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살을 남기며 선착장을 떠나는 쾌속정. ⓒ고원영 |
청평사(淸平寺)는 이상한 절이다.
가을에 가면 노래 두 곡 부르는 사이에 닿고, 이른 봄에 가면 이십 분 가량 나무 한 그루 없는 볕길을 걸어야 한다. 두 번 모두 배를 타고 소양호를 건너 선착장에 내렸을 경우이다. 그렇지만 소양호를 소양댐이라고도 부른다는 사실을 알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소양댐은 계절에 따라 물이 줄고 는다.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부터 소양댐의 수위는 높아지기 시작해 가을에 이르면 최고에 이른다. 그러면 배를 접안하는 선착장과 청평사 사이가 가까워진다. 반대로 갈수기인 겨울부터는 봄까지는 배를 접안하는 선착장과 청평사 사이가 멀어진다. 물의 양에 따라 거리가 짧고 멀어질 뿐이지 청평사가 움직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청평사에 가는 사람은 드물다. 이 사실을 모르고 봄과 가을에 청평사를 찾은 사람은 기이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절이 나타나며, 어느 때는 몇 구비를 돌았는데도 절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길을 잃은 느낌에 빠져든다. 그렇게 청평사를 다녀온 사람들은 말한다. 청평사는 이상한 절이다.
청평사는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에 있다. 청평사의 배경인 오봉산(779m)이 비록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지만, 나는 오봉산의 들머리인 배후령을 넘어서는 청평사를 찾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겠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산을 넘는 노고는 왠지 청평사와 어울리지 않는다.
대동여지도가 표시한 오봉산의 옛 이름은 청평산이다. 고려의 사상가이자 수승한 재가불자인 이자현이 1089년 이 산에 은거하자 들끓던 도적과 호랑이와 이리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맑게 평정되었다’는 뜻에서 청평산(淸平山)이란 이름이 생겼다.
청평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야 한다. 청평사는 연인들이 가야 제격이다. 소양댐 주차장에 차를 세운 한 쌍이 거침없이 선착장으로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초로의 남자인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데도 남녀는 커플룩이라고 부르는 짧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배를 타고 청평사로 놀러 가는 그 많은 연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의 가벼움은 더는 발걸음을 떼지 못해 매표소 곁에 멈춰버린 자의 무거움을 비웃었다. 검표원이 승선을 독촉했다. 그들, 커플룩의 연인이 깡총 뛰듯이 배에 올라탄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 밑바닥에서 물보라가 튀어 오르자 그들에게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웃음은 물속에 잠긴 마을을 알지 못한다. 조석으로 굴뚝 연기를 피워 올리던 산기슭의 집들, 삼일장이 서던 샘밭장, 전봇대가 있던 언덕배기 전답, 흙먼지를 일으켜 학교 가는 학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버스길이 물속에 잠겼고, 그 위를 유람선이 지나간다.
소양댐은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춘천군 북산면을 중심으로 4,600세대가 수몰되면서 건설한 남한 최대의 인공호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밭이 변해서 바다가 됐다는 사자성어 그대로였다. 소양댐 담수로 대부분 화전민이었던 마을 사람들은 소양호에서 일용할 양식을 건지는 어부로 변하거나 일거리를 찾아 타처로 떠났다.
그리고 그들은 청평사 가는 길에서 식당주인이나 노점상으로 변했다. 소양댐 버스종점부터 선착장에 이르는 내리막길에서 부침개, 막걸리, 도토리묵, 중국산 산나물을 파는 그들이 있다.
6,000원 왕복 도선료를 내고 통통배를 탄다. 건너편 선착장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여 분이지만, 이 시간에서의 느낌이 바로 배를 타고 청평사에 가는 이유이다. 호수를 건너 청평사로 가는 것이지만 수몰지구를 지나기 때문인지 어쩐지 물속에 있는 절을 찾아가는, 환상에 가까운 느낌에 빠져든다.
그러나 선착장에서 내리면 흙길이고, 그 끝나는 지점에서 청평사 일주문까지인 식당거리에 들어서면 유람선에서 느꼈던 환상이 단번에 지워진다. 춘천닭갈비 굽는 냄새가 진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식욕을 자극한다. 식당마다 손님들이 흥청거리는데도 호객꾼들이 나와 행인들을 불러 세운다. 출입문 옆 카운터에 앉아 카드등록기를 조작하는 식당 주인들, 그 셈 빠른 사람들이 소양호 주변에 살던 농부이고 어부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식당거리를 벗어나자 청평사 매표소가 나타난다. 매표소 건물을 마지막으로 민가는 사라지고, 오솔길과 나란히 계곡이 깊어진다. 그런데 웬일일까, 이쯤이면 커플룩의 연인이 다시 등장해서 내 앞을 명랑하게 걸어야 하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둘이서 걷는 걸음이라 혼자 걷는 내 걸음보다 훨씬 느릴 텐데 말이다.
▲ 청평사 계곡의 공주상. ⓒ고원영 |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자 아홉 가지 소리가 난다는 구성폭포가 보였다. 여전히 나는 연인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중년남녀가 깔깔대며 사진을 찍고 있을 뿐이었다. 폭포에 잇닿은 계곡에서 뱀을 손바닥에 올려다 놓고 바라보는 공주상 곁에서였다. 당나라 태종의 평강공주라고 하는 이 공주상에는 전설이 있다.
궁중의 말직에 있던 한 청년이 공주를 짝사랑하다 상사병으로 죽었다. 상사뱀으로 환생한 총각은 공주의 몸에 달라붙어 무슨 수를 써도 떨어지지 않았다. 상사뱀 때문에 죽을 위험에 처한 공주의 선택은 오직 하나, 고려국 청평사에 가서 뱀이 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청평사에 이른 공주가 구성폭포에서 목욕재계하는데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들려왔다. 공주가 상사뱀에게 부탁했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려고 하니 잠시 몸에서 내려와 줘요.”
웬일인지 그 말에 10년 동안 칭칭 몸을 동여맸던 뱀이 스르륵 몸을 풀었다. 그렇게 해서 절에 들어간 공주는 해가 저무는지도 모르고 염불삼매에 빠졌다. 조바심이 난 것은 상사뱀이었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공주를 찾아 기어이 청평사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회전문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이 떨어지고 뱀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 공주탑. ⓒ고원영 |
질긴 악연에서 풀려났지만 공주는 전생부터 자신을 사랑한 뱀을 연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사뱀의 극락왕생을 빌며 공주가 세웠다는 3층 석탑은 공주탑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계곡 건너편 으슥한 숲길 한쪽에 남아 있다.
이토록 슬픈 전설을 남긴 회전문이지만 그곳을 지나는 연인치고 유쾌하지 않은 얼굴은 없다. 보물 제164호인 청평사 회전문은 절에 들어설 때 만나는 두 번째 문인 사천왕문의 또 다른 이름으로, 중생들에게 윤회하는 삶을 직시하라는 문이다. 사랑이 아무리 아름답기로서니 불교에서는 집착일 뿐이다. 전생에 총각이었다가 벼락 맞아 죽은 상사뱀의 업은 육도윤회를 거듭하겠지. 생각이 거기에 이르렀다가 나는 문득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지. 사랑을 어찌 네모나거나 둥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청평사가 움직이는 건 소양댐의 담수 때문이듯 사랑의 불가해한 힘이라면 절 하나쯤 옮겨놓는 건 일도 아니지.
▲ 청평사 영지. ⓒ고원영 |
▲ 청평사 영지 연못에 나무들이 머리를 풀고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나무들 자체도 감각의 그림자이므로, 연못에 드리운 나무는 그림자의 그림자이다. ⓒ고원영 |
▲ 벚나무와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 청평사 회전문. ⓒ고원영 |
이자현이 꾸몄던 정신적 풍경에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하고 여전히 나는 두리번거렸다. 그 때문인지 회전문을 지날 때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사랑과 증오, 삶과 죽음이 녹슨 경첩처럼 삐긋 돌아갔다. 그 옛날 공주와 청년과 뱀이 회전하고 있었다. 상사뱀에 대한 연민이 끓어올랐다. 회전문이 없더라도 회전해야 할 운명이 회전문을 만났으니 벼락을 맞아 급사했던가. 오직 회전에서 벗어나려고 치열하게 구도한 자만이 이 문을 당당히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전문을 지나자 구도자들의 발자국이 경내 곳곳에 찍혀 있다. 청평사는 고려의 대표적 선지식인 보우대사와 나옹선사, 지공화상이 머물렀던 절이다. 지공은 나옹에게 가사와 함께 법맥을 전승한 스승이었다.
지공이 입적했을 때 나옹은 매우 담담하게 썼다. ‘스승의 가사를 수하고 향을 사른 뒤 설법했다’ 그러면서 나옹은 지공에 대해 회고했다.
푸른 두 눈, 뚫린 두 귀
오랑캐 수염에 얼굴은 검어라
그저 이렇게 오셨다가 이렇게 가셨을 뿐
기묘한 모습이나 신통을 나타내지 않으셨네
▲ 진락공 이자현 부도. ⓒ고원영 |
‘나옹록’이 전하는 글이다.
지공과 나옹도, 당나라 공주와 공주를 사모하다 상사뱀이 된 청년도, 오봉산을 정원으로 꾸미려 한 이자현도, 벚나무 아래를 지나는 연인과 그들을 다시 찾아내려는 나도 눈·귀·코·혀·몸·생각을 지닌 사람일 뿐이다. 나옹이 회고한 인도스님 지공은 그 남다른 얼굴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모습으로 둔갑하거나 신통술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옹의 문체는 지공의 수승함을 여백으로써 암시한다. 지공은 신통 이상의 능력을 지녔으니 여섯 가지 감각을 평정할 줄 아는 수행자였다. 그 여섯을 비워버리니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같음과 다름 따위의 분별심도 타파됐다.
부처와 마찬가지로 지공은 왕자의 아들로 태어났다가 출가했다. 지공은 인도와 중국과 우리나라, 세 나라 국경을 넘나들었고, 세 나라 전역을 순례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었던 지공은 1363년 연경의 천수사에서 입적했다.
입적은 윤회를 벗어나 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리고 고요해진 경지이다. 많은 스님들의 입적을 알리지만 정말로 고요해진 사람은 누구일까? 이자현은 스님이 아님에도 마음속의 도적과 호랑이와 이리떼를 평정함으로써 고요해졌고, 부처는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인 생로병사를 평정함으로써 고요해졌다. 그 옛날 부처의 손에 들린 연꽃도 보는 사람에게만 보였듯이, 정말로 고요해지는 사람은 흔치 않을진저, 나는 그저 청평사에 놀러 온 여느 관광객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전각만을 둘러봤을 뿐이다. 그리고 회전문을 나설 때였다. 소양댐 선착장에서 처음 본 연인이 벚나무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 청평사 벚나무 아래를 지나는 연인들. ⓒ고원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