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 금요일
제주항 묘박지
새벽 5시 50분 기상. 곧 아침 점호가 시작된다. 원래 오늘 계획은 제주 북동쪽에 위치한 여서도 부근에서 작업을 한 후 저녁 무렵에 나가사키로 향할 작정이었다. 항해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기상 상태부터 먼저 알아 봐야 한다. 핸드폰으로 제주 측후소에서 제공하는 기상 예보를 청취하니 장마전선이 하루 앞당겨 오늘 제주 부근까지 진출한단다. 내일 모레 계속해서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제주 부근 바다와 동해 남부의 해상 상태가 좋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당장 출항을 서둘러야 한다. 자칫 꾸물대다간 악천후로 일요일까지 출항이 지연될 염려가 있다.
토요일에 나가사키 앵커러지(검역묘지)에 도착할 예정이지만, 작업을 하지 않고 바로 항해를 시작한다면 하루 앞당긴 오늘 저녁에 도착할 것이다. 현재 위치인 제주항 묘박지로부터 나가사키까지 총 항정은 180마일이니 약 15시간의 항해거리다. 황천 항해에 대비 모든 현창의 볼트는 단단히 조이고 로프와 물건들을 결박하라고 지시하다. 아마 오늘 오후부터는 파고가 제법 드셀 것이다.
기상 예보대로라면 예상 파고는 3미터 정도쯤 될것이다. 전 승무원과 실습생들에게 선내 마이크를 통해 악화된 기상 상태로 인해 곧바로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를 시작한다고 전달하다. 6시 30분 출항 스탠바이. 기관장에게 기상 상태를 설명하고 주기관의 속도를 올려야 할 필요성을 의논하다.
일본 항해
평소보다 높은 속도인 RPM (주기관 회전속도) 610에 피치(프로펠러 각도) 18도로 조정하니 온 선내가 진동 소리로 요란하다. 속도계는 13.5 노트를 가르킨다. 해림호의 평균속도가 12노트이니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항해하는 셈이다. 이대로 가면 오늘 밤 자정 무렵쯤 나가사키항의 앵커러지에 도착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후부터 예상되는 비바람과 거친 파도다.
지난 17년여 항해사로 지내는 동안 선장으로 모셨던 S교수께서 동승하고 계시니 크게 염려는 안되지만 이젠 내가 선장이다 보니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나는 S교수라도 계시니 안심이지만, 지난 세월 당신은 혼자서 모든 결정을 내려야 했을텐데 마음 고생이 얼마나 컸을까. 한 배의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선장 직책은 막중한 긴장과 고독감이 따르는 힘겨운 자리다.
오늘 항해는 날씨가 뻔히 안 좋은 줄 알면서도 스케쥴 관계로 무리한 항해를 하는 셈이다. 사실 항해를 하다 보면 때로 무중 항해나 악천후라는 걸 사전에 알지만 어쩔 수 없이 강행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일 터이다. 해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가령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보증을 부탁하는 경우가 그렇다.
선내를 잠깐 살펴 보니 무링 라인(계선색)과 다른 물건들은 꼼꼼하게 잘 결박되어 있다. 여전히 하늘은 구름으로 짙게 깔려 있고 가느다란 빗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가사키 항까지의 예정 침로는 120도인데 풍향은 거의 90도쯤이다. 그렇다면 좌현쪽 옆구리 부근으로 바람과 파도가 친다. 선수쪽이 아닌 옆에서 치는 파도, 즉 횡파를 받게 되면 배의 요동이 아주 심하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풍향은 좌 우현 15도일 때 가장 이상적이다.(황천시에는 반드시 이 방향을 유지해야 안전하다) 물론 선미 뒷바람을 받는다면 순풍에 돛단 격이 될 것이다. 우연이겠지만, 항해를 하다 보면 대개 앞에서 불어오는 경우가 많다. 지금처럼 옆구리에서 부는 횡파는 가장 안좋은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는 30프로의 확률 중 가장 악조건으로 항해하는 셈이다. 지금 시간 오전 10시, 제주에서 30여 마일 떨어진 근해라 해면 상태는 아직 잔잔하다. 문제는 본격적으로 현해탄에 진입하는 오후부터 초저녁 시간대다.
구름이 잔뜩 깔려있는 하늘과 회색빛 바다를 연신 불안하게 바라보며 조타실과 침실을 오르내렸지만 다행히도 약간의 가랑비만 내릴뿐 우려했던 강풍은 불지 않았다. 제주항으로부터 일본까지 길게 동서로 가로덮인 장마전선은 일본쪽에서는 규수 남쪽 해상으로 뻗혀 있어 아직 우리가 항해하는 해상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내일쯤 장마전선은 북상할 터이고 그러면 기상은 더욱 악화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서둘러 출항하기를 잘한 셈이다. 선내 방송으로 황천항해를 대비해서 준비를 단단히 해두라 한 탓에 모두들 잔뜩 긴장했지만 오후가 되어도 해면 상태가 계속 잔잔하자 모두들 안도하는 빛이다.
횡파를 동반한 풍향은 항해하기에 나쁜 조건이었다. 그러나 장마전선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형성되었으니 결국 두 조건들을 합하면 제로가 된 셈이다. 때로 좋은 조건이 있으면 언젠가 불행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그러니 불평하지 말고 매사를 끈기있게 참고 기다릴 일이다.
나가사키 항구
나가사키항은 일등 항해사 시절인 지난 5년전에 한차례 입항한 경험이 있지만 오래전이라 항구의 지리가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더구나 야간 항해라 전혀 주변을 살펴 볼 수가 없다. 만약 작년 초임 선장때라면 긴장이 제법 되었을텐데, 지난 한 해의 경험탓인지 담담한 기분이다. 더구나 해림호의 항해 장비가 워낙 잘 구비되어있어 크게 염려되지 않는다.
ECDS(전자해도)와 알파 레이더의 성능이 뛰어나 아무리 협수도나 복잡한 외국 항구라도 안전하게 입항할 수 있다. 나가사키는 비교적 선박의 통항이 드믄 항구이다. 근처의 후쿠오카나 가고시마 항구만 하더라도 선박 출입이 상당하지만 이 곳은 다른 항구에 비해 물동량이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초저녁 무렵인 오후 6시경에 벌써 혼슈 연안인 후쿠시마 반도를 돌아섰다.
침실로 내려가 텔레비전을 켜니 마침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야구 경기를 중계하고 있다. 요코하마는 과거 주니치 드레건즈 시절의 선동열과 세이브 부문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사사키가 소속된 팀이다. 사사키는 현재 메이저 리그에서 마무리 전문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이치로와 함께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주전 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선수 가운데 다네다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타격폼은 마치 기마 자세를 연상케 하는 특이한 형태로 작년까지 이종범이 소속된 주니치 드레건즈에서 선수 생활을 했었다. 요미우리의 만년 간판 타자인 마츠이와 미남형의 강타자 기요하라, 인자한 할아버지 모습의 명장 나가시마 감독이 얼굴이 낯익다. 혹시 정민철과 정민태, 조성민이 등판하나 했지만 오늘은 출장하지 않나 보다.
저녁 10시경 다시 조타실에 올라 가다. 나가사키 항구가 불과 10마일로 가까워 온다. 지금부터 레이더를 주의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 또한 해도를 면밀히 파악해서 항구의 지형들을 정확하게 머릿속에 입력해 두어야 하고 레이더 상으로 잡히는 항구와 해도의 형태를 서로 대조해서 상기해 두어야 하며 입항 방법을 대략 스케치해야 한다.
물론 항구 부근의 등대와 암초 따위들도 세밀하게 파악해 두어야 할 것이다. 한밤중이라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오직 선장의 명령에 따라 지휘가 이뤄지기 때문에 단 한마디라도 실수해서는 안되고 순간순간 상황을 파악, 오더를 신속 정확하게 내려야 한다. 마침 2마일 전방에 대형 카페리선이 함께 입항하고 있어 진로를 파악하기에 도움이 되었다.
불과 0.4마일(약 750미터) 간격의 방파제 사이를 야간에 레이더만을 보고 통과해야 하니 신경이 너무 쓰인다. 전방의 카페리선이 4노트로 감속함에 따라 우리 배도 같이 속도를 낯추다. 앵커러지까지 들어가나 했는데 도중 파일롯 스테이션에 묘박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머물 앵커러지는 3마일쯤 더 들어가야 한다.
전 승무원에게 입항 스탠바이를 지시하다. 레이더를 보니 상선 두 척이 묘박하고 있다. 10노트로 속도를 약간 더 올리다. 미쓰비시 조선소 가까이에 있는 묘박지의 수심이 평균 20미터인데 특이하게 가운데 부근은 수심 10미터 정도의 뱅크 지대다. 20미터에서 갑자기 10미터로 불쑥 솟아오른 뱅크를 피해 투묘하고 나니 저녁 11시 20분이다. 엔진 정지를 하고 나니 쌓였던 긴장감이 겨우 풀린다.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자니 일등항해사가 찾아왔다. 저녁 당직 문제로 상의 드릴게 있단다. 하루종일 항해당직을 선 항해사들은 제외하고 대신 갑판원들만으로 정박당직을 세우려니 갑판원들의 불만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문제야 스스로 해결하지 왜 나를 찾을까. - 계속
첫댓글 익숙하지 않은 용어 설명 부탁드립니다. 황천 항해가 두어번 나오는데 무슨 뜻인가요?
당직근무배정 문제는 어디서나 문제가 되는군요. 가장 골치아픈 일이 사람 설득하는 일 아니겠어요? 항해사 때 못하면 선장이 되어도 못할텐데요.. ^^;;;; 삼탄 기다립니다.. ^^
'황천'(荒天)은 비바람이 심한 날씨를 뜻합니다.
배는 늘 해상에 떠있어야하기 때문에 당직사관과 당직선원의 근무는 정말 중요하지요. 그들을 믿고 모두 잠을 자니까말이죠.
프로필
- 군산수산전문학교 졸업
- 1974년~1988년(9년) : 스페인령 라스팔마스 원양기지에서 트롤어선 승선
- 1989년~2004년(16년) : 군산수산전문대학, 군산대학교 실습선 근무
황천길 항해라....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네요. ^^
답변 감사합니다. 이해가 빨라졌습니다. 해림호 방문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이제는추억이 되어버렸지만...
그나저나 배타고 스페인 가려고 했던 계획을 기어이 실현 못하고 이번 겨울에 뱅기 타고 가려고 합니다. 조선장님께서 태워다 주실 줄 알고 무작정 기다렸던거지요.. ㅎㅎ 바다가 보이는 하얀 카페는 언제 보여주실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