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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지혜서의 말씀 2,1ㄱ.12-22
악인들은
1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7,30)
사람들은 우왕좌왕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요한 7,28)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
(마태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적이고 그들 삶의 중심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여기서 ‘큰 소리로 말하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희년선포 때처럼 성령의 힘으로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요한 3,7-8)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새로운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새로 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고, 당신이 흘러들게 하소서.
영에 따라 흘러가게 하소서.
빠스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짐이 되는 가? 힘이되는가?>
사순시기가 점차 끝을 향해 가기에 독서와 복음은 주님께서 왜 죽임을 당하게 되는지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우리(악인들이)가 죽이려고 들 때 그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살리실 거라는 논리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인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런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호하고 구해주실 거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짓을 할 때 그런 짓을 하도록 보호하거나 구해주지 않으실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호하고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지요.
문제는 그 악이 어떤 악인가 그것입니다.
그 악이 우리가 싫어하는 그런 악인가,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그런 악인가?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싫어하는 그런 악들, 예를 들어 병이나 실패 같은 것들로 우리를 오히려 시험하시고 단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선 그런 악에서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으시고, 어떤 때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주시어 우리를 진짜 악에서 보호하십니다.
진짜 악.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짜 보호받아야 할 것은 진짜 악들로부터입니다.
진짜 악은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인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가지 못하게 하고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에서의 시련은 우리를 세상에서 떠나 오히려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가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사람들이 악한 의도로 주는 시련과 악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악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가지 않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
그런데 오늘 지혜서를 묵상하면서 제게 더 강렬하게 다가온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To us he is the censure of our thoughts; merely to see him is a hardship for us.”
하느님의 아들이 악인들에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된다고 하는데,
'내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람들은 힘이 되는가? 짐이 되는가?'
이 점을 묵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편견과 선입견에 갇히지 마라>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우리를 나무라고 탓하는 자, 그를 모욕으로 시험해 보자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당히 당신이 누구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서 왔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 배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며 아무도 그의 출처를 몰라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알면 힘이요, 능력이지만 어설프게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해박한 지식도 따뜻한 가슴이 없으면 자칫 교만에 빠지고 자기 안에 갇혀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문이 가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확고히 믿게 됩니다.
존 포엘 신부는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의심이 해소된 후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인 확인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이 있어서 따르기보다 먼저 따름으로써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비록 저의 믿음이 부족하오나 당신을 주님으로 믿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촌뜨기가 말하여도 그 말이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습니다.”
‘개천에서 용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어디에서 났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지식으로 사느냐가 믿음의 사람을 결정합니다.
요즘 세상은 ‘얼짱’, ‘몸짱’을 선호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겸손하며 이해심 많은 ‘맘짱’에는 관심이 부족합니다.
용모나 신장의 선입견에 갇혀 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학연, 지연, 혈연, 출신성분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 신앙인의 가야 할 길입니다.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교 교수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의 벽을 넘어 ‘내가 만든 예수님 상’을 바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누구나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키울 수 있다>
『하.사.시.』에 나오는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합니다.
예수님께 어떤 이방 여인이 다가와 남편이 싸움하다가 머리에 상처를 입어 의사의 말로는 실명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시메온이라는 남편은 이전에 죄를 지었다가 아내의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 적이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의 삶이 다시 냉혹과 탐욕으로 비뚤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사정은 알지만, 그가 용서받고 죽어 천국에 갈 것인지, 아니면 치유 받고 지옥에 갈 것인지 선택하라 합니다.
갈등하던 여인은 남편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도 같은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남자는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세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처럼 선생님의 용서를 주십시오! 그러나 지난번처럼 병도 고쳐 주십시오. 아리아! 아리아! 나 당신에게 맹세하오. 다시는 폭력도 쓰지 않고 속임수도 쓰지 않겠소. 나는….”라며 죽음의 공포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약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청하는 것이 속죄하기보다는 죽음이 두려워 그러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가 뉘우치도록 그의 아내에게처럼 두 가지를 제시하시고 하나를 선택하라 하십니다.
그도 지금 죽음과 심판, 지옥의 공포를 느끼고 있으므로 결국 “제 병을 고치기 위해 손을 들지 마시고, 저를 용서하시고, 저를 붙잡고 있는 마귀에게서 저를 구해내시기 위해 손을 드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내미시어 용서해 주시니 그는 이내 눈물을 흘리며 잠이 듭니다.
[출처: 『하.사.시.』 6권 150장]
결국 예수님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두려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의 근원은 모두 ‘죽음’입니다.
두려움은 살려는 욕구에서 생깁니다.
더는 잃을 게 없다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죽이려 하는데도 당당하게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아직 당신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운명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누구보다 강력한 분이셔서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당신께 손을 댈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할 수 있을까요?
만리장성을 쌓는 일은 힘이 듭니다.
그래도 진시왕은 일찍 죽었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부은 까닭에 더 빨리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에 한 강아지가 여러 마리의 호랑이에게 젖을 먹여 키우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개가 되었습니다.
호랑이들이 성장해서도 그 강아지를 자기 어미라 여기기 때문에 그를 보호합니다.
그 개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다가가려면 수많은 그 둘레의 호랑이들과 맞서야만 합니다.
이때 강아지는 다른 개들에게 전혀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정말 강한 대상에게 쏟았기 때문에 얻는 보상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죽어가는 남편과 그의 아내는 생존의 두려움을 병 나음으로 이겨내려 했습니다.
다행히 그들은 올바른 선택을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판관이 되셨습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자신 안에 잉태된 호랑이를 키우려면 임신부처럼 세상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 것들에 의지하여 자기를 지키려 하다가는 내 안의 호랑이가 죽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몰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물 위까지 걸었던 베드로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만 조금씩 젖을 줄 때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조금씩 더 평화로워짐을 느낍니다.
그러면 더 많이 투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은 이 세상에서 작은 투자로 백 배의 보상을 받는 것으로 성장합니다.
한 번에 하느님의 보호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성모님 태중의 아기처럼 나의 희생을 먹고 자라십니다.
저도 주일 학교 교리 봉사하고 성당에서 활동하면서 거기서 오는 평화 때문에 저의 전 생애를 바쳐도 되겠다는 믿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이 지상에서 두려움을 이기려고 원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주님께 의지해 봅시다.
내가 포기하는 그것들이 내 안에 잉태된 하느님을 성장시키는 영양분이 됩니다.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완전히 이기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요한복음 5장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요한 5,17-18)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은 아마도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최고의회 의원들을 비판할 수 있을 정도의 지위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는 “저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면 빨리 죽일 것이지, 저렇게 공공연하게 활동하는데도 왜 내버려 두는가?”입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라는 말은 “우리는 저 사람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는데, 혹시 최고의회 의원들은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말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라는 말은 “저 사람에게는 ‘메시아다운 신비감’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메시아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오신다.”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은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이 말은 “메시아는 하늘에서 직접 오실 것이다.” 라는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 라는 말은 “저 사람이 나자렛이라는 보잘것없는 시골의 가난한 목수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했던 말과 같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르 6,3)
요한복음 7장 24절에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로 판단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나 나자렛 사람들이나 모두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았던 자들, 눈에 보이는 것만 본 자들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고, 인간적인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의 겉모습만 보다가, 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일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버려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고,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이 나자렛 출신 목수라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르고 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왔다.” 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나는 하늘에서 왔다.” 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앞의 6장에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38).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는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신데”이고,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고, 또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당신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씀인데,
당신의 겉모습은 나자렛의 목수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고향이나 집안이나 직업 등이 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도 그런 걸림돌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모습에서, 다른 교우들의 모습에서, 또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또는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하고, 믿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어쩌면 신앙인들이 겪는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정말로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실까?”, 또는 “내 기도를 듣기는 하실까?” 라는 의심과 불안감일 것입니다.
그런 걸림돌들을 극복하는 비결은 따로 없습니다.
더 굳게 믿으려고 노력하고,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 외에는.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 자기 인식 - 하느님 탐구, 참나의 탐구>
“주님, 당신은 마음의 진실을 반기시니,
가슴 깊이 슬기를 가르치시나이다.”
(시편 51,8)
하루하루가 참 좋은 선물입니다.
기도하라, 회개하라, 사랑하라 주어지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3월 성요셉성월에 3월31일 부활대축일을 앞둔 지금의 사순시기는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참으로 하루하루 선물에 감사하며 힘껏 살아야 할 참 소중한 때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어 성지입니다.
성인은 수도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고 성인이 있는 곳 어디나 성지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그러니 어디에나 하느님이 계신 성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을 만나야 할 꽃자리 성지입니다.
어제 어느 형제님의 묵상글을 보면서 감동했고 다시 배웠습니다.
일부 인용합니다.
“요즘 아버지께서 성서 40주간에 참여하십니다.
연세가 89세이신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침 5시에 일어나셔서 묵주기도와 작은 성무일도를 바치시고, 평화방송에서 하는 미사에 참례를 하십니다.
그리고 저녁에도 성무일도를 바치시는 아버지입니다.”
말 그대로 주님의 영원한 현역의 형제입니다.
이런 분들이 평범한 일상의 성인입니다.
믿음생활에는 제대가 없고 졸업이 없습니다.
죽어야 제대이고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전사이자 학생입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전사이자 죽을때까지 공부해야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89세 고령에도 성서공부에 열중하시니 참 놀라운 주님의 평생학인입니다.
이렇게 보고 배울 노령의 아버지를 둔 형제님은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싸움입니까?
무지와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참나로 살기 위한 영적전쟁입니다.
무슨 공부입니까?
참나를 알기위한 공부입니다.
참나를 알기 위한 평생전투요 참나를 알기 위한 평생공부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이라 했습니다.
주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 탐구와 참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이자 이런 이들이 의인이요 현인입니다.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악인이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제 신원을 새로이 확인할 때 마다 읽어보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고백 기도중 한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교회에 몸담고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삼중 신원입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되겠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형제들과의 날로 깊어지는 전우애(戰友愛)와 학우애(學友愛), 그리고 형제애(兄弟愛)가 내적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참 자기인식도 참나의 삼중 신원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면서 가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의인과 악인의 대조가 뚜렷합니다.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이들이 의인이요, 주님도 참나도 모르는 무지한 이들이 악인입니다.
의인을 시험하는 무지한 악인들의 모습을 지혜서는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무지의 악에 눈먼 이들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에 대한 처방은 단 하나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을 알고 참나를 알아가는 삶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서서히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도 무지의 악인들에 포위되어 있는 의인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오늘 지혜서의 반복같습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영원히 지속될 무지의 악과의 전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자기가 누구인지 압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참나의 신원을 확인하는 의인이자 현인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알아야 참나의 신원을 알게 되고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이 또한 우리의 평생과정입니다.
무지의 치유,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날마다의 미사전례보다 평생교육에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 “더불어,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
(시편 55,2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기억을 넘어, 문제 해결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으로 나가야>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알다’라는 말을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첫째, 아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2000년 넘게 이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존감을 무너트리는 것들 중에는 ‘기억상실증’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커다란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발전으로 우리는 기억력에 의지하기보다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기억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보거나, 기억으로 길을 찾았는데 요즘은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길을 찾습니다.
자꾸 사용하고, 만나고, 생각하면 기억도 업그레이드됩니다.
둘째, 아는 것은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맥가이버,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작품은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들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저는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편인데 문제 해결 능력은 좋지 않습니다.
‘길치, 기계치, 디지털 문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쉽게 조립하는 의자도 1시간 넘게 고민하면서 겨우 조립하였습니다.
그것도 엉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을 바로 문제 해결의 능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해결사’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마귀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만, 탐욕, 분노, 시기, 식탐, 나태, 색욕’의 마귀들이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소경, 듣지 못하는 사람, 열병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은 본인이나, 조상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고, 절망 중에 있는 이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파타(열려라)’입니다.
셋째, 아는 것은 ‘믿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성과 이성은 무한하신 하느님을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칼은 요리사가 사용하면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강도가 칼을 사용하면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에 살던 분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고, 삶을 윤택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아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인종차별을 하였고,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잘 안다는 율법학자와 대사제 그리고 바리사이들에 의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는 것을 믿음으로 승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미가 비록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하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믿음과 사랑으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끝까지 믿어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현재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기억을 넘어, 문제 해결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 미국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가 없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제로 만 25년을 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성소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미 신부가 되었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기 성소가 아니라며 사제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관심 있게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는 본인의 말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완성된 성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완성되지 않았으니 자기 성소가 아직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완성되기 전에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성소’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늘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이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로만 가려고 할 때, 진정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낄 수가 없으며 그 길로 제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주님의 진정한 협조자도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을 드러내고 당신을 세상에 높여 세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자기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는 성소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그 안에서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또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면서 걷어차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 안에서만 자기 성소가 완성되어 갑니다.
기도하며 또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의 성소를 성숙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성소를 확실하게 지켜 나가셨습니다.
즉,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철저하게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최고 의회 의원들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시지만, 최고 의회 의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분을 잡으려고 하지만 손도 대지 못합니다.
성경은 아직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두려웠고 자기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시선은 하느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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