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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 7,4-5ㄴ.12-14ㄱ.16
그 무렵
4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4,13.16-18.22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그것은 구속사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아마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유년시절까지만 함께 할 수 있도록 안배한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계획하신 바를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인 요셉가문에서 태어남이요, 그 요셉의 약혼자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남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이처럼 인류의 구원을 잉태시키는 데 온전한 조력자가 되신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사가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19)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며 살았기에,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그는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요셉은 약혼자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온갖 의혹과 치욕스런 배신감으로 분노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비록 임신의 원인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결코 약혼자에 대한 서운함과 불신을 떨쳐버릴 수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이혼증서를 써주어 조용히 그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 아기는 요셉의 아기가 되는 것이며, 결국 요셉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사려 깊은 처사와 자비심을 보게 됩니다.
셋째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다.'(마태 1,24)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그는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순명으로 인류를 향한 하느님 구원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2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마 4,18)가 되었듯이, 그 역시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지만,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 포기에 따르자면,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에게는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으며,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수도승들의 모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수도생활 안에서 요셉 성인과 함께 또 다른 예수님이신 형제들의 양부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성 요셉 대축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복음은 요셉에 대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얘기하면서,
성 요셉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과 비교하며 설명을 합니다.
한자어로는 이신득의(以信得義)와 이행득의(以行得義)의 차이입니다.
이행득의란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고,
이신득의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떡해서 의롭게 되었느냐 그 얘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은 어떻게 의롭게 되었을까요?
그의 의로움은 어떤 것일까요?
요셉이 의롭다고 할 때 그때의 의로움은 율법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배우고 익혀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그렇지만 점잖고 따듯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파혼을 하지만 소문을 냄으로써 마리아를 궁지에 몰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의로움의 바탕이 되어 있는 그가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총의 짝이 바로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은총으로 의로워진 것은 그가 은총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이 합쳐져 의로워지는 겁니다.
도둑이나 강도에게는 문을 닫고 믿으면 문을 열 듯, 믿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열린 문을 밀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적도 마찬가지잖아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늘 말씀하시잖습니까?
의사를 믿지 못하면 의사가 아예 치유를 할 수 없듯이,
독초라고 의심하면 거부하고 약초라고 믿을 때만 허용하듯이,
주님 치유의 힘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아예 거부되고 믿는 이에게만 들어옵니다.
요셉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은총의 시기가 열리고,
그래서 율법의 의로움이 은총의 의로움으로 승화되고,
자기의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자기 힘으로 의로워진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란 그리스도로 인한 의로움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이제 자기 자식은 낳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어 그리스도를 키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위대한 가난이고 요셉의 위대한 정결입니다.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보다 자식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이 더 큰 가난이고,
그저 여자를 소유하지 않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더 위대한 정결인데,
요셉이 바로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의 삶을 산 것입니다.
마리아를 자기 여자로 소유하지 않고 성령의 정배로 내줌으로써 요셉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불의는 소유와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우리는 요셉의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에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을 배우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 “의로운 사람”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 3,5 2 / 코린 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 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 9,30 / 필리 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홧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 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 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고해성사의 효과는 정확히 이렇게 드러난다>
제가 어렸을 때 뒤란에서 야한 여자 사진을 보다가 아는 형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둥그렇게 꾸겨서 담 밖으로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 형은 그런데 굳이 그것을 찾으려 했습니다.
다행스럽게 논은 그것을 잘 감추어 주어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형이 찾았는데도 일부러 모른 척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그 일로 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나는 타인의 잘못을 덮어주는 논을 본받았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찾아내려던 동네 형을 본받았을까요?
이상하게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본받게 됩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들추어 상처 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자녀는 그러면 자기 잘못보다는 자기가 잘못했을 때 그것을 덮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배우게 됩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음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 자체가 용서를 믿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요셉 성인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 순결했다는 뜻입니다.
자꾸 타인의 잘못을 드러내려 한다면 자신이 얻는 게 있어서입니다.
반면 드러내고 싶은 게 없다면 이미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 받았기에 굳이 남을 아프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남을 아프게 하면 나도 아픕니다.
요셉 성인이 약혼 중에 임신하고 온 아내를 보면서도 굳이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신 그러한 순결한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요셉 성인의 의로움이 이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는 사람은 그것으로 반드시 얻는 이득이 있기에 타인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센 사람 한 명과 똑똑한 사람 한 명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집 센 사람은 4×7=27이라 주장했고, 똑똑한 사람은 4×7=28이라 주장했던 것입니다.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재판관에게 가자고 말하였고, 그 둘은 재판관을 찾아가 시비를 가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재판관은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 센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4×7=27이라 말하였느냐?”
그러자 고집 센 사람이 말합니다.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러자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매질 하여라!”
결국 고집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매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똑똑한 사람은 매질을 당하는 내내 재판관에게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지만, 재판관은 그런 그의 하소연을 한 마디로 잠재웁니다.
“4×7=27이라고 말하는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 한다.”
왜 굳이 받아들이지도 않으려는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면서까지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 할까요?
나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하는 틀린 면이 있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을 굳이 심판하고 잘못을 드러내며 자기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고해성사 직후’입니다.
이때는 모든 죄를 용서 받았기에 그 사실을 믿는다면 타인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내 죄를 용서 받았음을 의심하게 된다면 아담과 하와처럼 또 누군가의 잘못을 들추어 자기를 정당화하게 마련입니다.
고해성사를 본 즉시 우리는 요셉 성인처럼 ‘누구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됩시다.
‘굳이 남의 잘못을 들추어낼 때 내 맘만 괴롭게 되는 성 요셉과 같은 정결하고 의로운 상태’로 살아갑시다.
이것이 심판 앞에서 의로운 상태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합시다!>
사순 특강을 갔다가 정말이지 몇십 년 만에 신학교 동창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특강 시간에는 성당에 안 보이더니, 사제관에서 따로 들었더군요.
저를 보고 하는 말, 어떻게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냐고,
하루 온 종일 말 한마디 없던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말을 붙여도 뒤로 빼면서 실실 웃기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어떻게 이렇게 날나리가 되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정말이지 그랬습니다.
제가 봐도 놀랄 정도입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요셉 성인 못지않게 과묵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듣기만 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해야 할 일만 딱 하고...
몇십 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며 살았으니, 이제 다시 과묵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할 순간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진국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말없이 사랑하는 사람.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
조용히 도와주는 사람.
힘들 때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
침묵 속에 기도하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힘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복음 사가들은 그에 대해 철저하게도 함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세주의 양부이자, 마리아의 동반자로서, 오랜 세월 구세사의 주역들을 동반하셨던 그의 역할은 참으로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의 특별하고 굴곡진 삶을 글로 쓰자면, 아마도 소설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 침묵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일생을 봉헌했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마리아의 순결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께서는 요셉 성인의 사명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나 베드로 사도의 사명에 버금가는 막중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성 요셉의 사명은 조용히 생각하는 사명이요, 침묵하는 사명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구속 사업의 비밀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리 노출되지 않도록 끝까지 침묵을 지켰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성 요셉의 사명은 곧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명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계실 때의 성 요셉의 사명은 보호와 방위의 사명, 수호와 원조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적으로부터 방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역시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지키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성장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각별하셨던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성 요셉! 저는 이 성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전문가 쇼사르 박사는 요셉 성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 요셉은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었으며, 결코 지상 낙원의 꿈을 쫓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가장들의 모범입니다.
그는 참으로 여성스런 동정녀 마리아와 떳떳하고 올바르게 교제할 수 있었던, 참으로 이상적이고 멋진 남자였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세상, 성 요셉처럼 침묵의 사명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요셉>
오늘 복음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요셉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혼자서만 빠져나가려고 했던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요셉은 적극적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려고 했고, 능동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그 일을 진행하려고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의 이야기를 보면(루카 1,26-38), 천사는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이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혼자 요셉에게 성령 잉태를 알리는 일과 요셉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는 일은 온전히 마리아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일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곧바로 요셉에게 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렸을 것이고,
아마도 두 사람의 관계는, 즉 약혼 관계는 변함이 없고, 결혼도 예정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셉이 마리아를 믿었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안 믿었다면 율법대로 처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라는 말은 요셉이 마리아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또 그는 자신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만 세상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모르게’ 라는 말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는 자신의 아기라고 주장하려고 했다는 뜻이 됩니다.
요셉이 그렇게 주장하면 마리아는 안전해집니다.
그러면 파혼은 왜 하려고 했을까?
아기의 진짜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니까(루카 1,35) 자기는 뒤로 물러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모르게’ 함으로써 마리아와 아기를 보호하는 일은 하려고 했습니다.
파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요셉과 마리아를 변함없는 부부로 생각할 것이고,
같이 살기 전에 아기를 잉태한 일에 대해서도 조금 이르게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부부 사이의 자연스러운 일로만 생각할 텐데, 그러면 모두가 다 안전하고 평화롭게 됩니다.
그 모든 계획은 철저하게 마리아와 아기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요셉 자신의 각오에서 비롯된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작정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았을까?
약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남모르게 파혼하려면, 여러 가지로 고려해야 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나타난 시점은 요셉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려고 할 때입니다.
실행하기 직전에 천사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요셉이 주님의 천사를 천사로 알아보았고,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보통 사람들이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보는 것과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꿈에’ 천사가 나타났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 ‘꿈’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꿈’이 아니라 특별한 환시 체험일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기도 중에 응답을 들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한 말에 ‘두려워하지 말고’ 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요셉이 두려워하고 있었거나 고민하고 있었거나 무척 힘들어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가 쉬운데, 이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하려고 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할 때에도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부터 했습니다(루카 1,30).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은 마리아가 요셉에게 한 말을 다시 확인해 준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통해서 자기가 마리아와 마리아의 말을 믿은 것이 옳은 일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종합해서 생각하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착하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만은 아니고, 늘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을 보면, ‘메시아의 왕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루카 1,32-33),
요셉에게 한 말을 보면, ‘메시아의 구원사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뜻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 두 가지를 합해서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으로서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태어나실 아기가 그런 분이라는 것을 믿었고,
그래서 기꺼이 마리아와 아기의 보호자가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 - 성가정 교회 공동체>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로 전하리라.”
(시편 89,2)
사순시기 및 3월 성 요셉 성월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오늘 3월 19일은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주보성인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원이 1987년 3월 19일 설립됐으니 설립 37주년이 되는 날이자, 2014년 3월 19일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됐으니 승격 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 영예스럽고 자랑스런 성 요셉입니다.
저절로 3월 성 요셉 성월에 자주 부르는 “성 요셉 찬양하세” 성가 280장이 생각납니다.
3절까지 가사가 다 좋지만 1절만 인용합니다.
“성 요셉 찬양하세 주님의 양부를,
정결하신 성 요셉 마리아의 정배.
의로우신 성 요셉, 우리 양자로 삼아,
언제나 우리 마음을 정결케하시며.
의롭게 생활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가톨릭 교회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교회 수호자가 된 요셉 성인을 생각하면 저는 늘 하는 “만세육창”에다 오늘은 “성 요셉 만세!”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교회 위기 때마다 큰 빛을 발한 성 요셉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교회가 혼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큰 도움이 됐던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배경 성 요셉입니다.
1870년 교황 복자 9세는 성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889년 교황 레오 13세는 성 요셉을 성가정의 보호자이자 가장의 모범으로 공포했고,
1920년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성 요셉을 노동자와 임종자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937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 요셉을 사회정의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955년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는 5월1일 노동절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정했고,
1961년 교황 성 요한 23세는 성 요셉 축일에 회칙을 발표하고 성인에게 공의회를 보호해 달라고 청했고,
198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요셉이 ‘구세주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고,
2020년 교회가 코로나 19펜데믹으로 혼란을 겪을시, 교황 프란치스코는 ‘보편교회의 수호자 성 요셉 선포 150주년’을 맞이하여 그해 12월8일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를 발표하고 다음해 2021년 12월8일까지 1년을 ‘성 요셉의 해’로 선포했습니다.
참으로 교회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셨던 성 요셉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가득 지니게 됩니다.
성가정 공동체하면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이 생각나듯,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하면 참 좋은 배경의 불암산이 생각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자작 애송시 두 편의 불암산이 상징하는 바 성가정 공동체의 배경인 성 요셉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큰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
-2000.11.17.
또 하나 침묵에 잠긴 저녁 불암산을 보며 쓴 짧은 자작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바로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의 참 좋은 배경인 불암산같은 성 요셉입니다.
세 측면에 걸쳐 성인의 위대한 덕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요셉 성인은 참 큰 분이십니다.
참으로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분, 한마디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성인의 자비롭고 지혜로운 신속한 처신이 참으로 놀랍고 고맙고 감동스럽습니다.
자비와 분별의 지혜는 함께 갑니다.
다음 구절에서 성인의 고결한 인품이 잘 드럽납니다.
‘마리아의 남편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성 요셉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기가 아니라 마리아의 안위요 마리아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자비하고 지혜로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성 요셉입니다.
둘째, 요셉 성인은 참 깊은 분이십니다.
참으로 잘 들으시는 경청의 겸손한 성인이십니다.
귀기울여 주님 천사의 말을 겸손히 경청하는 성 요셉입니다.
깊은 산이 좋은 산이듯, 겸손의 깊은 사람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를 받고 있는 경청과 겸손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속내를 당신 천사를 통해 소상히 성 요셉에게 드러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성 요셉의 책임감이 얼마나 막중한지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예수란 이름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제2독서 사무엘 하권의 예언자 나탄의 다윗을 향한 예언이 흡사 요셉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다윗에 버금가는 존재가 오늘 복음의 다윗입니다.
그대로 우리 구원자 예수님의 출현에 대한 예언처럼 들립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튼튼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사실 나탄의 이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2000년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톨릭 교회를 통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셋째, 요셉 성인은 참 고요한 분이십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정수유심靜水流深, 심수무성深水無聲).
바로 요셉의 고요한 믿음이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버금가는 요셉의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브라함에 대한 고백은 요셉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아브라함의 의로움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요셉의 믿음,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 아브라함의 믿음, 요셉의 믿음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에서 요셉의 순종과 믿음이 통쾌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일방적으로 일하시지 못합니다.
인간의 자발적 믿음의 순종의 협조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이요 요셉의 믿음의 순종이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을 것입니다.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배경이신 성 요셉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참 사람의 모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크고, 깊고, 고요한 성 요셉이요, 자비와 지혜, 경청과 겸손, 순종과 믿음의 성 요셉입니다.
그대로 이런 양부 성 요셉을 보고 배웠을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날로 주님을 닮은,
“크고 깊고 고요한 삶을,
1.자비와 지혜의 삶,
2.경청과 겸손의 삶,
3.순종과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
군대 가면 ‘군기’ 잡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을 잘 통과하면 군 생활 적응을 잘 하고, 군 생활이 편해집니다.
그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고문관’이란 소리를 듣습니다.
지금은 군 생활이 짧아지고 편해졌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는 지금보다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내무반에는 모포와 옷을 넣어놓는 ‘관물대’가 있었습니다.
관물대에 사람이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신병이 오면 관물대에 들어가서 ‘어머니 은혜’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신병은 비좁은 관물대에 들어가서 어머니의 은혜를 부르면서 감정이 복받치는지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이 행사가 우리 내무반의 ‘신고식’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기를 세척하고, 내무반 청소를 하고, 군화에 광을 내면서 군 생활에 조금씩 봄이 오기 마련입니다.
전투체육의 꽃인 ‘족구’를 하고, 그리운 친구와 연인의 편지를 받고, 초소에서 근무를 서면서 계급도 이등병에서 일병, 그리고 내무반에서 실세인 상병이 됩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는 병장이 되면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가고 드디어 제대 특명을 받습니다.
3년의 군 생활은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새 집으로 이사 가면 집도 집 주인의 군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새 집과 주인이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제관에 온 지 3일 만에 보일러를 교체했습니다.
후배 신부님이 가스 냄새가 난다고 하였고, 홈디퍼에서 가스 누출 검사기를 사서 측정하니 가스가 누출되고 있었습니다.
보일러 수리하는 형제님이 와서 수명이 다 되었다고 교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일러를 새 것으로 교체하고 5일 만에 싱크대에서 물이 흘렀습니다.
형제님이 와서 보더니 음식물을 분쇄하는 기계가 고장 났다고 합니다.
음식물 분쇄하는 기계를 교체하면서 싱크대 누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생각하니 새 집과 저는 적응기간이 있었습니다.
와이파이 용량이 너무 느려서 인터넷 접속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용량을 높이고 기계를 새로 바꾸니 해결되었습니다.
화장실의 세면대가 막혀서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았는데 월마트에서 플라스틱 막대기를 사서 뚫으니 잘 내려갔습니다.
열쇠로 열어야 하는 문을 번호키로 바꾸었습니다.
신제품인지 스마트폰으로 밖에서도 원격으로 문을 열고 닫을 수 있어서 편했습니다.
사제관으로 온 지 1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제관도 저도 서로 적응 시간이 끝난 것 같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도 적응 기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아직 남자를 모르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응답했습니다.
천사는 이는 성령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이번에 천사는 요셉에게 약혼녀 마리아는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곤경에 처할 수 있기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천사는 다시 요셉에게 나타나서 그것은 성령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자렛의 성가정은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도, 요셉도 모두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나자렛의 성가정은 시작되었지만 적응기간이 또 필요했습니다.
헤로데는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갔습니다.
바람결에 헤로데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예수님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와서 성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공동체와도 적응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늘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길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주님의 약속을 믿었고, 요셉은 꿈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하였습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랑을 베풀며 기쁘게 사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어떻게 하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돈 많이 벌고, 승진 척척 되고, 아프지 않고, 시험에 늘 좋은 성적을 맞고, 자기 원하는 대로만 된다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가 썼다는 다음과 같은 일기의 내용을 봤습니다.
“수건은 집안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만들고 걸레가 된다.
걸레가 더러워진 만큼 우리 집은 깨끗하게 된다.
나는 걸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떠십니까?
걸레 같은 삶도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자기 자녀가 걸레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면 아마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것입니다.
그 삶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길을 쫓아갈 때, 예수님과 함께하게 되고 진짜 기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덕분입니다.
요셉 성인은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단호하게 마리아를 법정에 세우지도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하여 돌로 치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계획을 전합니다.
말없이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이렇게 그는 조용하게 주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반드시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초등학생이 말했던 걸레면 또 어떻습니까?
의미가 충만하다면, 분명히 기쁘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바로 그런 행복을 가지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깨끗이 닦여진 귀한 명품만 되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명품은 피곤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명품 만년필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한 번 쓸 때마다 부담됩니다.
즐겨 쓰는 만년필은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보급형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쓰는 기쁨 역시 명품 만년필이 아닌, 막 쓰는 보급형 만년필에서 생겼습니다.
많이 사용되는 ‘나’, 비록 걸레처럼 지저분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랑을 베풀며 기쁘게 사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 성인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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