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광인들의 잔치
신외숙
장지동에서 분당으로 꺾어지는 골목에 이르면 진풍경이 펼쳐진다.
하천을 끼고 한 동리가 나타나는데 프로판 가스에 연결된 판잣집이 보인다. 창 틈에서 새어 나오는 전등불은 세월을 40년 전으로 되돌려 놓은 듯하다. 루핑을 얹어 간신히 비바람이나 피하게 만들어 놓은 집은 움막집을 연상케 한다.
시골 읍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골목은 구멍가게와 세탁소 철물점 정육점으로 이어진다. 그 뒤로 펼쳐진 초록 풍경은 예술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는 하늘을 떠받치며 육중한 몸체를 자랑하고 있다.
길게 이어지는 하천은 거의 도랑물 수준이다. 그러나 장마가 지면 판잣집들이 떠나려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정도로 홍수를 이룬다. 가끔씩 물고기도 잡히는 걸 보아 수량은 깨끗한 것 같다. 도로 건너편은 신도시답게 꽤 높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대형 십자가가 달린 교회 건물과 오피스텔 관공서 약국 음식점들이 거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경기도 성남시입니다」
대형 이정표가 신호등 위 공중 위에 매달려 있다. 건물과 고속도로를 빼고 나면 거리는 텅빈 공간 같다. 그 공간 한가운데 주유소와 자동차 학원 부지가 떡 버티고 서 있다. 차도는 6차선 도로임에도 건널목은 항상 꽉꽉 막힌다. 경기도와 서울을 잇는 중간 길목이기 때문이다.
버스 정류장 주변은 이따금씩 분주하다. 재개발 주택단지가 들어서면서 외부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공인중개사 사무실이 많이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미용실과 문구점 뒤로 난 교회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려온다. 얼마 전 젊은 목사가 부임해 온 뒤 교회는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미혼 청년 남녀들을 동원해 전도지를 뿌리는가 하면 경로잔치와 봉사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교회를 알리는 어깨띠를 매고 하천을 청소하는 모습이라든가 노인들을 위한 특별 이벤트를 마련하기도 했다. 버스를 대절해 청계산으로 야유회 겸 야외 예배를 떠나기도 했다. 특히 젊은 목사는 어른 공경하기를 하나님께 하듯 했다. 커피는 물론 식사 대접과 함께 어깨 주무르기 등 서비스 공략에도 나섰다.
그래서 동네 노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요즘 젊은이 같지 않게 예의도 바르고 싹싹하고 인심도 좋구먼.”
그러나 교인 수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목사와 젊은 부인은 동네 사람들만 보면 늘 웃는 낯으로 대하고 생전 가야 화내는 법이 없었다. 동리 주변에는 밭이 많았다. 판잣집에 사는 주민들이 놀고먹는 땅이 아깝다하여 심은 푸성귀가 대부분이었지만 꽤 쏠쏠한 벌이가 되기도 했다.
어느날인가부터 목사 부부도 땅에 푸성귀를 심기 시작했다. 경험이 전혀 없는 탓에 동네 노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일일이 자문을 구하며 스승 대하듯 깍듯하게 대접하자 기분이 좋아진 노인들이 교인으로 둔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목사 부부는 노인들에게 한문과 성경을 가르치며 포교 활동을 펼쳤다. 처음에는 성경만 가르칠 요량이었으나 한문을 잘 안다는 전직 서당 훈장 출신의 노인이 나타나는 바람에 한문까지 하게 된 것이다. 노인은 입만 열면 사서삼경 논어 맹자를 읊어 댔다. 그래서 노인을 특별 강사로 세운 것이다.
교회는 일주일 중 목요일은 노인들을 위한 특별 배식도 했다. 갈 곳 없는 노인들에겐 교통비도 지급했다. 소문이 나면서 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재정이 열악한 교회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사정을 눈치 챈 노인들은 뒤로 물러설 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한문을 가르치던 전직 훈장이 쌈짓돈을 내놓은 것이다. 평소에 지독한 구두쇠로 소문난 그가 돈을 내놓자 사람들은 꽤 놀라는 눈치였다. 사실 노인들은 무료전철 이용권과 버스요금 등을 정부로부터 지원받고 있었다. 노인은 교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상대로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가르쳤다.
교회가 한문 서당처럼 변하면서 점점 부흥하기 시작했다. 교회 맞은편은 미용실과 세탁소 농협 과일가게 편의점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나같이 단층 가옥들이었다. 커다란 수은등이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비추고 하늘은 무겁고 칙칙한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그 하늘 아래 배불뚝이 옥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옥자는 정신장애자다. 혼자 길을 가면서 계속 웃고 떠든다.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배를 쥐고 웃는 모습을 보면 측은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는 불러오는 배의 정체를 아는지 모른지 항상 웃는 얼굴로 길을 간다. 환청을 듣는 그녀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요지부동이다. 기실은알코올 중독자인 그조차 환청을 듣는다는 소문이다. 옥자는 배를 쓰다듬으며 계속 웃는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보여도 여전히 웃기만 한다.
정신은 부실해도 옷차림은 항상 말끔하다. 어디서 났는지 배가 불러온 다음부터 고무줄로 된 주름치마를 입고 다닌다. 위에는 골덴 마이에다 숄까지 두른 채 색깔 매치도 잘 맞게 갖춰 입었다. 긴 머리는 위로 바짝 치켜 올려 상투처럼 동여맸다. 점점 불러오는 배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지나간다.
가끔씩 동네에 나타나는 불량배들이 있었다. 정신이 부실한 그녀를 보고 손가락으로 까딱 까딱 표시를 하며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녀를 입을 벌려 헤헤거리며 따라갔다. 어떨 때는 제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며 유혹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배가 유난히 고픈 날이었다.
낯선 남자만 보면 다가가 손을 내밀며 무언가를 달라고 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눈빛은 이상하게 광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가출 이후 더욱 황폐하게 변해갔다.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남편에게 넌더리를 느껴 한밤중에 맨 몸으로 집을 나섰다. 수중에 돈 한푼 없이 달랑 입은 옷이 전부였다. 그녀는 고속도로 밑을 지나 개천가를 천천히 걷더니 송파 쪽으로 사라져 갔다.
옥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외출했다. 검은색 비닐 쌕을 들고 집을 나와 초등학교 앞을 지나 사거리 모퉁이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진출했다. 물론 버스를 탈 때마다 차비는 내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무어라 욕을 하든 말든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웃고 떠들었다.
어떨 땐 하도 크게 떠들어서 기사가 내리라고 명령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태산같이 굳게 자리를 지켰다. 그녀가 탄 버스는 장지동을 지나 세곡동 어린이 병원을 지났고 양재동 로타리와 강남 네거리를 지나 사당동을 지났다. 그리고 상도동 언덕배기를 지나 교각을 건넜다.
이윽고 그녀가 내린 곳은 63빌딩을 지나 강나루가 보이는 곳이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운집한 그곳은 끊임없이 발걸음이 오가는 경제의 센터였다. 강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치는 건물 사이로 수많은 발걸음이 지나갔다. 해마다 봄철이 되면 노총 회원들이 모여 데모를 벌이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녀는 몇 번인가 63 빌딩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번번이 쫓겨났다. 제과점에 들어 갔다가 빵에 손을 댄 이후부터 얼굴이 알려져 출입금지 당한 것이다. 정신상태에 비해 비교적 얼굴이 말끔한 그녀는 경찰서로 끌려 갈 뻔했으나 주인의 선처로 출입금지로 그친 것이다.
그녀는 제과점 윈도우 앞에서 손가락을 빨며 계속 빵을 쳐다봤다. 신산한 가을바람이 여의도 강가를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커다란 두 눈을 껌뻑이며 싱긋 웃더니 이윽고 도어를 열고 제과점 안으로 들어섰다. 제과점은 주인과 여점원이 바구니에 있는 빵을 봉지에 담고 계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손님들이 빵을 고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옥자는 재빨리 그들 곁으로 다가섰다. 모카빵에 크림을 얹은 보기에도 먹음직한 갈색 빵이 구미를 당기고 있었다. 그녀는 빵 중에서도 크림빵을 가장 좋아했다. 모카빵 옆에는 기다란 파운드 빵이 상자에 담겨져 비닐에 포장돼 있었다.
쫄깃하고 달콤한 맛이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빵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먹어 보았던 빵의 미각이 되살아났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저절로 모카빵에 가 닿았다. 하얀 크림이 손끝에 묻어오면서 그녀는 빵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먹었다. 입 안에서 빵 향기와 함께 달콤한 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맛의 환각에 사로잡히자 그녀는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주변을 잊었는지 다시 손을 뻗어 빵을 집어 들었다.
아! 맛있다.
이번에는 소리까지 내며 빵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환상적인 맛이 그녀를 잠시 행복하게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여자 중의 하나가 카운터에 있는 주인에게 눈짓을 했다. 순간, 주인의 눈빛이 돌아가면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 이 도둑년아.”
주인의 소리에 옥자는 먹던 빵을 들고서 혼비백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뒤를 주인이 잽싸게 쫓아갔다. 놀란 그녀는 차도를 건너 고수부지 쪽으로 쏜살같이 도망쳤다. 뛰어가다 가끔씩 뒤를 돌아다보며 괴성을 질러댔다. 누가 보면 실컷 두들겨 맞고 쫓겨나는 모양 같았다.
“엄마 엄마아!”
그녀는 두 팔을 내저으며 한강이 떠나려가라 소리를 질러 댔다. 손끝에 남아 있는 크림을 빨아 먹으며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쳤다. 그래도 주인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 붙었다. 숨이 턱끝에 닿아 헉헉 대면서도 비둔한 몸을 흔들며 끝까지 쫓아갔다. 마침내 그는 옥자의 뒷목을 움켜잡고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도망치면 내가 못 잡을 줄 알고.”
주인은 옥자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는 마구 흔들었다.
“나쁜년, 지난번에 불쌍하다고 놓아 주었더니 또 훔쳐?”
그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이번에는 솥뚜껑 같은 넓적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등을 세차게 내리쳤다.
“아아! 아저씨 나 죽어요.”
그녀는 당장 숨이 끊어질 듯 엄살을 부렸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놀라 쳐다보자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악! 사람 살려요.”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가며 그녀는 생쇼를 했다. 마치 불쌍한 어린양이 늑대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르는 것처럼 온갖 불쌍한 표정과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얼마나 죽는 소리를 하고 난리를 피웠는지 주변에 순찰을 돌고 있던 경찰이 놀라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인은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말했다.
“무전취식이요, 돈도 내지 않고 마구 먹어치웠소, 지난번에도 그래 봐주었는데 이번에도 무단으로 침입해 마구 먹어댔소.”
옥자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싹 바꿔 경찰에게 말했다.
“아저씨 아파요, 저 아저씨가 막 때려서 피났어요.”
“뭐라구?”
주인은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옥자는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무슨 큰 억울한 일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를 질러가며 대성통곡했다. 지나던 행인들이 주인과 경찰을 바라보더니 곁에 와 섰다. 그녀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쳐내더니 경찰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 나 배고파요.”
천연덕스런 목소리였다.
“얼마나 먹었는데요.”
이번에는 경찰이 주인을 향해 말했다.
“글쎄 그게 다 다섯 개쯤 되나.”
의외의 질문에 주인은 당황하며 말했다.
“암튼 저 여자는 도둑이요, 가만 냅 두면 또 훔치려 들게 뻔해요.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 한단 말요.”
경찰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사이 옥자는 주인을 향해 혀를 낼름 내밀었다. 마치 용용 죽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방금 전까지 대성통곡하며 지나던 사람들 죄다 불러 모으더니 이번에는 철없는 어린애 같은 장난질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주인은 점점 그녀가 괘씸하게 여겨졌다. 빵을 훔쳐 먹은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행동이 여간 얄밉지가 않은 것이다.
경찰만 아니라면 당장 주먹으로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아하니 갈 곳도 없는 불쌍한 신세인 것 같으니 웬만하면 봐주시죠?”
“뭐요?”
경찰은 제 본분은 잊었는지 도둑년 편을 들고 있었다.
“아니 한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도둑질을 한 걸 그냥 봐주란 말요 시방?‘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사투리가 튀어 나오고 말았다.
“가격으로 따져도 얼마 될 것 같지 않고 사정도 딱해 보이고 해서.”
“당신 경찰 맞소?”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는 이제 경찰에 대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었다. 주인은 나름대로 생각했다. 까짓 빵값 몇푼 안 받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가해지만 편드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분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경찰의 말을 뒤집어 보면 그깟 빵값 몇푼 때문에 자신만 몹쓸 사람이 되어버린 꼴이었다. 또 빵을 훔쳐 먹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잘못했다면 빌면 될 것을 사람 약올리며 도망쳐 잡았더니 오히려 불쌍한 피해자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성통곡하며 길 가던 사람들까지 다 불러 세우고.
그는 억울하다 못해 분노가 치솟았다.
“당신은 마음이 천사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난 도저히 안 되겠으니 저 여자를 꼭 처벌해 주쇼.”
옥자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멀뚱멀뚱 두 사람만 쳐다봤다. 그러더니 잠시 후 맴을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상황감각이 없어도 이 정도면 사이코 수준이다. 옥자는 두 팔을 벌려 나비처럼 춤을 추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다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 되자 옥자는 신이 난 모양이었다. 다리를 쫙 벌리며 바닥에 주저앉더니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는 동네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두 손을 모으며 처량 맞게 노래하던 그녀는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기 시작했다. 흡사 감동 드라마를 연출하듯 진지하기까지 했다. 그 모양을 보자니 주인의 마음에 묘한 감동이 일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가 그깟 빵 몇 개 훔쳐 먹은 것을 도둑년 운운한 것에 후회가 됐다. 경찰의 태도가 약간 불쾌하긴 했지만 천성이 모질지 못한 그는 그만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다신 우리 가게 근처 얼씬거리지 마라, 또한번 얼씬거렸다간 그땐 국물도 없다.”
그는 발걸음을 63 빌딩으로 향하면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손으로 쓱 걷어 올렸다. 강바람이 목덜미를 사납게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날마다 집에서 나와 버스 투어를 계속했다. 그녀가 가는 곳은 늘 한정돼 있었다. 한강이 보이는 고수부지나 동네를 가르는 고속도로가 끝나는 뚝방 하천이었다. 그곳은 가끔 동네 청년들이 모여 불꽃놀이를 하거나 불량배들이 싸움터가 되곤 했다. 여자 혼자 가기엔 위험한 곳이었지만 그녀는 심심하면 발걸음을 했다.
옷을 한번 벗을 때마다 먹을 것을 던져주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머리통과 엉덩이를 발길로 걷어차는 사람도 있었지만 먹을 것만 던져주면 그만이었다. 먹을 것 앞에서는 언제나 옷을 벗었고 헤헤거리고 웃음을 팔았다. 어떨 땐 제쪽에서 먼저 꼬리를 치기도 했다.
불량배들은 그녀를 두고 광란의 잔치를 벌였다. 정신이 부실한 그녀를 두고 윤간을 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일단 실컷 재미를 보고 사건이 불거지면 그곳을 뜰 작정이었다. 어느날 그들은 그녀의 배가 차츰 불러오는 것을 느꼈다. 마침 수중에 돈도 떨어지고 있었다.
불러오는 그녀의 배를 보면서 동네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대도 그녀는 더욱 그들에게 다가갔다. 배가 고프다는 이유를 달고서. 그들이 상대해 주지 않으면 가게에 들어가 빵을 훔쳐 먹었다. 그러다 들켜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다. 그녀의 계산은 간단했다. 지난번에도 용서해 주었으니 이번에도 별탈없이 넘어 가리라.
또 배도 부르고 했으니 불쌍히 여겨서라도 봐주리라.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녀는 어느날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제과점에 들어갔다. 각종 빵 향기가 진동하는 고급 제과점이었다. 자꾸만 주변을 살피며 빵에 손길이 가려는 걸 주인은 일찌감치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밀려드는 손님들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이었다.
주문 들어온 케익을 정성스럽게 포장할 때였다. 옥자는 주인의 눈길이 소홀해진 틈을 타 소보루 빵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었다. 설사 들키더라도 그것쯤은 용서해 주리라 믿었다. 주인이 카운터를 향해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옥자는 빵을 집어 재빨리 치마 속에 감췄다. 그리고 또다시 빵을 연거푸 치마 속에 감추는 순간이었다. 빵을 포장한 비닐에서 빠시락 하고 소리가 나면서 바닥에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당황한 그녀는 재빨리 빵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모두 크림빵이었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달콤한 크림빵. 그 소중한 크림빵을 다시 치마 속에 감추려는 순간 주인의 두 다리가 눈앞에 보였다.
아뿔사! 들키고 말았구나. 도망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주인의 단단한 손아귀가 뒷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아까부터 행동이 수상쩍다 했지.”
주인은 소문을 들어 옥자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 때나 불쑥 가게나 식당에 나타나 불문곡직 먹을 것부터 챙겨 달아나는 괘씸녀라는 사실을. 먹을 것만 던져주면 불량배들 앞에서도 아무 때나 치마를 벗어 내리는 그녀가 못할 일은 없다는 것을. 그런 그녀에게 도둑질은 기본이었던 것이다.
다만 운이 좋아 철창 신세를 안 진 것뿐이다. 그런데 마침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제발로 가게에 나타나 빵을 치마 속으로 감추다 현장에서 들켜버린 것이다. 주인은 다짜고짜로 그녀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아악! 아저씨 나 죽어요, 왜 때려요.“
옥자는 잔뜩 부른 배를 손으로 가리키며 소릴 질렀다. 뱃속에 든 아이를 봐서라도 그만 때리라는 표시였다. 그러나 이어 세찬 뺨따귀가 연거푸 날아오자 온 동네가 떠나려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고 바닥을 뒹굴며 난장을 피우는지 가게에 들어오려는 손님들이 놀라 다시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 모양을 보자 주인은 더욱 더 화가 났다. 저 계집 때문에 오는 손님 다 놓치는구나. 옥자는 계속 죽는 시늉을 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모양을 제과점 창문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창을 두드리며 야유하는 사람들 중에는 어린 청소년도 끼어 있었다.
그러자 여태껏 바닥을 뒹굴며 아파 죽는다고 난리치던 옥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잔뜩 부른 배를 갑자기 앞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이렇게 임신한 여자를 주인이 사정없이 때렸노라고 구경꾼들을 향해 시위하는 것이었다. 주인은 그녀가 점점 더 괘씸해지기 시작했다.
부실한 정신 내세워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먹으며 동네에 온갖 나쁜 소문만 퍼뜨리고 다니는 흉악한 계집이었다. 툭하면 배고파 죽는다고 난리치면서 날마다 공짜 밥을 얻어먹었고 남자들에게 돌림빵 당하면서도 부끄러움도 느낄 줄 모르는 뻔뻔한 년이었다.
그 옥자라는 년 때문에 동네 청소년들이 모여 작당을 벌인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전혀 노력할 생각 않고 순전히 남의 도움으로 살려는 생각이었다. 그 방면으로 얼마나 머리 회전이 빠른지 몰랐다. 끼니 때만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밥을 얻어먹었다. 먹는 데는 염치도 양심도 없었다.
밥을 주지 않으면 남의 집 주방으로 들어가 훔쳐서라도 먹었다. 남이 가게든 식당이든 무단 침입해 빵이고 음식이든 제집 물건처럼 먹어치우는 것이다. 겁도 없이 당당하게. 그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제과점 남자는 옥자를 파출서로 끌고 가면서 중간 준간 그녀의 투실한 정강이를 발길로 걷어차고 머리통을 세게 쥐어박았다.
그녀는 온 동네가 떠나려가라 소리 소리 질러댔다.
"아악! 아파요 나 죽어요, 사람 살려요.“
행인들이 흘끔 흘끔 돌아보면서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세게 등짝을 후려치고 발길로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가 경찰을 부르지 않고 직접 파출소로 데려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년, 밥만 축내는 년, 내 집 물건이 네년 것이더냐, 어디 할 짓이 없어 도둑질이야.”
“아저씨, 그깟 빵쪼각 몇 개 먹은 것 가지고 뭘 그러세요, 지난번 여의도에서는 제과점에 있는 비싼 빵 실컷 먹었는데도 불쌍하다고 봐주었단 말이에요.”
그녀는 뻔뻔하게도 죄를 탕감해 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거기에선 통했을지 몰라도 나한텐 어림도 없다.”
“아저씬 자식도 안 키우세요, 이 뱃속에 든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냔 말이에요.”
“그래, 말이 나왔으니 어디 한번 해보자, 그래 자식을 뱃속에 담은 년이 부끄럽지도 않더냐, 도둑질과 거랭뱅이 짓을 밥먹듯 해대니, 아니 그러고 보니 이년이 정신이 말짱한 년 아녀.”
“이년 이년 하지 마세요, 저도 엄연한 한 인격체라고요.”
그녀는 이제 주인에게 일장 훈시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발걸음은 파출소 문턱을 넘고 있었다. 파출소는 근무 경찰은 다 어디로 갔는지 당직하는 손경사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로타리 제과점 김씨 아니쇼?”
손경사는 제과점 주인과 잘 아는지 손 인사를 주고받았다. 주인은 손경사에게 옥자를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무슨 일인데요. 또 무슨 사고 쳤습니까?”
그러고 보니 옥자는 파출소 출입이 이미 여러번인 모양이었다.
“아! 글쎄 이년이 툭하면 우리 가게 물건을 슬쩍하지 뭡니까. 그러고도 모자라 아예 배째라는 식이에요. 양심은 장작불에 구워 먹었는지 뻔뻔하기까지 하지 뭡니까? 오히려 제년이 큰소리 탕탕 쳐요.”
그때 손경사 앞에 있던 전화기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났다. 그러나 웬일인지 손경사는 전화 받을 생각은 않고 옥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잠시 후 전화는 저절로 끊어졌다.
“너 올해 나이가 몇이냐?”
“그 그건 왜요?”
“너도 어린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이젠 정신 차릴 때도 되지 않았냐? 아니 어떡케 툭하면 무전취식에다 도둑질에다…….”
손경사는 입에 올리기도 부끄럽다는 듯 마지못해 말했다.
“넌 그 뱃속에 든 아이한테 부끄럽지도 않니?”
손가락으로 부른 배를 가리키자 옥자는 그때서야 정신이 든 듯했다.
“너 때문에 동네 청소년들 기강이 문란해지고 병 괴상한 소문이다 돌고…… 그냥 이 동네에서 조용히 사라져 주면 안 되겠냐?”
손경사의 말에 옥자는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말했다.
“그럼 아기와 난 무얼 먹고살라고요.”
그 말에 손경사와 김씨는 넋을 놓고 말았다.
“그래도 제 자식이라고 걱정은 되는 모양이네.”
손경사가 김씨에게 눈짓을 하자 옥자는 이번에는 그냥 풀려나고 말았다. 옥자는 무거운 배를 끌어안고 파출소 문지방을 넘어 거리로 나왔다. 입가에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뻔뻔스러운 배짱과 함께 식욕이 득달같이 몰려왔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서 먹거리를 해결하나.
배를 움켜쥐고 찾아든 곳은 시장통에 있는 선술집이었다.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해 저절로 발걸음이 가 닿았는데 철판 위에서 삼겹살이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었다. 중년 남자 둘이서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삼겹살을 상추쌈에 싸 입에 털어 넣고 있었다.
그녀는 염치도 없이 남자들 틈에 끼어 앉았다. 뻔뻔스럽게 부른 배를 손으로 가리키며 삼겹살을 들어 낼름 입에 넣었다. 남자들은 하도 기가 막혀 마시던 술잔을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주인장을 불렀다.
“이보슈, 이 여자 누구요?”
주인이 놀라 뛰어왔다.
“아아니 넌 옥자?”
“술맛 떨어지기 전에 얼른 내 보내슈.”
남자들은 이번에는 젓가락을 탁자 위에 내던지며 말했다. 그런데도 옥자는 전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또다시 손을 뻗어 삼겹살을 입에 넣고 말았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였다. 한쪽 손으로 부른 배를 가리키며 또다시 삼겹살을 집어 입으로 집어넣으려는 찰나였다.
주인장의 매운 손이 그녀의 얼굴을 내리치고 있었다. 이어 등짝과 어깨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저씨 왜 때려요?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그녀는 대담하게 주인에게 항변했다. 아직 입도 적시지 않았는데 그냥 일어서기엔 너무도 억울했다. 저 철판 위에 있는 삼겹살을 몽땅 먹어치워도 시원찮을 그녀였다. 아직도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삼겹살에 연신 눈길이 갔다. 저 삼겹살을 상추에 된장을 발라 실컷 먹어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깟 삼겹살 좀 먹었기로 왜 때리냐고요? 내가 아저씨네 집 개예요?”
옥자는 턱을 꼿꼿이 쳐들고 대들었다. 제과점 사건 이후 옥자는 점점 대범해지고 있었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겠지. 공짜 밥 얻어먹는 데 이골이 난 두뇌는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거기에다 뱃속에 든 생명은 좋은 핑계거리로 작용하고 있었다. 설마 뱃속에 든 아기를 봐서라도 또다시 봐 주겠지.
“나가 이년아.”
주인은 그녀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서 밖으로 나왔다. 아직 초저녁이었다. 시장통에는 장보러 나온 주부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듯 그 광경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네 년 때문에 손해 본 사람들이 한두 사람인 줄 아냐, 손해도 손해지만 네년 때문에 손님 다 떨어진다, 이거여.”
그는 옥자의 머리채를 쥐고서 있는 힘을 다해 흔들었다.
“아악! 아파요 살살 하세요, 애가 놀라서 나오겠어요.”
그녀는 손으로 배를 가리키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릴 질렀다. 그때 마침 배달 갔던 그의 아내가 다가오며 물었다.
“무슨 일이래요?”
“당신 마침 잘 왔어, 내 이년을 파출소에 넘겨주고 올 테니 당신 가게 좀 지키고 있어, 이년이 가게에서 손님 상에 있는 고기를 마구 처먹었어.”
“네에?”
주인장의 아내는 얼른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음식점 주인장은 옥자의 목을 끌고서 온 시장 안을 돌아다니며 화풀이를 했다. 그때마다 옥자는 돼지 멱따는 소릴 하며 아프다고 난리를 피웠다. 주인장에게 이끌려 튀김 가게 앞을 지날 때는 손을 뻗어 새우튀김 하나를 얼른 입속에 털어 넣기도 했다.
안 그래도 좋은 먹성이 뱃속에 아이까지 생기자 배로 늘어난 모양이었다. 그에 맞서 뻔뻔함과 오기도 배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시장통을 빠져나와 파출소로 끌려가면서도 계속 손을 벌려 먹을 것을 청했다.
파출소에서는 이번에는 절대 봐줄 수 없다고 했다. 벌써 여러번째 민원이 들어온 데다 더 이상 봐주었다간 아예 상습화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서를 꾸며 유치장에 넣을 낌새가 보이자 옥자는 파출소 바닥에 다리를 뻗대고 울기 시작했다. 마치 억울한 일을 만나기라도한 것처럼 대성통곡하자 경사들은 말했다.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구먼, 상습범이야.”
옥자는 뱃속에 든 아이를 빌미로 끝까지 유치장행을 면해 보려 했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이미 여러번 써먹은 솜씨라는 게 알려진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는 아이를 낳으면 입양기관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동안 아이를 핑계로 편하게 살 생각이었는데 그만 빗나가고 만 것이다.
“저런 년은 뱃속에 든 아이도 팔아먹을 년이야, 일 안 하고 공짜로 얻어먹고 사는데 이력이 난 게지, 빨리 송치해버려.”
그녀는 이제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지자 더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다 함께 잡혀온 불량배에게 배를 걷어차이고 말았다. 시끄럽다는 이유로 불량배는 그녀의 배를 사정없이 구둣발로 걷어찼다. 그녀가 죽는 소리를 하며 배를 안고 바닥을 구르는 데도 모두 앉아서 구경만 했다. 그녀의 몸은 불량배에 의해 공처럼 튕겨졌고 패대기쳐 졌다. 마침내 짐짝처럼 구석으로 가 처박혔다.
그날 이후 옥자의 모습은 그 동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감옥에 붙잡혀 갔는지 아님 미혼모들을 위한 쉼터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사라짐과 동시에 동리에 떠돌던 불량배들도 사라졌다. 이제 동리 가게들은 안심하고 운영하게 되었고 공짜 손님으로 인한 시비도 당분간 발생하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또다시 가을빛이 동리를 물들어가던 어느날이었다. 고즈넉한 가을 분위기를 타고 개척교회가 부흥하고 있었다. 40대 중반인 목사부부는 얼마 전, 입양기관에서 여자 아기를 데려와 키우고 있었다. 부부뿐 아니라 교인들이 돌아가며 아기를 봐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공동 양육하는 셈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 중에는 동네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정씨와 로타리에서 제과점을 하는 김씨, 또 시장통에서 선술집을 하는 연씨도 포함돼 있었다. 여자 아기는 날이 갈수록 살이 토실토실하게 올랐고 귀염성 있게 자랐다.
아기는 목사부부를 따라 배일같이 새벽기도에 참석했고 조금 더 자라 유치원에 가자 성경공부와 기도훈련을 받았다. 이따금씩 궤도를 이탈해 목사부부를 애태우는 일도 있었지만 얼마 안 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목사 부부는 엄격하게 신앙논리에 따라 양육했기에 정도에서 벗어나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아이는 좀 더 자라면서 자기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어디에 대고 물어보려고도 안 했다. 생존이라는 절박한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버림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청소년 시기에 접어들면서 우울증이 발생하고 말았다. 뇌에서 공급되는 도파민의 이상이라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청소년기의 우울증은 도파민의 이상으로도 발생하지만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큰 충격 때문에 발생하기도 합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성폭력을 당했거나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을 때 뇌기능이 망가져서 오기도 합니다. 혹 무슨 충격 받을 만한 일이라도 아님 집안의 유전으로 인한…….”
목사부부는 차마 딸 아이가 양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언제 딸 아이가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청소년기의 우울증은 매우 위험합니다. 각별히 신경 많이 쓰시고 유의하십시오.”
딸 아이는 방구석에 처박혀 지내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목사부부는 딸에게 긍정적 사고를 부각시키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감정은 사고(思考)와 별개의 문제였다. 슬픔과 불안 두려움이 도를 더해갈 무렵 목사부부는 처음으로 입양한 걸 후회했다.
내 의를 지나치게 앞세운 나머지 후환을 자초하고 말았구나.
딸 아이는 죽은 듯이 방에 엎드려 있다가 밤만 되면 홀연히 밖으로 나갔다. 학생 신분에 맞지 않는 화장을 하고서 어디서 구했는지 하이힐까지 신고 있었다. 멀리서 그 모양을 지켜보던 목사부부는 기가 막혔다.
자신들은 사랑을 실천한다는 게 결국 화근 덩어리를 껴안은 셈이었다. 밤 외출이 잦아지던 어느날, 딸 아이의 종적이 묘연해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옥자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바로 그날이었다.
아이는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려던 차였다. 어느날 아이는 잠이 들 무렵 귓가에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는 동네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 노랫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꿈속을 거니는 것처럼 몽롱한 기분에 취해 걸어가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언젠가 동네 어귀를 지날 때였다.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목사 딸 말야, 데려다 키우는 애 있잖아, 아무래도 옥자를 닮은 것 같애, 그 눈매하며 희여멀금한 얼굴색하며.”
“예끼 이 사람 갖다 붙이기는 옥자가 어디 그렇게 예쁜 얼굴인가 밉상은 아니지만 큰 눈망울이 뻔뻔하고 앙큼하게 생긴 얼굴이지.”
“아냐 아냐, 그렇지 않아, 옥자 그년이 저기 뚝방에 서서 노래 부를 때 모습하고 똑같다니까. 거 있잖아 동요 나의 살던 고향은…….”
그날 밤 아이는 환청을 들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는 동네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딸 아이는 그날 밤 동리를 떠나 멀리 갔다. 그리고 자기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 몸과 마음을 숨긴 채 살아갔다. 어느덧 성년이 된 그녀는 대학에 다니며 한 논문을 썼다.
「마음은 형체는 없지만 감정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상처가 침입하면 반응한다. 그 반응에 따라 마음은 갖가지 양상을 나타내는데 그럴 때 나타나는 증상이 상처에 대한 방어체계다. 마음은 또다시 발생하게 될지 모를 상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사용하는데 그때 나타내는 증상이 피해의식이다.
피해의식은 기억체계를 동원 재빠르게 반응한다. 상대를 먼저 공격하거나 두려움 혹은 회피하는 양상을 나타낸다. 피해의식은 과거의 경험에서 반추되는 것이므로 타협이나 이해심이 없는 게 특징이다.
그 감정의 근저는 불신이며 양상은 적대감과 분노로 나타난다. 피해의식은 모든 것을 악의로 해석하는 경향을 띈다.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과거에 반추해 악의로 결론 내린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판단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현상은 매번 반복된다.
과거의 상처에 집착된 사고(思考)가 끊임없이 추측과 상상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타협이나 수정의 여지가 없다. 자연히 무리에서 이탈되며 외톨이가 된다. 대인관계에 있어 가장 상대하기 힘든 케이스다. 사람들은 피해의식에 휩싸인 사람들을 가장 꺼려한다. 진실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에 모든 판단을 맡기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직 이기심과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사랑이나 인정(認定)도 통하지 않는다. 그것조차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그것이 사실로 판명난다 할지라도 다시 재해석함으로 마음이 낮아진다. 피해의식은 두려움의 형태가 분노로 나타나는 일종의 자의식 현상이다. 그 이면에는 자존심 상하고 손해본 기억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뇌에서 끊임없이 명령하는 것이다.
손해보지 말아라.
상처 입지 말아라.
대적하고 먼저 공격하라.
거절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항상 고뇌한다. 의식속에 한번 뿌리 내려진 상처는 사고(思考)를 고착화하고 갖가지 부정적 양상을 일으킨다. 모든 걸 자기 주관적으로 해석해 수많은 오해의 불씨를 나타낸다. 불신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생각을 조정하는 것이다.
그는 항상 외롭다.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평강이나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 손해볼까봐 늘 전전긍긍하며 사랑마저도 늘 주저한다. 그러나 그 심연(深淵) 저변에는 사랑받고자 원하는 끊임없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누군가 그에게도 다가가야 한다. 그에게 다가가 참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어야 한다. 한두 번 갖고는 안 된다. 열 번 스무 번 거듭 거듭 보여 주어야 한다. 피해의식의 가장 확실한 처방책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녀는 여의도 강가를 걷다가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말쑥하게 잘 차려 입은 중년여자가 음식점 앞에서 남자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얻어 맞고 있었다. 여자는 머리를 상투처럼 위로 끌어 올려 동여 맨 모습이 언 듯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웠다. 아마도 음식점에서 공짜로 먹은 뒤 돈이 없다고 우긴 모양이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무전취식으로 고발하겠다고 하자 여자가 말했다.
“아저씨 맘대로 하세요, 그깟 음식값 한번 안 냈다고 잡아가둘 경찰이 흔한 줄 아세요?”
그녀는 큰소리 탕탕 치면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웃었다. 그러자 남자는 더욱 분이 나 여자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다.
“이거 순 상습범 아냐?”
“아얏! 아저씨 왜 자꾸 때리는 거예요, 폭행죄로 확 고소할까보다.”
“뭐야? 이런……."
그때였다. 구경꾼 중의 한 여자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등포 시장에서 옷 가게를 운영하던 정씨였다.
“가만 가만 이 옷 우리 가게에서 팔던 것 같은데.”
여자가 입고 있는 카키색 점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순간 여자는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뭐 뭐라구요? 내가 이 옷을 훔치기라도 했단 말예요?”
“가만 가만, 그러니까 그때 없어졌다고 난리 쳤던 그 옷이 이 옷 맞잖아?”
순간 정씨는 여자의 목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아저씨 이 여자 도둑이에요. 얼마 전 우리 가게에 들어와서 서성댔는데 이 옷도 함께 없어졌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 여자 전문적인 도둑 무전취식 사기꾼 아냐?”
남자는 중년여자에게 죄목을 붙이더니 어느새 핸드폰을 꺼내 자판을 누르고 있었다. 그 사이 여자는 고수부지 쪽으로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었다. 음식점 주인 남자는 핸드폰을 걸다 말고 그녀의 뒤를 정신없이 쫓아갔다. 그런데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는 바람에 멈춰 서고 말았다. 걸음아 날 살려라 뛰던 여자가 고수부지 굴다리를 지나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여자가 사라지고 난 굴다리 밑으로 엄청나게 센 강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어디선가 여자의 비명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그러나 차량과 바람결에 파묻혀 곧 사라지고 말았다.
목사의 양녀는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면서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끝
첫댓글 졸린 눈을 비비며 참 재밋게 읽고 갑니다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장문의 글을 완독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건필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