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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서울신대 74,65학번 동기들이 순교지 탐방 차 목포 신안비치 호텔에서 6월 22일 하루 밤 쉬면서 문준경전도사 순교영성에 대해서 강의를 부탁하여 작성한 강의 내용이다. 강의를 하려고 자료를 찾다보니 구전으로 들었던 것과 상의한 점이 많아 고전을 찾아 다시 정리하여 보았다. 기념사업이 진행될 시점에서 역사 바로 잡기 표준화 작업이 필요함을 실감하고 우선 문전도사님과 관련된 교역자, 장석초, 김응조, 이성봉 목사님의 사적을 살펴보았다. 완벽할 수는 없으나 나름 년대에 맞추어 찾아보았다. 좋은 자료를 재보해 주시면 더 명확한 사료가 되리라 본다. 필자와의 관계 신안군은 1969년 무안군에서 분할하여 1개읍 14개면이며 1004개 섬으로만 구성된 군이다.(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으로 분군) 당시에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지는 무안군 지도면 증동리였다. 필자는 문 전도사의 순교 기념교회로 1951년 세워진 병풍교회 출신이며 주일학교 다닐 때 전도사 초상화가 사택에 걸려 있어서 늘 보았으며 직접 뵙지는 못했으나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처럼 많이 들으며 성장했다. 문준경 전도사는 1891년 무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출생하시어 1950년 10월 5일 새벽2시에 59세를 일기로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순교하신 분이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가 죄명(INRI)이 듯이 문 전도사님도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섬마을의 순교자 p12)이라는 죄명으로 순교하셨다. 예수 영접 전 삶 문준경은1891년 2월 2일 전남 무안군 암태면 수곡리 문재경씨의 3남4녀 중 3째 딸로 출생하여(순교자 문준경p58) 유복하게 성장하여 1908년 3월 17세에 지도면 등선리 정운삼씨 삼남 정근택씨와 결혼(순교자문준경 p63)하였으나 당시 남편은 외도하였고 후일 소실의 출산을 수발들기 까지 하였다.(순교자 문준경 P74) 신혼 초부터 남편의 무관심속에서 20년간 시부모 배려로 국문도 배우게 되고 시부모님을 잘 모신다 하여 정씨가문의 효부로 인정받으시며 사시다가(순교자 문준경 p70)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시어머니마저 큰 시숙이 모셔 가셨다 홀로 남은 그는 남편의 귀가는 기대도 할 수없는 상황에서 새 삶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에 처한 그는 시댁을 떠나 큰 오라버니가 있는 목포로 방한 칸 얻어 이사하여 삯바느질을 시작하게 되었다.(순교자 문준경 p80-81) 성결의 사람 장석초 전도사와 만남(1925년5월~1929, 7, 15) 그러던 어느 날 목포교회(현,북교동교회) 장석초 전도사가 시무 하는 목포교회 한 성도의 설득력 있는 전도로 1927년 3월 5일에 입교하게 되었고 그해 11월에 구원의 확신을 받고 1928년 6월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 받은 1년 후 집사 직분도 받았다.(섬마을의 순교자 p51-52, 순교자 문준경 p22-23))어둡고 절망스러움에 지쳐 있었던 상황에서 주님을 영접한 그에게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의 체험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요 소망이요 감사였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내가 받은 예수의 이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1928년 6월부터 목포에서 가까운 압해도 지역에 다니며 축호전도와 목포교회 일부지역을 맡아 전도에 힘썼다 그는 특히 친척들의 영혼 구령에도 관심을 갖고 전도에 나섰던 것으로 본다.(섬마을의 순교자 p51). 그 후에도 친정을 위해 많은 기도가 있었으리라 본다. 그 시점에 북교동 교회에서 1928년 11월 강사 장원초 대전교회 담임(이명직 성결교회 약사 p171) 전도사의 부흥성회가 있었다. 이때 보고에 중생인 3인 성결인 1인 결신자 32인으로 숫자를 헤아려 보고되어 있다.(활천1929, 1호 p63) 당시 장 전도사가 1928년 초에 압해도 대천리 최씨와 초가를 매입하고 기도처소로 시작하여 사람이 많아지자 아담한 예배당을 장 전도사 사비로 건축하고(성결교약사 1929년간 p123) 1929년 7월 15일자로 장 전도사는 압해도 교회로 파송 받아간다.(성결교회 약사 p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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