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 경험이 깊어지는 의사가 차츰 진료와 투약에 겁을 먹는 데 비유해 법 적용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과녁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에 비유해 모두 백발백중 할 수 없고 대신 얼마만큼 중심부에 접근하도록 던질 수 있느냐라는 글도 법관으로서 흔히 범하기 쉬운 독선과 자기 과신 대신 지극히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재직하는 동안 직장이나 동료에게 폐가 되거나 불명예를 끼치는 일은 않을 것, 적당한 보수 외에 어떤 불의의 이득을 탐하거나 특권 의식을 부려 지탄받는 일을 회피할 것, 기질과 역중에 맞는 자리를 골라 옮기도록 할 것」 등을 스스로 다짐하고 이 자세를 그는 재직기간 끝까지 충실히 지켰다.
가난한 법관의 삶은 전주지방법원장 취임 때의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고무신과 작업복 차림에 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것이 트레이드마크인 그에게 제대로 된 양복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고향 법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외투 하나 없이 가서야 될 말이냐는 지인에게 이끌려 외투를 사서 덮어 씌워주었다고 후에 회고했다.
그의 청렴도는 남의 원조를 받는 것이 자신의 「수도생활」에 지장이 된다며 처가에서 보내준 쌀가마니 마저 되돌려보낼 정도였다 한다.
김홍섭에게는 「사형수의 대부」라는 또하나의 별칭이 따라다닌다. 생전에 많은 사형수를 찾아다니며 이들을 가톨릭으로 안내해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개인적으로 사형제도에 회의적이었지만 실정법상 어쩔 수 없이
사형을 선고하더라도 사형수를 종교적으로 구원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총애하던 육군특무대장 김창룡을 살해한 주범 허태영 대령과의 영적 교제는 널리 알려진 사실. 관련 사건을 재판하다 이미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허대령을 참고인으로 부른 것이 인연이 돼 면회와 서신을 교환하며 그의 대부(代父)가 됐다. 허대령은 사형이 집행되는 마지막 길에서 자신의 행동은 역사가 밝혀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김홍섭 판사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간다는 유언을 남겼다.
1965년 간암으로 별세한 김판사의 장례식장에는 10여명의 사형수 대자(代子) 사진이 고인의 유영과 함께 걸렸다. 사형수의 교화에 열정을 쏟은 것은 판사라는 직위를 떠나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는 어려서 개신교에 입문해 불교를 거치는 방황 끝에 가톨릭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전주법원장 재직시에 그가 틈나는 대로 찾았던 곳도 순교자들이 묻힌 치명자산이었다. 그의 삶과 재판 과정에 깊은 구도자적 자세가 스며있는 사례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국가주의다. 인류보다 자기 국민을 생각하는 국가주의는 모두가 인간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는 고로 악이다」라는 1959년 수첩에 적힌 메모나 「기본인권은 법의 위에 있고 인류의 공동 운명은 민족의
그것보다 크다고 보는 것은 나의 법관으로서 기본 신조다」라는 1960년 메모 내용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앙과 함께 청빈한 법관 생활을 하게 한 또다른 일화도 있다. 전주법원장으로 부임한 뒤 그는 자신이 다녔던 원평초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용인으로 일하던 최생원(본명 최상근씨)에게 공손히 절을 했는 데 최씨가 어리둥절해 하더라는 것이다. 사연인즉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 교장이 아껴하던 사택에 있던 매실을 친구들과 따먹은 뒤 모두 도망가고 혼자만 붙잡혀 교장실에 꿇린 채 혼이 났다 한다.
자신을 붙잡아 간 사람이 바로 그 생원이었으며, 그 일로 평생 깨끗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는 것. 오늘의 자신이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신의 덕이다라는 말을 최영근씨로부터 들었다고 원평에 붙박이로 살아온 향토사학자 최순식씨가 기억하고 있다.
소년 시절 법률가가 되기 위해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했던 전주에 사법의 어른으로 부임한 그는 1년여 짧은 근무 기간이지만 많은 직원들이 울면서 이별할 정도로 따뜻한 인간성을 보여주었다 한다.
가인이 「앞으로 대법원장이 될 사람은 김홍섭 뿐이다」고 말했을 정도로 아껴했던 그는 그러나 지병인 간암으로 50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한 추모와 재조명 작업은 오늘에까지 이어지며 법조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서울대 최종고 교수는 「사도법관 김홍섭」이란 본격적인 연구서에서 그를 「한국 법조계의 태양이다」고 스스럼없이 규정했고, 그에게 「사도법관」(장면 전 총리) 「한국 법조인의 기둥」(조진만 전 대법원장) 「절망의 생명을 어루만지던 대부」(한승헌 현 감사원장) 「생명의 외경을 안 휴머니스트 법관」(한국일보) 등 수많은 헌사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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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조국의 비극과 광란이 극에 달했고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해 있을 때 나는 그곳에서 전시연합대학에 제학하면서 美 第7港灣憲兵司令部에서 통역관으로 학비를 마련하고 있었다. 영도에 있었던 선친의 친지댁에서 기숙하고 있었는데 우연히도 2층 적산가옥의 두 개의 방을 하나는 내가 하나는 김홍섭판사님의 가족이 쓰게 되었으니 인연의 기구함이 그리도 신비로운 것이었던가 싶다.
짬이 나면은 그분과 나는 영도 뒷산에 올라 멀리바다를 구경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젊은이! 이런 것도 글이 될 수 있겠오? 나는 수무살 때까지 바지개를 지고 꼴을 배러다녔지요. 글이라고 많이 아는 것이 없오. 하시며 가만가만히 이야기 하시던 그 겸허하고 성스러운 모습이 오늘도 눈에 선하다.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후 엄마만끔의 세월이 가고 나는 바로 그분의 방으로 인사를 갔었다. 그리도 반갑게 맞아주시던 그 모습...비서헤게 이손님 나가시는 시간까지 일체의 전화, 면담, 다른 용건 등 미루어달라고 분부하시며 손을 잡아보고 또 만저보고 하시던 다정 다감하셨던 그분의 생각이 오늘에도 잊을 수 없어서 "고무신 검사 최대교"님의 속편으로 인연을 더둠어 이 글을 남깁니다. 하늘을 울어러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법관의 염원을 능가하는 詩가 또 있으랴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역시 詩를 가름해서 이 글을 올립니다. 그분이 가신지 반백년이 가까워 오는 오늘까지 보내버리면 영영 마지막이 될지도 몰은다는 애절한 연서인냥 그분에게 써놓고 미쳐 부치지 못했던 회한의 서찰 한통 내 가슴에 남아 오늘도 이렇게 내 콧장등을 매웁게 합니다. 서촌
자료협조 : 전북일보 『20C 전북50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