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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 13,1-9.15-17.19-30.33-62
그 무렵
1 바빌론에 요야킴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2 그는 수산나라고 하는 힐키야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다.
3 수산나의 부모는 의로운 이들로서 그 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시켰다.
4 한편 요야킴은 아주 부유한 사람으로서 넓은 정원이 그의 집에 맞붙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큰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늘 그를 찾아오곤 하였다.
5 그런데 그해에 어떤 두 원로가 백성 가운데에서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바로 그들을 두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바빌론에서, 백성의 지도자로 여겨지는 재판관인 원로들에게서 죄악이 나왔다.”
6 그들이 줄곧 요야킴의 집에 있었으므로, 소송거리가 있는 이들은 모두 그리로 그들을 찾아갔다.
7 한낮에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수산나는 남편의 정원에 들어가 거닐곤 하였다.
8 그렇게 그곳에 들어가 거니는 수산나를 매일 눈여겨본 그 두 원로는 수산나에게 음욕을 품게 되었다.
9 그들은 양심을 억누르고 하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돌린 채, 의로운 판결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15 그들이 알맞은 날을 엿보고 있을 때, 수산나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녀 둘만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날이 무더웠으므로 그곳에서 목욕을 하려고 하였다.
16 거기에는 숨어서 수산나를 엿보는 그 두 원로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17 수산나는 하녀들에게, “내가 목욕을 하게 올리브 기름과 물분을 가져오고 정원 문들을 닫아걸어라.” 하고 말하였다.
19 하녀들이 나가자마자 두 원로는 일어나서 수산나에게 달려가
20 말하였다.
“자, 정원 문들은 잠겼고 우리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소.
우리는 당신을 간절히 원하오.
그러니 우리 뜻을 받아들여 우리와 함께 잡시다.
21 그러지 않으면, 어떤 젊은이가 당신과 함께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당신이 하녀들을 내보냈다고 증언하겠소.”
22 수산나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는 꼼짝 못할 곤경에 빠졌소.
그렇게 하면 그것은 나에게 죽음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오.
23 주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그렇게 하지 않고 당신들의 손아귀에 걸려드는 편이 더 낫소.”
24 그러고 나서 수산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두 원로도 수산나를 향하여 소리를 지르더니,
25 그 가운데 하나가 달려가서 정원 문들을 열어젖혔다.
26 집에 있던 사람들이 정원에서 나는 고함 소리를 듣고, 옆문으로 뛰어들어가 수산나에게 일어난 일을 보았다.
27 원로들이 저희 쪽의 이야기를 하자 하인들은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수산나를 두고 누가 그와 같은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28 다음 날, 수산나의 남편 요야킴의 집으로 백성이 모여들 때, 그 두 원로는 수산나를 죽이겠다는 악한 생각을 가득 품고서 그리로 갔다.
29 그들이 백성 앞에서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요야킴의 아내, 힐키야의 딸 수산나를 데려오게 하시오.”
그러자 백성이 사람을 보냈다.
30 수산나는 부모와 자녀들과 모든 친척과 함께 나왔다.
33 그러자 수산나 곁에 있던 이들과 그를 보는 이들이 모두 울었다.
34 그 두 원로는 일어나 백성 한가운데에서 수산나의 머리에 자기들의 손을 얹었다.
35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6 그 두 원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단둘이서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 이 여자가 여종 둘을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가더니, 정원 문들을 닫아걸고서는 여종들을 내보냈소.
37 그때에 숨어 있던 젊은이 하나가 이 여자에게 가더니 함께 누웠소.
38 정원 구석에 있던 우리는 그 죄악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서 그들에게 달려갔소.
39 그리고 둘이서 정을 통하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그자가 우리보다 힘이 세어 붙잡을 수는 없었소.
그래서 그자는 문을 열고 달아나 버렸소.
40 그 대신 이 여자를 붙들고 그 젊은이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41 이 여자는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하지 않았소.
이것이 우리의 증언이오.”
그들이 백성의 원로이며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회중은 그들을 믿고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42 그때에 수산나가 크게 소리 지르며 말하였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
43 또한 당신께서는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44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45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
46 그러자 다니엘이 “나는 이 여인의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47 온 백성이 그에게 돌아서서, “그대가 한 말은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다.
48 다니엘은 그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여러분은 어찌 그토록 어리석습니까?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49 법정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자들은 수산나에 관하여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50 온 백성은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자 다른 원로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원로 지위를 주셨으니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설명해 보게.”
51 다니엘이 “저들을 서로 멀리 떼어 놓으십시오. 제가 신문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2 사람들이 그들을 따로 떼어 놓자, 다니엘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 말하였다.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은 당신, 이제 지난날에 저지른 당신의 죄들이 드러났소.
53 주님께서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당신은 죄 없는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죄 있는 자들을 놓아주어 불의한 재판을 하였소.
54 자, 당신이 참으로 이 여인을 보았다면, 그 둘이 어느 나무 아래에서 관계하는 것을 보았는지 말해 보시오.”
그자가 “유향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5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은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하느님에게서 판결을 받아 왔소.
그리고 이제 당신을 둘로 베어 버릴 것이오.”
56 다니엘은 그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 그자에게 말하였다.
“유다가 아니라 가나안의 후손인 당신,
아름다움이 당신을 호리고 음욕이 당신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였소.
57 당신들은 이스라엘의 딸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 왔소.
그 여자들은 겁에 질려 당신들과 관계한 것이오.
그러나 이 유다의 딸은 당신들의 죄악을 허용하지 않았소.
58 자 그러면, 관계하는 그들을 어느 나무 아래에서 붙잡았는지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자가 “떡갈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9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도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당신을 둘로 잘라 버리려고 칼을 든 채 기다리고 있소.
그렇게 해서 당신들을 파멸시키려는 것이오.”
60 그러자 온 회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1 다니엘이 그 두 원로에게, 자기들이 거짓 증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저희 입으로 입증하게 하였으므로, 온 회중은 그들에게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이웃을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그 방식대로 그들을 처리하였다.
62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에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8,1-11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고발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11,7)
혹시 가슴에 돌덩이 한 두 개 정도 품고 살아가지는 않나요?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 말입니다.
‘화’라는 돌덩이, 상처와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스스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들이 들려주어서 들게 된 돌덩이든, 사실 그 돌덩이는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짓누르고 있고 자신을 무겁게 할 뿐입니다.
그런데 고발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돌을 손에 든 채로 갔는지, 땅에 내려놓고 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차마 지금은 던지지 못하고 나중에 적절한 시기에 더 큰 돌로 더 세게 내리치려고 그냥 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여인을 구실로 삼아, 이미 예수님에게도 여인에게도 ‘돌’을 던진 이들입니다.
단지 더 이상 돌을 던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피하였을 뿐입니다.
죄송하다고 말하지도 않고, 용서해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단지 떠나갔을 뿐입니다.
아마 그들을 또 다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는 예수님이 말씀에 그들은 ‘나이 많은 이’부터 돌아갔지만, 진정으로 회개한 이들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단지 심판하지 않고 돌을 던지지 않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돌 맞은 이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고,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의 죄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를 위하여 그에게 선을 베푸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여인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돌 맞은 그의 상처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며, 또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의 표시입니다.
곧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11)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은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새롭게 살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돌덩이로 오히려 저 자신이 짓눌려 있지 않게 하소서.
돌덩이를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만지작거리게 하소서.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위로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뜸 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대자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오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은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데 예수님께 그래도 될지 말지 답을 요구합니다.
평소대로라면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이지만 이 경우만은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고 궁지에 몰아넣을 좋은 기회라고 의기양양하며 빨리 대답하라고 좨칩니다.
사람들의 시선도 이제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께 쏠려 있습니다.
이럴 때 보통의 우리는 빨리 답해야 한다는 대단한 압박감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그들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쉽고 조급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답하시지 않고 뜸을 들이십니다.
제가 식당 주방일을 하다 보면 뜸을 들이기 전에 손님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급한 마음에 김을 빼면 밥이 덜 되거나 제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황이 급하더라도 마음은 급하게 먹지 말고 뜸 들여야 합니다.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고 뜸 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고,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며 내가 상황을 주도하는 법입니다.
사실 우리는 뜸 들이는 이 시간을 가지지 않아 지나고 나서 이렇게 답하면 되었을 것을! 이렇게 대처하면 좋았을 걸을! 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오늘 주님의 뜸 들이심도 이런 의미일까요?
자기 주도를 위한 시간 벌기!?
주님께서 뜸 들이신 의미는 분명 이것 이상이고, 우리의 뜸 들임도 이것 이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의?
하느님의 뜻을 찾고 알기 위한 기도의 시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실까?
이렇게 우리는 답을 재촉하는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얼굴을 하느님께 향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다울 것입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경우 소년 다니엘이 성령의 감도로 간음죄에 몰려 죽을 판인 수산나를 살판으로 바꿨는데,
우리도 다니엘처럼 이렇게 성령으로 판을 바꾸는 겁니다.
이것은 스테파노가 죽게 되었을 때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본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얼굴을 하늘로 향하는 대신 땅에다 ‘하느님’ 이렇게 쓰고 계셨을 겁니다.
그랬는데 그 하느님께서 ‘살려라!’ 하고 답하셨을 것이고, 살리는 방법은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죄 없으면 돌로 치라 하면 될 거라고 알려주셨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이런 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상황이 빨리 해결되길 조급해하지 말고 뜸 들이고 당황하지 말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는데, 급할 때 기도하고 급할수록 기도하라!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 주신 모범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저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대해 수시로 판단을 내리고 단죄합니다.
심지어 영화나 텔레비전의 극을 보면서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여 열을 올립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에 화를 쌓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삽니다
남의 티끌은 유난히 잘 보면서도 자기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단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여인을 단죄하기보다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는 속셈이 더 컸습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예수님께서 그를 단죄하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요, 단죄하지 않으면 전통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하십니다.
그리고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요한 8,9).
자리를 떠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주님의 한 말씀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속일 수가 없었기에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실 자기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는 결코 돌을 집어 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죄인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고발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몸을 굽히시어 죄인의 처지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즉각 판단을 내리지 않으시고 여유를 주셔서 자신의 속을 보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자신의 속을 보고도 돌을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더 큰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 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주님의 충만한 은총이 주어지길 빕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어라고 쓰셨을까요?
‘너 자신을 알라! 아니면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죄목들’을 나열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길 희망합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마태 5,45) 아버지 하느님, 당신이 보내주신 아드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요한 8,11)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자녀의 죄는 어머니가 낳을 때 그 흘린 피로 이미 다 씻겼다>
영화 <더 스토닝>은 이란에서 아직도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는 ‘투석형(投石刑)’을 소재로 한 실화입니다.
두 손목과 양팔이 뒤로 묶인 채, 도망가거나 피할 수조차 없도록 허리까지 땅에 파묻힌 상태로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돌을 맞으며 죽어가야 한다면?
그것도 자신이 직접 낳은 아들들과 남편, 아버지와 친척 남자들, 평생 한 가족처럼 얼굴을 보고 지낸 마을 이웃들이 던지는 돌이라면?
안구의 핏줄이 터지다 못해 돌출되거나 머리뼈가 깨졌는데도 무더기로 날아오는 돌을 맞으면서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아이 넷을 키우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소라야의 결혼생활은 남편의 폭력과 폭언 탓에 몹시 불행합니다.
자식들을 생각하며 힘겨운 결혼생활을 버티던 그녀는 14살 소녀와 결혼하기 위해 위자료를 주지 않고 이혼하기를 원하는 남편 알리가 꾸민 잔혹한 함정에 빠져듭니다.
간음한 여인으로 몰린 것입니다.
그릇된 탐욕과 거짓은 들개 같은 사내들의 횡포로 이어지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가담한 죄악은 집단 침묵으로 뒤덮여 묻힐 뻔하지만, 나중에 책을 쓴 자흐라의 용기 있는 목소리에 힘입어 마침내 소라야의 이야기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 용서하는 방식은 장차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실 것 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돌을 들고 있는 바리사이들의 죄를 땅에 쓰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당신 손가락은 땅에 박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죄를 흙에 쓴 글자처럼 사라지게 하시기 위해 우리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돌아가시고 묻히셨습니다.
우리 모든 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땅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 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라.”라고 하신 순간은 “여인아, 그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 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라고 물으시고 여인에게서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은 직후였습니다.
나를 단죄 하는 이가 없다면 나도 굳이 다른 이를 단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판관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탓을 돌렸듯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 자기를 단죄 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부끄러웠고 이미 두려웠습니다.
자아가 바로 그들을 단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를 판단하는 이유는 그 죄책감을 가리기 위해 방어 기제 중 하나를 발동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위 영화에서 알리는 위자료를 주기 싫은 것과 14살 소녀와 결혼하고 싶은 죄를 용서 받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용서 받았다면 소라야에게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알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 않았기에 악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2018년 연말에 어머니를 살해한 30대 남성이 대법원이 징역 20년 형을 확정했습니다.
38살 A 씨는 술에 취해 TV를 보다가 어머니로부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A 씨는 평소에도 잦은 음주 등으로 꾸중을 들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날 꾸중을 듣는 과정에서 뺨을 맞은 A 씨가 급기야 어머니에게 의자와 흉기를 휘둘렀고, 의식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내버려 둔 채 달아나기까지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아들의 흉기에 찔린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고 도망가라.”하고 말한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들을 걱정했던 겁니다.
전에 사망 보험금을 노리고 지인을 시켜 차 사고를 내 어머니를 죽이려 한 아들의 선처를 호소한 노모도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는 내가 칼을 휘둘러도 죽어가면서 그 죄까지 가지고 가십니다.
자신이 낳은 존재이기에 그 책임을 자신이 껴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죄를 짓고 나에게 유일하게 심판하셔야 할 분이 나를 죄 없다고 하시는데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벌도 받고 죄책감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더 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당신 책임으로 안고 대신 돌아가십니다.
부모는 낳을 때부터 그 피로 자녀의 모든 잘못을 용서한 분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그 죄책감 때문에 이미 용서한 분을 찌르게 됩니다.
어머니가 피를 흘리며 자녀를 낳을 때 자녀가 미래에 지을 죄까지 다 피로 보속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에덴 동산에서 뱀을 놓아주실 때 이미 죄 지을 것을 다 용서해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이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어 끝까지 하느님을 원망하고 칼을 들이댄다면 더는 구원을 희망할 수 없게 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괜찮다 다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온 한 가련한 여인, 죽느냐 사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반응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뭘 쓰셨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들과 교부들이 여기에 대해서 연구하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셨습니다.
대체로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이름, 악한 고발자들의 죄목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귀신도 모른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도 모른다는 것, 오직 예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적대자들에게 맞서지 않으십니다.
방어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가만히 계십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뭔가를 쓰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김 빼기 작전이었습니다.
뭔가 대판 싸워야 되는데, 자신들이 짠 작전이 팍팍 진척될 것인데, 예수님은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시며 완전히 그들을 무시해버립니다.
갑자기 김이 빠질 데로 다 빠져버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 순간 엄청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위기관리능력이 참으로 뛰어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맥 빠지고 허탈해진 적대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결정타 한방을 더 날리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 말씀 끝에 사람들은 하나하나 떠나가고, 결국 텅 빈 성전 마당에는 예수님과 그 여자 단둘만 남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그 순간에 대해서 아주 아름다운 주석 하나를 남기셨습니다.
“모두가 다 빠져나가고 오직 둘만 남았다.
우리를 대표하는 ‘비참한 여인’과 ‘하느님의 자비’ 둘만 남았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이 어처구니없는 사랑,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 기막힌 사랑으로 인해 그 여인은 지금 눈보다 더 깨끗하게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자의 상태를 가리켜 교회 전승은 ‘순결한 창녀’라고 했습니다.
순결한 창녀, 이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향해, 또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언인가 쓰셨다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는데, 사실 땅바닥은 여인의 가슴이었습니다.
그 땅바닥은 죄와 타락과 방황으로 얼룩진 여인의 마음이자 우리 각자의 마음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 마음 하나하나에 당신 손가락이 아프도록 꾹꾹 눌러 또 다른 한 말씀을 새겨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들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딸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죄가 많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아무리 부족해도, 괜찮다 다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오늘 복음 이야기는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라는 가르침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고,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앞의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않고서 인간들이 마음대로 죄인을 단죄하고 처벌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말씀은 신명기 17장에 있는 율법을 인용한 것입니다.
"... 반드시 증인 둘이나 셋의 증언이 있어야 그를 죽일 수 있다.
증인 한 사람의 증언으로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증인들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온 백성이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신명 17,6-7ㄱ)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에 ‘죄 없는 자’ 라는 말을 추가하셨는데,
이 말은 “혹시라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있다면”이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도 모두 똑같은 죄인들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할 죄인이고,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은 사실상 “돌을 던지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 7,1-3)
그런데 우리는 이 가르침을,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보더라도, 또는 죄 속에서 사는 것을 보더라도 못 본 척 하라는 가르침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들은 이 땅에 ‘하느님의 선’을 실현해야 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선의 실현을 위해서 죄와 악을 막고 물리쳐야 합니다.
특히 ‘사회악’에 대해서는 선과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서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방법은 심판과 처벌이 아닙니다.
회개하도록 타이르고 인도하는 것이 선을 실현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또 남을 회개시키려면 우선 먼저 나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것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일은 구약성경 예레미야서 17장 13절,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예레 17,13)에 연결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땅에 죄인들의 명단을, 또는 죄인들이 지은 죄목들을 쓰셨다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것은 무엇을 쓰셨느냐가 아니라, 침묵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없이 떠나갔다는 것은 자신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살아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당신도 죄가 있다는 뜻은 아니고,
당신은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왔다는 뜻입니다.
“가거라.”는 “가서 ‘새 인생’을 살아라.”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자를 단죄하지 않으신 일은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 라는 것을 나타내고,
즉 완전히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처벌을 잠시 보류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자는 돌아가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 인생’을 살았을까?
그 뒷이야기를 우리는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아직도 미완성이고, 진행 중인 이야기입니다.
만일에 여자가 제대로 회개하지 않고 또 죄를 짓는다면,
집행이 유예되었던 처벌까지 합해져서 ‘가중처벌’을 받게 될 것이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 인생’을 산다면 완전히 용서받고, ‘무죄 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자비와 지혜의 주님 -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주님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시편 23,4)
오늘 시편 화답송이 그대로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오늘 3월18일 다산 어른과 논어의 공자 말씀도 주님과 날로 더욱 가까이 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막연한 그리움만 품으면서 정작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마음이 식고 가라앉아 멀어질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 다산
“산 앵두나무 꽃이 펄럴펄럭 나부끼네.
그대 어찌 그립지 않겠소만, 그대 머무는 곳이 너무 머네.”
공자가 말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 진정 생각한다면 어찌 먼 것이 있겠는가?”
- 논어
“가장 작은이들과 함께 하라, 언제나!” (Be with the least, always!)
어제 교황님을 방문했던 어느 일행들에게 주신 교황님의 짧은 권고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 진리이며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존재방식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가장 작은이들과 함께 하십니다.
언제나!
바로 오늘 말씀에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어제 수도형제가 공동카톡방에 올린 수도원 대문 뒤쪽에서 발견했다는 유인물의 차마 입에 올리기 거북한 저주의 거친 문구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먼저 되라. 천벌 받는다”
“못되 쳐먹은 새끼들아 천벌 받는다”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나 이 또한 사순시기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우리의 깊은 회개를 촉구하는 말마디로 알아 들었습니다.
“사람이 먼저 되라”, 수도자, 사제, 신자 이전에 “사람이 됨”은 기본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와 복음 말씀이 사람됨의 기본을 알려줍니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 13장은 다니엘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수산나를 구하는 무려 63절까지 계속되는 참으로 긴 장입니다.
개신교 공동번역에는 생략되고 가톨릭 공동번역에만 나오는 외경에 속하는 다니엘서입니다.
여기서는 수산나가 고립무원의 외로운 처지의 가장 작은 자가 됩니다.
반면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보다는 루카복음에 더 어울리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복음의 핵심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간음하다 사로잡힌 여자가 고립무원의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서 혜성같이 등장한 주인공이 제1독서 다니엘과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이 두 분은 참으로 사람됨의 모범을 보여 주면서 가장 작은 자들과 함께 하시는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서에서 음욕에 빠져 수산나를 사지에 몰아넣은 사악한 두 원로를 응징하고 수산나를 구원하는 다니엘의 용기와 지혜로운 처신이 참 통쾌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느님은 다니엘을 통해 개입하신 것입니다.
사실 수산나의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께 상달된 것이지요.
사실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들 사악한 원로의 흉계에 빠졌을 때도 하느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이들 손아귀에 걸려드는 편이 낫겠다하며 결연하게도 이들과의 타협을 거절합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속에서도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 보니 그대로 주님 향한 일편단심 사랑과 신뢰, 희망의 기도하는 눈길이요 이어지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그순간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심으로 개입하심으로 두 원로는 가차없는 심판을 받았고, 수산나는 구원되어 살아나니 말 그대로 구사일생, 천우신조입니다.
온 회중은 이구동성으로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간음하다 사로잡힌 여인이 살아나는 과정도 참으로 극적입니다.
정말 제1독서의 사악한 원로들처럼 간음하다 사로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야말로 정말 사악한 죄인들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죄인들입니다.
이 여인과 함께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버린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지극히 침착한 처신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을 촉구하는 적대자들에 아랑곳 없이 침묵중에 묵묵히 땅위에 무엇인가 쓰시며 주위 사람들 모두의 흥분을 진정시키며 밖으로 향하던 눈길을 자기 내면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어 다음 말씀으로 기상천외한 반전이 이뤄지니 진정 천상 지혜의 계시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새삼 자비의 깊은 샘에서 솟아난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다니엘은 물론 예수님의 지혜는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많이 회자되는 말마디인지요!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시니,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지혜로운 처신이 놀랍습니다.
그동안 이 말씀을 들은 이들은 죄가 많은 나이 많은 이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님과 여자만 남습니다.
모두를 자발적 회개로 이끌어 모두를 살리는 자비하신 예수님의 구원의 지혜입니다.
이어지는 둘 사이의 대화도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주님의 모습이 약여(躍如)합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도 단죄하지 않는데 누구 누구를 단죄합니까?
주님은 회개한 이들을 단죄하지 않고 그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십니다.
오직 오늘 지금부터 새로운 시작의 삶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즉시 회개하여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함이 지혜이자 구원의 첩경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시고 살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오늘 온종일 되뇌고 싶은 화답송 시편 마직막 구절입니다.
“주님,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시편 23,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요리(料理)>
‘요리(料理)’라는 말의 뜻은 ‘헤아려 다스린다.’라고 합니다.
요리사, 주방장, 쉐프는 헤아려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음식을 만드는데서 저는 요리할 줄 모르는 편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사골 육수에 꽁치 통조림을 넣고, 거기에 소시지 볶음을 넣었습니다.
어묵과 떡국 떡도 넣어서 끓였습니다.
헤아림이 없어서인지 맛이 신묘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꽁치 통조림에는 묵은김치가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사골 육수에는 담백한 재료가 좋다고 합니다.
재능도 없고, 노력도 부족하니 앞으로도 음식을 요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끔씩 정성과 맛이 깃들여 요리된 ‘반찬과 국’을 주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쉬운 것부터 하나 둘 배워나가면 저도 음식 재료를 헤아려서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나마 아침은 헤아려 다스리기 쉽습니다.
떡과 계란 그리고 우유와 과일 한 쪽이면 진수성찬입니다.
대한민국은 총선을 앞둔 선거의 계절입니다.
정당은 ‘공천’이라는 요리를 잘 해야 합니다.
능력과 인품을 겸비한 후보를 선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과 현실에 다가온 위기와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선거는 어쩌면 잔인한 요리인 것 같습니다.
같은 목표를 향해서 여러 후보가 준비하지만 결국 선택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선택된 정당의 후보들 중에서도 오직 한 사람만이 당선되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시민은 ‘투표’라는 요리를 잘 해야 합니다.
옥석(玉石)을 가릴 수 있는 혜안이 있어야 합니다.
왜곡된 정보와 진실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무조건 비난하는 후보, 허황된 공약을 남발하는 후보, 비리와 부패에 연루된 후보를 요리에서 배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준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참여와 요리 능력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몸은 비록 멀리 타국에 있지만 2024년 총선이라는 요리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한 성찬이 되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문제를 요리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인간은 유한하면서 무한을 생각합니다.
죽어야 할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살아야 할 의미를 찾습니다.
‘왜(why)'라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입니다.
유교는 ‘우환(憂患)’을 요리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천명을 따른다면 우환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사서삼경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으로 우환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불교는 ‘고통(苦痛)을 요리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는 고통, 거짓된 자아에 흔들리는 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 합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깨달음으로 집착이라는 업보를 끊어버리면서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두려움(恐怖)’을 요리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두려움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할 때 사라진다고 합니다.
풍랑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물속에 빠져드는 베드로에게 ‘왜 두려워하느냐?’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십니다.
인의예지와 깨달음, 그리고 믿음은 인류가 삶의 문제를 헤아려 다스리는 요리입니다.
물론 저는 그리스도교에 의지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을 데리고 온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율법에 따라서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던지려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라고 천대받고 무시 받았던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에게 이방인의 선교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죽어야 했던 여인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리고 씻어 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벗었던 수산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렸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에서 용서받고 다시 태어났던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더 큰 은총을 받았을까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리면서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 미국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을 먼저 생각하면 됩니다>
“대학생 아들이 있는데 게임만 하면서 인생을 낭비합니다.
성인이니까 그냥 놔둬야 할까요?
아니면 게임을 못하게 일일이 따라다니며 잔소리해야 할까요?”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듭니다.
요즘에 취업하기 힘들다고 하니 그냥 꾹 참고 다녀야 할까요?
아니면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할까요?”
이런 식의 흑백 논리를 말하면서 답을 이야기해 달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선택의 폭을 스스로 좁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이렇게 단순화하면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이나마 편안한 심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다시 더 복잡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세상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답이 많은 세상에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근시안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준이 정확해야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긴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의 기준을 정확하게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율법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벗어나는 다양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돌을 던져 죽이라고 했다면서, 예수님의 생각은 어떤지 묻습니다.
살려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다고 트집을 잡을 것이고, 죽이라고 하면 이제까지 가르쳤던 사랑은 어디에 있냐면서 또 다른 트집을 잡았을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떠나갑니다.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억지를 스스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간음했다고 하는데, 혼자 그 자리에 온다는 것 자체가 큰 억지이요.
여자 혼자서 간음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들은 사랑 없는 닫힌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먼저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야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으며, 이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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