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 (1세)음력 7월 14일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7의 5번지에서 한의인 진주 유씨 준수와 어머니 밀양 박씨 우수 사이 8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장남은 극작가 유치진. 유치환의 나이 3세 때 경남 통영시 태평동 500번지로 이주.
1922(15세) 통영보통학교 4학년 마치고 일본으로 가 도쿄의 토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에 입학. 1923(16세)형 유치진의 주도하에 박명국, 김거주, 최두춘과 함께 동인회 <토성> 조직하여 시 발표. 주일학교에서 훗날 그의 아내 권재순과 만남.
1927(20세)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이 무렵 <참새>(통영 참새 모임회 간행) 제2권 제1호에 토막시 <단가> 9편을 발표.
1928(21세) 연희전문학교의 퇴폐적인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1년 만에 중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학원에 다님. 10월 경성중앙보육학교 출신 안동 권씨 재순 여사와 결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 무렵 일본 아나키스트 시인 다카무라 고오타로, 쿠사노 심뻬이 등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감명을 받다.
1929(22세) 귀국.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감동하여 고향에서 유치진과 <소제부>라는 회람지 발간. 장녀 仁全 출생. 1930(23세) 동랑의 이름으로 시집<소제부 제일시집> 발간. 여기에 유치환의 시 <오월의 마음> 외 25편을 발표. 1931(24세)시 <정적>을 <문예월간>2호에 발표하면서 시단에 등단. 차녀 春妃 출생. 1932(25세)평양으로 이주. 사진관 경영. 곧 고향으로 돌아와 시작(詩作)에 전념.
1934(27세)부산으로 이주. 화신백화점에서 1년간 근무. 1937(30세)통영협성상업고등학교 교사 취임.7월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장응두, 최상규 등과 함께 발행. 1939(32세)12월 제 1시집 <청마시초> 간행 1940(33세) 3월 통영협성고등학교 교사 사임. 가족과 만주 빈강성 연수현으로 이주. 농장 및 정미소 관리, 이때의 경험은 제 2시집 <생명의 서>에 영향을 줌. 1945(38세)6월말 귀국. 부인이 통영문화 유치원 경영. 통영문화협회 조직, 초대회장 역임. 10월 고향 통영으로 귀환하여 통영여중에 교사로 부임. 1946(39세)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제1회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수상. 동인 <죽순>에 참가해 시조시인 이영도와 만남.
1947(40세)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 1회 시임상 수상. 6월에 시집 <생명의 서> 발간. 1948(41세)9월 시집 <울릉도> 발간1949(42세) 5월 <청령일기> 발간. 1950(43세)6.25동란으로 부산으로 피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를 조직. 육군 제 3사단에 종군. 제2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51(44세) 9월 종군시집 <보병과 더불어> 간행 1953(46세) 통영으로 이주.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 발간. 경부대학교 문리대에서 강의. 1954(47세)10월 시집 <청마시집> 발간. 시집 <기도가>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가 합본으로 나옴. 1957(50세) 12월에 시집 <제9시집> 발간 1958(51세) 시집 <유치환시초> 발간, 12월에 시집 <유치환시선> 발간 1959(52세)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 재피선. 수상록 <동방의 느티> 발간. 12월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 발간. 대구로 이주 1960(53세) 12월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발간 1963(56세)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 발간. 경남여고 교장으로 옮김. 1964(57세)11월 시집 <미루나무의 남풍> 발간. 1966(59세)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취임. 한국예술단체 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이 되다. 11월 시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간행 1967(60세) 2월 13일 9시 30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 부산대학병원으로 후송 도중 사망.
2. 유치환의 시세계와 시경향
2.1. 시세계 총론
몇 편의 수필과 소설을 남겼지만 그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160편 이상의 시와 10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의 고향 항구 도시 충무가 그의 시작에 많은 영행을 준 것은 명백하다. 그의 시에 나오는 주제는 대개 자연인데 특히 바다가 많이 나온다. 그는 자연의 모든 면을 다루었다; 꽃, 동물, 바위와 대개의 경우 자연의 일부로써의 인간. 자연을 통하여 삶의 충만함과 무상이라는 이중적 테마를 강조하였다. 그의 시에 나오는 무상은 인간이 삶을 통하여 극복해야만 하는 긍정적인 무상인 것이다.
그의 시는 삶의 참여와 강조, 삶을 짓누르는 것에 대한, 삶의 자연적인 과정에 대한 자신의 존재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현대 한국시단에서 ★생명파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삶에 대한 위대한 연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끔 상대하기 어려운 일상의 사회적 상황을 발견한다. 종종 그의 작품에서 공허함이 발견된다. 일제시대(1910~1945)에 쓰여진 초기 작품은 당연히 조국에 대한 일본의 압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감에 의하여 인간이 겪는 고뇌를 이러한 시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자연사물에 대한 의인화는 외로운 존재인 자연을 통하여 반영되는 자신의 허무함을 표현한다. 삶의 시련을 극복하려는 그의 결심은 감정의 표현이 없는 이상적인 정적, 정지, 인내에 의해서 표현된다. 허무함을 듬뿍 안고 있는 그의 시는 가끔은 비참하고 냉소적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숨김없이 묘사하기에 그의 시는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시는 삶의 진실과 공존하는 비참한 인생을 폭로한다.
그는 시에서 양식이나 기교보다 이상과 주제에 더 중점을 두었다. 직접적이고 정교함이 그의 매력이다. 그의 자유시는 산문체이며, 직유와 은유를 많이 사용한다. 그의 삶을 강하게 그리기 위하여 그는 가끔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이미지를 가끔 시용한다. 때때로 그의 시는 이상을 초월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이상은 주제와 이상의 일관성 - 원천적인 삶의 이중성에 기인하는 삶의 충만과 강조 - 을 강화시켜 준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고독감, 쓸쓸함은 부정적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약속과 희망을 머금은 공격적인 색채가 짙다.
★ 생명파
1930년대 후반, 시문학파의 기교주의의 경향을 반대하고, 인생을 가치의 중심에 주어야 한다는 주장과 주지주의의 비생명적 지향에 반발하여 생명을 강조한 입장이 합치되는 곳에서 형성된 유파이다. 생명의 궁극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주제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미당 서정주와 유치환을 일컬어 생명파 혹은 인생파라고 한다. 이들 이외에도 오장환, 김달진, 이용악 등 이계열의 시인이 있다. 생명파라는 호칭은 미당 서정주 자신에 의하여 비롯된 이후 널리 일반화되기에 이른다. 생명파는 시문학파가 기교에 집착하여 시의 내용을 무시한 것에 반발하면서 내용의 중요성을 재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모더니즘의 서구 취향과 작위적인 기교를 배격하고 현대 문명에도 변질되지 않는 내면 의식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려고 했다는 시사적인 위치와 함께 우리의 현대시가 서구에서부터 수입된 이후, 비로소 인생, 생명의 인간 문제로 좀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탐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2. 시세계
2.2.1. 청마의 초기시 : 1931년 ~ 해방전
청마의 초기시를 다시 1940년 만주탈출을 분기점으로 하여 전후 두시기로 나누어 보겠다. 만주탈출 이전의 시편은 「청마시초」를 대상으로 했으며 만주 탈출 이후의 시편은 「생명의 서」를 대상으로 보았다. 「청마시초」의 시세계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대항하지 못한 시인의 회한과 내적 갈등을 극복해 가려는 의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은 「非力의 時」, 「박쥐」, 「일월」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생명의 서」에서는 가열한 생명의지로 자신을 극복해 가려는 신념과 북만의 대자연 속에서 마주친 허무를 초극하려는 의지가 시인의 주된 관심이 되고 있다. 「생명의 서」, 「바위」, 「드디어 알리라」 등의 시편은 이 시기 청마시의 중요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 작품들이다.
2.2.2. 청마의 중기시 : 해방이후부터 ~ 자유당 말기
6.25동란을 전후하여 두 시기로 중기시를 나누어 보면 6.25이전의 시편은 「울릉도」와「청령일기」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 시기에 청마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애정을 주로 한 애국시의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거듭된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부조리가 횡행하게 되자 청마는 조국해방에 기초했던 감격의 심정을 비판과 저항의 태도로 바뀌어갔다. 「조국이여 당신은 진정 고아일다」, 「눈초리를 찢고 보리라」 와 같은 격렬한 시편은 이 시기 청마의 시적 특질을 잘 집약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또한 「보병과 더불어」 는 종군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생명에 대한 존귀성, 전쟁에 대한 회의와 허무의식을 집약하고 있다. 또한 적에게까지 동정과 연민의 태도를 드러냄으로써 이념을 초월한 인간애에의 탐구를 잘 구현하고 있는 것도 이 시기의 특징에 포함된다. 중기시의 후반기에 해당하는 6.25동란 이후부터 자유당 말기까지의 시세계는 허무의식과 윤리적 자아실현의 자세로 집약된다. 또한 1950년대 후반의 청마시는 현실비판과 저항으로 일관되어 있는데 「莘福은 이렇게 오더니라」,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와 같은 시집은 이 시기 청마시의 면모를 잘 담고 있다.
2.2.3. 청마의 후기시 : 1960년대 ~ 1967년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미루나무 南風」과 수상집 「나는 孤獨하지 않다」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후기시에 들어 청마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조의 세계로 관심을 옮김으로써 죽음과 운명에 순응해 가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내 너를 내세우노니」, 「시인에게」,「나의 배」,「돌아오지 않는 비행기」,「거리에서」와 같은 작품들은 청마의 후기시적 특징을 잘 구현하고 있는 시들이다. 청마가 이와 같이 자기응시의 자세로 문학적 탐색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은 현실과의 대결에서 부닥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모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2.3. 유치환 시의 특징
2.3.1. 허무의 의지, 생명의 의지
日月
나의 가는 곳 어디나 日月이 없을소냐
머언 未開 적 遺風을 그대로 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하되 삼가 애련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인들 남길소냐
유치환은 생명에의 의지를 투철한 허무 의식을 바탕으로 더욱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다. 허무의 의지란 일체의 인간적인 감정을 초극하고 냉혹하고 비정한 인간이 되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삶은 고뇌와 방황 속에 있지만 후회없는 삶을 살려는 생명에의 의지만이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치환 시의 가장 본질적 특징은 허무의지이다. 그의 허무는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비롯한다. 죽음은 두 가지 의미로 전개되는데 한 편으로는 일제 말기의 극한 상황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결부되어 그의 시적 자아는 자학적 분노와 야성적 생명의지를 보여준다. 이 자아는 결국 인간사와 무관한 비인격신을 만남으로써 범신론적인 자연애의 종교적 자아로 승화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숙명적 조건인 죽음은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을 낳는다. 청마시는 소재를 사회현상에서 취득하는 특징을 보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현실주의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존재와 초월의 세계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탐색을 필요로 한다. 그의 정신적 특징은 회한과 자학, 일제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의지, 허무, 순수서정 및 사모하고 할 수 있다.
초기에는 보들레르와 니체의 영향을 받아서 의지가 허무에 압도된 낭만적, 상징적 경향의 시를 쓰다가 후기에는 생명의 열애를 바탕으로 하여 한편으로는 동양적인 무위 서정의 세계를 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허무의 세계를 극복하려는 원시 생명적 의지를 시화하였다.
2.3.2. 시적표현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청마는 생소한 한자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하는가 하면 생경한 언어구사에 의해 직설적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많기 때문에 약간의 뒷공론이 없지 않았다. 사실 청마는 시의 방법론이나 수사법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청마의 시는 허무의식과 고독을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내면적인 투쟁, 그리고 생명의지의 발현을 위한 대결로서의 용솟음치는 시정신에 의해 감동력을 발휘한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유치환은 개념형성에 치중하여 시어의 조탁에는 관심이 없었고, ‘무기교’의 기교속에 시심의 깊이 있는 사유를 잘 소화시켜 관념과 직관의 논리의 시로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2.3.3. 관념의 시인
청마의 시에 대한 한 평가로 청마가 투철한 의지를 추구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통해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를 관념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3.4. 남성적 어조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愛憐에 물들지 않고 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청마의 시는 남성적 어조와 여성적 어조의 대조적인 두 어조가 두 갈래의 확연히 구별되는 수맥처럼 함께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청마 시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은 남성적인 어조로 이 어조는 주로 그의 진술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시의 어조는 시인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청마의 남성적 어조는 우주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그의 남성적인 태도, 즉 의지적 자세를 나타낸다.
3. 통영과 이영도
3.1. 통영과 이영도
통영은 유치환의 출생지이자 이영도 시인을 만났던 곳이다. 해방이 되던 그 이듬해 1947년 청마는 향리 통영여자중학교에서 이영도를 처음 만났다. 이영도는 스물하나에 박기주와 결혼하여 대구에서 신혼생활을 하다가 남편과 사별한 뒤 딸 하나를 데리고 언니가 살고 있는 통영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청마가 이승을 떠난 후 이영도가 엮은 [사랑하였으므로 幸福하였네라.]에 보면 1946년12월1일자에 [정향에게 주는 시(1)]가 들어있고 그다음1952년6월부터1966년12월31일까지 거의 20년 동안 청마가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있다.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 시는 허무의 극복이라는 의지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정념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일반적인 청마시와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어찌보면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센티멘탈리즘에 휩싸인 사춘기적 연정을 노래한 듯한 이 시는 진정한 행복의 가치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통해 지극히 순결한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시를 통해 현실에 만연되어 있는 이기주의, 자기 중심적 사고에 의해 사랑을 주기보다 받기를 원하거나, 먼저 사랑하기를 꺼리는 그릇된 풍조에 참사랑의 경종을 울려 주고 있다.
이 시는 수미상관식 구조에 의해 의미를 강조하는 한편, 청마 특유의 관념적, 남성적 시어를 철저히 배제시키고, 부드러운 정감이 넘치는 여성적 시어만을 구사함으로써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연인들의 통영 여행은 청마 유치환이 8살 연하의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에게 사랑의 편지를 써서 보내던 청마거리의 통영우체국에서 시작한다. 통영항 중앙시장 뒷길의 통영우체국에서 세병관 사거리까지의 청마거리는 통영에서 청마의 체취가 가장 진하게 배어있는 곳이다.
정운은 문재와 미모를 고루 갖춘 여인이었다.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정운은 청마가 근무하는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했다. 일제 말기 만주에서 방황하다 돌아온 서른 여덟 살 청마의 가슴 속에 정운은 밀물처럼 달려들었다. 학교 교무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얼굴이지만 안타까운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그러나 유교 가풍이 엄한 집안에서 자란 정운은 바위처럼 끄덕도 하지 않았다. 청마가 60살이 되던 196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까지 20년 동안 정운에게 띄운 연서는 모두 5,000여 통. 이 편지들은 청마가 세상을 떠난 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십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당신을 못내 사랑해 오지 않은 바 아니언마는 이번에사 진실로 당신이 나 자신보다도 귀한 것으로서 아낌과 애정이 절절히 깨우쳐지는 것입니다. 그 허망한 사후(死後)까지를 기약할 수 없는 애정의 깊이와 진실이란 것을 오늘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2. 통영과 우체국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년)을 생각하면 먼저 통영과 우체국을 떠올리게 된다. 청마는 통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가 유약국을 경영하고 있었고, 청마는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권재순을 만나 누이, 오빠로 지내다가 결혼을 하기도 했다. 청마는 '우편국에서'라는 시를 남기고 있는데, 아마도 통영에 있는 한 작은 우체국일 것이다.
통영여고에는 그가 교사 시절 작사를 하고 동료교사이던 작곡가 윤이상이 작곡을 한 교가가 남아서 불려지고 있으며, 시비는 윤이상과 자주 올랐다는 남망산 중턱에 세워져 항구를 굽어보고 있다. 중앙동 우체국도 여전하다. 이영도가 살고 있는 길 건너 이층집을 바라보며 청마가 편지를 쓰고 부쳤다는 곳이다. 그 우체국을 오가는 중에 쓰여졌을 청마의 <행복> 시비(詩碑)가 우체국 화단 앞에 세워져 있다. 청마는 통영여중 재직 중에 새로 부임해 온 이영도 시인을 만났고 그가 보낸 무수한 편지 중의 일부는 훗날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이영도 시인에게 보낸 6천여 통의 편지뿐만 아니라 또 다른 여인에게 보낸 편지도 많았다고 전해지는데 그만큼 청마의 내부는 그리움과 연정으로 늘 들끓고 있었던 셈이다.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여기나 와서 기다리자/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는 유리문 밖으로/연보랏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고/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 기다림 때문에 행복하다. 우체국의 유리문이 여닫힐 때마다 파란 하늘과 함께 갯비린내가 밀려 왔다. 아마도 시인은 거기에 와서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치고 한참 동안 앉아 있다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청마 유치환을 '깃발의 시인'으로 기억한다. 남성적 준열한 삶의 의지를 실어나르는 한문 투성이의 그의 시들은 한과 애상, 그리고 여성적 비극의 정조로 물들여져 있는 한국 현대시의 맥락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청마는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만약 나를 시인으로 친다면 그것은 분류학자의 독단과 취미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어찌 사슴이 초식 동물이 되려고 애써 풀잎을 씹고 있겠습니까?"라고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의 '서문'에서 썼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준열하다.
4. 아나키즘과 청마
4.1. 배경
일본 유학 시절, 그 당시 일본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던 아나키즘에 경도 되어 일본의 아나키스트 작가들의 작품에 심취하였다. 또한 민족문학의 암흑기라는 1940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청마는 만주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때 허무주의적 의식과 더불어 개인적 혹은 민족적 패배주의 의식이 심화되면서 시적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하게 되고, 아나키즘적 사상체계가 더욱 공고해져서, 50년대 중반이후부터 아니키즘 시인으로써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4.2. 청마시에 나타난 아나키즘 문학관 수용양상
청마의 시에서 변화하지 않는 기본적인 태도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나키즘 사상이다. 아나키스트들의 특징은 권위를 부정하고 그것과 싸운다는 점이다. 또한 생명을 존중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개인의 자주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며, 윤리적․도덕적 염결의식을 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아나키즘은 기존사회의 총체적 모순과 부조리한 제도에 대하여 비판하며, 자연주의적 사회관에 입각하여 권위를 부정하면서, 바람직한 미래 사회를 전망하고 제시하는 사상적 철학이다.
아나키즘은 불확정적인 사상체계로, 독자적인 문예학 이론과 정형적 모형이 거의 없는 열려있는 미학의 세계이다. 따라서 청마가 경험한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의해서 시의식과 시적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청마가 아나키스트 시인이기 때문이다.
14세 때인 1922년, 동경 유학은 청마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고, 시작품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아나키즘의 영향이 그러하다. 유학 당시 청마는 동랑의 꾸지람을 들으면서 도쿠로미 로카의 「自然과 人生」, 요시다 겐지로의 「人生의 微光」등을 읽었으며, 가장 애정을 가진 시인은 다카무라 고타로, 하기와라 사쿠타로, 그리고 아나키즘 시인 쿠사노 심페이의 작품을 탐독하였다.
아나키즘은 무질서 또는 무정부라고 번역된다. 그것은 일본의 한 학생이 서양으로부터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면서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이래 한자문화권에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韓國아나키즘運動史} 에 따르면, 아나키즘은 정치를 일체 배제하는 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정치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므로 남의 압제를 받고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자기의 본성인 이성으로써 스스로 자제자율하고 자치하면서 남과 더불어 서로 도우며 살고자 원한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유의사와 사회의 연대성을 정치의 기조로 삼는다. 그리하여 각 개인의 자유가 만인의 자유로 보장하고, 만인의 자유가 각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질서를 추구한다. 나라 전체는 모든 지역과 각종 협회의 자율적 자유연합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는 사회여야 한다는 진행형의 사상체계이다.
아나키즘은 확정된 사상체계를 가지거나 독자적인 문예학적 이론을 가지지 못한 반면 열려있는 미학의 세계이다. 아나키즘의 미학은 '운동'으로서는 한계상황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으나, 사상적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문학에서는 아직도 아나키즘은 유효한 가치를 가진다. 아나키즘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문예학적 특성이 있다.
1) 자유에 대한 갈망․유토피아〔이상향, heteropia〕사상 2) 선에 대한 신념․도덕주의 3) 이데올로기의 부정․허무주의 4) 권위나 권력에 대한 투쟁의식 5) 반형식주의․반제도주의 6) 생명애․인간애 혹은 자연주의
특히 청마는 일본 유학 시기에 일본 아나키스트 문인들이 추구하던 '자연애' 혹은 '생명애〔=人間愛〕'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작품의 상당수가 동․식물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청마의 일제강점기 시에 나타나는 갈등의 이유는 가야할 곳 혹은 간절하게 바라는 또 다른 세계(heteropia)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관념적 탐색 즉 향수의식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향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기가 실제로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지향하는 "homesickness"이고, 그 하나는 이상향이나 미지의 먼 세계를 동경하는 "nostalgia"가 그것이다. 전자는 과거 지향적이고 후자는 미래 지향적이다. 전자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서 자기동일성(=正體性)을 확인하려는 태도이며, 후자는 미래지향적 미지의 세계에서 자기동일성을 발견하려는 바람이다.
4.2.1. 원수와의 대결의식
특히 청마의 초기시에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질타 그리고 분노와 비꼼의 시편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이것은 당대의 정치적 혹은 시대적 정황에 대한 소시민적 지식인의 당연한 대응이지만 청마의 경우는 정신적 높이와 고결한 성품 즉 윤리의식이나 도덕적 염결성 때문에 더욱 강도 높게 나타나고 있는 증거이다. 특히 첫시집인 {靑馬詩抄}에서는 이러한 의식에 반영을 위한 매개물로 '동물'의 오브제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鄕愁]․[어느 갈매기]․[白晝의 停車場]․[가마귀의 노래]․[고양이]․ [소리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부조리한 현상, 청마의 정의대로 '원수'와 대결하려는 의지로 나타난다.
나는 고양이를 미워한다 그의 아첨한 목소리를 그 너무나 敏捷한 적은 動作을 그 너무나 山脈의 냄새를 잊었음을 그리고 그의 사람을 憤怒하지 않음을 범에 닮었어도 범 아님을 ― 「고양이」全文
땅과 낮의 세계에 동참하지 못하고 밤의 세계에서 몰래 나와서 홀로 춤을 추어야만 하는 작가의 세계인식은 [고양이]에서는 현실세계에 동참하여 아첨하는 고양이를 질타하고 울분을 터트리게 한다. 타고난 외형은 범의 형상을 닮았지만 현실에 순응하여 아첨하는 고양이의 삶이, 청마의 현실적 삶의 모습과 상통한다. 이 고양이는 바로 현실에 타협해서는 안 되는 청마 자신의 모습이자, 현실에 타협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자아의 인식은 중간자적 존재로서 인간 한계의 비극성을 형성하게 만든다.
청마는 아나키스트 시인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사는 삶이야말로 굴욕적이고, 치욕적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가 '원수에 대한 가열한 반항의 길'에 자신의 신명을 내던지지 못하고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사실은 원수에 대한 무서운 대결의식을 표명하고 있다.
자유를 구속하고,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제국주의적 체제 아래서 굴욕적인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던 자주인(自主人) 청마는 새로운 세계로의 탈출을 꿈꾼다. 본래 아나키즘이란 합리의 체계에 근거를 둔 근대적 정치체제의 타파를 구호하며 발의된 행동철학이다. 일체의 제도를 타파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사회를 만들고자 시도하는 행동철학이기도 하다. 정신사적으로 아나키즘은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 자유와 자주인(自主人)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추구하는 행동을 수반한다. 모든 것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진보를 보장하며, 의욕과 활기를 창조해내는 것이 아나키즘의 이상적인 철학인데 이것이 좌절될 경우, 다음 행동은 자유를 박탈하고, 자신의 처지를 처참하게 만드는 원수에 대한 적대감을 표시하는 행동양식으로 이어진다. "나의 원수와 / 원수에게 아첨하는 者에겐 /가장 옳은 憎惡를 예비하였나니"라고 노래한 작품「日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5. 유치환의 친일에 관해
최근 통영문인협회의 통영시내 중앙동우체국을 '청마우체국'으로 개명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민족문학경남작가회를 비롯한 반대 단체들의 반발이 생기고 있다. 이 논쟁은 가열돼, 통영문인협회의 고소로 법정싸움까지 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자.
친일 여부에 관해 논란이 되는 작품들
<수(首)>
십이월 북만(北滿) 눈도 안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茄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賊)은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도다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寒天)에 모호(模糊)히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너이 죽어 율(律)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함을 제(除)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험렬(險烈)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명목(暝目)하라! 아아 이 불모한 사변(思辨)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 지고
유치환을 친일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만주국’ 정부에 의해 목이 잘린 ‘비적’이 북만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사람이라고 하고, 유치환이 친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비적’은 단지 토비에 불과하기에 〈수〉에서 비적에 대한 비난은 당연한 일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작품 ‘수’를 쓴 40년대 북만주 가신 지역은 무법자와 부랑자가 엉켜 살던 집단이주촌으로, 시 속의 ‘비적’은 독립군이 아니라 원주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도둑이나 강도일 가능성이 크고, 또 이를 처음 제기한 장덕순 교수는 당시 <국민문학>을 주도하던 최재서 선생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으므로 <국민문학>에 발표된 이 시에까지 그 감정이 옮겨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야>
새 세기의 에스프리에서 뿔뿔이 악상을 빚어 제가끔 음악을 연주(演奏)하다.
사(死)… 생(生) 파괴(破壞)…건설(建設)의 신생(新生)과 창설(創設) 천지(天地)를 뒤흔드는 역사(歷史)의 심포니……. 청각(聽覺)은 신운(神韻)에 매료(魅了)되고 새 세대(世代)에의 심장(心臟)은 울어 울어 성상(聖像) 아래 마적(魔笛)은 소리를 거두다.
경이(驚異)한 신기(神技) 가운데 섬과 섬이 꽃봉오리처럼 터지다삼림(森林)과 森林이 울창(鬱蒼)히 솟다. 무지개와 무지개 황홀(恍惚)히 걸리다.
종막(終幕)이 내려지면 위대(偉大)한 인생극(人生劇)에로 옮길 많은 배우(俳優) 배우(俳優)들은 새 출발(出發)의 그 연륜(年輪)에서 정복(征服)의 명곡(名曲)을 부르려니 승리(勝利)의 비곡(秘曲)을 부르려니…….
유치환을 친일파로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작품이 학도병 참여를 권유하는 잡지 특집에 실렸다는 점에서 “화려한 새날의 향연이 예언”되는 역사의 전야에 조선 출신의 학병들이 정복과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취지로 씌어진 학병의 지원을 촉구한 작품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제 말 유치환과 함께 시작 활동을 했던 오장환이 해방 직후 〈민족주의라는 연막〉(〈문화일보〉 1947년 6월 4~6일)에서 청마를 두고 과거 학병 출정 장려시를 썼던 시인이 어떻게 민족주의를 운운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하고 비판했던 것도 이 시를 가리킨 것이다. 반대쪽은 그러한 주장은 아전인수의 해석이며, 어느 부분에도 확실히 친일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새해의 희망을 담은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작품 활동 이외에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유치환이 만주에서 협화회에 간부로 근무했다는 사실이다. 협화회는 일반적으로 친일적 성격을 지닌 단체라고는 하나, 지역별로 그 성격과 역할이 매우 달라서 뭐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또 협화회가 친일적인 단체라 하더라도 당시 만주에 이주해 살던 사람 대부분은 협화회 세를 낸 회원이며, 청마가 간부로 활동했다면 그것은 ‘만주에서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누군가는 져야 할 십자가’를 진 것일 뿐이라는 반대측의 주장이 있어 협화회의 근무 사실만으로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로 보인다.
참고문헌
1. 현대 대표시 연구, 신용협, 새미, 2001 2. 서정주 ․ 유치환의 시세계, 이활, 명우당, 1991 3. 한국 현대시 연구, 신용협, 새미, 2001 4. 한국시인연구-유치환, 박철석, 문학세계사, 1999 5. 재부작고시인연구, 강성애 외, 아성출판사, 1988 6. 유치환 연구, 조상기, 한양대학교 1989년 박사학위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