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
해병 독립제5대대
1. 해병 독립제5대대의 현황
해병 독립제5대대는 1951년1월24일 차량편으로 출발하여 '안동'남쪽 '亭下洞'에 도착하고 해병 제1연대의 주력부대는 부연대장(金斗燦 중령)의 지휘하에 1월26일 LST 3척으로 진해를 출발하여 '영덕' 동남쪽 해변의 '下猪洞'에 상륙하여 1월29일 전투기지인 '영덕'에 집결하였다. 1951년 1월 25일 해병 독립제5대대(대대장 吳命福 소령)는 중동부전선(강원도)에서 미 해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정자동'에 본부를 설치하고 미 해병 제1연대의 예비대로서 '안동-대구' 간의 도로를 확보하고 이 지구일대에서 준동하고 있는 적을 수색, 소탕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월 25일 독립제5대대는 제21중대, 제23중대, 및 제24중대를 '정하동'에 경계배치하고 제22중대는 제24중대로부터 박격포 2문, 중기 2정의 배속을 받아 '의성-안동' 간의 도로경비와 부근일대의 수색임무를 부여받고 '암산'에 파견, 배치하였다.
한편 '고곡동'에 근거를 두고 '임하동'일대에서 출몰하고 있는 패잔병 약 200명이 그 지역일대에서 횡행하고 있어서 이 지구의 경찰대는 항상 패잔병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1월28일 지역내에서 준동하고 있는 패잔병 약 200명이 '추목동'을 습격하여 왔기에 경찰대는 '송동'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정하동'에 배치되어 있던 독립제5대대 대대장은 부대대장(李鳳出 대위)에게 제22중대로부터 박격포 2문, 중기관총 2정을 배속받아 이 적을 공격토록 하였다. 부대대장은 1월29일 05:00시 '정하동'을 출발하여 06:00시에 '송동'에 도착하였고 계속 도보행군으로 30분 후에 '추목동'을 통과 중 적으로부터 불의의 사격을 받고 곧 응전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적에 의해 포위돼 있었다.
그러나 해병들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신속한 행동으로 전투배치하여 중기관총은 2분만에, 박격포는 3분만에 사격준비가 완료되어 반격을 시작하였다.
김경태 3등병조
특히 김경태 3등병조는 대담하게도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적의 후방으로 돌아 적의 후방에서 사격하는 등의 용전을 계속하여 적 8명을 사살하고 또 52명을 부상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리고 약 40분만에 '추목동' 뒷산 270m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때 이 작전에 함께 참가했던 미 해병대의 'Greenton' 중위는 한국 해병대의 신속하고 침착한 행동에 경탄하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미 해병대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없는 전투부대]라고 한국 해병대를 격찬하였다.
안영복 二等兵曺, 천춘식 1분대장
2월1일 독립제5대대 부대대장(이봉출 대위)은 미 해병 제1연대의 명령으로 박격포 2문과 중기관총 2정의 배속을 받은 제21중대를 '점곡'에 경계배치하였다. 이때 3소대(소대장 견습사관 朴千萬 해간 3기)는 수색정찰의 임무를 띄고 '정자동'일대를 정찰 중 불의에 적의 패잔병 약 200명으로부터 기습사격을 받았으나 소대장이하 전대원은 전혀 당황함이 없이 전투배치하여 응전하였으며 특히 선임하사관 안영복 2등병조는 분대를 지휘하여 적진에 돌입, 백병전을 전개하는 한편 천춘식 1분대장은 경기관총을 전술적으로 잘 운영하여 적에게 600여 발의 명중탄을 퍼부어 적의 전의를 제압하고, 격전끝에 적 30여 명을 사살하고 11명을 생포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고 패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하였다.
이와같이 '점곡'지구에서 적의 패잔병 소탕작전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독립제5대대는 미 해병 제1연대로부터 그 배속이 해제되고 새로히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영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때 미 해병 제1연대장으로부터 보내온 치사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독립제5대대와 함께 항상 작전을 수행하였음을 행복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번 귀대대와 이탈하게 된 것을 심히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귀대대 장병, 특히 제21중대의 선전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런 사실을 신현준 사령관에게 전해 주십시요". 이렇게 '안동'지구에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독립제5대대는 다시 북상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때의 적의 동향은 인민군 제1사단의 일부 병력이 후방교란의 기도로 '단양'을 경유 '안동'부근 산악지대에서 잠복 중이었다.
2월4일 17:00시 '영주'에 도착한 독립제5대대는 부대본부 및 제21중대를 '영주'서부 26고지에 배치, 제22중대본부를 후방 116고지에 각각 배치하여 '영주'방어에 임하게 하였다. 또한 제23중대를 부대대장 지휘하에 박격포 2문, 중기관총 3정을 배속시켜 '예천'방면으로 파견하였다.
독립제5대대대는 잔적 소탕과 '영주'일대의 치안확보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주민의 협력을 얻고져 2월5일 14:30시 대대참모와 지방유지의 환담회의를 열고 군민들의 협조와 경찰대의 임무 등에 관하여 토의하였다. 해병부대는 '영주-안동' 간을 연하는 일대를 확보하면서 2월12일까지 부근일대의 패잔병 소탕을 위한 수색전을 계속하면서 '안동'에서 제23중대와 합류하였다.
2. 해병 독립제5대대의 재배치
2월13일 독립제5대대는 새로운 임무를 받고 '신강구'에 집결한 후 2월16일 해군 함정편으로'인천'에 상륙하여 '김포'지구에서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 해병 제1연대의 주력부대는 "영덕'지구작전"을 수행하며 또한 '안동-영덕' 간의 도로일대를 확보하기 위하여 수색작전을 수행하면서 적의 발악적인 활동을 저지하고 있었다.
(1) 해병 독립제5대대 및 전선현황
독립제5대대가 '안동', '진주'지구에서 잔적의 소탕을 마치고 해병 제1연대와는 별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중부전선에서 서부전선 '인천'에 상륙한 것은 1951년2월16일 13:00시였다. '인천'에 상륙한 독립제5대대는 '인천'과 '김포'반도를 새로운 전투지구로 하고 작전임무는 잔적을 소탕하여 치안의 확보와 시가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독립제5대대는 이 작전을 현지에 주둔 중인 미 제2특별공병여단장 '투메니' 준장의 지휘하에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인천'시가는 대체로 평온한 상태에 있었으며 가끔 적의 패잔병들로 조직된 '게릴라'부대의 침입이 있을뿐이었다. 퇴로를 잃고 '인천'시가에 잔류하고 있던 적의 패잔병들은 국군과 UN군의 맹열한 공격으로 인하여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인천'시를 철퇴하여 '김포'반도 북단에 연하는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인천'시내에 침입하는 '게릴라'부대의 근거지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우군부대는 육군 제1사단과 UN군이 '안양'에 주둔하고 있었고 그 선봉부대는 '소사', '영등포, 및 '한강'남단까지 진출하였으며 언제든지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을 공격, 재탈환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와같은 우군의 상황을 고려하여 독립제5대대는 우선 '인천시'를 방어하면서 '김포'반도일대의 잔적을 소탕할 계획을 수립하고 부대본부를 '인천상업중학교'에 정하였다. 독립제5대대는 제21중대, 제24중대를 예비대로 '인천시'의 경비에 임하게 하고 부근일대에 배치하였다. 이와같이 독립제5대대가 '인천'을 경비하게 되면서부터 '인천시'를 소란케 하던 적 '게릴라'의 준동도 점차 없어지고 치안이 일익 확보되었다.
이리하여 '인천'을 방어하는 한편 UN군이 2월하순 반격을 개시하여 3월14일 수도'서울'을 재수복할 때 적의 '김포'반도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는 한편 정찰대를 '영등포'일대까지 파견하여 '서울'공격전에 협조하였고 또한 적의 4월22일부터 시작한 제3차공세 시에도 수도방위를 위하여 '김포'반도에서 '개풍군'일대를 정찰하면서 적을 견제하였었다.
중동부전선에서 해병 제1연대가 "월산령 방어전"을 끝으로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장단, 사천강'지구에 포진하게 된 1952년3월17일까지 독립제5대대는 '김포'지구의 경계와 "월암리전투"를 치루고 '김포'반도의 전방 '개풍군'일대의 수색과 정찰을 계속 중 해병 제1연대의 이동과 더불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연계를 지어 휴전 시까지 서부전선에서 수도방위의 중책을 수행하였다.
(2) 독립제5대대의 "월암리(月岩里 경기, 개풍군) 전투"
UN의 소련대표 '마리크'가 38선 정전안을 6월24일 제출하자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UN군 총사령관 '릿지웨이' 장군에게 북한측과 현지에서 정전교섭을 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때 이로인한 국내여론은 한결같이 "이렇게 정전할 바에야 무엇 때문에 싸워야만 했는가? 고귀한 희생을 내면서까지 싸운 보람이 겨우 이것인가?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남북통일을 완수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하여야 한다,"는 비통함과 울분이 뒤섞인 감정을 절규하였으나 결국 7월초순부터 '개성'에서 정전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토의하게 되었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전전선은 대체적으로 정찰전과 소규모의 기습전이 계속되는 기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더욱이 '판문점'에서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개성', '판문점', '문산' 및 이를 통하는 도로를 중립지대(D.M.Z.)라 하여 제한된 기형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때 적은 이와같은 외교의 동향을 계기로 최대한의 영향을 회담에 반영하기 위하여 '개성'북방으로 후퇴하여 소규모정찰전을 수행하던 방법을 변경하여 대부대의 병력을 '개성'지구로 투입하여 남하하여 왔다.
인민군 제8사단제2연대는 개풍군 광덕면 '몽덕리'까지 진출하고 이 부대에서 편성된 수색대는 '강화도'의 대안 '백마산'일대까지 출몰하면서 때에 따라서는 '한강'을 도하하여 남하할 기세까지 보였다.
힌편 다른 인민군 부대는 '월광리'북방 5km 지점인 '상도리'까지 침투하고 있었고 또한 중공군의 소수병력은 '월암리'북방 7km지점인 '신촌'과 '상도면', '광덕산', 및 '임계면'에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이와같이 적이 회담을 견제하며 그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갈 의도하에 다시 전황은 긴장되어 갔으며 적의 남하할 기세는 더욱 노골화되어 갔다.
이리하여 주변상황은 독립제5대대가 종전보다 더욱 적극적인 정찰전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의 우군상황은 육군 제1사단이 '임진강'남안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독립제5대대의 수색대본부는 '양촌'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독립제5대대는 육군 제1사단의 작전지시에 의하여 '월암리'에 수색대본부를 두고 전방 즉 '개성'방면의 수색을 계속 감행하고 있었다. 독립제5대대의 작전은 사실상 그 당시의 상황의 긴박성을 반영하고 있어서 미 제1군단장 및 육군 제1사단장으로부터 종전보다 더욱 경계를 철저히 하여 적의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라는 지시가 거듭 강조되었다.
이리하여 독립제5대대장(이봉출 소령 7월8일부로 부대대장에서 대대장으로 임명)은 방어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장애물 설치, 진지보강, 및 수색전의 철저를 기하는 등 미 제1군당장의 지시에 따라 이를 다시 각중대에 강조, 지시하였다. 그 중의 특기할 것은 "금번의 작전은 수색정찰의 철저여하에 따라 그 승패가 좌우되는 것이니 수색정찰에 더욱 적극 노력하라. 또한 각지휘관은 명령 또는 지시사항이 철저히 이행되도록 감독하여 그 경과 및 결과를 지체없이 보고하라"는 특별지시였다.
이리하여 제5대대는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적극적인 수색정찰전을 위하여 제22중대 및 제23중대에서 1개소대씩 차출하여 '월암리'를 근거로 전방에 대한 정찰을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을 근거로 한 해병정찰대의 계속적인 활동은 적에게 정찰대본부의 위치가 탐지되었다. 따라서 해병정찰대의 신출귀몰하는 정찰전을 방해하는 방안으로 적은 수색대근거지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가.
독립제5대대 수색정찰대의 혈전 현장도(월암리)
![]() 김포지구(개풍군, '한강'너머 북쪽지역) "월암리(月岩里) 전투" 현장 위치도. '한강'북쪽 대안의 윗쪽 빨간 원으로 표시된 지점이 "월암리 전투" 현장을 표시하고 있음. 사진 설명: 위의 지도의 밑부분은 '김포반도'의 북단을 보여주고 있으며 대안의 '개풍군'지역내에 빨간 원으로 표시된 지점일대가 해병 독립제5대대의 정찰대가 활동한 지역이며 또한 "월암리 전투"의 현장을 표시하고 있음.
오른쪽 윗부분에 해병 제1연대가 1952년3월17일부터 중공군과 휴전 시(1953년7월27일)까지 혈전을 지속한 '장단, 사천강'지역이 오른쪽 위로부터 밑으로(한강)흐르고 있는 '임진강' 서쪽지역에 위치하고 있음.
![]() 김포반도 북단 및 개풍군 '장단, 사천강'일대지역(오른쪽 위의 '임진강'서쪽, 초록색 지역) ![]() "월암리 전투" 상황도(1951.7.23)
그 당시 인민군 제8사단은 본부를 '개성'북방에 두고 제2연대본부는 '진봉산'에 있었고 각대대는 '광덕산'에서 남으로 '한강'연안 '영정포'에 이르는 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때 매일 계속되는 강우와 농무로 인하여 해병들의 경계시야는 극히 제한적이었는 데 이를 호기로 적은 7월23일 05:30시를 기하여 '월암리'를 급습하여 왔다.
적은 '월암리'후방고지와 좌우고지를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점차 포위망을 압축하여 왔고 또한 다른 적의 부대는 해병부대의 상륙지점인 '하조강리'에 내습하여 도강작전에 사용되는 목선을 전부 파괴하고 '월암리'남방으로 공격해 왔다. 이때의 적은 1개연대의 병력으로 중기와 박격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에 반하여 해병정찰대는 2개소대의 병력뿐이었고 그나마 중장비는 없었을 뿐더러 계속된 강우로 인하여 행동에 많은 제한을 받고 있었다. 또한 통신기마저 고장이 나서 본부와의 연락은 두절되었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해병정찰대는 적과 교전하여 적을 공격, 선멸하는 것보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전원이 무사히 적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느냐 가 선결문제였었다. 적은 81mm 박격포로서 정찰대진지를 강타하면서 4면으로부터 공격하여 포위망을 압축하며 정찰대본부에 시간적여유를 주지않으려고 공격하여 왔다. 적이 접근하자 정찰대는 지근거리에서 일제히 전화력을 집중하여 적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제일선의 적은 속출하는 희생자와 해병정찰대의 예상외의 완강한 저항에 당황하여 시체를 유기한채 일시 후퇴할 기세를 보였으나 숫적인 우세에 있는 적은 곧 후속부대의 증원으로써 전력을 보강하고 재차 공격을 감행하여 정찰대진지 200yds 전방까지 접근하여 심지어 해병들에게 항복하라고 고성을 지르기도 했다.
1) 해병들의 감투정신
해병정찰대는 현위치를 사수하면서 이리떼같이 공격해 오는 적에게 총열이 달아오르도록 사격으로 응전하였다. 약 2시간에 걸친 전투끝에 해병정찰대는 보유탄약이 소진되어 수류탄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수류탄마저 떨어지자 해병들은 BAR, 소총, 및 경기관총 등을 분해하여 적에게 던지는 등 형용키조차 어려운 고전을 지속하였다.
2) 김형우 이등병조
이때 김형우 이등병조는 대원 5명을 인솔하여 적전 10yds까지 접근하여 마지막 수류탄을 던져 적에게 15명의 사상자를 내게하고 적진에 돌입하여 총개머리판으로 적을 내려치는 육박전을 하면서 전원이 장열히 전사하였다. 이에 용기백배한 해병들은 서로 격려하면서 적에게 포로가 되어 해병대에 오명을 남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각오로 결사적인 반격을 거듭하면서 혈전하였다.
그러나 숫적으로 절대 우위에 있는 적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인하여 사태는 정찰대에게 극히 불리하게 되어 부득불 후퇴를 단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적은 이미 정찰대의 철수로인 각고지를 전부 점령하고 있어서 오직 정찰대의 철수는 개활지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개활지를 통과하여야 하는 이 철수작전은 많은 희생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정찰대는 결사적인 철수를 개시하여 적이 점령 중에 있는 고지로부터의 사격을 피하면서 7월23일 10:00시 '하조강리'고지까지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정찰대는 일단 재편성을 하는 한편 대안('강녕포')에 위치하고 있는 부대본부에 비상수단으로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것은 무전기가 고장났기 때문에 부득기 산위에 올라가서 모닥불을 피워 연기를 내게 한 것인데 이 연기를 본 대안의 재23중대1소대는 수신호를 교환하여 상호 확인한 다음 즉시 중대본부에 보고했고 보고를 받은 제23중대장(김재혁 대위)은 1소대장(박병호 소위)에게 '한강'을 도강하여 정찰대를 지원할 것을 명령했으나 물때가 맞지 않아 즉각 도강할 수 없었던 1소대는 명령을 받은지 약 3시간 후인 13:00시경에 도강할 수 있었다.
3) 미 해병대 LVT의 지원
그 동안 '강녕포'(김포반도의 북단 '한강'변에 위치)우측 능선밑에 배치되어 있던 미 해병대의 LVT(Landing Vehicle, Tracked)대대는 해병부대의 요청에 따라 '한강'대안의 '하조강리' 뒷고지로 해병정찰대를 추격 중인 적에게 맹렬한 포격을 가하여 적은 15:45시부터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조강포'에 도착한 해병지원부대는 적의 공격을 받지 않는 가운데 '월암리'로 진격할 수 있었고 이어 정찰대는 지원부대와 합세하여 다시 '월암리'를 공격하여 19:30시 진지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이 전투에서 해병정찰대의 결사적인 저항과 미 해병대의 LVT(Landing Vehicle, Tracked)의 맹렬한 지원사격으로 152명의 적을 사살하고 사상 90명 및 2명을 생포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으나 해병들도 8명의 전사자와 부상 8명, 12명의 실종자를 내는 한편 20여 정의 소화기와 2문의 공용화기를 망실하는 등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와같이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중첩된 포위망을 결사적으로 돌파하고 피비린내나는 육박전을 감행한 '월암리'의 격전장을 시찰한 미 해병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처참한 격전장은 처음 보는 것이라고 한국 해병들의 감투정신을 격찬하였다.
파괴된 '한강' - 1950.9. -
파괴된 서울역
독립제5대대는 다시 긴장한 가운데 '김포'지구의 경계와 전방 '한강'너머의 '개풍군'일대까지 적정의 수색과 정찰을 계속하던 중 중동부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수립하고 '월산령'방어지구에서 "미네소다 방어"임무를 마지막으로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해병 제1연대(연대장 김동하 대령)가 1952년3월17일 '장단'지구에 배치됨에 따라 수도'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한강'을 사이에 두고 연계를 지어 계속 휴전 시까지 '김포'지구에서 경계방어의 중임을 담당하였다
이후 '김포'지구는 한국전쟁 중 해병 제1연대의 예비대를 위한 부대재편성 겸 휴양지로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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