락농민들이 산출되었다. 더구나 미곡 수출은 곡가를 크게 등귀시켰으므로 자가식량부족으로 이를 구매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절대다수의 소·빈농층의 농가경제를 크게 압박하였다. 심지어 3~4년에 한번씩 닥쳐오는 흉년에는 그러한 사정은 더욱 심각하였다. 지방관에 의한 방곡령은 모두가 미곡수출로 인한 농민 몰락과 이들의 보호를 위해 취해지고 있었지만, 이는 그 실시권자가 스스로 미곡수출시장에 연결되어 조세상납과정에서 치부를 행한 지방관이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모순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결국 전란의 와중에 놓인 농민층의 투쟁은 불가피하였다. 그 일례로서 1882년의 임오군란의 경우 다수의 도시빈민층이 미곡수출에서 유래된 곡가등귀에 유감을 품고 투쟁에 합세하였던 것이었다.
농민전쟁에서 제시된 “대동상납전(大同上納前)에 각 포구잠상(浦口潛商)의 무미(貿米)를 금단(禁斷)할 것” “각 국인 상고(商賈)는 각 항에서만 거래하게 하고 도성에 들어와 실시하지 못하게 하며 각처에서 임의로 행상하지 못하게 할 것” 등의 요구에서도 이는 두드러진다. 실제로 농민전쟁의 와중에 황해도지방에서는 수천명의 농민군이 일본 미곡상을 습격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농민전쟁은 제2차 기포를 계기로 봉건적 지주전호제의 철폐와 농민적 토지소유의 완전한 실현이라는 반봉건 투쟁에서 출발하여 세계자본주의 세력에 매개된 일본의 농업경제침투에 대한 반침략투쟁으로 급속히 전환하는 획기를 보여주었다. 농민전쟁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농민층들의 요구는 갑오·광무개혁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으며, 그들의 투쟁은 영학당·활빈당·의병들의 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농민전쟁이 끝난 1896년의 1월~3월 사이에도 40명의 일본인이 피살되었고 그중 다수가 상인이었다. 그외에도 장연지방 등에서도 일본인 미곡상인에 대한 투쟁이 치열하였다 한다.
먼저 영학당운동은 기본적으로 농민전쟁을 계승한 것으로서 봉건적인 수탈, 개화파 정권의 경제정책 및 그것과 연결된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저항하면서 농민적 토지소유와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 발전을 지향하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입장은 호남 고부 등 여러 고을의 민전이 명례궁의 장토로 편입된 균전문제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원래 이는1891년부터 명례궁이 물력을 대고 농민들은 노동력과 진황지를 제공하여 개간한 진황지였으나,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결수보다 많은 지대를 제공함으로써 분쟁이 야기되었었다. 더구나 농민전쟁 당시 이 토지는 농민들의 소유지로 확인되었지만 농민전쟁의 패배와 더불어 궁장토에 편입되기에 이르렀으므로 농민들은 영학당의 주도하에 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처럼 영학당운동은 농민적 토지소유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일어난 상급소유였던 지주적 토지소유에 대한 투쟁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지방군수의 실정(失政)으로서 결세(結稅)를 독촉하여 거두고, 고마답(雇馬畓)·모경답(冒耕畓)을 방매하여 사복을 채웠으며, 거두어 들인 세전(稅錢)으로 무곡(貿穀)하였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특히 세전무역에 대한 저항은 농촌장시를 중심으로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과 발전을 바라는 농민층의 지향을 보여주었다. 이는 곧 영학당운동이 농민운동에서 제시된 반봉건·반침략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었음을 말하여 준다.
활빈당은 농민층분화의 결과 농촌에서 배제된 도적들로 구성된 단체로서 이들이 1900년에 발표한 ‘13조목 대한사민논설(十三條目大韓士民論說)’ 중에는 무려 9조목이나 경제문제를 다룬 내용이 실려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지방관의 탐학에 반대하여 형벌과 농민부담의 체감(11조)을 주장하였으며, 빈농층의 요구에 맞추어 곡가를 싼 값으로 안정시킬 것(10조)과 농업생산력의 유지·발전을 위해 소의 도살을 금지할 것(12조)을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상인을 선두로 한 외국상인에 의한 미곡수출 때문에 아사 직전에 놓여진 빈농층을 구제하기 위한 방곡령 실시(5조)와 외국상인의 유통권에 종속되어 가는 농촌 장시의 보호를 위해 이 곳에의 외국상인 출입의 엄금(9조)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활빈당의 투쟁강령은 단순히 지방군수의 세전무곡과 이를 통한 일본인 상인과의 유착을 반대한 영학당의 그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농촌장시에서의 외국상인출입을 엄금하자는 보다 진보적인 것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활빈당의 활동으로 인해 개항장 부근의 외국인들이 크게 곤란을 받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활빈당투쟁이 토지수호를 위한 운동으로서 값진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화전을 혁파하고 균전제를 실시(9조)하자고 요구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은 비록 중세의 토지제도인 균전제란 이름을 빌고 있지만 결코 봉건적인 소농경영으로의 복귀라는 의미보다는 농민전쟁에서의 토지개혁사상을 계승하여 독립자영농민의 형성을 주장하였던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이미 이들은 국지적 시장권으로서의 농촌 장시의 필요성과 그 보호를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지금의 소작료는 나라의 과세보다 무겁기가10배”라 하였듯이 지주적 토지소유의 질곡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하다 하겠다. 결국 활빈당투쟁은 소·빈농층의 입장에서 미곡수출에 매개된 일본인 상인의 농촌침투와 완전한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을 위해 지주적 토지소유를 지양하자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지주적 토지소유를 철폐하고 이를 농민층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토지개혁으로서 이른바 균전제 실시를 주장하였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는 이와 같은 농민 스스로의 운동과는 다른 차원에서 외국에의 이권 양도에 대한 독립협회의 저항이 비로소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반대를 위한 성토가 1898년 2월 27일의 독립협회 통상회에서 전개되었고 구미열강의 이권양도에 대한 반대도 소극적이나마 1898년 5월 16일부터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만민공동회운동의 경제적 성격은 봉건적 억압과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면서 도시소상인·소수공업자로서의 발전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한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의 주장 중에서 공화(公貨)를 착복한 지방관을 처벌(조칙 3조)할 것과 어사·시찰 등의 농민에 대한 침탈을 조사·처단(조칙 4조)하란 내용을 볼 때, 이들은 영학당을 위시한 당시 농민들의 반봉건적 투쟁에 대한 일차적 이해가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일본자본주의의 불법적인 토지침탈은 청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시작하여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화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자본주의의 토지소유로의 진출은 발전하는 상업적 농업과 더불어 균전제 실시 등 완전한 농민적 토지소유를 지향하는 농민투쟁에 의해 일단 저지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당시 한국정부가 마련한 법률적 규제에 의해서도 허용되지 않았다. 광무연간의 양전 지계사업은 한국정부가 스스로의 필요성에 의해 행한 근대적 소유권 및 제도의 법적인 확인이란 점뿐만 아니라, 갑오개혁 이후 농민적 토지소유의 발전기반이었던 농민적 제권리(도지권 등)에 대한 최초의 제도적인 뒷받침이란 점에서도 그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또한 이 광무연간의 양전과 지계의 발행에 있어서는 “산림토지(山林土地) 전답가사(田畓家舍)는 대한국인외에는 소유주됨을 득(得)치 못할 사(事)”라고 법규를 정함으로써, 일본을 위시한 외국자본주의의 토지침탈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토지침탈을 위한 초기적 진출에 실패한 일본자본주의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한 대규모적인 토지약탈을 기도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