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이 응준

[행언]

What a wonderful world
ꡒ우와, 날씨 한번 징그럽게 화창하네! 은희 걔, 명(命)인가 보다.ꡓ
산을 내려오던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다만 그(녀)는, 잠시 후 이렇게도 덧붙였다.
ꡒ묏자리 흙이 떡고물처럼 곱더라, 그치?ꡓ
사실이었다. 분명 하늘은 방금 결정(結晶)한 보석처럼 빛났으며, 포클레인이 파놓은 구덩이는 어둠의 입자만큼이나 보드라워 보였다. 게다가 그날 10월 8일은 한로(寒露)였다. 나뭇잎이 핏물 드는 밤이면 귀뚜라미의 노래에 담뿍 살이 오르고, 이슬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투명한 서리를 이루기 직전의 때. 중국 사람들은 이 시기의 보름간을 오 일씩 삼 후(候)로 나누어, 기러기들이 귀한 손님으로 날아들고 국화꽃은 샛노랗게 얼굴을 연다고들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목소리는, 은희를 묻고 돌아서는 우리들 발걸음에 대한 애처로운 자위쯤이었을 터이다.
장례버스는, 해저물 녘 우리를 서울역 광장에 떨어뜨려놓았다. 하지만 쭈뼛쭈뼛 저마다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무리에서 선뜻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흩어져서는 안 될 만한 이유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잠시 후 우리 모두는, 종로통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 함께 있었다.
감히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우리는 마치 오래 전 그 시절의 잔치로 모인 양, 술잔을 돌리며 온밤을 북적거렸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우리를 휩싸고 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감의 우울이 당혹스러워서라고 해야 옳았다.
물론 파리나 헝가리로 유학하거나, 알래스카로 이민한 녀석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은희처럼, 편지 한 통 주고받을 수 없는 먼 나라로 떠난 경우는 처음이었다. 좀 다르게 말하자면, 그날 우리를 관통하던 모종의 슬픔과 우울은, 은희라는 특정인의 소멸이라기보다는, 평소 교활하게 잊었거나 용케도 외면했던, 인간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엄연한 진리와 정통으로 마주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날 난, 우리 중의 누구보다도 유독 고독하였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은희와 나 사이의 일을 아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나는 앞으로의 생에서 무엇을 얻든, 쉽사리 잃어버리게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마녀
둥글게 휘어진 복도를 감싼 플라스틱 창 너머로, 환경보호 단체들 여럿이 모여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악덕 J그룹의 수질오염 행각을 비난하는 온갖 문구들에, 보도(步道)는 울긋불긋한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족히 사오백 명은 됨직했다. 자동차 경적을 비롯한 거리의 모든 소음들이, 그들의 결연한 함구 속으로 멍하니 빨려들고 있는 듯했다.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광경이었다.
은희와 나는 각자 종이 커피잔을 하나씩 손에 쥔 채, 문제의 J그룹 본사 건물 4층 비상계단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다름아닌 내가, 밤마다 독극성 폐수를 한강에 몰래 방류하다 들킨, 그 파렴치한 기업에 종살이를 하고 있어서였다.
―요즘엔 향수도 뿌리고 다니나 보지?
은희의 얼굴엔 여독(旅毒)의 얼룩이 여태 푸르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뭐라 적당히 이름붙이기 힘든 향내가 났다.
―귀국한 뒤로 줄곧, 가평에 있는 오빠의 허브 농장에서 지냈어. 지금도 거기서 올라오는 길이야.
말인즉슨, 수십 가지의 천연 허브 향기가 제 몸에서 한꺼번에 우러나오고 있다는 거였다. 파슬리, 세이지, 로즈메리, 라벤더…….
어느덧 은희는, 분홍빛 립스틱이 칠해진 얇은 입술을 부지런히 움직여가며, 나로선 요구하지도 않은 해명을 해대고 있었다. 그것은 대체로 혼란스럽고, 도무지 신뢰하기 어려운 자초지종이었다.
나는 저 거리의 어떤 사람들처럼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새삼스레 추궁하거나 분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다. 난 정말이지 그제껏 내 삶의 관행과는 달리, 한결 지혜롭게 행동하고 싶을 뿐이었다.
―뜻밖이야. 양복이 참 잘 어울려.
그런 내 태도가 무안했는지, 은희는 말의 방향을 엉뚱한 쪽으로 옮겼다.
―너 그 동안, 상당히 과묵해졌구나.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저 아래, 참 괴상한 작자들이야. 아무튼, 신기해. 환경에 대해 걱정하는 아줌마, 아저씨들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을까?
―호, 혀가 굳어버린 건 아니었나 보네?
―위생 마스크로 주둥이를 틀어막은 사람들처럼 유별나진 않지만, 어쨌든 우리도 이젠 명백한 어른이야. 우리만이 아니지, 우리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 거의 전부가 어른이 돼버렸어. 애들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기껏해야 조카들 정도밖에는 없다구. 알아듣겠어? 우리는, 어른이야. 함부로 살아서는, 안 돼.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나는 그냥,
―더이상 내게 일탈을 요구하지 말라는 얘기야. 난 상식을 지키며 생활하고 있어.
―이성(李城)!
―넌 불행해질 거다. 미안하지만, 장담해.
―잔인무도하군.
―너는 그렇게 말할 자격 없어. 양심이라는 거, 없나?
―난 오늘 따지러 온 게 아니야. 지난 일을 사과하고, 화해하려는 거라구. 모르겠어?
―그만 들어가봐야 해. 그리구, 나 지금, 너랑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피곤하고 짜증나. 더군다나 이런 뚱딴지 같은 경우가 어딨어? 불쑥 찾아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은희는 핸드백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어, 뭔가를 다급히 적는다. 그리곤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오려내, 내게 건넨다.
―전화번호가 나왔어. 내일모레부터는 이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 천천히 생각해. 그리고 도중에라도, 꼭 연락 줘.
―부질없어.
―그렇지 않아!
―엘리베이터는 저쪽이야. 어서 가.
은희는 푸후―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묵묵히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가라앉으며 사라지는 그 작은 등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순식간에 서늘해진다.
타당한가? 나는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야, 은희!
기어이 난 스스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차마 불러선 안 될 이름을 입에 담고 말았다.
어느새 되돌아와 나를 올려다보는 은희의 두 눈이, 대낮의 터널처럼 어둠에 움푹 패어 있다.
―나, 이젠, 구질구질한 것들이 지겨워. 질질 짜는 인생이라면 신물이 난다구. 근데, 그런데 말이다, 너와 함께 있다 보면 난, 틀림없이, 또 엉망이 되고 말 거야.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이 세상에서 아주 없어져버릴까? 응?
우는 아이를 독 묻은 사탕으로 달래는 악마의 얼굴. 은희는 끔찍하도록 다정히 미소지으며 그렇게 묻는다. 나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용하다 싶더니만, 겨우 여기서 무너지냐는 거다. 온몸에 우박 알갱이 같은 소름이 돋는다.
청년아, 무엇으로 네 행실을 깨끗이 하려느냐? 사악한 여인을 심중에 두었으매, 장차 닥칠 큰 낙심을 어이 할꼬?
나는 거리에서 침묵하는, 저 괴팍한 어른들이 부러웠다.
심병삼씨가 각색한 양치기 소년의 몰락
어느 나라인지는 몰라요. 그따윈 이제 와 아무래도 좋죠. 그저 옛날옛날 한 지나치게 경치 좋은 산언덕에, 양치기 소년이 홀로 살고 있었대요.
양치기 소년은, ꡒ늑대가 나타났다!ꡓ고 소리쳤죠. 오, 한데 이게 뜻밖으로 반응이 끝내줬던 겁니다. 마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왔지 뭐예요. 하지만 결국 뻥인 거를 알고는 욕만 실컷 하면서들 돌아갔죠. 그 광경을 잠깐이라도 상상해보세요. 양치기 소년이 을마나 고소하고 신났겠어요! 좌우간 이후에도 몇 번을 더 고렇게 구라를 땡기는데, 오, 이번에는 증말로 늑대 근마가 나타난 겁니다! 히껍한 양치기 소년은, 당근 소릴 질렀죠. ꡒ늑대가 나타났어요! 진짜야! 아악, 늑대라니깐!ꡓ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ꡒ저 씨발놈이 또 장난질이네!ꡓ 하면서, 신경을 끊었어요.
바로 그 시각, 양치기 소년은 늑대의 아가리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참이었죠. 늑대는 우선적으로, 맛있는 부분들만을 골라서 파먹었어요. 오, 부드러운 사춘기의 볼과 가슴살, 그리고 따뜻한 호기심이 콸콸 흐르는 심장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윽고 늑대는 아기 늑대들을 위해, 양치기 소년의 왼팔을 북어포처럼 뜯어가지고선 유유히 사라졌죠. 오오, 뼈다귀가 환하게 드러난 양치기 소년의 시체는 해 지는 산언덕에, 아까츰에 말했던, 그 불필요하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완전히 정전될 때까지 누워 있었어요.
자, 이제, 별들, 무더기로 등장!
가장 크고 빛나는 별이, 양치기 소년의 주검을 향해 말했죠.
ꡒ너는 곧 교훈이 될 거야.ꡓ
흩어진 고깃덩어리일 뿐인 양치기 소년,
ꡒ무슨 교훈?ꡓ
가장 크고 빛나는 별,
ꡒ거짓말에 재미를 붙이면, 기어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교훈. 세상 모든 아이들은 네 죽음을 겁내면서 정직의 중요성을 깨달을 테지.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하나 있어.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지? 대체 그 수많은 양치기 소년 가운데서, 왜 하필 네가, 흩어진 고깃덩어리일 뿐인 양치기 소년이 되고 만 거니?ꡓ
흩어진 고깃덩어리일 뿐인 양치기 소년,
ꡒ그냥, 심심해서. 너라면 안 그랬겠어? 허구한 날 보이는 거라곤 푸른 하늘과 역시 푸른 땅, 그리고 하얗거나 검은 구름과, 언제나 하얗게만 징징대는 양들뿐이었어. 외로워서. 아무도 날 찾아와주지 않아서. 근데 내 죽음의 교훈이 기껏, 거짓말을 일삼지 말라는 거라고? 수정해봄이 어떨까? 거짓말쟁이가 될 정도로 누군가를 고독하게 만들면,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긴다는 걸로.ꡓ
가장 크고 빛나는 별,
ꡒ글쎄다. 좌우간, 너 참 안됐다.ꡓ
흩어진 고깃덩어리일 뿐인 양치기 소년,
ꡒ그래, 정말이야.ꡓ
Ernest Hemingway(1899～1961)
심병삼씨는 주장한다. ꡒ오, 커피는 생선이오!ꡓ라고. 그건, 처음 그 말을 들었던 당시의 나로서는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비유였다. ꡒ오, 코카콜라는 해물파전이오ꡓ 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커피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생선만이 아니었다. 심병삼이라는 심상치 않은 이름도, 커피와 인연이 없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근사한 커피를 마시기 위해 태어났다고 공공연히 자부하는 심병삼씨는, 최고의 커피향을 맡을 수 있다면야 러시안 룰렛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위인이다. 실지로 심병삼씨는 명동에서 고급 커피전문점 ꡐ헤밍웨이ꡑ를 경영하고 있다. 커피전문점 사장이기 때문에 커피 마니아가 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커피 마니아로서 커피전문점을 차렸다는 점도 항시 분명히 한다.
ꡒ시들시들 맛이 간 생선을 먹으면 탈이 나지요. 커피도 똑같아. 신선하고 뛰어난 커피를 정성껏 음미하면, 우리는 느낄 수 있는 거죠. 무엇을? 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고양하고 상승하는 몸을! 여러분, 커피는 악마의 열매요. 오오, 너무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그 아름다움을 질투한 신이 검게 칠해버린 천사의.ꡓ
매주 목요일 저녁 여덟시, 심병삼씨는 어김없이 커피 감음회(鑑飮會)를 연다. 거기에 속하는 열 명―나까지 친다면―은 전부, 심병삼씨처럼, 혈관에 피말고 커피가 흐르는 인간들이다. 국립대학 서양미술사 교수로부터 오토바이 수리공, 사법 고시생, 공인중개사, 사진작가, 피혁공장 사장, 동물병원 원장, 하다 못해 무직인 자까지, 그 면모가 사뭇 다양하다. 커피가 아니었다면, 전쟁이 터져 어두컴컴한 방공호 밑바닥에서나 한데 모일 법한 멤버들인 것이다.
가게 안으로 막 들어설 적엔 희끄무레한 눈빛이던 그들이, 기껏 커피 한 잔을 마주했다 해서 요술공주 새리마냥 초롱초롱 빛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마치 아편을 돌려 피우는 무슨 사교집단 소굴에라도 휩쓸린 기분이 든다. 누구나 신을 믿지 않을 순 있다. 그러나 대신, 그에 합당하는 정열로 무엇이건 신앙하거나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 대상이 간장과 똑같은 색깔을 지닌 커피일지라도.
하여간 오늘 목요일 저녁 여덟시경에도, 신비로운 커피의 교주 심병삼씨는 스페인 풍의 다이얼 밀로 악마의 열매를 부지런히 갈다가, 불현듯 ꡒ커피는 생선이다!ꡓ라는 식의 성구(聖句)들이 떠오름에 차마 겨워 고개를 끄드닥끄드닥거리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감히 심병삼씨와 그의 일당에 끼이기를 주저하는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다. 나는 비록 이러저러한 경위로 그들과 친분은 맺었으되, 커피에 관해서는 도무지 과문할뿐더러, 그닥 순정한 취미도 없어서이다. 요컨대 정회원으로는 자격 미달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병삼씨와 그의 친구들이 이렇듯 자연스레 나의 존재를 묵인해주는 건, 아마도 그들의 이야기를 절대적으로 경청하는 내 겸손함 내지는 어벙한 태도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나라고 해서 떠벌릴 한 말씀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커피가 생선이라면, 생선이 장미보다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 무렵의 난 은희만 원한다면야, 백악관 뒤뜰에 숨겨진 외계인 시체라도 훔칠 태세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주변의 우려를 살 만치 맹목적인 아이였고, 그건 조금 더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쉽게 바뀔 만한 천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번 흘러가버리면 다시는 만회할 수 없는 흉터 같은 사랑, 난 은희에게서 버림받기 전까지는, 기뻐하지 않으면 실망할 줄밖에 모르는 소년이었다.
나는 길 건너편에서 날아오는 어떤 섬광들이 눈에 걸려 조깅을 멈췄더랬다. 평소라면 절대 삼가던 무단횡단까지 불사하며 찾아간 거기에는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는데, 그 짐칸에서 비스듬히 각을 세우고 일렬로 누운 섬광들의 정체는, 엉뚱하게도 싱싱한 갈치들을 가득 채운 얼음상자 수십 개였다!
아아, 방금 바다에서 잡혀온 순은(純銀)의 갈치들은, 분명 세상 어느 장미꽃보다도 아름답고 매혹스러웠다. 주책이라 놀려도 좋고, 환각이라고 질책하여도 상관없다. 그 아침의 내겐 그것이 가장 또렷한 실재였으니까. 한 마음이 다른 이의 마음으로 망명하는 정황은 무릇 그렇다. 당신을 천 년 전부터 이 자리에서 줄곧 기다려왔노라고 유치하게 고백해도, 사랑의 마법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 동안은 하등의 차질이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잠이 덜 깬 눈으로 아파트 문을 연 은희는, 은빛 갈치꽃 열 송이를 가슴에 받아 들고는 배꼽이 떨어져라며 웃어댔더랬다. 망연히 들리는 그 깔깔거림에, 요즘도 나는 가끔씩 귀가 멀고 만다.
ꡒ선생님, 저거어, 진짠가요?ꡓ
대뜸 눅눅한 좌중의 침묵을 깨며, 젊은 사진작가 조만이 심병삼씨에게 묻는다. 벽난로 위에 걸린 엽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익히 커피 감음회 사람들로부터, 조만이 근래 그 바닥에서는 가장 잘나가는 신예라 들은 터였다. 하지만 수동카메라만 잡으면 수전증이 도지는 내가, 이 세기말의 내 또래 현역 사진작가를 올바로 알아볼 리 만무했다. 부연하여, 내게 있어 사진이란 딱 두 가지 종류로만 존재한다. 자동카메라로 찍는 소풍 사진, 그리고 사진관에서 번쩍― 터지는 증명 사진. 사람은 누구나 제 시선이 지니고 있는 깊이와 넓이만큼으로밖에는 타인을 검증하지 못하는 법이다. 따라서 나는 조만이라는 특이한 이름 따로, 사진작가란 유별난 직함 따로 기억했다가는, 그를 대할 때마다 의무적으로 끼워맞추는 딱한 노릇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 생애의 모든 관계가 그러할는지도 몰랐다. 우선 커피 감음회 사람들만 하더라도, 나는 그중 누구에 대해서도 사진작가 조만의 경우 이상으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국립대학 서양미술사 교수라니까, 오토바이 수리공이라니까, 사법 고시생이라니까, 공인중개사라니까, 피혁공장 사장이라니까, 동물병원 원장이라니까, 벌써 삼 년째 집에서 논다니까, 그냥 그렇다고 외워둘 뿐이었던 것이다.
ꡒ오, 물론이죠, 조만씨. 허가증도 있는 거랍니다.ꡓ
조만은, 아니, 커피 감음회의 모두―나를 포함하여―는, 심병삼씨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쓴다. 그리고 그는 회원들에게―오십줄이 가까워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한 국립대학 서양미술사 교수나 피혁공장 사장에게조차도―무조건 아무개씨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기상천외하다 싶게 화기애애하다. 이런 불온한 의혹을 품고 있기에, 여태 내가 정회원이 아닌 거겠지만서도.
심병삼씨,
ꡒ헤밍웨이는 사냥을 즐겼죠.ꡓ
조만,
ꡒ아, 그래요. 엽총!ꡓ
동물병원 원장,
ꡒ맞아, 엽총으로 자살했지.ꡓ
사법 고시생,
ꡒ헤, 스스로를 사냥한 셈이네.ꡓ
무직,
ꡒ멋지다!ꡓ
이에 심병삼씨는 두툼한 시가의 허리를 코끝에 대며 덧붙인다.
ꡒ하지만 여러분, 헤밍웨이의 아버지도 자살했다는 사실은 알고들 있나요? 엽총이 아니라 권총이었지만요.ꡓ
나는 심병삼씨의 구강 구조로부터 흘러나온 낱말들이, 이번엔 또 어떤 그럴싸한 방식으로 조합될지가 궁금하였다. 심병삼, 그의 곁에 있다보면 세상만사가 순식간에 분자 배열을 달리한다. 모든 문제들을 제멋대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들려주었던 양치기 소년과 늑대의 이야기처럼.
동물병원 원장,
ꡒ총으로 자살하는 것도 유전인가 보죠? 진보네. 권총이 엽총으로 길어졌으니. 그 반대인가?ꡓ
심병삼씨, 시가에 불을 붙이며,
ꡒ허나 헤밍웨이가 진짜로 자살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해요. 총구를 청소하다가 실수로 격발이 됐다는 견해도 있어요.ꡓ
ꡒ더이상 작품을 쓸 수 없어서 그랬겠죠.ꡓ
조만은 같은 예술가로서, 헤밍웨이의 고뇌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병삼, 시가의 노릿한 연기를 꿈벅거리며,
ꡒ말년의 헤밍웨이는 비참했어요. 그의 후기 작품들은, 작가로서 진이 다 빠져버린 자신에 관한 어설픈 풍자에 지나지 않았죠. 오, 「노인과 바다」는 예외였지만서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늘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친구들과 만나기만 하면 싸움을 벌였고, 지독한 우울증과 편집증에 시달렸죠.ꡓ
국립대학 서양미술사 교수,
ꡒ헤밍웨이가 자살한 건, 카스트로가 집권하는 바람에 쿠바의 아름다운 바닷가를 떠나게 된 탓이 커요. 그러고 나서부터는 전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대요.ꡓ
조만,
ꡒ저는 늙으면 따뜻한 나라에 가서 레게 음악을 들으며 늙어가고 싶어요. 해변가에 술집을 차려도 좋겠죠.ꡓ
ꡒ부자여야 되겠네.ꡓ
왜 그랬을까? 내가 괜히, 무심코, 한마디 내뱉은 것이다. 그러자 커피 감음회 회원들 일동이 나를 묘한 분위기로 쳐다본다. 내가 이처럼 불쑥 대화에 끼어드는 일이란 지극히 희귀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내 발언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어째서인지, 조만은 기분이 상했다는 투로 내게 묻는다.
ꡒ이 형, 전시회를 다니나요? 사진까진 바라지도 않고, 간혹 그림이라도.ꡓ
ꡒ아뇨.ꡓ
ꡒ그럼, 평소에 책이란 건 읽나요?ꡓ
ꡒ별로.ꡓ
ꡒ그렇다면, 제발 그만 좀! 평소 문화를 소비하지도 않으면서 돈 얘기나 꺼내는 이성 형 같은 사람들 때문에, 예술가인 내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싶은 거 아닙니까. 쓰―.ꡓ
ꡒ어, 저어, 그게, ꡓ
난 그래도 고전음악 감상에는 제법 조예가 깊다는 말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나는 조만이 내게 열받아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어 기가 막혔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소릴 들을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골때리는 것은, 이 어색한 상황을, 너무도 당연히, 조만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나를 향한 커피 감음회 사람들의 원망어린 눈빛이었다.
이때 심병삼 선생께서 중재에 나선다.
ꡒ아, 아, 여러분, 새로운 세계를 믿나요? 그걸 애써 경험하려 하지 마세요. 오히려 우리들 스스로가 뉴월드 그 자체가 됨으로써 극복, 그래요, 극복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에겐 확실한 게 하나 있소. 우리는 커피를 숭배해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봐요, 대작가 헤밍웨이도 한낱 고독으로 인해 죽었잖아요? 우리는 일정한 삶의 균형도 있고, 무목적의 목적도 지니고 있습니다. 오, 에브리바디 니즈 어 프렌드!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든 친구가 필요한 거지요. 오오, 헤밍웨이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ꡓ
오토바이 수리공과 무직, 그리고 공인중개사가 동시에,
ꡒ맞습니다.ꡓ
심병삼,
ꡒ심리학에선 이렇게 말해요. 가령, 열 명이 모여 포커를 하고 있다고 칩시다. 아홉 명이 짜고, 뻔한 게임의 룰을 어떤 한 사람에게만 그릇되다고 우기면, 그는 종국엔 얼굴이 벌게져 굴복하죠. 제가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박박 우기니까, 급기야는 자신이 잘못됐다고 인정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그중 한 사람이라도 그의 편을 들어주면, 그는 속아넘어가지 않고 계속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다고 해요. 오, 그렇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나를 믿어준다면, 우리는 소신을 굽히지 않을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신뢰를 주는 사람들이 됩시다. 아니죠, 어쩌면, 오, 벌써, 이미 그렇군요.ꡓ
나를 뺀 나머지 모두,
ꡒ맞습니다.ꡓ
이게 대체 뭣하는 사이코들인가 싶었다. 물론 한두 번 보아온 일은 아니지만, 곁에서 그냥 그러려니 하던 것과 내가 직접 관여된 상태의 풍경이란, 그 황당함의 파워가 달랐다. 나는,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 애처로운 현실을 파악하고는 뒤늦게나마 이렇게 말했다.
ꡒ맞습니다.ꡓ
피혁공장 사장,
ꡒ조만씨, 그거 알아요? 좀 어렵겠지만, 노르웨이로 가면 끝내줄 거요. 거기선 마누라가 애를 낳으면 남편에게도 휴가를 줘요. 온갖 혜택은 물론이고, 그 기간 동안 봉급의 팔십 퍼센트가 지급된답디다.ꡓ
조만, 희색이 만면하여,
ꡒ우와, 우째 그런 일이?ꡓ
피혁공장 사장,
ꡒ석유가 나오거든.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사우디에 이어서 2위야.ꡓ
나를 제외한 모두,
ꡒ대애다안하군!ꡓ
심병삼씨,
ꡒ에에브리이바디 니이즈 어 프렌드, 누구에게나 친구가 필요한 거죠. 오, 이렇게 좋은 친구들!ꡓ
이번에도 한 템포를 놓쳐버린 내가,
ꡒ대단하군요.ꡓ
기념 식수
그 연극의 마지막 날 마지막 회 공연을 마친 은희는, 출연자 대기실 앞에서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던 내 손을 잡아끌고는 문예회관 대극장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 문은 잠겨 있었다. 그러나 계단의 끝과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 사이는 이미 적당히(?) 어둡고 넓은 공간이었다. 은희는 얼굴의 분장도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서 해!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로 입술을 꽉 다문 은희는, 독하게도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내 머릿속으로는 해초, 태풍, 종이 비행기, 우체통, 젖소, 손수건, 백과사전, 전화기, 식칼, 전축 같은 것들이 두서없이 마구 지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은희의 몸 안에 쏟아내면서 나는, 문득 엉뚱하게도, 내가 화분 속에 담겨진 역한 독초처럼 생각되었다. 아마도 그 무렵의 어느 자투리 시간이던가, 식물들의 의사소통과 계산 능력을 두고 열변을 토하던 은희 탓에 생긴 망상이었을 것이다.
파리지옥풀은 반드시 두 번 건드려야 닫히는데, 이는 수를 셀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구. 식물들의 사생활을 장시간 촬영하여 빠르게 돌리면, 그들의 적극성에 혀를 내두르게 되지. 식물은 여행도 하고 적과도 투쟁해. 왕성한 풀씨 하나가 얼마 후에는 초원 전체를 차지한다니까.
웃옷의 단추도 채우지 않은 채로 담배를 피우며 은희는 묽게 웃었다. 은희는 자주 웃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웃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는 여자였다. 기쁨과 슬픔을 비롯한 모든 감정을 한 가지 방법으로 소화시키려는 은희의 웃음은, 대부분의 경우 정상적인 웃음의 테두리에서 훨씬 벗어나 있기 일쑤였다.
바지를 추켜세우며, 내가 멋쩍어 말했다.
―나 참. 왜 이러는데, 웃기게.
―기념 식수였어.
―뭐?
―기념 식수.
나는 기념 식수라는 소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 주일 뒤에는 확실히 알게 되었고, 조금 있다가는 영원히 모르게 된다. 은희는 파혼이라는 통고만을 남겨둔 채 떠나버린 것이다.
내가 은희에게 무얼 심었나? 아니면 은희가 내 마음에 어떤 몹쓸 종자를 기념 식수하였던 것일까? 아마도 후자일 터이다. 그것이 하루하루 크게 자라며 억센 뿌리의 악력으로, 내 영혼의 별을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한밤의 ＦＭ 영화음악
사라질 때처럼 나타난 은희는, 내게 모든 게 말끔히 정리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난 도대체 은희가 무얼 정리했다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만일 영화감독 남편이라든가, 하나 있다던 아이―아들인지 딸인지는 몰랐고, 그 이상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를 두고 말함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무시할밖에.
은희는 어리석었다. 인간이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단연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조차도 맘대로 지우거나 복원하지 못하는, 차마 무력한 존재들이 아닌가.
이번에도 은희는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나이며, 앞으로는 나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만 애쓰겠다고 했다.
나는 가르쳐주고 싶었다. 우리는 곳곳에 바람구멍이 숭숭 뚫린, 비루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분명 모두가 너의 탓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내게는 가장 큰 고통이다. 나로선 너를 용서할 수도, 용서하지 않을 수도 없다, 라고.
삼 년 전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물론 그것이 방금의 일이라 해도 내겐 전혀 상관없다. 나는 아팠고, 어떤 삶의 자상(刺傷)으로도 그 이상은 아플 수 없으리란 것만이 중요하다.
성남으로 가는 막차는 히터가 고장나 있었다. 잡음이 지지거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심야 라디오 방송, 그리고 기차 굴러가는 소리. 아니었나? 그때 그 버스가 철길 근처를 지났던 게.
ꡒ오늘은 멀리 유학길에 오르시는 연극배우 장은희씨와 ꡐ내 인생의 영화 베스트 파이브ꡑ를 꾸며보았습니다. 〈파니 핑크〉 〈길버트 그레이프〉 〈제8요일〉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그리고 〈크라잉 게임〉. 비교적 최근 작품들이었구요, 아쉽게도 우리 영화는 한 편도 없었죠? 자, 그럼 장은희씨. 우리 ꡐ한밤의 FM 영화음악ꡑ 청취자 여러분들께 작별인사 좀 부탁드릴게요.ꡓ
ꡒ이 방송이 나가는 날에 전 벌써 한국에 없겠지만요,ꡓ
나는 은희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은희가 뭐라고 떠들었는지는 아무런 기억도 없다. 다만 내 발가락은 완전히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 깊디깊은 겨울밤의 버스 안은, 내 생애에서 가장 추운 공간이었다.
부조리극
나와 공인중개사, 그리고 무직 이렇게 셋은, 국립도서관 부근의 한 우동집에 앉아 있었다. 요행히도 조만, 그 존마니는 없었다.
적어도 서울 시내에서만큼은 가장 맛있는 우동이라며, 극구 사양하는 무직과 나를 등 떠밀 듯 그리로 안내한 건 공인중개사였다. 우동은 정말로 근사했다. 그러나 우리로 말하자면 방금, 저 살벌한 서초 경찰서 강력계에서 나란히 걸어나온 터였다. 그저 참고인 자격일 뿐이었지만, 아무튼 경찰소 같은 데에 불려다닌다는 것은 곤욕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조직폭력배라면 오히려 제격이었을 인상의 담당 형사에게, 나로선 심병삼씨의 사생활이라든가 원한관계에 대해 알 턱이 없으며, 다만 목요일 저녁마다 지켜본바, 그는 적어도 살해를 당하거나 할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노라고 진술했다. 그러자 형사는,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느냐며 말꼬리를 붙잡았다. 그 눈매가 얼마나 날카롭고 위압적이었는지, 난 하마터면 스스로를 범인으로 착각할 뻔하였다.
그렇다고 내가 심병삼씨의 죽음을 자살로 믿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재주로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인가. 커피와 심병삼이란 이름 석 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살 역시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의, 아무런 논리와 근거도 없는 나만의 느낌을 말이다.
더군다나 내 심증대로라면 심병삼씨의 죽음은 타살도 자살도 아니라는 얘긴데, 나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것도 우락부락한 강력계 형사에게, 미친놈쯤으로 취급받긴 싫었다.
매맞은 아이처럼 시무룩해진 내가 불쌍해 보여서였을까. 형사는, 여러 정황상 이미 자살 사건으로 잠정적인 결론이 내려진 상태이며, 다만 한두 가지 미심쩍은 점들이 있어 협조를 구하는 것뿐이라고, 의외로 부드럽게 일러주었다.
ꡒ한 점의 의혹도 있어선 안 되는 거죠. 인간의 죽음이 가볍게 다루어질 사안은 아니잖아요?ꡓ
ꡒ아, 예, 그, 그건 그렇죠.ꡓ
그는 외모와는 달리, 사뭇 철학적인 형사였던 것이다. 이어 형사는, 심병삼씨가 천애고아이며, 더구나 커피 감음회 사람들말고는 이렇다 할 인간관계가 없었더라고 하였다. 나는 보통 놀란 게 아니었다. 난 심병삼씨가, 훗날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형사는 마지막으로, 커피 감음회라는 게 도대체 뭣하는 집단이냐고 물었다. 난 말 그대로 커피를 감상하는 모임이라고 대답하였다.
ꡒ재밌군, 재밌어.ꡓ
손가락 두 개만을 이용하여 노트북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형사의 입가는, 이내 생선비늘 같은 비웃음으로 번들거렸다. 그러나 나는 어서 그곳을 빠져나가고픈 일념에, 도통 기분 나쁠 겨를이 없었다.
ꡒ유서 한 장만 써놨어도 이런 일이 없잖아.ꡓ
공인중개사는 천박하게 투덜거렸다. 비단 우리만이 아니라 커피 감음회 사람들 전부가, 이미 어떤 방법으로든 조사를 받은 모양이었다.
무직은 단무지를 더 시켰다. 나는 우동 가락을 툴툴 태연히 말아넣고 있는, 내 앞의 두 사내가 충격이었다. 그들은 분명, 심병삼씨의 죽음을, 보통의 귀찮은 일 이상으로는 여기고 있지 않았다.
공인중개사는 형사로부터, 심병삼씨가 파산 상태로 접어든 지 오래였다는 얘길 들었다고 했다.
ꡒ그 작자, 주식에다가, 말도 못하는 경마장 환자였대.ꡓ
단무지를 베어물던 무직이, 눈에 전등을 켜며 거든다.
ꡒ이건 알아요? 집을 수색했는데, 엄청난 숫자의 포르노 테이프들이 나왔답디다. 그런 얘기도 들었죠?ꡓ
나는 벽면을 응시하며, 심병삼씨의 생전 모습을 기억해보려고 한참을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무덤덤한 이목구비, 은행나무처럼 굵고 느리던 동선(動線)의 어느 한 대목도 떠오르질 않는 거였다.
ꡒ그럼 앞으로 커피 감음회는 어떻게 되는 거죠?ꡓ
내 질문에, 우동 국물을 마저 비우려던 공인중개사와 무직은 거의 동시에 사레가 들렸다. 나는 심하게 캑캑거리는 무직에게 내 물잔을 건네었다.
냅킨으로 대충 입가를 수습한 공인중개사가, 굉장히 흥미롭다는 투로, 내게 말했다.
ꡒ이 형,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ꡓ
ꡒ예?ꡓ
ꡒ장난치는 거냐구요.ꡓ
ꡒ그게 무슨,ꡓ
ꡒ왜 그래? 괜히 순진한 척하고, 민망하게시리.ꡓ
ꡒ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ꡓ
공인중개사의 요지는 이거였다. 커피 감음회 사람들은, 내가 상상하는 것만큼 커피에 맛이 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심병삼의 ꡐ헤밍웨이ꡑ에 목요일 저녁 여덟시마다 모여들었던 건, 뭐라 딱히 설명하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애써 풀이하자면, 그저 부담 없이 농담이나 따먹으면서 논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약간 고급스럽게 이야기해서, 모두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목요일 저녁 여덟시마다 일종의 연극판이 벌어진 셈이라는 거였다.
무직,
ꡒ연극이라기보담, 집단 만담(漫談)의 한바탕 신명나는 장(場)이 아니었을까요?ꡓ
공인중개사,
ꡒ개그지.ꡓ
무직,
ꡒ중세 철학자들은, 바늘 끝에서 과연 몇 명의 천사가 춤출 수 있는가를 토론하고 그랬대요.ꡓ
공인중개사,
ꡒ아니, 그럼, 이 형은 그게 아니었단 말이에요? 에이, 설마?ꡓ
ꡒ시, 심 선생은 좋은 분 아니었나요?ꡓ
나는 뭔가 미끈하고 매스꺼운 것이 울컥 치밀어올라, 상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엉뚱한 소릴 하고 말았다.
ꡒ상태가 양호하지 못했지. 하긴 우리는 안 그런가, 뭐. 이 형 이제 보니 연구 대상이네, 그런 따끈따끈한 말씀을 다 하시고 말이야. 아무렴, 사람이야 죄가 있겠나, 대부분 선량들 하지. 에이, 그려, 이 형 말이 맞어. 세상이 더러워서 그래.ꡓ
이대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돌이킬 수 없는 바보가 될 것만 같아, 나는 혀를 지그시 깨물었다.
공인중개사는, 내가 우동을 즐기지 않은 사실에 의아해하며 계산을 치렀다.
난 우동집을 나오자마자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러나 목울대까지 감아드는, 저 미끈하고 더러운 무언가를 끝내 게워내지는 못했다. 속도 모르는 공인중개사와 무직은, 친절하게도 번갈아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ꡒ그 기막힌 우동을 남기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아무리 술이 좋아도 그렇지, 다음날까지 이러면 쓰겠어? 건강은 젊었을 때 지켜야지. 작작, 알아서 드시라구.ꡓ
ꡒ이 형, 이 형, 괜찮아? 약 사다 드릴까요?ꡓ
잠시 후 우리는 사거리에서, 서로간에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들처럼―물론 그럴 테지만―냉정하게 헤어졌다.
몇 걸음 걸어가는데, 등뒤에서 공인중개사의 이런 뇌까림이 들려왔다.
ꡒ아무튼, 심병삼, 멋진 친구야. 오, 헤밍웨이를 흉내내다니! 아으―.ꡓ
Pablo Casals(1876～1973)
지하철이 잠실역에 정차하자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곧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올라탔다. 왼편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아담한 키로 내 앞에 선다. 그제서야 나는, 아까부터 그녀가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악보책임을 안다.
잡지나 소설이 아닌 악보책이라니, 홀연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나에겐 황량한 콩나물 대가리로 메워진 오선지일 뿐이지만, 지금 저 아가씨의 머릿속엔 차분하고 고결한 첼로의 잠언시가 흐르고 있을 것인데.
1889년의 어느 날 바르셀로나의 한 악기점 으슥한 구석에서 〈무반주 첼로 조곡〉 전 6곡의 악보를 발견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당시 13세 소년이던 파블로 카잘스였다.
신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맡기지 않는 법이다. 〈무반주 첼로 조곡〉은 흡혈귀의 관처럼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채, 2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거기서 오직 소년 카잘스만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신탁(神託)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로부터 카잘스는 96세로 죽는 그날까지 매일 〈무반주 첼로 조곡〉을 연습하였고, 40여 년간 연주 불가능한 부분들에 대한 연구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삼사 년에 걸쳐 이루어질 레코드 녹음을 시작하였다.
그토록 예술 정신이 투철했던 파블로 카잘스도, 어려서는 학비를 벌기 위해 카지노에서 활을 잡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 무렵 소년 카잘스의 연주를 들었던 어느 단골 손님은, ꡒ그는 카지노를 콘서트 홀로 뒤바꿔놓았고, 다시금 그 콘서트 홀을 사원(寺院)으로 만들어놓았다ꡓ며 겁먹은 얼굴로 회상하였다.
카잘스는 음악적으로만 위대했던 게 아니었다. 80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스무 살의 제자와 결혼했던 것이다. ꡒ신랑이 장인보다 서른 살이나 위인 경우는 흔치 않지.ꡓ 그는 덤으로 이런 우스갯소리까지 남겼다.
젊은 아내를 맞이하여 100세까지는 문제없다던 카잘스는, 그러나 그것을 조금 못 채운 96세에 세상을 떴다. 임종의 자리에서 카잘스가 마지막으로 들은 음악은 역시 바흐였다. 평소 그가 아들로 여기던 피아니스트 유진 이스토민이, 부인 몬테스의 요청으로 연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카잘스가 죽은 2년 뒤에 이 마흔두 살의 노총각과 서른여덟의 미망인은 결혼한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들린다. 어느새 나는 여기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내 앞에 무릎을 댄 저 묘령의 귀여운 아가씨와 단둘이, 카잘스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전 6곡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 사각형의 지하철 내부 가득 자우룩이 차오르는, 흔들리며 물들어가는 첼로의 심원한 슬픔을 말이다.
어느 운좋은 사나이는 마에스트로의 길을 가다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품안에서, 평생토록 추구해 마지않던 음악을 수제자의 손길로 들으며 숨을 거두었다.
난 이 순간 그를 향한 질투에 내 배를 가르고 싶다. 도저한 삶의 진실이란 진정, 어둠과 빛의 끝을 경험했기에 전설이 되는 그들만의 전유물일까?
그렇담 대체 순결함이란 무엇인가? 속되고 평범한 우리는 스스로의 꿈과 생사가 걸린 약속도 대수롭지 않게 어기며 인생을 낭비한다. 나중엔 주거나 받았던 상처의 이름마저 맘대로 바꿔가면서, 그래도 나는 그간 이만큼이나 냉정해졌다며 유치한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다.
나는 시청역에서 하차한다. 갑갑한 지하도를 꺾어돌아 지상으로 통하는 환한 계단을 밟으며, 커피의 교주를 자처하던 심병삼씨가 기껏해야 헤밍웨이 따위를 흉내내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계는 허위와 착종으로 하얗게 바래져버렸다. 아마도 그는 그런 것들에 의해 자연사했을 터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한다. 또한 어젯밤 내가 은희를 죽인 일도, 그러한 맥락에서 납득되어야 할 것이다.
城, 무너지는
이제 와 기적 따윈 바라지 않기로 한다. 모든 종류의 은총이란, 생에 훨씬 더 모를 일 하나가 보태어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ꡒ저 포도는 너무너무 시어서 못 먹을 거야.ꡓ 난 차라리, 높은 가지 위에 매달린 탐스러운 포도 송이를 두고 이런 식으로 합리화시키는, 처량하되 한편으론 영리하기 그지없는 우화 속의 여우이련다. 나는 세상을 향해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대신, 어떠한 답변의 의무도 거부하며 살아갈 작정인 것이다.
그저 속이 쓰리고, 머리가 지끈거리며, 자꾸 목이 마를 뿐이다. 오직 그것만이 이 밤의 명백한 진실이며, 어디에도 삶의 건너편을 염두에 둔 예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흐리멍텅한 눈길로 좌중을 휘둘러본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겼고, 결국 청진동 해장국집에는 겨우 서넛만이 남았다. 아직도 부족해 뭔가를 지껄이고 있는 초췌한 몰골들이 신기하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 한잠씩 늘어지게 뻗고 일어나면, 은희의 장례식 덕에 모처럼의 동창회가 마련되었더라는 사실 외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난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슬며시 밖으로 나선다. 뜸한 인적(人跡) 사이로 부는 바람이 솔솔하다.
가장 가까운 건물 화단 턱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꺼낸다. 신호가 간다.
―은희입니다. 어쩌죠? 지금 집에 없거든요. 삐― 소리가 난 후에 메모를 남겨주시면, 돌아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행복하세요.
―삐이―익.
ꡒ나다. 성이. 니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야. 벌써 어제 일이 되어버렸네.ꡓ ꡒ무덤덤한 장례식이었어. 특별히 슬프거나 지루하지 않은.ꡓ ꡒ모르겠어, 도무지. 뭐냐면, 우음, 니가 불쑥 다시 찾아와 했던 말, 내게 청혼했던 거, 사실인가 해서.ꡓ ꡒ역시 거짓말이었는지, 아니면 진심이었는지, 아, 미치겠어.ꡓ ꡒ은희야, 앞으로 나는 어느 쪽을 믿고, 우기고 살아가는 게 좋을까?ꡓ ꡒ이번에도 날 가지고 놀았던 거라고 욕을 할까, 아니면, 아니야, 은희는 정말로 나랑 같이 살려고 그랬던 거야, 그러면서, 그렇지만, 어차피 너와 나는 행복하지 못했을 거라고, 그러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며, 체념하는 게 나을까.ꡓ ꡒ궁금해.ꡓ
평정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을 크게 해본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도로변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에 올라탄다. 욱신거리며 졸음이 몰려들지만, 취기가 매스껍고 어지러워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다.
어느새 속도계의 바늘은 시속 90킬로미터를 조금 벗어나 있다. 나는, 나를 태운 이 딱딱하고 차가운 물체가, 저 어둠의 전방에 놓인 허공과 허공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불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백미러에 비친 내가,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본다. 그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너무도 끔찍하고 낯설어, 나는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만다.
감히 꿈에도 원하지 않았다. 누구처럼 감당할 수 없는 계시를 받은 적 없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 올리지도 않았다. 그저 난 평범한 사내로, 대충 나와 엇비슷한 과거를 가진 여인의 곁에서, 아름답고 슬픈 햇살과 두렵고 힘찬 우레 아래 묻히길 원했다.
전쟁과 비참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평화로울 수 없으리라는 것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였다. 한 여자로부터 두 명의 약혼녀를 잃은 것이다. 파리지옥풀이 정확히 두 번을 세고 나서야 주둥이를 닫아버린다던 은희의 말은 옳았다. 내 사랑은 두번째의 두드림 만에 비로소 지옥에 갇힌 것이다.
이제 나는 괴변의 추억을 곱씹으며, 매일 밤 악몽보다 어두운 잠자리에 들 것이다. 잊고 싶지만, 아직 그럴 수 없어 괴롭고, 그럴 수 있을 때까지는 얼마나 오래도록 늙어가야 하는가를, 너 아니면 사랑한 자가 없었기에 아무에게도 추궁하지 못하겠지.
나는 내가 버티고 선 시간을 알고 싶지 않다.
은희는 쓸쓸한 양치기 소년이고,
나는 아랫마을의 무심한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기이한 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