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봄의도시 운남성으로 가다 | ||||||||||||||||||||||||||||||||||||||||||||||||||||||||||||||||||||||||||||||||||||||||||||||||||||||
운남성 여행기-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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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일 11/24 중국 운남성 여행길에 나섰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아파트 우리 집에 열 감지기가 작동된다”는 전화가 왔다. 몸이야 닳지만, 이제 어떻게 하겠나. 여행은 이런 일에도 나 몰라라 나서는 것 아닌가. 집에 언제 오느냔다. 며칠 외출이라고 했다. 여행이라고 말하긴 미안했다. 손잡이 부분만 닫은 것이 아니라 아래위 다 잠그고 열쇠도 가져왔다. 대리인도 어쩔 수 없다. 체념이 약이다. 동행이 다 모였다. 출발. 그래도 불안하여 딸보고 부탁. 큰 딸 순형이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 갔단다. 관리인의 말은 지금은 열 감지기가 작동 않는다고 하더란다. 오작동 경우도 흔하단다. 이것만 믿기로 했다.
인천공항 오후 9시 45분 동방항공(비행기) 탑승, 이륙. 집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 걱정도 멀어져 갔다. 탑승시간을 가까스로 대어 공항에 도착.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탓으로 차가 제대로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대신, 탑승 수속 시간을 줄여서 좋았다. 기내식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맛있는 기내식이 시장을 더하여 더 맛있었다. 제2일 11/25 25일 한국 시간 02.50분, 곤명(昆明) 국제공항 도착. 5시간 조금 못 걸렸다. 03시 40분, 빨간 장미의 환영을 받으면서, 공항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여행사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의 안내가 벌써 시작됐다. 버스 기사는 ‘쩡따꺼’ 또는 ‘쩡쑤쁘’라고 부르면 된단다. 존대하여 부르는 말이지만, 한국인이 듣기에 꼭 좋지는 않았다. “식사하셨습니까?”를 뜻하는 중국말을 연상시켰다. 나처럼 점잖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생각이다. 04시 30분, 중황반점(中凰飯店:호텔 이름)에 여장을 풀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 호텔에만 묵는단다. 안정감을 주어서 좋았다. 호텔도 수준급이었다.
눈을 붙이는 듯하다가 07시부터 식사. 나는 손목시계의 시침을 그대로 두고 한 시간씩 마이너스하여 여기 시간을 맞추었다. 게으르기 이를 데 없는 짓이다. 이곳 시간 10시. 버스로 호텔 출발, 관광 시작. 1200년의 역사를 가진 원통사(圓通寺)를 보러 가는 길이다. 가이드는 흔들리는 버스 복도에 마이크를 들고도 용케 서서 재잘거린다.
국제공항이 있는 이 도시를 여기 중국에서는 ‘쿤밍’이라고 부른다. 운남성(雲南省)은 전성(滇省)이라고도 한다. 성명(省名) ‘전성(滇省)’의 ‘전(滇)’은 운남성에 있는 그 유명한 곤명호의 이칭인 ‘전지(滇池)’의 ‘전(滇)’에서 유래한 듯하다. ‘전(滇)’은 또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는 모르겠다. 운남성의 면적은 중국에서 8번째로 넓은 성이란다. 가이드는 운남성의 넓이가 우리의 4배라고 하였다. 나는 혼자 따져 보았다. 운남성의 면적은 39만 km², 한반도 면적은 초등학교 때 배운 지식에 의하면 22만 km². 그러면 운남성의 면적은 한반도 전체의 약 1.8배다. 예쁘고 똑똑하고 해박해 보이는 가이드가, ‘우리의 4배’라고 말한 것은 휴전선 이남을 ‘우리’라고 한 것인가? 휴전선 이남을 ‘우리’라고 했다고 하더라도, 정확히는 3.6배라고 해야 옳다. 한반도 안의 유일한 합법 정부는 우리의 대한민국이다. 따라서 운남성의 면적은 우리 대한민국 면적의 1.8배라고 해야 옳다. 나의 옹졸한 생각은 그 동안의 왕성한 간척 사업에 의한 드넓은 간척지의 면적을 포함하면 그 배율(倍率)은 1.8배보다 줄어 들 것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해 본다. 그러나 한 나라의 한 성(省)의 넓이가 다른 한 나라의1.8배라는 것은, 다른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듣기 흔쾌한 말은 아니다. 또 밝힐 일이 있다. 내가 여기서 운남성이나 쿤밍에 관해 기술하는 내용의 거의 모두가 가이드의 설명을 따른 것임을 밝힌다. 그리하여 설명의 끝에 ‘~ 란다’, ‘~라고 하더라’라고 하였다. 이러다가 지쳐 생략한 곳도 있음을 밝힌다. 또한 가이드의 설명을 잘못 메모한 것도 있을 것임을, 운남에 있는 교포 가이드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 실제로 필자는 어떤 나라의 모처를 여행한 후, 가이드의 설명을 액면대로 믿고서 견문기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때 명백한 오류를 발견하여 난감해 한 경험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할 말은 “식구 많은 게 자랑이냐?”란 말 뿐이다. 그러면 상대는 말할 것이다. “인해전술 때 쓴다. 왜.” 피차의 건강을 위해서 이만 줄이자. 여기 현지에서는 ‘쿤밍’이라고 하니, 내게 익숙한 ‘곤명’을 버리고 ‘쿤밍’이라고 불러야겠다. ‘쿤밍’은 꽃의 도시, 사시여춘(四時如春) : 봄의 도시, 해발 1,891m의 도시, 중국 서남단에 위치한 운남성(雲南省)의 성도(省都). 한국과의 시차는 한 시간 늦다.
‘운남성(雲南省)’은 현지발음 ‘윈난성’. 94%가 산지인 운남성은 중국에서 가장 많은 52(한국 내 자료는 20여)개 소수 민족을 안고 있단다. ‘쿤밍(昆明)’이란 성도(省都) 이름도 이곳 소수 민족의 부족명에서 왔단다. 앞에서 사시여춘(四時如春)이라고 했지만, 이곳에선 정확히 7개 기후가 있단다. 이곳은 약재․꽃․야채의 왕국이기도 하고, 268종의 버섯이 있어 버섯왕국이라고도 한단다. 가이드가 묻고 이내 대답한다. 중국에 많은 것은? ①인구(13억 9천) ②자전거 ③짝퉁이란다. 유‧불‧선(儒彿仙)이 공존하는 원통선사(圓通禪寺)에 도착했다. 입구의 원통승경문(圓通勝境門)은 저 유명한 명말청초(明末淸初)에 풍운을 몰고 와 살다간 사나이 오삼계(吳三桂)가 만들었단다.
더 정확히는 오삼계가 시켜서 그의 부하와 기술자 그리고 민초들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것 따지지 말자. 저 금동불전(金銅佛殿)은 태국 정부가 기증한 것이란다. 오삼계를 중국인명사전에서 찾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평서백(平西伯)에 봉해졌다. 숭정(崇禎) 17(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항복 권유를 거절, 청나라 군대를 입관(入關)시킨 뒤 이자성을 격파하고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졌다. 사천(四川)으로 내려갔다가 운남(雲南)으로 들어왔다. 강희(康熙) 원년(1662) 남명(南明) 영력제(永曆帝)를 살해하고, 황명을 받아 운남에 주둔했다. 이 때 광동(廣東)의 상가희(尙可喜), 복주(福州)의 경정충(耿精忠)과 함께 ‘삼번(三藩)’으로 불렸다. 강희 12(1673)년 강희제가 철번(撤藩) 명령을 내리자, 상가희․경정충과 합세하여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자칭 천하도초병마대원수(天下都招兵馬大元帥)라고 부르면서 ‘주(周)’라고 나라를 세웠다. 악주(岳州)를 함락, 섬주(陝州)․감주(甘州)․절민(浙閩) 일대를 점령하니 사방에서 호응했다. 그러나 차츰 세력이 약해져 형주(衡州)에서 칭제(稱帝)했지만 반년 만에 죽었다. 손자 오세번(吳世璠)이 뒤를 이었지만 강희 20(1681)년 쿤밍(昆明)에서 청나라 군에 의해 멸망했다.
도로가에 버스를 세웠다. 여기는 운남육군강무학교(雲南陸軍講武學校). 만주청산리전투사령관으로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범석(李範奭. 1900-1972) 장군이 1919년 이 학교 기병과(騎兵科)를 졸업했다고 한다. 동문수학한 최모 씨는 북으로 갔단다.
바다라고는 보이지 않는 내륙 깊이에 있는 취호공원(翠湖公園)이다. 이 공원 호수에 갈매기들이 가득히 날았다 앉았다 하면서 기성(奇聲)을 질러대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에 목을 매다는 갈매기들이 신기하다 못해 서글펐다.
야성(野性)으로 돌아가라, 돌아가라. 바다로 돌아가라 바다로 가라. 나는 지금 어느 곳을 먼저 보았는지 순서를 잊었다. 메모해 둔 것이 불완전하다.
대관루(大觀樓) 어귀의 드넓은 돌에 곤명손염옹선생구구(昆明孫髥翁先生舊句) ‘대관루장련(大觀樓長聯)’이 새겨져 있었다. 그 내용을 알고 싶었으나 알 길이 없었다.
손염옹(孫髥翁. 1700-1775)은 이곳 곤명 사람으로 이름은 미상, 포의(布衣)로 살았다. 지두화(指頭畵)를 잘 그렸다. ‘지두화’란 손가락 끝으로 그리는 동양화의 하나로 청나라 고기패(高其佩)가 하나의 화법으로 완성시켰다고 한다. 180자로 된 손염옹의 ‘대관루장련(大觀樓長聯)’은 18세기 당시의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고 한다. 서산의 용문(龍門)을 향해 아내와 나란히 삭도(索道)의 좌석에 앉았다. 케이블카는 컵에 가득히 든 커피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천천히 올라간다.
천지가 확 트이면서도 이렇게 아늑할 수도 있는가? 왼쪽으로 멀리 펼쳐 보이는 곤명시의 맑고, 밝고, 준수한 건물들도 아름답고, 가까이 녹색 곤명호의 잔잔한 물결도 아름답다. 곤명호의 물에 무더기무더기 덩어리져 보이는 저 진한 녹색의 정체는 무엇일까? 호수 바닥에 깔린 수초들의 모습인가, 호수 물위에 떠있는 수초 덩어리 혹은 부유물 또는 그 그림자인가? 잔잔한 호수의 물결 위에 이따금 떠 있는 배는 꿈속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곤명호의 아름다움을 한껏 보태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가 옛날부터 널리 알려졌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천하를 호령하던 청제국의 황제 건륭제의 어머니도 이 곤명호를 보고 싶어 하셨던가? 그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려 아들 건륭제는 북경에 곤명호와 똑같은 호수를 파 드렸던가?
천하가 다 알도록 입신양명한 후에 다시 이같이 드리는 효도야 말로 참으로 시원하고도 큰 효도라고 생각된다. 이 불효는 어머니께 효도를 못해 드려 죄송해 하면서도, 불초 제가 건륭제의 어머니도 못 와 본 곳을 와서 이렇게 편안히 앉아서 즐김을 부모님께 고마워하고 있었다. 오늘날 말로 행복해 하고 있었다. 다시 삭도의 바닥에 올려놓은 발 그 아래를 굽어본다. 애써 꼿꼿이 높이 높이 커 올라온 나무의 꼭대기(우듬지), 그 위에 내 발바닥이 놓여 있음에 나는 지금 오만해 하려하고 있다. 이 또한 건륭제 어머니도 구경 못한 절경임에 틀림없다.
삭도에서 내렸다. 이제까지 가장 먼 거리의 케이블카를 타고 천하의 절경을 즐겼다. 여행의 동료들은 이 정점에서 다시 길을 잡았다. 걸어 내려오면서 석굴(石窟)과 또 다른 절경을 찾아 간단다. 우리 내외는 무릎과 발목이 아파 더 걷기를 포기했다. 다시 삭도를 타고 내려왔다. 거듭 보아도 천하의 절경이다.
그러나 더 걸어서 볼 수 있는 좋은 경치, 여행의 동료들이 보고 있는 경치는 내가 살아서는 다시 못 와 볼 경치임에 마음이 아팠다.
한참을 기다려서 다른 절경을 즐기고 온 일행과 합류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여행의 동료들이 가는 여정에서 떨어져 돌아선 최초의 날이 오늘이다. 서글펐다. 식당 행. 중국술 두어 잔에 거나해졌다. 구중회 교수가 한국에서 가져온 볶은 고추장이 참으로 맛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