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가을날, 깊은 숲 속에 감춰진 ‘비밀의 화원’을 향해 길을 나선다. 청량리역에서 열차를 타고 수목원이 위치한 청평역에 다다른 시간은 출발 후 1시간 정도 후였다. 아담한 청평역을 뒤로하고 현리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10여분쯤 갔을 까. 낯설은 시골길에 ‘수목원’을 알리는 반가운 팻말이 보인다. 여기에서 수목원 입구까지는 4km의 거리다. 포장된 길이긴 하기만 걷기에는 그리 수월치 않다. 수목원으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신작로 주변의 밤나무에는 주렁주렁 밤송이가 열렸다. 손끝만 닿으면 우수수 떨어질 만큼 풍성하다. 어느새 수목원 주차장에 다다랐다.
‘아침고요수목원’은 원예학자인 한상경 교수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조성한 곳이다. ‘아침고요’라는 이름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우리 나라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예찬한데서 아이디어를 얻어, 한국적인 자연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겨져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나만의 ‘비밀의 화원’으로 발을 들여 보자. 매표와 더불어 건네 받은 수목원 안내지도를 꼼꼼히 살피며 코스를 정하고, 예쁜 토끼들이 방문객을 맞는 고향집 정원을 지나 능수정원으로 향한다. 아침계곡이 흐르는 구름다리 건너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니 소나무, 단풍나무, 소사나무 등의 자태를 감상할 수 있는 분재정원에 이른다. 크기가 서로 다른 항아리 위에 갖가지 자태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그 모습이 멋스럽다.
분재공원 옆에는 ‘초화류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원색의 화려함이 넘치는 곳이다. 굳게 잠겨 있는 매점을 지나 투명한 지붕과 유리로 사방을 장식해 따사로운 햇볕을 온전히 받고 있는 온실전시장에 들어선다. 작은 모형으로 표현된 우리네 옛 마을의 모습이 정겹다. 게다가 앙증맞은 크기의 다양한 식물들을 집 앞마당에 심어놓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온실전시장을 나서 시가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하늘높이 솟은 나무들이 저마다의 시어로 잠시 쉬어가라며 벤치를 내어준다.
하경정원과 에덴동산은 온통 꽃 잔치가 열렸다. 수목원의 대표적인 정원인 ‘하경정원’은 한국적인 선과 색채가 화려하게 조화된 정원이다. 어느 곳을 배경으로 하여도 그 화사함이 묻어나기에 가장 인기 있는 사진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메리골드, 코리우스, 토레니아, 금계국, 베고니아 등이 저마다의 개성 있는 향기와 아름다운 빛깔로 주위를 물들인다. ‘하경정원’은 아래 하(下) 경치 경(景)자로서 ‘아래로 경치를 내려다 보는 정원’이라는 뜻이다. 하경정원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흡사 잘 꿰여진 떡 코치를 연상시키는 반원형 통나무 다리를 건너야 한다. 50m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니 하경정원을 중심으로 한 수목원의 전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그 모양이 흡사 우리 나라 지도를 담아있다.
양반집과 초가삼간을 꾸며놓은 한국정원 가는 길에는 ‘탑골’이라 불리는 ‘돌탑정원’이 있다.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하나 둘 마음을 쌓아올려 정원으로 탄생한 곳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염원을 담았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벗삼아 걷는 길,이마를 만져주는 산들바람이 어머니 손길처럼 부드럽다.
양반집에는 따가운 볕을 피해 대청마루에서 몸을 쉬는 연인들이 모습이 여럿 눈에 뛴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잠시 달콤한 낮잠을 청하는 이들도 보인다. 발길을 돌려 높다란 곳에 적막하게 서 있는 초가삼간으로 향한다. 양반집과 비교되는 그 모습이 고단한 민초들의 일상을 느끼게 한다. 열려진 부엌에는 불을 지피던 나뭇가지들과 아궁이, 그리고 가마솥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문득 어릴 적 가마솥에 시루떡을 맛나게 쪄주시던 할머니 생각이 난다. 갓 쪄낸 떡에 달콤한 조청을 듬뿍 찍어 어린손주에게 건네주시던 할머니의 사랑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친다. 초가집 마루에 앉아 향기로운 가을 하늘을 호흡해 본다. 귓가를 스치는 미풍이 감미롭다.
성서산책로로 향하는 길은 시원하게 뻗은 나무들 사이사이 벤치가 마련되어 있어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산책로의 끝은 아침광장으로 이어져 있다. 아침광장은 사면이 아름다운 능선으로 둘러 쌓인 너른 잔디밭이다. 영화 ‘편지’의 결혼식 장면을 찍었던 곳으로 시야가 닿는 곳마다 하나의 그림이 된다. 드넓게 펼쳐진 잔디광장에는 피크닉을 나온 가족과 연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가을여행을 나선 어느 중년부인이 사진을 부탁해 온다. 아내의 다정한 포즈요청에 연신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남편의 얼굴에서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 교차한다. 무뚝뚝해 보이는 그 표정 뒤에 환한 소년의 마음이 있음을 이렇게 커서야 알았다. 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침엽수정원 뒷편의 작은 계곡에 두 손을 담근다. 어디선 가 풋풋하고 신선한 향기가 솔솔 풍겨온다. 향기의 진원지는 야생화정원이다. 외국의 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부드럽고 고운 색을 지녀 친근함을 주는 우리 꽃이다. 계절마다 번갈아가며 꽃을 피우는 야생화정원은 때마다 새로움을 준다. 봄에는 노루귀, 복수초, 여름에는 까치수염, 참나리, 꽃창포가 가을에는 노루오줌, 개미취, 쑥부쟁이, 용담등이 정원을 수놓는다. 이곳 정원들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원두막은 지친 심신을 풀고 한결 느긋하게 수목원을 감상할 수 있는 감초 역할을 한다. 수목원에서는 계절별로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봄에는 난, 여름은 철쭉과 야생화, 가을에는 무궁화와 단풍축제, 그리고 겨울에는 국화와 눈꽃 축제가 그것이다. 아이들이 자연과 호흡하며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너른 공간이 있고, 꽃과 나무에 취해 낭만의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멋이 있어, 수목원은 우리들의 ‘비밀의 화원’으로 언제나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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