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학문 인심도심 논쟁
1. 인심도심 논쟁의 배경
인심도심 논쟁이 시작된 조선 중기는 조선 주자학의 두 대표적인 이황과 이이가 살았던 시기이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심도심 논쟁은 이이와 성혼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인데, 이 논쟁이 있기 6년전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사칠 논쟁이 벌어진 바 있었다. 이 두 논쟁은 그 학술 용어와 논쟁의 범주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내용으로 볼 때는 동일한 문제 의식 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중국 남송 시대 주희의 철학 사상에 내재된 이론적 문제점을 여러 가지 시각으로 해석하여 이들이 필요로 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형이상학적 논의였다.
한편 이러한 인심도심 논쟁은 중국 명대 중기 왕수인의 논적이었던 나흠순이 '리기 일체'와 '심성 일물'을 주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인심도심을 일원론적인 체용 관계로 본 설을 조선의 노수신이 받아들인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나흠순의 내재론적 기철학은 후일 조선과 일본의 기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 주자학 일변도였던 조선의 주자학적 세계에서 이러한 기철학적 입장은 당연히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황은 철저한 주자학도로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한 인물이었다. 리기론에서는 이항과 기대승 등이 나흠순의 논의를 일정 정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인심도심설에서는 노수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나흠순의 인심도심설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이와 성혼의 인심도심 논쟁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는 논쟁이 아니었다.
2. 인심도심 논쟁의 연원
'인심도심'이라는 말은 "서경" '대우모'에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미하니 정성을 다하고 하나에 집중해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수 있다"는 구절에서 연원한다. 이것은 자기 내부의 도심과 인심을 뚜렷이 구분하여 오직 도심으로 중심을 잡고 성실히 행하여야 사물에 가장 합당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논어"나 "순자" 등에서도 인심도심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그런데 인심도심이라는 주제가 유학에서 본격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중요한 논쟁거리가 된 것은, 주희가 '중용장구서'에서 그 의의를 서술하고부터이다. 주희는 이 글에서 "'인심은 위대하고...'라 한 것은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준 말이다...대개 이것을 분석하여 말하자면 마음의 허령과 지각은 한 가지이지만 인심과 도심의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원래 타고날 때 받은 천성의 올바름에서 근원하기도 하므로 그것을 지각하는 것이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심은 위태하여 불안하고 도심은 미묘해서 보기가 어렵다"고 하여, 인심이란 대체로 인간의 신체적 기운에서 생기고, 도심은 선천적인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에서 순수하게 도덕적인 것이 도심이고, 그 자체는 부도덕한 것이 아니지만 신체의 기운과 욕구에 따라서 부도덕하게 될 위험이 높은 것이 인심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도심은 선하다고 할 수 있고, 인심은 선한 경우와 악한 경우가 함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물론 맹장의 성선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리하여 주희는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런데 나흠순은 자신의 기철학적 입장에서 정이와 주희의 리기이원론을 비판하고 리기를 혼연일체로 보는 정호의 관점을 받아들여, 리란 실체가 아니며 기의 법칙에 불과하다는 기 일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심지어 장재의 '태허'역시 기와 대립하는 리적인 것이라 보고 리기를 두 가지 것으로 보았다고 비판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흠순은 리기론에서는 주희와 장재를 싸잡아 비판하고, 심성론에서는 주희와 왕수인의 이론을 함께 비판하는 입장에 섰다.
나흠순은 주희 등 리기이원론자들이 성을 천명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누는 것을 비판하면서, 심성을 두 가지로 보는 것이나 한 가지로 보는 것이나 다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는 심을 제외한 성도 없고 성을 제외한 심도 없다고 하면서, 오직 한 가지 가운데 두 가지를 분석해야만 성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나흠순은 도심을 양지라 한 왕수인의 이론은 체용을 혼동하고 기를 리라고 한 잘못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주희는 인심이건 도심이건 모두 이미 발동한 것으로 보고 있는 데 반해, 나흠순은 "도심은 성이요 인심은 정이라"고 하여 도심은 미발의 상태요 인심은 기발의 상태라고 보았다. 또한 나흠순은 "도심은 체이므로 지극한 정체를 볼 수 없어 은미하다 하였고, 인심은 용이므로 그 지극한 변화를 헤아릴 수 없어 위태롭다고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3. 인심도심 논쟁의 전개
이언적과 조식 및 이황과 노수신 등의 논쟁
조선 중기 인심도심에 관한 논쟁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이언적이 그의 아들 이전인과 문답한 내용을 적은 '관서문답' 가운데 인심도심에 관한 내용에 대해, 조식이 '해관서문답'에서 반박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조식은 "이언적이 귀, 눈, 입, 코의 욕망을 사욕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귀, 눈, 입, 코의 욕망이 생겨나는 것은 성인이라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으니, 이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천리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착하지 못한 쪽으로 기울고 난 뒤에라야 비로소 욕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심과 도심의 구별이 있는 것은 다만 형기와 의리의 차이로 인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욕이라 하지 않고 인심이라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나타난 이언적의 논의는 주희의 학설을 답습한 것으로 이 후 이황과
성혼의 입장으로 이어지는 반면, 조식의 논의는 나흠순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이 후 노수신과 이이 그리고 윤휴의 입장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은 인심도심에 관한 논의를 펴면서 주희의 "어떤 경우에는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원래 타고날 때 받은 천성의 올바름에서 근원하기도 한다"는 주장에 영향을 받아, "나누어 말한다면 인심은 진실로 형기에서 발생하고 도심은 진실로 천성의 올바름에서 근원한다. 합해서 말한다면 도심은 인심 사이에서 섞여 나오는 것이니, 실상은 서로 발하는 것으로서 판연하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황은 다른 글에서는 인심과 도심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즉 "인심은 칠정이 되고, 도심은 사단이 된다. '중용장구'의 주희설과 허동양의 설을 가지고 본다면, 인심과 도심이 두 가지로서 칠정과 사단이 됨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황이 인심도심을 사단칠정과 연결시키면서 자신의 이원적인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 또한 주희가 리와 기를 두 가지로 보려 한 태도에 따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희는 리와 기를 리기론에서는 한 가지의 것으로, 심성론에서는 두 가지의 것으로 논의했다고 말해진다. 조선에서 권근과 이황을 위시하여 리를 중시하는 후기의 주자학자들까지 리기심성론의 논의 구조는 대체로 이와 대동소이하였다.
아무튼 인심도심에 관한 이황의 불분명한 논의는 비록 부분적으로 다른 점은 있어도 바로 주희와 허동양 그리고 정이의 논의를 답습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황의 인심도심설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한 가지이냐 두 가지이냐 하는 논리적 일관성과 이론적인 치밀성보다는, 그가 이 논의를 통해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인 측면에서 그가 인심을 인욕과 구별하여 인심을 인욕보다 앞에 둔 점과, 인심과 도심을 구별하여 도심과 사단을 인심과 칠정보다 우위에 놓은 점,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심을 천리의 보존이라는 경지로까지 높이고자 한 점이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주희의 논의 구조를 답습하고 도덕적 실천을 강조한 이황의 인심도심설에 맞서, 노수신은 나흠순의 "곤지기"에 나타난 논의 구조에 따라 이황과는 다른 인심도심설을 피력하였다. 노수신은 '곤지기발'에서 "내가 만년에 "곤지기"를 얻어 보니 그 말이 정대하고 정미하였다. 이는 대부분 앞사람이 드러내지 못한 것을 밝혀 정주학에 크게 공이 있었다"고 하여 스스로 나흠순의 논의를 참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노수신이 나흠순의 견해에 동조하여 인심도심 논의를 편 데 대해 이황, 이항, 김인후 등이 계속 비판을 가함으로써 조선 주자학계에 인심도심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이황은 "'그 광령을 모으고 그 생각들을 끊어 버린다'는 말은 선학적 폐단이 있으니 제거하기를 바란다"고 하여 노수신의 입장을 반박하였다. 그런가 하면 김인후는 "'신령함을 모으고 생각을 그친다'는 말은 곧 주희가 말하는 '경'이라는 것이니, 뜻과 생각을 정하여 정신을 통섭하는 것이 바로 근원을 함양하는 도이다. 다만 뒤의 현인들이 말을 끌어 옴에 단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선학에 떨어질까 염려해서이다"라고 하여 노수신의 인심도심 논의에 불교의 선학적 요소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 같은 반박에 대하여 노수신은 "인심이 인욕이라면 도심은 이미 발한 것이라고 해야 옳지만, 인심이 선악을 겸했다고 한다면 도심은 아직 발한 것이 아니라고 해야 옳다"고 하고, 또 "인심은 선악을 겸했다는 주장에서 본다면 반드시 도심이 체가 됨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이와 성혼의 논쟁
조선에서 인심도심과 관련하여 각기 다른 입장에서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논쟁을 벌였던 사람은 이이와 성혼이다. 먼저 이이의 기본 입장을 보자. 이이는 사단을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서 도심은 천리로서의 사단이었다. 그러나 이이는 인심도심이 곧바로 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사단칠정은 모두 정이라 할 수 있지만, 인심도심은 심의 비교, 측량 기능으로서의 의가 더해진 것이기 때문에 정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사단칠정은 성과 정의 합으로 이루어진 구조이지만, 인심도심은 여기에 의가 더해진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이황이나 이황의 논의를 지지한 성혼은 사단을 도심에 그리고 칠정을 인심에 분속시키면서도 도심을 사단과 완전히 같다고 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사단은 천리가 드러난 단서만을 가리키는 것이나, 도심은 마음의 시종과 유무를 관통해서 가리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이는 리기론에서 "기가 리를 포함한다"거나, "기가 발동하여 리가 그것을 타는 것이다"라고 하여 리는 기의 법칙이라는 설을 제시하였으며, 이로부터 "기질이 본성을 포함한다"거나,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논리를 이끌어 내었다.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이는 이황의 리기론과 사단칠정론을 반박하였던 것이다. 이이의 인심도심설은 리기론과 마찬가지로 훨씬 더 논리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이이는 이렇듯이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설 및 사람의 마음은 리기가 혼륜되어 있는 것이라는 설을 근거로 심은 곧 기라고 주장하였다. 심 가운데 이치가 곧 성이며, 심, 성, 정, 의는 한 가지 길이라는 것이 그의 종지였다. 이이에 따르면 심이 아직 발동하지 않으면 성이고, 이미 발동했다면 정이 되며, 발동한 뒤에 헤아리는 것은 의가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심이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을 때는 성의 경계에, 감응하여 따라 통할 때는 정의 경계에, 그리고 감응한 바로 말미암아 실마리를 풀고 헤아리는 것은 의의 경계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이와 성혼의 인심도심 논쟁은 선조 5년(1572)부터 아홉 차례에 걸쳐 서신
왕래를 통해 전개되었다.
성혼은 이황과 주희의 '중용장구서'에 입각하여 자신의 논지를 펴는데 반해, 이이는 스스로는 밝히지 않았지만 대체로 노수신의 인심도심설과 나흠순의 "곤지기"에 바탕을 두고, 혹은 적어도 이들의 이론을 참고로 하여 논의를 펴 나갔다. 물론 이이와 성혼의 논의가 선배들의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또 리기론에 대한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이 상호 보충하는 모습을 보이고 결론에서도 어느 정도 합일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과는 달리, 이이와 성혼의 논쟁은 서로의 입장을 끝내 합일되지 않은 채 매듭을 지었다.
논쟁은 먼저 성혼이 이이에게 리기론에 대한 문제를 묻는 데서 출발하여 인심도심 논쟁으로 번져 나갔다. 성혼은 이황의 주장, 즉 "사단은 리가 발동하여 기기 그것을 따르는 것이므로 본래부터 순수한 선이요 악이 없고, 반드시 리의 발동이 완수되지 못해서 기에 가려진 연후에 흘러 선하지 않게 된다. 칠정은 기가 발동하여 리가 그 위에 타는 것으로 사단과 마찬가지로 선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의 발동이 절도에 맞지 않아 리를 없애 버리게 되면 방탕해서 악이 된다"고 한 것을 두고, "리기의 발동이 처음에는 선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기가 절도에 맞지 않게 된 뒤에야 마침내 악으로 흐르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이어서 그는 "인심도심설이 저처럼 구분되어 있고 리기의 발동을 예부터 성현이 모두 그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황의 논의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대한 이이의 제1차 답변은 "성현의 말씀도 혹 횡설수설이 있고 그 본뜻은 잃어버리기도 한다"는 전제 위에서 "마음은 하나이지만 도심이다 인심이다 일컫는 것은 성명과 형기의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정도 하나이지만 혹은 사단이다 혹은 칠정이다 하는 것은 오직 리를 말할 때와 기를 겸하여 말할 때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심과 도심은 능히 서로 겸할 수는 없어도 서로 시작과 끝이 될 수는 있으며, 사단은 칠정을 겸할 수 없으나 칠정은 사단을 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이는 인심과 도심이 서로 상대적으로 관여하여 처음에 사의로서 형기가 작용한 것은 인심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잘 살펴 바른 이치대로 나아가면 도심의 명령을 받아 도심으로 바뀐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성명의 바른 마음에서 곧바로 나온 것은 도심이지만, 그것에 따라 완수하지 못하고 사의를 섞는다면 인심이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바로 인심과 도심을 상대적으로 파악하며, 처음에 인심이었던 것이 도심으로 될 수도 있고 도심으로 시작하였더라도 인심으로 끝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이이는 성혼에게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내었다. "인심과 도심이 서로 처음과 끝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지금 사람의 마음이 성명의 마음에서 바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혹시 그것을 능히 따르고 완수하지
못하여 사의로 한가하게 느긋해진다면, 이는 처음은 도심이다가 끝에 가서는 인심이 되는 것이다. 혹 형기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바른 이치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곧 진실로 도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혹 바른 이치에 거슬려도 그 잘못을 알아서 억제하고 눌러서 그 욕심을 좇지 아니하면 이것은 처음에 인심이다가 끝에 가서는 도심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이의 인심도심설이 성혼의 인심도심설과 달라지는 곳이다. 즉 이이는 인심도심이란 서로 발단하는 것은 다르나 그 과정에서 상호 관련에 따라 처음과 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심도심 자체는 본래 다른 방향으로 지향하려는 양면적인 심인 만큼 서로 내포할 수 없는 상대적 개념이다. 이와 달리 사단과 칠정의 경우는 사단은 칠정을 포함할 수 없으나 칠정은 능히 사단을 포함한다고 하여 서로 상대적으로 대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이의 논지였다.
성혼과 처음 인심도심 논쟁이 시작된 지 10년 후인 선조 15년(1582)에 왕에게 지어 올린 '인심도심도설'에서 이이는 자신의 학설을 정리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천리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성이라 하고, 성과 기를 발동하는 것을 정이라 하는데, 이 때 성은 심의 체가 되고 정은 심의 용이 되며 심은 미발과 이발을 합하여 말하는 것이므로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한다"고 하여 심, 성, 정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구분하였다. 즉 심이 한 몸의 주재가 되고, 체용의 기미가 되며, 미발과 이발을 포섭하는 개념, 다시 말해 성과 정을 통섭하는 개념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이이의 독창설이 아니라 주희나 이황 등 주자학자 일반이 주장하는 바와 다름이 없으나, 단지 논리적인 구조에서 심의 정의를 찾고 있다는데 특색이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인심과 도심을 두 가지 다른 작용으로 설명하였다. 즉 도심은 도의를 위해 발하는 것이고, 인심은 구체를 위해 발한다는 것이다. 심의 체인 성은 미발의 상태로 한결같지만, 심의 용인 정은 기가 발한 것으로 도심과 인심의 두 가지 작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이는 인심도심을 선악 문제와 연결시켜, 칠정은 인심도심의 선악을 합하여 말한 것이고, 사단은 도심과 인심 가운데 선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부분이 이황과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황은 단순히 인심은 칠정이고 도심은 사단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이이는 주희가 '중용장구서'에서 말한 "도심은 천리이기 때문에 선만 있고 악이 없다고 하고, 성현도 음식이나 남녀문제 따위에서 인욕이 있기 때문에 인심은 선도 있고 악도 있으며, 어리석은 사람도 도심이 없을 수 없다"고 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본성이 선하므로 누구나 다 요순같이 될 수 있다는 데 그 근거를 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에서 우리는 이이가 인심도심설에서 일심을 바탕으로 하면서 나흠순의 사상, 더 나아가서는 양명학파의 현성양지나 불교의 선학적 요소까지도 받아들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 스스로는 이황과 성혼의 리기심성론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날과 논리를 번득이면서도, 주희의 이론에 대해서는 이이 자신의 논리를 위해 인용하거나 유보 조항으로 남겨 놓는 데서 머무르고 말았다. 이이의 제자와 후예들의 리기심성론도 이이의 논리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희를 존숭한 이이의 태도에 따라 마침내는 "주자언론동이고"와 같은 책을 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이가 인심도심설과 아울러 리기심성론과 같은 뛰어난 이론을 펴고도 조선 후기 오랫동안 번쇄하고 지리멸렬한 리기심성 논쟁을 유발한 것은 이와 같은 그의 한계와 상관된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의 리기심성 논쟁에 비록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것도 없는 바가 아니지만, 끝내 주희 학문의 문턱에서만 맴돌고 만 데에는 이이 자신에게 일말의 책임이 남는다고 할 수 있다.
4. 논쟁 이후의 인심도심설
앞서 살핀 선배 학자들의 인심도심설은 크게 보아 주희와 나흠순의 논의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그들 특유의 논점이 부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러한 논의 범주와는 달리 인간의 마음과 도덕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실천을 주장한 학자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학자는 무엇보다도 후대에 실학 사상의 이론적 모태를 제공하거나 실학을 실천한 사람들 가운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인물들 가운데 특히 두드러진 인물로서 허균과 윤휴를 들 수 있다. 이들과는 달리 이황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로서 또한 이현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허균
허균은 이른바 양명 좌파라 불리는 태주 학파의 후기 학자들, 구체적으로 이지의 '동심설'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지는 현성양지의 입장에서 동심이 진심이라고 말하며, 명교와 같은 주자학적인 도덕주의 이론을 거짓 도학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지는 주희를 비롯한 수만은 주자학자들이 내린 도심에 관한 해석들이 실제로는 허식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동심에 장해가 되는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뿐 아니라 동심 속에서 이른바 이단 사상들까지 포괄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허균의 학문은 이와 같은 이지의 사상에서 적잖이 영향을 받았으며, 삶의 궤적 또한 이지와 비슷하게 벼슬을 버리고 장삼가사를 걸친 채 유랑하면서 인간의 욕구 그대로를 실천하고자 할 뿐 그런 욕구의 '바름'에 구애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에 그의 사상은 간접적으로 전하는 언설을 통해 살펴볼 수밖에 없다.
안정복과 심재 등은 "허균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나 행동하는 데는 검속함이 전연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품부한 것)이고 남녀의 분별의 윤리 기강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높은즉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감히 하늘이 품부한 본성을 어길 수 없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사사로운 욕심으로서의 인심이나 하늘의 이치라는 도심도 모두 대상에 감응하는 데 근원하여 생겨나는 것이라면, 성인도 육체가 있는 이상 인심이 없을 수 없고,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천품이 있는 이상 도심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굳이 주자학자들이 리기심성을 논하며 형식적인 도덕률과 예학을 강조, 이를 이간의 자연적 감정보다 우위에 두면서 인간 일반을 구속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허위적인 모습을 허균은 폭로하고, 나아가 인간성의 해방을 통해 실학 정신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윤휴
윤휴는 조선 시대 박세당과 함께 반대당인 송시열과 그 후예들에 의해 이른바 '사문난적'으로 배척되었던 사람이다. 더구나 당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서인이 학문적으로도 대체로 노론은 이이의 계통을 잇고 소론은 성혼의 계열을 계승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근기 남인 계열의 학자인 윤휴의 인심도심설을 이들이 추종하던 이이와 성혼의 학설과 비교하는 것은 의의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윤휴는 학문적으로 남인인 이원익과 허목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이와는 별도로 부친 윤효전이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한테 배웠던 관계로 해서, 남인 계열의 리 중심 철학과 함께 기철학적인 영향을 받았음도 무시할 수 없다. 윤휴는 처음에는 주희의 학설을 따라 인심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도심은 성명의 바름에서 근거하므로 지각하는 바가 달라 차이가 날 뿐, 처음부터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이이가 "이미 도심이라고 하면 인심이 아니고, 인심이라고 하면 도심이 아니다"라고 하여 인심과 도심의 개념을 다르게 본 것에 대해, 그렇게 하면 도심과 인심을 리와 기에 분속시켜 결국 인심도심을 이원적으로 여기게 된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윤휴는 다른 한편으로 나흠순의 인심도심설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즉 윤휴는 '제순인심도심지도' 등에서는 인심도심을 기발이요 유행이라 하여 주희의 학설과 별로 다르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인심도심도'의 중도에서는 도심을 미발로 보고 인심을 기발로 보아 나흠순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인심도심을 정자는 천리와 인욕이라 하고, 주자는 인심은 형기에서 나오고 도심은 성명에서 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흠순에 이르러서는 기발과 미발로 생각하였으니 대개 각각 지적한 바가 있었다"고 하여 절충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자학 일변도였던 당시의 학문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절충안은 실은 주자학설보다는 나흠순의 학설을 지지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윤휴의 인심도심설은 비록 이이의 인심도심설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한편, 이황의 리기 이원적 입장도 지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윤휴의 인심도심설은 오히려 노수신이나 중국의 나흠순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현일
이현일은 영남의 퇴계 학파 적전으로서 이이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인심도심설을 피력하였다. 그는 "심의 허령지각은 두 가지 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각이 의리에 따르는 것을 도심이라 하고, 혈기에서 작용하는 것을 인심이라 한다. 지각은 하나이지만 그 기원한 것에 각각 주된 바가 있으니 한 마음으로서 두 가지 양태가 있다 해도 해로울 것이 없다. 이제 이이가 '리기는 혼륜하여 나눌 수 없는 까닭에 인심도 도심의 발동이 하나의 길 위에 있을 뿐'이라 한 것은 천리와 인욕을 통틀어 하나로 삼게 되고 성과 기라는 두 글자를 판별하지 못하는 병통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현일이 이이의 인심도심설을 "근원은 하나이지만 그것이 흘러 두 가지로 된다는 학설"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것은 "두 가지 근원을 가지고 두 가지 양태로 나타나는 학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이현일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이의 인심도심설은 나흠순의 "도심은 체요, 인심은 용"이라는 일원적인 경향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이가 비록 겉으로는 나흠순의 인심도심체용설을 비판하지만 속마음은 이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과감하게 지적하기도 하였다.
5. 논쟁이 지는 의의
현대 산업 사회의 발전과 자본주의 체제의 과도한 경쟁으로 인간 소외라든지 도덕성의 타락이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어서인지, 이와 같은 도덕심의 회복을 요구하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정 학교 사회에서 도덕 교육과 개인적 실천을 주장하는 소리가 요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공자가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듯이,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과 조건이 크게 변한 상황에서 주자학자들의 주장과 똑같은 도덕적 엄격주의만을 곧이곧대로 강조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도 허균과 같은 사람의 인심도심에 대한 견해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와 같은 체제 내적 논의가 어떻게 변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인심도심 논쟁에 관한 연구 자체만을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이황과 이이의 이론이 갖는 차이점을 비교한다든지, 이이와 성혼 사이에 수 차례에 걸쳐 오간 서신 논쟁을 문제삼는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과 아울러 이언적, 노수신, 조식, 허균, 윤휴 등 조선 시대를 통틀어 인심도심에 관한 논의가 지속되어 왔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의 논의 속에 나타나는 견해들은 비단 주자학적 사고 속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나흠순이라든지 양명학적인 경향도 적지 않아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에 관한 논의는 조선 시대 학자들의 주된 관심 대상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를 바라보는 관점도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윤휴처럼 같은 성리학적 논의 구조이지만 이로부터 탈피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나, 허균과 같이 인심도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사변 논쟁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스런 심성의 발로를 강조한 사람의 논의는 이 논의의 변용 가능성과 관련해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유명종, "송명철학" (형설출판사, 1979)
유명종, "한국사상사" (이문출판사, 1985)
이종술, "퇴계 율곡의 비교연구" (수덕출판사, 1985)
유명종, "조선후기 성리학" (이문출판사, 1988)
이병도, "한국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9)
유명종, "성리학과 양명학"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